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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라보이 지젝의 전체주의가 어쨌다구? 일부 발췌

 자신의 오빠를 예를 갖춰 매장하는 것이야말로 안티고네에게는 최고로 중요한 문제였고 이를 위해 다른 모든 세속적 욕구는 포기할 수 있었다. 그래서 자신이 포기한 것들을 떠올리며 슬픔에 잠기는 안티고네는 숭고함의 정형이 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보다 더 비극적인 것은 무엇인가? 우리의 생물학적 생을 넘어서 존엄성 자체마저도(안티고네에게는 있었으나 여기서는 가질수 없는) 희생을 강요당할 때가 그러하다. 자신의 실존에 대한 근본적인 배반으로 모든 것이 무가치해져버린 인간은 세속적 쾌락조차 즐길수 없게 된다. 152p

 

진정한 영웅은 자신의 행위가 이후 사태에서 반역으로 매도되고 그로 인해 자신은 제거될 것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 불가피한 타협을 실행한 사람이다. 이것이야말로 최고의 공헌이자 안티고네를 넘어서는 비극인 것이다.

 

 

엘리엇의 시 [대성당의 살인 Murder in the Gathedral]

“모반의 최고형식, 그릇된 이유에서 올바른 일을 하는것, -네가 올바른 일을 할때조차, 너는 그 반대의 것을 노리고, 그러니까 네 바탕의 사악함이라는 진정한 본성을 감추기 위해 그 일을 한다. ”

 

 

니콜라스 말브랑슈

나는 주관적으로 덕이 많을 수 있지만 그것이 신의 시선아래서 나의 객관적인 구원을 가져다 준다고는 결코 보장할 수 없다. 나의 구원을 결정할 하나님의 은총내리심은 전적으로 객관적인 법칙에 의존하고 있으며 이는 물리적 자연법칙에 비견될 수 있는 어떤 것이다.

스탈린주의하의 공개재판도 이와 유사한 객관화의 또다른 판본이다.

나는 주관적으로 결백할 수 있다. 그러나 공산당의 은총의 손길을 받지 못한다면 내가 쌓은 모든 윤리적 고결함은 공산주의적 대의에 반하는 프티부르주아적 휴머니스트의 그것에 지나지 않을것이므로 나는 주관적 결백성에도 불구하고 영원히 객관적인 죄인으로 남을지도 모른다. 바로 여기에 전체주의의 참된 비극이 숨어있다.

 

우리는 스탈린주의적 공산주의의 문제가 공산주의적 대의에 대한 냉혹하고 자기말소적인 헌신에 있으며 이것이 사람들을 괴물스런 윤리적 자동기계로 변모시켜 인간의 공통적 감정과 정서적 동감을 망각하게끔 만들었다는 식의 주장에 저항해야만 한다. 사정은 그런주장과 정반대이다. 스탈린주의적 공산주의의 문제는 그들의 윤리적 태도가 충분히 순수하지 못했다는데 있으며 그들이 도착적인 의무의 경제에 사로잡혀 있었다는 데 있다.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이것이 얼마나 무겁고 고통스러운 일인지 나도 잘알고 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이것이 나의 의무인 것을.....’

‘의무를 다하지 못한 것에는 어떠한 변명도 있을 수 없다. ’

이는 윤리적 엄격성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표어이다.

‘너는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반드시 해야하므로! Du kannst, denn du sollst!'

이것은 의무를 다하는 것에는 어떠한 변명도 있을 수 없다는 문장으로 귀결된다.

의무를 수행하는데 변명거리가 되어주는 의무의 참조근거는 위선적인 것으로 간주되어 제거되어 마땅하다는 것이다.

 

선생의 체벌-나라고 애들 패는게 좋은 줄 아쇼? 그게 내 의무인걸 어쩌겠소

 

여기서 우리가 만나는 것은 자신의 큰 타자의 의지를 위한 순수한 도구로 자리매김하려는 도착적 태도 바로 그것이다.

그 일은 내책임이 아니오. 나는 보다 높은 가치를 실현하기 위한 도구에 지나지 않는단 말이오. 그래서 나는 책임으로부터 면죄되어야 하오.

책임은 내가 지지 않으면서 타인에게 마음껏 고통을 가할수 있으니 얼마나 신나는 일인가.

 

칸트 윤리학이 금지하는게 바로 이 것이다. 주체가 단지 외부에서 부과된 것을, 즉 객관적인 필연성을 실현했을 뿐이라면 그에게 무슨 죄가 있는가? 라는 질문에 대한 칸트의 답은 객관적 필연성을 주관적으로 추측해서 당연하게 받아들였다는 점에서 - 그에게 부과된 것으로부터 쾌락을 이끌어냈다는 점에서 그는 유죄다.

 

 

레닌의 위대성

멘셰비키가 역사의 발전법칙이라는 실증적 논리가 만사를 포괄하는 근본적토대라고 여기며 객관적 법칙을 신봉한데 반해, 볼세비키는 ‘큰 타자란 실존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루카치가 찰나포착이라 불렀던 기예는 자본주의가 우리의 요구를 순화해 체제에 포섭하기 전에 그 갈등을 증폭시키는 기예이다. 루카치 주장의 요점은 행동을 그것을 둘러싼 역사적 환경들로 환원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중립적인 객관적 조건이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독일인 판사 슈레버의 편집증에 대한 분석에서 프로이트는 우리가 보통 광기(주체가 자신에게 가해지고 있다고 편집증적으로 믿고 있는 음모의 시나리오)라고 생각하는 것이 실은 이미 일종의 회복의 시도라는 점을 상기시킨다. 완전한 정신적 와해 이후에 나타나는 편집증적 구성은 주체가 자신의 세계에 모종의 질서를 재구축하려는 즉 인식적 지도그리기를 가능케 하는 어떤 준거의 틀을 다시 세우려는 노력이라는 것이다.

 

알랭 바디우가 지적한 바 있듯이, 현실사회주의는 그것의 참상과 실패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의 전지구적 지배에 효과적인 위협을 가함으로써 적어도 지난 몇십년간 자본주의의 대변자들이 겁을 집어먹고 편집증적인 반응을 보이게끔 만들었던 유일한 정치세력이었다.

프레드릭 제임슨이 말하듯, 오늘날의 모든 공산진영은 그 참상과 실패에도 불구하고 과거와 마찬가지로 일종의 해방된 영토이다.

 

 

 

203페이지부터

지젝의 노동에 대한 관점이 드러남

의미의 장 그 자체의 좌표를 변경시키는 개입, 즉 라캉이 누빔점이라 부른 것의 한 사례로서 노동의 개념을 재구성할 필요가 있다. 노동(물질적이고 산업적인 생산)은 공동체와 연대성의 특권적 지점으로서의 노동인 것이다. 이러한 이상에서는 노동은 단지 그 자체로 만족을 가져다주는, 생산을 위한 집단적 노력에의 참여만을 뜻하지 않는다. 사적인 문제들까지도 소속된 노동 집합체 안에서 토론될 때 비로소 올바른 관점을 갖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개념은 노동을 제의화된 공동체적 행동으로 보는 전근대적 일의 개념이나 과거의 산업적 생산방식에 대한 노스탤지어적 찬양과는 혼동될 수 없는 것이다. 노동의 이상에서 생산 집단은 자신들의 문제를 이성적으로 토론하는 근대적 개인들의 집합체이지, 제의화된 고대적 공동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이데올로기적 지각 방식속에서는 섹스가 아니라 노동 자체(상징적 행위들과 대비되는 것으로서의 육체노동)가 대중들의 눈앞에서 가려져 있어야 할 외설적 추잡함의 장소가 되어버렸다. 노동과정을 지하나 어두운 동굴속에 위치시키는 이러한 전통은 중국이나 인도네시아 혹은 브라질의 부품조립라인에 이르는 제3세계의 노동현장에서 땀흘리는 무수한 익명의 노동자들이 ‘비가시성’영역으로 가려져 있는 오늘날에 이르러 절정을 구가하고 있다. 그렇기에 서구에서는 사라지는 노동계급이라는 헛소리가 받아들여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주위를 둘러보면 어디서나 쉽사리 노동의 자취들을 찾아볼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 그러나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이러한 전통이 노동을 죄와 등치시킨다는 점이며, 고된 일로서의 노동은 원래부터 대중들의 눈앞에서 감춰져야만 할 추잡스럽고 죄스런 행동으로 치부한다는 점이다.

 

 

209페이지

이러한 조건하에서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변증법이라는 맑스의 용어를 되살려 보자. 생산력의 변화가 우리의 사회적 존재 전체, 즉 사회적 상호작용이라는 우리의 실천과 경험전반에 어떤 영향을 끼치고 있는가? 맑스는 생산과정의 혁명적 변화들을 곧잘 정치적 혁명과 대비시키곤 했다.

해체주의적 흐름들(생산에서 상징적 행위로의 이전) 속에서 우리는 오히려 거꾸로, 즉 상징적 교환에의 참여와는 대립되는 것인 물질적 생산에로 초점을 되돌려 놓는일이 필요함을 깨달아야 한다. 우리는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개념적 재배치라는 과제를 앉고 있다.

 

정치적 전체주의란 아도르노가 주장했듯이 도구적 이성의 원리, 즉 기술에 의한 자연착취의 원리들이 사회로까지 확장되었을 때 사람을 신인류로 변형되어야 할 원자재로 취급하게 되었으며 여기에 전체주의의 뿌리가 있다는 식이다. 하지만 그 반대로 정치적 테러, 즉 전체주의가 정확히 말해 물질적 생산의 영역이 그 자율성을 부정당하고 정치논리에 종속되었음을 가리키는 것이라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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