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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도시2를 보고

경계도시2를 보고

경계도시2는 영화가 만들어지고 7년이라는 시간이 지난뒤에야 비로소 개봉이 되었다. 물론 다큐멘터리라는 특성상 500개가 넘는 테입을 편집하는 물리적 시간도 많이 필요했겠지만 그보다는 다른 시간이 더 필요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든다.

3월18일 대학로에 있는 하이퍼텍 나다에서는 영화를 상영하고 영화평론가 정성일씨와 감독 홍형숙씨와의 대담시간이 상영이후에 주어졌다.

그렇게 힘든 영화를(영화를 보는 내내 힘들었다. 이는 다만 나만 느낀 것은 아닐거 같다.)만든 감독이라는 느낌이 안들정도로 홍감독은 평안해 보였고 동시에 강해보였다.

역설적으로 그렇게 강한 사람이 아니었다면 이런 다큐영화를 만들지 못했으리라.

평론가 정성일씨는 경계도시1이 송두율교수에 관한 이야기라면 경계도시2는 송두율교수를 통해 한국사회를 말하는 영화라고 평했다.

아마도 그렇기에 한국사회의 구성원인 우리가 불편함을 느끼는 것이리라.

 

내가 본 느낌은 이 영화는 대한민국 사회를 ‘관찰’한 영화이다.

관찰이라는 표현을 쓰는 이유는, 홍감독이 한국 사회의 관용을 호소하긴 하나 감독역시도 그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잘 알것이라는 거다.

그것은 단지 하나의 선언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즉 도덕책을 읽어준다고 해서 윤리의식이 생기는건 아니듯이 관용을 호소한다고 해서 영화를 본 관객의 똘레랑스가 갑자기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걸 감독도 안다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역시 이 영화의 메시지는 공동체를 구성하는 각 개인들에게 자기 성찰의 기회를 주기 위해 우리를 관찰한 영화이다.

관찰이라는 관점을 통해 이 영화는 사회적 불의이자 사회적 병리를 고발한다. 만약 이 영화가 도덕책을 읽어주는 영화였다면, 다시 말해 그것이 강한 가치관이 내재된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했다면 이 영화는 그만큼 날 아프게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냥 또 왠 개가 짖나부다하고 넘어갔을지도 모른다는 거다.

 

리차드 로티는 사회적으로 개인과 특수자를 인지하고 배려하는 능력은 예술가들이 가지고 있는 ‘능력’이라고 표현했다. 그 능력의 발휘를 통해 사회는 자신이 미처 인지하지 못했던 하지만 자신 속에 내재된 불의를 인식하고 점진적으로 그 불의를 제거할 동력을 획득한다는 것이다.

이 영화는 그러한 로티의 예술적 민감성에 정확하게 부합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하지만 로티의 예술적 민감성이 발현된 이 영화가 사회적 불의를 고발한 것은 사실이나 그 불의를 점진적으로 제거할 수 있는지는 또 다른 이야기이다.

아도르노도 미메시스적 인식을 강조했지만 결국 자본주의 사회의 도구적 합리성이라는 악마를 극복하는 것에 회의를 느끼지 않았던가....

난 이 영화를 보면서 분노하는 나 자신을 보고 움찔하고야 말았다. 난 송두율 교수가 2003년 당시 마녀사냥을 당할 때 무관심했으며, 이 영화를 보기전까진 기억조차 하지 못했다.

용산의 비극, 이주노동자의 비극, 사회적 소외계층의 현실적 비극, 성폭력을 경험한 여성들의 비극, 아동학대의 비극, 그 밖에도 수없이 많은 비극.....

그 비극들을 겪을때 난 ‘아주 잠깐’ 분노했었다....‘잠깐’....

그런 내가 고작 이 영화한편을 매개로 이 사회에 분노하고 일침을 가할 자격이 있는가?

 

우리가 흔히 비판하는 수구꼴통이라는 이들과 빨갱이들.......그리고 그 중간에 있는 다수 국민들......

 

예를 하나 들어보자. 진흙탕물이 조금씩 나오는 물부족 동네가 있다. 대부분은 그냥 몸을 상하게 하는 진흙탕물을 서로 차지하기 위해 싸우기만 할뿐 우물을 파서 문제를 근본적으로 극복할 생각따윈 없다. 하지만 어떤 이가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 우물을 파다가 졸졸 나오던 진흙탕물마저 안나오게 만들었다. 그럴 경우 문제해결에 소극적이고 관심없는 이들은 우물을 파는 이들을 아마도 매장시켜버릴거다. 같이 판다면 새로운 우물을 뚫을수 있음에도.....

 

수구와 빨갱이는 적극적인 소수이고 중간자인 국민은 소극적이고 무관심한 소수이다.

오류를 저지르는 이들은 적극적인 이들이란 이야기다.

그렇다면 적극적인 이들이 나쁜건가....소극적인 이들이 나쁜건가?

좀 더 나은 사회, 서로가 역지사지 할 수 있는 사회.

정말 그런 사회를 원한다면 모두가 치열해져야 할 것이다.

수구꼴통들이 사회를 좌지우지 할 수 있는 까닭은 다수의 국민들이 우물을 파려고 하지 않으려 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다수위에 군림할 수 있는거다. 자신의 시민권을 권리로 인식조차 하지 않는 수많은 다수중에 나도 포함되지는 않는건지......

 

 

영화내내 송두율 교수는 많은 시간 침묵한다. (강요당한 침묵일 것이다.)대신 그의 부인인 정정희씨는 자신의 원칙을 절규하듯이 외친다. 이보전진을 위한 일보후퇴를 위해 전술적 전향을 강조하는 시민운동 진영에게 정정희씨의 절규는 씨알도 안맥힌다.

“우리가 왜 전향을 해야하는가? 우리는 북에 편향적이지 않다. 남북의 평화를 위해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는 경계인으로 살기 위해 노력해왔다. 문제는 북은 우리의 방북을 허용했지만 남은 우리의 방남을 허용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우리가 편향적인 친북인사라는 것인가?”

 

갈등의 해결은 어떻게 가능한가? 더 큰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개인은 희생되어도 가능한가?

파시즘은 우익들만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피해의식을 가지고 있는 좌파들에게도 일상적으로 나타나는 문제이다. 좌파라고 하는 시민사회계층은 송교수부부에게 이렇게 이야기 한다.

“왜 당신들만 생각하고 운동진영 전체의 입장은 고려하지 않는건가? 당신들이 이렇게 고집을 부리면 곧 있을 총선의 패배에 큰 영향을 끼칠지도 모른다.”

자신들이 앞장서 남북화해모드시기를 이용해 초청한 이들이 자신의 정체성을 상실할지도 모를 절체정명의 위기는 대의라는 이름 앞에 무릎을 꿇고야 만다.

 

 

 

적극적인 변화를 추동하는 것은 플라톤이나 니체가 주장한 것처럼 정말 능력있는 소수에 의해서나 가능한 것일까? 그렇다면 그 변화를 위해 개인은 희생될 수도 있다는 것인가?

내가 있고 사회가 있는 것이지 사회가 있고 내가 있는게 아니다. 사회를 위해 희생을 요구하는 것이 바로 전체주의가 아니고 뭐란 말인가..

우리의 관용은 어디서 어디까지의 경계를 기준으로 삼아야 하는가?

이 영화는 그렇게도 어려운 문제를 우리에게 던지고 있다.

 

625를 경험하지도 못한 이들이 625를 경험한 이들의 레드컴플렉스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단순히 레드컴플렉스가 기득권들의 정치적 이데올로기로 작동하는 것만 비판할 건가?

그리고 그런 이데올로기에 이용되는 어리석은 대중을 욕하기만 할건가?

물론 다수의 대중도 욕먹어 마땅하다. 먹고사는 생존의 문제앞에서 정치니 사회니 하는건 사치에 불과하다고 외친다. 하지만 자신의 생존이 극한까지 몰린이들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은 무엇인가? 바로 정치가 아닌가.

결국 먹고살만한 사람들이 정치에 관심을 가지는게 아니라 먹고사는 근본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정치에 참여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런 맥락에서 참 역설적인 사회에서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 영화는 개인과 공동체에 대한 영화이다. 공동체와 개인의 딜레마....

우리가 살고 있는 공동체는 들뢰즈가 이야기 한 것처럼 자유로운 탈주가 가능한 공동체가 결코 아니다. 자유로운 탈주가 가능한지 가능하다면 어떻게 가능한지, 혹은 가능해야 하는 건지.....여러 차원에서 이 영화는 물음을 던지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절대 이 영화를 보고 감정적으로 동요되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이 영화는 우리가 잊고 있었던 또는 애써 잊을려고 하는 부분을 감정적으로 건들고 있기는 하지만 감정으로만 접근한다면 우리는 또 다시 하나의 냄비만 끓이는 꼴이 되고 말 것이다.

 

 

우리에게는 정말로 폭력적인 속성이 내재하고 있어 르네 지라르가 말한 것처럼 희생양을 필연적으로 만들어야 하는건가?

아니라면 사람을 수단으로 대하는 자본주의의 합리주의가 우리에게 이런 속성을 심어주고 있는건가?

 

비판을 하기 위해서 우리는 사회적 토론의 장이 개방적으로 확보되어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러한 절차에 참여해야 한다는 당위는 당위에 그치고 만다.

 

이 영화는 그래서 중요하다. 우리의 경계를 고민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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