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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9일 경철수고 수업 정리

맑스는 초기작업인 경철수고에서 인간주의적 관점을 견지하는 듯 보인다. 그래서인지 꽤나 모호해보이는 입장들이 많다....

 

하지만 후기로 갈수록 자본주의 모순을 극복하는 방안으로 계급중심적 관점을 확고히 하는듯 하다...

특히 그룬트뤼세와 자본론에서 그러한 모습이 많이 보인다...

 

요즘들어 맑스에 대한 새로운 해석들이 많이 나오고 있다...

1. 경철초고의 인간주의적 관점을 주목하는 마르쿠제의 해석

2. 자본론 해석은 그동안 인식론적으로 잘못 읽혀져 왔으며, 이제 인간주의를 극복한 새로운 해석의 필요성을 제기하는 알튀세...

3. 베이컨적, 프로메테우스적으로 읽혀온 맑스의 인간우월론적인 생산력주의를 비판하며 새로이 맑스를 생태적으로 해석하려는 관점...

 

이러한 문제의식을 종합해보니 맑스의 사상에 대한 새로운 관점이 현대사회에 걸맞게 새롭게 정리되야할 필요성이 사무치게 느껴진다.

 

먼저 소외된 상태의 극복이란 무엇인가?

정말 자본주의라는 체제가 극복되면 기계적으로 인간의 자유롭고 창조적인 자기실현이 가능해질까?

이 문제를 다루기 위해서는 인간의 욕망에 대한 고찰이 함께 다루어져야 할 것이다...

라캉이 지적한 대로 인간의 욕망은 결핍에서 비롯하며 상징계진입과 더불어 구조에 의해 형성되므로 영원히 타자의 욕망을 벗어나는 것은

불가능한 것일까?

이러한 관점을 따른다면 자본주의가 극복된다하더라도 물적 토대에 의한 소외는 극복될지언정 진정한 소외의 극복은 영원히 불가능할

것이다.

 

반대로 들뢰즈의 욕망개념을 따른다면 욕망은 생성의 힘이고 서로들간의 차이에 의해서 발생하므로 욕망이야말로 무한한 생성의 힘이고

창조의 원천이 될 것이다.

들뢰즈의 사상은  욕망이 결핍에서 기인한다는 부정성을 극복하긴 했지만 규범적 토대를 마련하진 못한다...

사회적 억압을 철폐하고 홈패인 공간을 통해서 무한대의 욕망이 분출되는 것을 통해 모두의 욕망이 올곧게 실현됨을 지향하지만.....

우리는 이 지점에서 히틀러의 욕망, 만인에 대한 지배욕구에 대한 통제의 근거를 마련하기 힘들게 된다...

 

일단 여기서 욕망의 정체를 명확히 밝히는 것은 더 많은 논거와 연구를 필요로하므로 일단 패스한다..

 

거기까지 나아가지 않더라도 당장 눈앞에 보이는 자본주의라는 괴물을 끝장내야 한다는 것은 누구나가 동의할 수 있으니 출발점을

먼저 제한하기로 한다....

 

 

최근들어 노동패러다임과 탈노동패러다임간의 대결구조가 눈에 띄게 분명해지고 있다.

즉, 다시말하자면 해방의 동력을 어디서 찾느냐의 문제가 될터인데, 노동안에서의 해방을 지향하느냐 아니면 노동으로부터의 해방을

지향하느냐의 문제 되시겠다.

 

맑스는 경철초고에서 노동의 신성함을 강조하지만 후기저작인 자본론에서는 노동의 부정성을 지적한다.

즉 노동을 하지 않을수록 인간의 자기실현이 가능해지리라는 것이다.

두번째 관점에 의하자면 고용노동의 종식이 향유의 노동으로 변환될 수 있느냐의 문제 되겠다..

 

이러저러한 해석의 문제를 분명하게 분석하기 위해서는 맑스 본연의 노동개념을 좀 더 정확히 봐야한다.

 

맑스는 헤겔의 추상적 노동개념을 극복하면서 유물론적 관점을 제안한다.

헤겔의 노동은 고립자인 정신의 자기전개과정 자체이다.

 

하지만 실제 우리의 현실에서 고립자의 운동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

헤겔의 사유전개는 논리적일수는 있으나 현실을 반영하지는 못하는 개념인 것이다.

마치 사회계약론자들이 상정하는 자연상태라는 개념이 실제하지 않지만 논리전개를 위해 만들어진 개념이라는 것과 유사할 것이다.

그런 문제의식 속에서 맑스는 대상과 대상의 관계맺음이야말로 노동의 정체라고 해석한다.

 

유적존재로서의 인간은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이라는 대상으로서 대상과 관계맺는 방식을 통해 자기정체성을 규정해나가는 것이다.

 

따라서 맑스에 의하면 노동은 다음 두가지로 해석된다.

1. 자기보존행위

2.자아실현행위

 

여기서 어떤 관점이 맑스의 관점인가로 논쟁하는 것은 맑스에 대한 오독일 수 있다.

두 가지의 노동은 분리되는 것이 아니라 실상 결합되어야 하는 것이다.

 

자기 보존을 위한 수단이 자아실현행위가 되는 것.

즉 자본주의 하에서 분리된 상태를 재결합시키는 것이야말로 맑스가 생각한 올바른 상태가 아니었을까/

 

다시 노동패러다임과 탈노동패러다임의 대결구도로 돌아와보자.

노동패러다임을 주창하는 대표적인 주자는 에리히 프롬과 알렉스 캘리니코스등이 있고, 탈노동패러다임의 선두주자는

비루, 앙드레 고르, 안토니오 네그리등이 있다.

 

두 입장 모두 현실적으로 필요한 대안으로 노동시간단축을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필요한 대안에 동의한다는 것이 그것이 문제해결의 본질이라고 주장하는 것과는 다른다.

 

나는 노동시간단축도 현실에서 필요한 단계이지만 더 나아가서 행위주체의 행위에 대한 통제권 귀속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자본주의 체제의 문제는 내가 원하지 않는 일을 나의 생존을 위해서 억지로 하게된다는 점, 나의 노동행위에 대한 결과가 나에게 귀속하지

않고 타자(일례로 자본가)에게 귀속한다는 점이다.

즉 노동의 소외는 행위주체의 행위지배권 상실인 것이다.

 

나는 사적소유의 철폐에 무조건적으로 동의하지 않는다.

말그대로 공동재산주의로 가게 될 경우 지속가능한 발전이 가능할 것인가?

다같이 못사는 사회가 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맑스가 고타강령비판에서 주장한 코뮨주의 1단계와 2단계는 사실 결합되어야 하는 것이다.

필요에 의한 분배와 노동성과에 의한 분배가 함께 이루어지는 것이 옳은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기본적으로 인간의 생존을 위한 기본적 권리는 보장되어야 하며(필요에 의한 분배), 동시에 노동의 결과에 대한 사회적 기여에 의해서

추가적 분배도 이루어져하는 것이다.

 

살펴보았듯이 노동을 신성성과 부정성이라는 이분법적 틀안에서 사고하는 것은 올바른 노동개념을 정립하는데 장애물로 작동할지도 모른다.

 

물론 부르주아 이데올로기(국민경제학과 칼뱅주의적 관점)에서 노동의 신성성이라는 관념아래서 노동자를 억압하는 기제로서 작동한 것은

사실이나 그렇다고 그에 대한 반대급부로 노동을 부정성이라고만 바라본다는 것은 또 하나의 오류일지도 모른다.

 

그런 관점만을 고집한다면 소외된 노동의 극복은 소외된 문화의 향유라는 새로운 문제를 나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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