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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이데 수업정리

3월23일 수업

독일이데올로기

1편 포이어바하편 박재희 옮김. 청년사 72페이지까지

 

포이어바하의 유물론이 아닌 맑스의 유물론에 대한 고찰

 

 

플라톤은 파르메니데스를 인용하며 감각적 인식은 그림자에 불과하며 이성에 의해 드러나는 것만이 진리임을 주장하며 감각에 대한 이성의 우위를 전제한다.

플라톤에서 헤겔로 이어지는 관념론은 자기‘의식’이 존재를 규정하는 것으로 본데 반해 포이어바하는 감각과 현실이 의식을 규정한다고 본다.-유물론적 사고관의 등장

 

여기서 한발자국 더아나가 맑스의 혁명적 사고가 시작된다. 사유는 유(類)의 경험에 의거해 일반화, 보편화되는 ‘과정’이며, 그러한 사유의 과정이 바로 철학이다. 이 지점에서 맑스는 진리와 현실로 양분된 이분법적 사고를 해체하여 사유는 현실로부터 도출되는 결과물임을 고발한다. 순수한 사유, 순수한 진리는 없다.

 

맑스 철학과 경험론과의 관계

철학이 현실의 추상화과정이라는 맑스의 테제는 로크적 테제와 연결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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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역사의 유물론적 이해를 위한 전제들

우리가 출발점으로 삼는 여러 전제들은 결코 멋대로 정한 독단적인 것이 아니라, 바로 현실에 실재하는 전제들이며, 이들 전제로부터 이끌어지는 추상은 단지 상상 속에서만 형성될 수 있다. .......따라서 이들 전제들은 오로지 경험적으로만 확인될 수 있는 것이다.........모든 인간역사의 첫 번째 전제는 두말할 것 없이, 살아있는 인간 개개인들의 존재이다. 따라서 첫째로 설정되어져야 할 것은 이들 개개인들의 물질적 신체 조직 및 그로 인해 발생되는 여타 자연에 대한 그들의 관계이다......무릇 모든 역사서술은 이러한 자연적인 토대와, 역사진행의 과정에서 인간의 활동에 의해 이러한 토대가 변화된다는 사실로부터 출발하지 않으면 안된다............인간이 둥물과 구별되는 것은 그들이 신체조직에 의해 규정되는 단계에서, 그들의 생존수단을 ‘생산하면서’부터였다........

이 생산의 방식을 단지 개개인들의 육체적 생산을 재생산해 낸다는 측면에서만 고찰해서는 안된다. 오히려 생산의 방식이란 곧 이러한 개개인들의 일정한 활동의 방식이고, 그들의 삶을 표현하는 일정한 방식이며, 그들이 살아가는 일정한 ‘생활양식’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삶을 표현하는 방식대로 존재한다. 그러므로 그들이 어떻게 존재하는가는 그들의 생산, 즉, ‘무엇’을 생산하는가 그리고 ‘어떻게’생산하는가와 일치한다. 이렇듯 사람들이 어떠한 존재인가는 그들이 수행하는 생산의 물질적 조건들에 따라 좌우된다.

 

 

경험론과 연결되는 듯한 맑스의 테제는 인간과 자연대상과의 관계라는 전통적 테제를 폐기하고 사회적 관계를 강조하면서 구별점을 드러낸다. 즉 순수관계는 없으며 이는 사회적 삶에 대한 함의를 드러낸다. 이 지점에서 철학의 독자성은 파괴된다. 철학은 자립적인 학문의 영역이 아니라 경험과학의 1차적 일반화를 거쳐 얻어진 추상화의 2차적 산물에 불과한 의존적 학문인 것이다.

 

이러한 맑스의 유물론적 변증법은 엥겔스의 자연변증법과는 구별된다. 독일고전철학의 종언에서 엥겔스는 기계론적 물질개념을 염두에 두고 있는듯 하지만(포이어바하와 유사하다.)맑스는 물질개념을 ‘인간이 육체를 갖고 있다.’는 제1원리로부터 이끌어낸다. 즉, 현실적 개인들, 현실적 개인의 생활관계로부터 모든 것이 출발한다. 이러한 탈형이상학은 이후의 전개에서 차이를 드러내지만 그 출발이 되는 전제는 니체와도 유사한 사유를 보여준다.

 

맑스는 포이어바하의 출발점인 ‘인간 그 자체’라는 개념도 추상적 개념이라고 보고 구체적 개념으로 전환되어야 함을 주장한다. 맑스는 사회적 관계의 총체로서 인간을 파악하기 때문에 '사회 속에서의 인간‘이야말로 사변을 벗어던진 구체적 개념이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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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유물론적 역사관의 본질, 사회적 존재와 사회적 의식

이념, 개념, 의식의 생산은 무엇보다도 직접적으로 인간의 물질활동 및 물질적 교류-현실 생활의 언어-와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다.......인간은 그들의 개념, 관념, 그밖의 것들의 생산자이다. 하지만 현실의 활동하는 인간은 그 발전의 최고 형태에서조차도 그들의 생산력 발전수준과 그에 조응하는 교류의 일정한 발전 수준에 의해 제약된다. 의식이란 의식되어진 존재 이외에 다른 아무것도 아니며, 인간이 존재한다는 것은 곧 실제의 생활을 영위한다는 뜻이다........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오는 독일 철학과는 정반대로 우리는 땅에서 하늘로 올라간다.......오히려 자신들의 물질적 생산과 물질적 교류를 발전시키는 인간만이 자신들의 현실과 함께, 자신들의 사고와 그 생산물들을 변화시킨다. 의식이 생활을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생활이 의식을 규정한다.........자립적인 철학이란 현실에 관한 기술이 시작됨과 동시에 그 존재의 매개물을 상실한다. 자립적인 철학을 대신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인간의 역사발전으로부터 이끌어낸 추상 즉, 가장 일반적인 결론들을 총괄할 것 뿐이다.

 

 

맑스의 유명한 테제인 ‘사회적 존재가 사회적 의식을 규정한다’의 개념이 여기에서도 엿보이고 있다. 하지만 현재 시점에서 이 명제는 ‘사회적 존재와 사회적 의식은 상호규정적이다’라는 명제로 보충되어야 한다. 구조와 행위가 상호작용하고 있다는 측면에 주목해야만 우리는 맑스의 ‘실천 철학’을 낡은 것으로 폐기하지 않으면서 인간해방을 위한 사유를 지속할 수 있을 것이다.

두 번째로 문제제기할 수 있는 지점은, 맑스는 경험과 역사를 벗어난 외부는 존재하지도 않는다고 보며 인정할 수도 없다고 보았다. 하지만 정말 ‘외부’는 존재하지 않는가?

맑스주의와 근대성이라는 글에서 이진경 선생은 ‘사회적 무의식은 사회적 관계에 의해 규정된다.’라는 발상의 전환을 통한 맑스의 재해석을 촉구한다. 이 주장을 올곧이 받아들이는 것은 차후의 문제일테지만 문제의식의 출발이라는 측면은 공유가능하다고 본다. 맑스도 ‘경제학비판’에서 “그렇지만 곤란한 것은 그리스의 예술이나 서사시가 어떤 사회적인 발전과 결부하고 있다는 것을 이해하는 점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들이 우리들에게 대해서 아직 예술적인 즐거움을 주며, 그리고 또 어떤 점에서는 규범으로서의 도달할 수 없는 규범으로서의 의의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이해하는 점에 있다”고 말했다. 맑스의 혁명적 사고인 실천철학이 여전히 유효하고 그것이 인간해방을 지향한다는 대전제 아래서 맑스의 사유를 계승하기 위해서는 맑스가 지적한 전통철학의 오류인 ‘이분법적 사고’에서 벗어나야 한다. 흔히 말하는 맑스주의자들이 현실사회주의의 붕괴이후 맑스를 ‘죽은 개’ 취급하는 것은 맑스를 교조적으로 해석하고 받아들인 이분법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실천철학이 그 역동적 해방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사회적 존재’들이 ‘실천’을 유기적으로 끊임없이 현실에 맞게 재구성하고자 할때 비로소 의미를 갖게 될 것이다.

다시 외부라는 개념으로 돌아와서 논의를 이어가 보자. 현대철학의 가장 큰 위기를 초래하게 만든 ‘프로이트’는 무의식이라는 새로운 난제를 철학에 제기했다. 그리고 이 난제는 맑스철학을 재구성하는데 무척이나 큰 어려움을 주고있다. 하지만 이론적 완결성을 담보하기 위해 현실을 외면하는 것은 사회적 존재의 모순을 더 심화시킬 뿐이다.

최근들어 이러한 ‘외부’에 대한 재해석이 활발하게 진행되는 것은 그러한 측면에서 진정한 맑스적 사유의 계승을 위한 노력이라고 보인다. 알튀세나 라캉주의적 맑시즘등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그런 사유노선의 풍부함이 추가적으로 덧붙여진다면 현실의 모호한 모순을 극복하고 해방을 위한 실천적 동력이 지속가능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맑스가 경계한 기계적 목적론에 대한 구절을 살펴보고 오늘 수업 끝....

 

 

67페이지

공산주의란 우리에게 있어 조성되어야 할 하나의 ‘상태’가 아니며, 혹은 현실이 따라가야 할 하나의 ‘이상’도 아니다. 우리는 공산주의를 현재의 상태를 폐기해 나가는 ‘현실의 운동’이라 부른다. 이 운동의 여러 조건들 역시 지금 현재 존재하고 있는 전제들로부터 생겨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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