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홍콩, 중국의 벽에 갇힌 '인권'

성공회대학교 아시아NGO정보센터는 <시민의신문>과 함께 9월부터 다섯번에 걸쳐 ‘포스트 9·11 시대 아시아와 인권’이라는 주제로 공개 세미나를 개최한다. 이번 세미나는 말레이시아·홍콩·중국·일본·한국을 주제로 각 지역 전문가들을 초청해 다양한 인권문제를 함께 고민한다. 이번 행사는 급격하게 변화하고 있는 아시아의 맥락에서 새로운 인권지형을 모색하는 학문적 기회가 될 것으로 보인다. <편집자주>
○ 주최 : 성공회대학교 아시아NGO정보센터, NGO대학원, 시민의신문
○ 후원 : 프리드리히 에베르트 재단
○ 장소 : 새천년관 7305호
①9/12(월) 오후 4시 - “말레이시아의 이슬람과 인권”
②9/26(월) 오후 4시 - “인권 : 홍콩과 중국의 함수”
③10/10(월) 오후 6시 30분 - “일본의 헌법개정논의와 평화적 생존권”
④10/24(월) 오후 4시 - “한국의 이주 노동자 정책과 과제”
⑤11/7(월) 오후 4시 - “라운드테이블 토론”
“잔인하게 말해서 홍콩은 1999년 이미 마지막 기회를 놓쳐 버렸다. 중국 본토에 사는 홍콩인 자녀들이 홍콩 거주권을 달라고 할 때 홍콩 사람들은 중국인은 누구이고 홍콩인은 누구인지, 혈통이란 무엇이고 민족이란 무엇인지, 식민성이란 무엇인지, 그런 고민을 진지하게 해야만 했다. 그러나 홍콩은 그들을 그냥 추방하는 것으로 끝내 버렸다. 홍콩의 정체성을 고민할 기회가 없을 것이다.”

지난 2003년 7월 1일은 홍콩이 중국에 반환된 지 6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이날 홍콩 도심에서는 시민 50여만명이 모여 시위를 벌였다. 당국이 국가안전법을 개정하려고 시도한 게 발단이었다. 이달 말 개정작업에 들어갈 예정이었던 홍콩 기본법 23조(국가안전법)는 국가전복이나 반란선동 금지, 국가안전위험조직 금지 등을 규정하고 있었다. 법을 확대 적용할 경우 인권 침해와 종교 탄압의 빌미로 악용될 수 있다는 반발을 사고 있었다. 시민들이 강력하게 저항하자 홍콩 당국은 결국 23조 개정작업을 취소했다.

당시 한국 언론들은 홍콩의 시위를 대단히 긍정적으로 묘사하면서 ‘민주화된 홍콩’의 저력을 강조했다. 그러나 과연 그러한가. 지난 9월 26일 ‘인권: 홍콩과 중국의 함수’를 주제로 강연한 장정아 인천대 중어중국학과 교수는 조심스레 고개를 가로 젖는다. 그가 보기에 홍콩에서 인권·민주·법치·자유는 추상적으로는 중요시되지만 현실에서는 중국과의 관계 속에서 왜곡되는 측면이 강하다. “많은 경우 중국반대가 곧 인권이요 민주요 법치로 통용되고 식민성을 근본에서 성찰하거나 ‘홍콩식’ 인권담론을 진지하게 재검토하는 노력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장 교수가 내리는 결론이다.

1997년 홍콩이 중국에 반환되면서 홍콩은 150년 넘는 역사의 한 장을 마감하고 새로운 역사를 시작했다. 150년이 넘는 기간 동안 홍콩은 식민지였고 ‘중국의 위협’에 직면해 있었다. 홍콩인들은 중국본토에서 정치경제적 이유로 건너온 난민들에서 기원한다는 독특한 역사도 중요한 변수다. “홍콩의 인권문제는 결국 중국의 위협 앞에서 어떻게 인권을 지킬 것인지가 문제가 됐으며 인권 문제는 민주·자유·법치와 혼용되면서 홍콩이 중국의 위협 앞에서 지켜야 할 ‘홍콩적’ 가치로 강조됐다.”

홍콩에서 ‘인권’이라는 주제는 중국과의 관계가 너무나 중요한 변수로 작용한다. 이는 홍콩 내부의 식민성을 극복하는 과제에 걸림돌로 작용한다. 게다가 주권, 생존권, 발전권이 식민지 시기 오히려 보장되었고 주권이 중국에 반환되면서, 즉 조국으로 돌아가면서 오히려 인권이 나빠졌다는 것도 인권담론을 왜곡시킨다. 중국에서는 “타국이 인권을 위협한다”고 강변하지만 홍콩에서는 ‘조국’이 인권을 옥죄는 게 핵심 문제다. 즉 홍콩이 중국 위협 앞에서 지켜야 하는 홍콩적 가치를 강조하게 된 것이다. 홍콩 시민단체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인권현안도 중국관계에서 나오는 것이 대부분이다.

그럼 영국 식민지 시기에는 민주화가 잘 이뤄졌나 하면 절대 그렇지 않았다고 장 교수는 말한다. 그는 “집회시위나 민주선거 같은 기본적 자유권조차 90년대 이전까지는 전혀 없었고 중국반환을 앞두고 10년도 안되는 시기에 잠깐 나타난 현상”이라며 “그런 자유조차 중국반환 이후 위협받으니까 사람들이 반발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홍콩식 가치?

이와 관련해 밥 베이티(Bob Beatty)라는 학자가 2003년 쓴 책은 흥미로운 조사결과를 보여준다. 이에 따르면 홍콩정치인 89명 가운데 대다수는 싱가포르에서 강조하는 ‘아시아적 가치’에는 별로 동의하지 않지만 ‘홍콩식 가치’ 혹은 ‘홍콩 나름의 특색’이 있다는 데는 대다수가 동의했다. 그들이 말하는 홍콩의 독특한 가치란 다름 아닌 “정부의 최소한의 간섭과 이로 인한 경제적 자유, 법치 존중, 서구와 중국문화 그리고 홍콩식의 효율성이 혼합돼 있다는 점, 점진적인 민주화, 언론과 발언의 자유” 등이다.  

장 교수는 “그게 무슨 ‘홍콩식’이냐고 되물을 수도 있겠지만 문제는 이렇듯 추상적인 개념들을 강박관념처럼 강변한다는 사실”이라며 “결국 ‘홍콩식’이라는 것은 중국을 염두에 둔 인권담론”이라고 꼬집었다. ‘홍콩식’이란 다름아닌 “중국보다 경제자유가 많고 중국보다 법치를 존중하며 중국보다 민주화됐고…”라는 것이다.

장 교수의 주장에 대해 토론자로 나선 이남주 성공회대 교수도 홍콩에서 나타나는 인권논의를 비판적으로 지적했다. 그는 “홍콩에서 강조되는 인권, 법치, 자유 등의 가치가 갖는 가장 중요한 한계는 이들이 홍콩인에게 내재화된 가치라기 보다는 다른 어떤 목적을 위해 활용되는 도구적 성격이 강하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 목적이란 특히 경제적 번영을 가리킨다. 다시 말해 인권, 자유, 법치란 독자적인 가치로 인정되기 보다는 홍콩의 경제적 번영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하다는 식으로 왜곡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이 교수는 “홍콩만 가진 특수한 한계로 볼 것이 아니라 그 한계 자체가 보편적이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지적했다.

홍콩의 미래는 어떻게 될 것인가. 과거 금융과 무역 허브로 번성했던 홍콩은 점차 경제적으로는 상하이에 밀리고 정치적으로는 베이징에 종속된다. 표준중국어인 북경어를 쓰는 홍콩사람도 점차 늘어나고 있다. 애초 뿌리가 얕았던 ‘홍콩’이라는 정체성은 모래성처럼 흩어지는 조짐을 보인다. 방청객이었던 조효제 교수가 “너무 부정적으로만 보는 것 아니냐”고 질문한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강국진 기자 globalngo@ngotimes.net

2005년 9월 29일 오후 16시 50분에 작성한 기사입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이슬람 아닌 개발독재가 인권 좀먹는다

성공회대학교 아시아NGO정보센터는 <시민의신문>과 함께 9월부터 다섯번에 걸쳐 ‘포스트 9·11 시대 아시아와 인권’이라는 주제로 공개 세미나를 개최한다. 이번 세미나는 말레이시아·홍콩·중국·일본·한국을 주제로 각 지역 전문가들을 초청해 다양한 인권문제를 함께 고민한다. 이번 행사는 급격하게 변화하고 있는 아시아의 맥락에서 새로운 인권지형을 모색하는 학문적 기회가 될 것으로 보인다. <편집자주>
○ 주최 : 성공회대학교 아시아NGO정보센터, NGO대학원, 시민의신문
○ 후원 : 프리드리히 에베르트 재단
○ 장소 : 새천년관 7305호
①9/12(월) 오후 4시 - “말레이시아의 이슬람과 인권”
②9/26(월) 오후 4시 - “인권 : 홍콩과 중국의 함수”
③10/10(월) 오후 6시 30분 - “일본의 헌법개정논의와 평화적 생존권”
④10/24(월) 오후 4시 - “한국의 이주 노동자 정책과 과제”
⑤11/7(월) 오후 4시 - “라운드테이블 토론”
1970년대 초반부터 시작된 이슬람부흥운동의 결과 현재까지 지난 30여년간 이슬람의 교리와 원칙에 바탕을 둔 정치적 종교적 이론과 실천의 발전은 사회생활 전반에 걸쳐 말레이시아의 이슬람적 색채를 강화하는 데 크게 이바지했다. 이슬람 원칙에 기초한 은행제도와 보험, 국제이슬람대학 등 이슬람은 정치와 종교 뿐 아니라 일상생활에도 깊이 스며들어 있다. 말레이시아 정부가 이런 경향을 부추긴 것도 사실이다.

이런 겉모습과 달리 말레이시아 정부가 추진하는 것은 “이슬람화가 아니라 개발 또 개발”이다. 홍석준 목포대 역사문화학부 교수(문화인류학 전공)는 “개발독재와 그에 따른 인권쟁점이 말레이시아의 주요모순”이라고 규정했다. 그는 ‘개발독재를 추구하는 정권’과 이에 대항하는 세력으로 말레이시아 인권구도를 설명한 뒤 대항세력을 속칭 이슬람 근본주의자들과 시민사회운동으로 나눴다. 특히 이슬람의 견지에서 정부에 반대하는 입장을 취하는 야당 세력 빠스(PAS)나 이슬람을 표방하는 시민단체들은 이슬람의 규범과 원칙에 부합하는 인권개념을 강조한다는 점을 주목했다.

서구의 인권개념과 원리는 기본적으로 개인에 기초한 인간 개념에서 출발한다. 세계인권선언 등에 담긴 인간은 권리의 유일한 담지자로서 개인이다. 하지만 빠스 등은 이슬람이 알라에 대한 절대적 복종을 통해 평화를 얻는다는 원칙에서 모든 인간은 평등하며 동등하게 인정받을 자격이 있다는 점을 인권에 관한 기본강령으로 내세운다. 여기서 인간은 집단적, 사회적 존재이다. 인권 개념은 집단적 가치 혹은 무슬림 공동체적 규범과 가치에 기반을 두기 때문에 개인보다는 공동체의 이익을 우선시한다.

“마하티르는 개발지상주의자”

홍 교수는 마하티르 전 말레이시아 총리에 대해 한국에서 널리 알려진 통념과 상반되는 주장을 폈다. 무엇보다도 “마하티르가 이슬람을 강조하는 듯 보이지만 실상은 이슬람을 이용해먹었다”는게 홍 교수 생각이다. 그는 “마하티르는 경제발전을 가장 중시하며 그걸 위해서라면 서구화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고 말했다. IMF와 미국·영국을 기회 있을 때마다 비판하는 것에 대해서도 “왜 미국이 마하티르를 베네수엘라 차베스 대통령처럼 대하지 않았겠느냐”며 “교묘한 외교술”일 뿐이라고 꼬집었다.

강국진기자 

그는 특히 “마하티르가 박정희를 본받자는 얘길 해서 한국에서 화제가 된 적이 있는데 하나만 알고 둘은 몰라서 그런 것”이라며 “마하티르의 본심은 중국의 경제성장을 본받자는 것인데 말레이시아 다수종족인 말레이인들이 말레이시아에 거주하는 화인(華人)을 곱지 않게 바라보는 것을 고려해서 박정희를 끌어들인 것”이라고 말했다.

개발독재는 사회통제를 수반한다. 말레이시아 연방헌법은 일련의 인권제한에 관한 법률과 조례들은 국가가 필요하다고 인정하면 정부 당국이 시민의 권리와 자유를 보다 제한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국내치안법이다. 이것은 재판 없이 구금할 수 있는 법률을 말하는 것으로 개인의 자유를 제약하는 경찰법, 공무원들의 활동을 제한하는 공무원비밀법, 인쇄출판의 자유를 구속하는 인쇄출판법, 대학 구성원들의 활동을 감시하는 대학법, 각종 비정구기구의 활동을 제한하는 사회법 등으로 이뤄져 있다.

말레이시아 정부는 이 법이 사회의 안정을 유지하고 국민의 삶을 향상시키기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고 주장했지만 시민단체들은 기본권을 제약하는 법이라고 규탄하고 있다. 말레이시아 정부는 ‘아시아적 가치’에 관한 담론을 활용하거나 잠재적인 테러 위협에 직면한 상태에서 안정을 도모해야 한다는 명분 아래 경제개발을 시민의 정치적, 시민적 권리보다 상위에 두는 정책을 시행해 왔다. ‘아시아적 가치’는 유신정권이 강조했던 ‘한국적 민주주의’처럼 사회적 통제를 강화하고 국가 권력을 확고히 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참신한 시도, 아쉬운 뒷심

여성할례, 명예살인, 일부다처제, 가부장제, 차도르, 빈곤, 테러리즘… 한국인들이 이슬람 사회의 인권을 바라보는 눈은 썩 곱지 않은게 사실이다. ‘낯설다’는 느낌은 ‘다르다’가 아니라 ‘틀리다’로 다가오고 텔레비전과 신문은 하루가 멀다하고 ‘사건사고 기사’로 이슬람을 색칠한다. 가장 큰 문제는 우리가 이슬람을 바라보는 시각이 우리의 눈이 아니라 ‘서구’의 눈이라는 것이다. ‘서구’의 눈이 지극히 편향돼 있다는 것은 더 말할 필요도 없다.

최근 이슬람의 눈으로 이슬람을 이해하려는 노력이 시민사회에서 일어나고 있지만 아직은 미미하기만 하다. 더구나 그런 노력조차 이라크나 팔레스타인 같은 ‘중동’ 즉 ‘아랍세계’에 머물러 있다. 지난 12일 세미나 첫시간을 홍 교수가 “이슬람의 관점에서 말레이시아의 인권을 다루겠다”고 ‘선언’한 것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이슬람의 관점에서 인권문제를 접근한다는 것도 그렇지만 어떤 면에서는 이슬람보다도 더 낯선 동남아시아를 다룬다는 것도 쉽게 접하기 힘든 기회였다.

그러나 토론자로 나온 박은홍 성공회대 교수가 지적한 것처럼 “서구인권개념이 자유권에 치우쳐 있다고 얘길 시작했는데 본론에서는 말레이시아 정부가 자유권을 탄압하는 내용을 집중 거론”한 것은 아쉬운 대목이다. “결국 서구인권기준으로 말레이시아 인권현황을 고찰하는 결과를 초래한다”는 비판은 그래서 홍 교수에겐 더 뼈아픈 비평이었다.

강국진 기자 globalngo@ngotimes.net
2005년 9월 15일 오후 17시 41분에 작성한 기사입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코빌라이가 카간이 되기까지

<등장>

대몽골제국의 네 번째 카간인 '멍케'는 칭기스칸의 손자로서 카간이 되기 전부터 그 능력을 검증 받은 사람이었다. 여러 나라 말을 자유자재로 구사하고, 유클리드 기하학을 비롯해 동·서의 학술과 문화에 능통했다. 동쪽으로는 아버지 톨로이를 따라 금나라의 숨통을 끊어버린 전쟁에 참여했다. 서쪽으로는 바토(Batu, 칭기스칸의 큰아들인 조치의 아들)와 함께 헝가리까지 나아갔다. 멍케는 명실상부한 "준비된 황제"였다. 그는 지난 수년간 정체상태에 있던 세계 정복계획을 다시 추진했다. 동으로는 남송을 정복하고, 서로는 지중해를 넘어 유럽까지 나가고자 했다. 남송 공략의 책임자가 바로 그의 친동생인 코빌라이였다. 코빌라이의 젊은 시절 행적은 알려진 게 거의 없다. 1251년, 그는 서른 일곱 살의 나이로 세계 무대의 주연으로 급부상한다.

코빌라이는 몽골고원 동남쪽 외각의 금련천(金蓮川) 초원에 동방경영의 본거지를 세웠다. 그의 첫 번째 공격목표는 운남(雲南)과 대리(大理)였다. 최종 목표인 남송을 측면과 배후에서 공격하기 위한 의도에서였다. '운남'과 '대리'는 주요 은(銀) 생산지이기도 하다. 따라서 운남과 대리를 첫 공격지로 삼은 배경에는 몽골제국의 중심세력인 '상인'들의 '은' 확보 요구가 한 몫을 했다는 주장이 있다.

1257년 멍케카간이 남송 정복전쟁의 친정(親征)을 발표했다. 이 전쟁에 코빌라이가 제외되었는데, 그 이유는 분명하지 않다.

<남송정복전>

정복 작전은 몽골의 전통적인 방식을 따랐다. 타가차르(칭기스칸의 동생인 오트치긴의 손자)가 동방 3왕가(칭기스칸이 자신의 세 동생들에게 분봉한 '아우들의 올로스')와 오투하(다섯 개의 유력한 부족집단인 잘라이르·콩기라트·이키레스·우르우트·망구트)를 주력으로 하는 좌익군단을 이끈다. 멍케가 중앙군을, 오리양카다이가 우익군단의 지휘봉을 잡았다.

타가차르의 기본 전략은 원래 한수(漢水)를 타고 남하하면서 양자강 중류 유역을 제압하고 멍케의 본대가 그 뒤를 공격하면서 진군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타가차르의 군대는 양양(襄陽)과 번성(樊城)을 공격하다가 일주일만에 퇴각했다. {원사}는 "두 달에 걸친 장마"를 철군 이유로 밝히고 있지만, 장마 때문에 세계 최강의 부대가 모든 작전을 포기했다는 점은 이해하기 힘들다. 어떻든 '철군'에 격분한 멍케는 '뜻밖에' 코빌라이를 재기용했다.

정복 작전은 몽골제국 답지 않게 처음부터 어긋나고 있었다. 멍케는 한 여름의 무더위를 잠시 피하자는 여론을 무시한 채, 친히 최전선으로 나섰다. 그러나 멍케 카간은 본격적인 전투를 시작하기도 전에 "집사" 에서 '바바'라고 기록한 전염병에 걸려 쓰러졌다. 1259년 8월이었다.

<도박>

멍케가 죽었다! 누가 후계자가 될 것인가?. 몽골은 '적임자' 계승 전통을 따른다. 세습이 아닌 호선이며, 카간이 후계자를 정하는 것도 아니다. 차기 대권은 '불혹'(不惑)의 나이와 이에 걸맞는 정치 군사적 자질이 기본조건이다. '40대'로 다양한 정치집단의 이해관계를 조율하고 군을 지휘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후보는 모두 '세' 명이었다. 당시 이십대의 청년이었던 멍케카간의 아들들은 자격 미달로 당연히 대권 후보에서 제외되었다.

대권주자는 멍케카간의 친동생인 '코빌라이, 훌레구, 아리크-버케' 세사람으로 압축되었다. 막내인 아리크-버케가 가장 유력한 후보자였다. 그는 남송원정때 아오로크(留守營)를 책임지는 자리에 있었으며 몽골 본토의 서반부인, '항가이'에서 '알타이'에 이르는 광대한 '톨로이집안' 영토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몽골 고원의 주인이 진정한 몽골 제국의 주인이다. 멍케카간의 측근들도 아리크-버케를 지지했다. 훌레구는 오늘날의 이스라엘을 점령하고 이집트 지역의 맘룩왕조로 진격을 계속하고 있었다.

코빌라이는 목숨을 건 도박을 시작했다. 그는 여러 가지 포석을 염두에 두고 "양자강 도하, 악주 공격"이라는 히든카드를 내밀었다. 이 작전이 성공한다면, 코빌라이는 멍케카간의 유지 계승이라는 명분을 확보하게 된다. 난공불락의 자연요새인 '장강' 도하 작전의 성공은 군 지휘관으로서 코빌라이의 위상 또한 드높일 수 있다. 남송 후방에 고립된 오리양카다이 장군 부대를 구출하는 효과가 있다. 오리양카다이는 멍케지지자였다. 만약 그가 혼자 힘으로 몽골로 귀환할 경우 코빌라이에게 좋을게 없었다.

1259년 9월 29일, 양자강 북쪽 도강에 성공해 남송의 의표를 찔렀다. 코빌라이는 작전 시작부터 몽골제국 전역에 강렬한 인상을 심어주기 시작했다. 멍케카간의 죽음으로 지휘관을 잃은 '중앙군'이 코빌라이 군에 합류했다. 동방 3왕가와 오투하의 군단도 곧 코빌라이의 휘하로 들어왔다. 1260년 코빌라이의 군단이 '중도'에 총집결, 겨울을 보낸 뒤 '금련천'으로 북상했다. 이곳에서 "비겁한 코릴타"가 열렸다. 46살의 코빌라이는 운명을 건 승부수를 던졌다.

아리크-버케도 주저 없이 카라코람의 서쪽 근교 알탄강변 여름 숙영지에서 코릴타를 열고 카간에 즉위했다. 아리크-버케는 코빌라이보다 여러 면에서 유리했다. 아리크-버케는 멍케카간 장례식의 상주(喪主)였을 뿐 아니라, 몽골제국의 '중앙'에서 카간에 즉위함으로서 '정통성'을 주장할 수 있었다. 조치 올로스의 우두머리인 베르케, 차카타이 올로스의 우두머리인 오르가나, 서남아시아에서 원정 중이던 훌레구도 아리크-버케를 지지했다. 1264년 코빌라이에게 항복하기 전까지, 아리크-버케는 분명 몽골제국의 '정통' 카간이었다. 조치올로스에서는 아리크-버케의 얼굴을 새긴 동전도 발행되었다.

<카간 쟁탈전>

아리크-버케는 정통성을 확보하고 있었지만, 이겨봐야 본전인 싸움이었다. 목숨을 걸고 싸워 줄만한 세력은 자신의 처가인 오이라트(Oirad)족 정도일 뿐.

'반역자' 코빌라이 군은 패전 시 '멸족'을 피할 수 없다는 위기의식에 필사적일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몽골제국전체의 한축을 담당하는 동방 3왕가와 오투하 군단을 주축으로 한 코빌라이 군은 처음부터 아리크-버케보다 군사적으로 우위에 있었다.

주된 전장은 동(東) 몽골 초원이었다. 초원 전투는 기동성이 생명이다. 따라서 세 차례의 전투에서 양측은 모두 '기마 부대'를 전면에 내세웠다. 두 측의 주력 기마 부대는 모두 순수한 몽골 기병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양쪽이 모두 유목 전투력에 의존했던 셈이다.

코빌라이는 상대편의 전투력을 무력화하기 위해 화북에서 카라코롬으로 이어지는 보급로를 차단시켜 버렸다. 이에 다급해진 아리크-버케는 차카타이의 손자 '알루구'를 차카타이 올로스의 우두머리로 삼아 식량 원조를 받고자 했다. 그러나 과거 멍케카간에게 불만을 품고있던 알루구와 차카타이 집안은 '계승자'임을 자처하는 아리크-버케에 반기를 들고, 코빌라이와 손을 잡았다.

전세가 불리해지자, 아리크-버케는 카라코롬에서 퇴각해 차카타이 올로스를 점령했다. 1262년∼1263년 겨울, 아리크-버케는 포로가 된 차카타이 올로스의 장졸들을 모두 처형하는 '치명적인 실수'를 범했다. 몽골의 카간은 '몽골공동체'를 위해 존재한다. 이미 항복한 공동체 구성원을 죽이는 일은 전례가 없었다. 이로 인해 아리크-버케는 민심을 잃었다.

관리들이 떠났다. 어거데이의 후손들도 아리크-버케에게 등을 돌렸다. 조치올로스는 지원을 망설이고 있다. 고립으로 혼자가 된 아리크-버케는 1264년 7월 코빌라이에게 투항하면서, "처음에는 우리가 옳았지만, 지금은 당신이 옳다"는 말을 남겼다. 코빌라이 시대의 개막을 알리는 축포였다. 아리크-버케는 유배당한 지 2년만에 사망했다.
몽골제국의 구성원들은 코빌라이를 카간으로 인정했다. 그리고 그는 30여년에 걸친 제위기간을 세계역사상 가장 빛나는 시대의 하나로 만들었다. 하지만 몽골제국의 원칙을 깼다는 비난은 영원히 그의 몫이 되었다.

※이 글은 스기야마 마사아키가 쓰고 임대희 등이 번역한 <몽골세계제국>, (신서원, 1999)을 토대로 쓴 글임을 밝힙니다.

---------------------------------------
김호동, [몽고제국의 형성과 발전], {강좌중국사}Ⅲ, 서울: 지식산업사, 1989.
스기야마 마사아키, 임대희 외 옮김, {몽골세계제국}, 서울: 신서원, 1999.
Morgan, David, The Mongols, (Blackwell, 1990).
Rossabi, Morris, Khubilai Khan: His Life and Times, (Bekeley: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88).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칭기스칸은 주당이었다?

몽골인의 풍속에서는 주인이 술잔을 들어 손님에게 권했는데 손님이 아주 조금이라도 술을 남기면 주인은 그를 다시는 대접하지 않는다. 반드시 손님이 완샷을 해야 좋아한다. … 그들이 술을 먹는 풍속은 나란히 앉아 서로 술을 주거니 받거니 하는 것이다. 만약 어떤 사람이 한 손으로 잔을 들면 나에게 술 한 잔 하라는 뜻이다. 내가 술을 한입에 비워야 그 사람도 마실 수 있다. 혹은 두 손으로 잔을 들어 나에게 주는데 그러면 내가 마신 다음에 그에게 똑같이 술을 따라 줘서 술을 돌려 먹는다. 이렇게 하게 되면 쉽게 취하게 된다. 그러면 취해서 울고, 싸우고, 실례하고, 토하고, 드러눕는다. 그렇게 해야 주인이 크게 기뻐하면서 "손님들이 모두 취한 것은 나와 한마음이 되었다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이 글은 칭기스칸 당시 몽골에 파견되었던 남송(南宋)의 사신 조공(趙珙)이 쓴 <몽달비록>에 나오는 내용이다. 위에서 묘사한 내용이 우리에게 썩 낯설지 않다는 점이 흥미롭다. 사실 연회의 술자리는 우리네의 일반적인 '뒤풀이' 모습을 생각나게 할 정도로 비슷한 면이 많다. 로마 교황이 몽골에 파견한 사신이었던 루브룩(William of Rubruck)은 심지어 '멍케카간' 앞에서조차 술에 취해 혀가 꼬부라져 버린 통역관때문에 고생을 하도 해서 다음에 몽골에 갈 사신에게는 훌륭한 통역이 그것도 여러 명 필요할 거라는 푸념을 할 정도였다.

연회를 뜻하는 단어 '토이'는 투르크어와 몽골어에 모두 있는 말이다. 몽골에서는 어떠한 모임이든지 그 전후에는 반드시 모두가 즐기는 자리를 마련했다. 사람마다 따로 한 상을 차려주고, 술통도 각자의 옆에 둔다. 연회는 몽골제국의 정치운영에도 대단히 중요한 구실을 했다. 연회는 사흘이나 닷새, 혹은 이레동안 열렸다. 코릴타 전에 열리는 연회에서는 각종 사전교섭과 협상이 벌어졌다. 또 코릴타 폐막 연회는 안건을 결정하는 과정에서 생긴 잡음을 없애고, 국론을 재통일하는 역할을 했다.

몽골인의 애주(愛酒)는 말 젖을 발효시켜 만든 도수 5도 정도의 '말젖술'이다. 막걸리와 비슷하지만 더 시큼한 것이 특징이다. 한국인이 말젖술을 처음 먹으면 바로 설사를 한다고들 하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다. 건강에 문제가 없는 사람이라면 말젖술을 접하는데 큰 어려움이 없다. 말젖술은 몽골인의 여름 주식이기도 하다. 남녀노소 구분 없이 즐길 수 있는 한 여름의 고급영양식인 셈이다.

이밖에도 몽골에는 '아리히'라고 하는 40도 가량의 독주가 있다. 아리히는 칭기스칸 시절 위구르를 통해 몽골에 전래된 아라비아산 술이다. 아리히는 몽골을 거쳐 고려로 건너와 지금의 '안동소주'가 되었다.

현재 몽골의 국민주(國民酒)는 '보드카'이다. 사회주의 시절 소련의 영향 때문이다. 몽골인에게 술은 애음(愛飮)의 대상이자 모든 '희노애락'(喜怒哀樂)의 나눔이기도 하다. 슬픔, 기쁨, 행복, 헤어짐의 순간에 이들의 술자리는 '터'가 따로 없다. 노상이던, 대합실이던, 터미널이던, 초원이든….

몽골제국의 건설자, 칭기스칸 역시 이런 술 문화의 중심에 있던 인물이었다. '코릴타(Khurilta)'의 전후연회에서, 승패에 관계없이 전쟁 이후에, 주변의 대소사에 그는 당연히 희노애락을 함께 나누고 "영원한 하늘"의 가호를 기원하며 주저없이 술잔을 돌리며 '완샷'을 했을 것이다.

---------------------------------------
Christopher Dawson (ed.), The Mongol Mission, (London & N.Y.: Sheed and Ward, 1955).
박원길, 몽골의 문화와 자연지리, (두솔, 1996).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