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개헌을 주장하는가?
행인님의 ["국민"이길 거부당한 사람들] 에 관련된 글.
노무현의 원포인트 개헌론이 제기된 이유나 김형오를 중심으로 하는 국회 일각에서 개헌론을 제기하는 이유는 다른 것이 아니다. 이 구조가 자신들을 힘들게 하는 구조라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지금 개헌론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그나마 핑계거리라도 있다. 노무현 정권에서 제기된 개헌론을 제18대 국회에서 본격적으로 논의하자고 여야 합의를 봤다는 거. 하지만 그렇게 따지면 노무현이라고 해서 핑계거리가 없었을까?
기실 한국 헌법은 이미 만신창이가 되어 있다. 헌법의 규정이 문제여서라기보다는 그 규범성을 왜곡하는 사회현상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원포인트 개헌론이 나왔을 때 이미 노무현정권은 독소조항이 가득한 한미 FTA를 체결하면서 헌법의 틀을 흔들어버렸다. 그 이전부터 문제가 되어왔던 집시법이나 보안법, 그리고 항상 요동을 치면서 고개를 삐죽거리고 있는 테러방지법은 헌법체계를 왜곡하는 전형적인 사례이다. 그뿐인가? 헌법이 보장하고 있는 표현의 자유, 학문예술의 자유, 인신의 자유 등은 날이 갈수록 축소되고 있다. 헌법의 규정때문이 아니라 헌법의 하위법률들과 그 법을 집행하는 자들에 의해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개헌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이 모든 문제를 권력구조의 틀 안에서 바라본다. 당연히 그들에게 있어서 권력구조의 변경은 문제해결의 지름길이 된다. 논의의 출발이 선의건 악의건 간에 이 틀거리를 벗어나지 못한다.
결과는 항상 원인에 의해 귀납되는 것. 그들이 가지는 해법의 전제는 당연히 권력이다. 더 명확히 이야기하자면 권력을 가진 자들의 욕망이다. 체제의 안녕은 언제나 자신들의 안녕의 다른 말이다. 그리하여 결국 문제는 주체의 문제로 환원되며 권력을 가진 주체가 누구냐의 질문으로 귀결한다.
프레시안에서 헌법자문위원회 김종인 위원장과 최태욱 교수의 대담을 보았다. 내용은 매우 재미있었다. 흥미진진하다. 그런데 그 대담을 다 읽고 나서, 다시 한 번 또 읽어봐도 찜찜한 기분을 떨쳐내기 힘들다.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은 부분에서 더욱 그렇다.
김형오 국회의장이 국회가 스스로 개헌 논의를 해보자는 생각을 한 것 같아요. 그러려면 대통령 임기 초기에 해야지 시간이 가면 어려워지니까 준비작업을 하자는 취지에서 연구자문위를 구성한 것입니다.(김종인 위원장)
왜 김형오는 국회가 스스로 개헌논의를 해보자고 생각했을까? 무엇때문에? 국민의 기본권 보장을 더욱 확실히 하고싶어서?
국회 헌법연구 자문위원회 결과보고서를 검토하고 있는 중인데, 이 보고서를 보면서 느끼는 점은 대체 왜 개헌을 하겠다는 건지 그 의도가 분명치 않다는 거다. 보고서의 머리말에는 "세계적인 정치경제환경의 급변과 새로운 시대정신의 도래, 남북관계의 변화와 통일의 대비, 보다 합리적인 국정운영을 위한 헌법적 과제 등 많은 도전이 우리 앞에 놓여 있으며, 이러한 상황에 대응하여 더 나은 미래를 제시할 수 있는 헌법을 마련할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다"는 구절이 나온다.
그런데 "남북관계의 변화와 통일의 대비"를 위한 위원회의 최종 연구 결과는 "영토조항 현행 유지". 이런 결과는 어쩔 수 없는 것처럼 보이는데, 그 이유는 헌법개정논의 자체가 정치적 맥락에서 출발했기 때문이다. 즉 민감한 사안에 대한 섣부른 변환은 그 변환을 주도한 세력에게 치명적인 정치적 사망선고로 이어질 수 있다. 따라서 이들은 "국민적 합의"라는 허울을 근거로 자신들의 정치적 생명력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사안에 대해선 자신들의 이해관계를 직접 투영하기를 꺼리게 된다.
이 한 가지 예만 보더라도 현재의 개헌론이 얼마나 무용한 것인지를 쉽게 알 수 있다. 아무리 보고서를 들여다봐도 보고서 머리말이 밝히고 있는 그 취지를 달성하고자 하는 노력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단지 사회적으로 이 규정에 대해선 이런 이야기들이 있다는 것을 종합해놓은 것에 불과하다. 즉 이 보고서가 제출되게 된 경위와 관련해 목적의식 자체가 불투명하다는 것이다.
기본권 보장 부분에서 정보통신관련논의가 꽤나 많이 이루어졌다는 것이 특색일지 몰라도 결국 기본권 논의는 장식에 불과한 것이 이 보고서의 내용이다. 가장 중점적으로 다루어지고 있는 부분은 통치구조부분. 내각제로 할 거냐 대통령제로 할 거냐부터 시작해 무척이나 다양한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다. 이 보고서가 만들어진 배경을 염두에 두면 이런 보고서의 구조가 발생하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다시 문제로 돌아가보자. 누가 개헌을 주장하는가?
길거리에 나가 아무나 잡고 물어보자. "개헌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세요?"
질문을 받은 사람 중 절반은 이건 왠 듣보잡? 이러면서 걍 피해갈 것이고, 매우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그거 대통령 4년 연임(중임이란 말도 잘 안 쓴다)하자는 거요? 하는 정도의 수준에서 이야기할지도 모르겠다. 고시 준비하는 넘들에게 의견청취를 하더라도 거의 절대 다수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아 쒸파, 나 시험 합격한 다음에 개헌하지..."
까놓고 말해 개헌의 직접 주체가 되어야 할 인민들은 실상 헌법이 뭔지도 잘 모른다. 거기 관심가질 만큼 시간도 없다. 그렇다고 해서 정규교육과정에서 헌법교육 제대로 받아본 적도 없다. 촛불집회 과정에서 나왔던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는 말이야 누구나 다 알고 있다고 치더라도, 그 민주공화국에서 자신이 가지고 있는 기본권이 뭔지조차 모르는 사람이 허다하다. 그도 그럴 것이 자신의 삶이 헌법의 생활규범성 안에 놓여있다는 것을 실감할 일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기껏 경찰서나 법원에 왔다갔다 할 처지가 되어서야 법이라는 것이 이거 무서운 거구나 정도로 생각하게 될 뿐이다.
더 중요한 것은 현행 헌법체계 자체가 자신들의 삶을 팍팍하게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인민들은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이다. 오히려 인민들은 정치하는 넘들이 나쁜 넘, 이런 식의 정치혐오가 있을 뿐이다. 니들이 잘 뽑지 그랬어라는 힐난은 무책임하다. 뽑힐 넘들이 자질을 갖추는 것이 먼저다. 문제는 이 상황에서 자질도 갖추지 못한 것들이 선량이랍시고 뻗대고 앉아 지들 밥그릇 챙기기 위한 방편으로 개헌을 운운한다는 거다.
앞서 예를 든 것처럼 영토조항 하나만 보더라도 위원회의 결론은 현행 유지다. 현행유지라는 결론을 내면서 위원회가 한 말이 가관이다. "영토조항에 대하여는 보다 심도 있는 연구가 필요하므로 현행 영토조항을 유지하기로 함"
다른 조항은 안 그런가? 하나만 더 예를 들어보자. 현행 헌법 제119조2항. 즉 경제정의조항이라고 흔히 알려져 있는 이 규정에 대하여 보고서는 "현행규정 유지"라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 그 이유 중 하나는 "현재 전세계적으로 국가와 시장의 역할에 대해 논란이 벌어지고 있으므로 과도한 논란을 피하기 위해서는 개정을 유보하는 것이 바람직함"이란다. 재밌지 않은가? 어차피 개헌이라는 행위 자체가 사회적인 논란의 장을 통해 만들어지는 것인데, 논란이 우려되니 손대지 말자고 결론 내리는 거. 이런 연구 왜 하는 걸까? 혈세낭비하면서.
어느 면을 살펴보더라도, 정치구조에 대한 논의를 제외하고는 별다른 개헌의 목적의식이라는 것이 보이지 않는다. 바로 여기서 헌법의 문제는 정치주체의 문제, 권력주체의 문제로 확인된다. 개헌론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바로 현실정치세력이며 이 사회에서 기득권을 가진 권력주체들이다. 야당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다. 어차피 그 야당이 과거 집권당이었을 때도 한통속인 사람들에 의해 개헌론이 운운되었으니.
개헌을 시급한 과제라고 이야기하기 전에, 헌법의 구조를 왜곡하고 있는 현상부터 시정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촛불집회와 관련해서 백서를 펴낸 서울중앙지검은 피의자의 피의사실을 사전에 공포하여 개인에게는 명예훼손, 법원에 대해서는 재판개입의 의도를 분명히 했다. 이런 현상은 헌법이 용인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헌법의 정신을 지켜야 할 검찰은 이런 짓을 망설임 없이 저지른다.
용산참사를 보더라도 그렇다. 어디 그들이 헌법의 기본권 보장을 받은 사람들의 모습인가? 쌍용 노조는 어떤가? 이들이 헌법의 불비로 인하여 고통을 받고 있나? 집시법이나 보안법은 어떤가? 헌법 위의 법으로 군림하고 있는 이러한 법률들을 오히려 더 강화하자고 설치는 상황에서 개헌이야기가 가능할까? 도대체 그 빌어먹을 개헌은 누구를 위한 개헌인가? 누구의 이익에 복무하기 위한 개헌인가?
김종인은 대담 중에 "불행한 대통령을 만들면 안 되겠다는 생각에서 김형오 의장이 개헌을" 이야기한 거 같단다. 여기서 관점의 차이가 명백해진다. 불행한 대통령은 얼마든지 나올 수 있다. 아닌 말로 시중의 장삼이사보다 대통령 한 번이라도 한 사람이 불행해봐야 얼마나 더 불행하다는 걸까? 오히려 그런 대통령 만나 생고생하는 인민들이 진짜 불행한 거 아닌가? 그렇다면 개헌 역시 "불행한 대통령"을 만들지 않기 위해서가 아니라 "불행한 인민"을 만들지 않기 위해서 진행되어야 한다. 김형오의 말은 다시 말해 지가 불행해지고싶지 않다는 것에 불과하다.
그리고 강조할 것은, "불행한 인민"을 만들지 않기 위한 개헌은 바로 그 인민들이 주체가 되어서 진행해야 한다. 419가 그랬고 6월 항쟁이 그랬다. 그 결과가 정치꾼들의 협잡으로 끝났다는 역사적 과오가 되풀이되지 않아야 할것은 더욱 분명하고. 그런 의미에서 개헌을 이야기하려면 먼저 인민들에게 헌법을 이야기해야 한다. 이 전제조건 없이 진행되는 개헌론은 거듭, 대국민 사기에 불과하다.
달달 외워서 출처 밝히고 써 먹을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_+
이제 에밀리오님도 타인의 폭력에 의해 육체와 정신이 분리된 상태에 돌입하셨군요. 나도 내가 뭔소리하고 다니는지 몰라.
뭐 안 외우셔도 이미 다 알고 있는 내용일텐데요. ㅎㅎ
행인 / 에헤헤 그렇지 않습니다 @_@
miss me / 그럴 수 있지요 @_@
대통령제에서 내각제 개헌이란? 총리를 바지사장으로 세우고 뒤에서 밀실정치를 하자는 수작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