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아내리는 노동의 결론은 기본소득인가
경향신문이 신년 기획으로 연재하고 있는 "녹아 내리는 노동" 시리즈는 가슴을 먹먹하게 만든다. 조만간 죄다 다시 꼼꼼히 살펴보아야 할 내용들이니 일단 링크.
아마도 이 연재가 거의 끝나가는 무렵인듯 하다. 오늘자 지면에서는 특히 기본소득이 강조되고 있다. 그런데 여전히 기본소득에 대한 긍정적 관점들은 그 근거들이 모호하거나 부족하다. 자, 판판이 놀고 있는 백수 입장에서 하루라도 빨리 기본소득 제도가 도입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라는 걸 강조해두고 이야기를 시작해보자.
일단 간단한 거 확인만 해놓고 가자면, 지면에서는 제목이 "기본소득 받은 2%만 구직 단념 ... 더 나은 일 구하는데 쓴다"로 되어 있는 기사가 온라인에서는 "미국 스톡턴 시의 기본소득 실험 ... "현금 줬더니 더 나은 일자리 구해""로 바뀌어 있다. 또한 "4차 산업혁명시대, 분배 정의에 대한 새로운 상상"이라는 기고문의 제목은 "기생충, 노동의 미래, 그리고 기본소득: 분배정의에 대한 새로운 상상"으로 달라져 있다.
우선 연재기사의 내용을 보자.
경향신문: [녹아내리는 노동] 미국 스톡턴 시의 기본소득 실험..."현금 줬더니 더 나은 일자리 구해"
먼저 여기서 이루어진 어떤 정의부터 보면. "경기가 회복돼도 일자리와 임금은 늘지 않는다. 미국에서 더이상 일자리와 임금만으론 중산층을 지킬 수 없다." 이 정의는 굉장히 솔직하다. 기본소득의 목적이 어디 있는지를 너무나 정확하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렇다. 기본소득은 저소득빈민층을 위한 제도가 아니라 실은 중산층을 지키기 위한 제도라는 것. 달리 말하면 중산층의 소비구조에 기반하는 시장자본주의질서를 지키기 위한 최후의 방책이라는 것. 한국의 특히 좌파측 기본소득론자들이 굳이 피하고자하는 부분이다. 한국의 좌파 기본소득론자들은 그런 의미에서 대단히 솔직하지 못한 측면이 있다. 이건 다음에 이야기하자.
연재기사가 든 사례는 미국 캘리포니아주 스톡턴시다. 여기서 기본소득 실험을 해봤더니 일을 그만두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나은 일자리를 구하더라는 거다. 기사가 목적했던 취지는 기본소득이 사람들을 게으르게 만드는 것이 아님을 보여주고자 했던 거다. 기본소득 받으면 일을 하지 않을 거라는 것은 기본소득 반대론자들이 주로 하는 이야기긴 하다. 하지만 그건 단견일 뿐이고, 현재의 자본주의구조 내에서 이루어지는 기본소득은 필연적으로 일자리를 찾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왜냐하면 그 기본소득의 성격과 재원때문에 그렇다. 이건 뭐 그동안 숱하게 말했던 거니까 패스하도록 하자.
어쨌든 난 기본소득을 준다고 한들 구직의 욕구 자체가 사라질 수 없다고 주장해왔다. 그런 의미에서 이 연재에서 소개된 스톡턴의 사례는 특별한 의미가 있다. 우선 이 실험은 무작위선정 125명을 대상으로 한 것인데, 이들 중 대다수가 구직을 희망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거 당연한 거 아닌가? 애초 이 프로그램 자체가 구직을 보조하기 위한 목적으로 설계되었다. 그렇다면 결과가 이렇게 나온 게 오히려 당연한 것이고 만일 이런 결과가 나오지 않았다면 그건 프로그램의 설계가 잘못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이 실험에서 사용된 '기본소득'은 한국의 실업급여의 성격과 그다지 다르지 않다는 거다.
물론 대상자로 선정되어 이러한 수당을 받게 되자 "우버 그만 둬도 되는 거야?"라고 기뻐했다는 어떤 여성의 사례는 나름의 긍정성이 있다. 그러나 여전히 문제는 남는다. 자, 그렇다면 이 여성은 이제 기본소득 실험이 끝난 마당에 다시 우버를 뛰어야 하나? 아니면 그 수당을 받던 18개월 동안 더 이상은 우버를 뛰지 않아도 될 정도의 임금을 받을 수 있는 다른 직장을 구한 건가?
아프리카의 빈국에서 기본소득 실험을 했을 때 나왔던 결론과 똑같은 결론이 미국에서 나왔다는 건 기본소득의 장점을 보여주는 게 아니라 미국의 현실이 완전 개판이라는 걸 보여주는 거다. "고장난 타이어를 고쳐야 차를 끌고 일을 나갈 수 있다. 그 돈이 없어 일을 하지 못하는 게 현실"이라거나, "일당을 못벌어도 생활을 지탱할 수입이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일을 하루 쉬고 전일제 일자리를 위한 면접을 볼 수 있었다"는 회고는 기본소득이 이래서 필요한 것임을 역설하는 게 아니라, 미국의 현실이 아프리카 어느 빈국과 같다는 것임을 보여주는 거다. 그렇다면 그 대안이 기본소득인가?
자, 이런 의문이 들자마자 기본소득의 재원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이 실험의 재원은 '경제적 안정성 프로젝트'라는 기금에서 나왔는데, 이 기금은 페이스북 공동창업자 크리스 휴즈 등이 운영한단다. 그냥 그림이 나오지 않는가? 결국 기본소득의 재원은 자본으로부터 나오게 되고, 기본소득을 유지하기 위해선 자본주의가 유지되어야 한다. 여기에는 생산수단이라든가 사회적 소유라든가 하는 개념은 전혀 개입되지 않는다. 한국의 좌파 기본소득론자들은 이 이야기를 회피한다.
게다가 기사 말미에 나오는 이 내용은 아직도 수긍이 되지 않는다. 기본소득의 의미는 "그동안 사회가 가치를 매겨주지 않던 무수한 무급노동까지 '일'로 인정한다는 의미도 있다. 생산에 간접적으로 기여하지만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던 돌봄과 가사노동, 가족들과 보내는 시간, 구직활동, 창작, 자원봉사 등에도 보상이 주어지는 셈이다." 이건 진보적 사고인가?
난 "돌봄과 가사노동, 가족들과 보내는 시간, 구직활동, 창작, 자원봉사 등"을 임노동으로 치환하는 것이 과연 인간적인 것인지 의문이다. 임노동이 가지고 있는 가장 심각한 문제는 바로 노동의 소외, 그리고 이를 통한 인간소외이다. 그런데 저 "돌봄과 가사노동, 가족들과 보내는 시간, 구직활동, 창작, 자원봉사 등"은 인간이 '일'을 통해 인간임을 확인할 수 있는 몇 안 남은 일들 중 일부다. 그런데 이걸 굳이 임노동의 일부로 편입하는 개념을 동원하는 게 적절한 것인지는 의문이다. 물론 임노동과 이들 "돌봄과 가사노동, 가족들과 보내는 시간, 구직활동, 창작, 자원봉사 등"은 매우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그리고 이러한 "돌봄과 가사노동, 가족들과 보내는 시간, 구직활동, 창작, 자원봉사 등"을 잘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임노동이 보다 인간적으로 노동친화적으로 전환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굳이 "돌봄과 가사노동, 가족들과 보내는 시간, 구직활동, 창작, 자원봉사 등"을 임노동으로 치환해야 문제가 해결되는 것일까?
게다가 임노동은 그 자체로 자본과의 대척점에서 노동의 주체적인 대자성을 기초해준다. 노동해방은 불변의 과제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것을 임노동 아닌 것으로 전환할 수 없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난 이 부분에서만큼은 아직도 제대로 납득을 할 수가 없다. 이들 "돌봄과 가사노동, 가족들과 보내는 시간, 구직활동, 창작, 자원봉사 등"은 임노동으로 전환할 것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책임져야 할 가치있는 활동이어야 한다.
기고문 역시 설득력이 부족하다.
경향신문: [녹아내리는 노동] "기생충, 노동의 미래 그리고 기본소득: 분배정의에 대한 새로운 상상"
이 대목에서 먼저 정확하게 규정해야 하는 건 '기본소득'은 분배가 아니라 재분배의 일종이라는 거다. 이걸 또 설명하는 건 그렇고, 암튼 기고문에 대해서만 좀 더 보면, 일단 이 기고문은 그동안 기본소득론자들이 했던 이야기들을 반복한다. 새로운 이야기는 없다. 영화 '기생충'이 소재로 등장한 것이 색다르달까. 아, 말 나온 김에, 아니 이 기본소득론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왜 기생충을 자꾸 끌고 들어오는지 모르겠네. 지난번 조한혜정 선생도 그렇고 이 기고도 그렇고.
암튼 이 기고문은 평범한 내용 중에 여전히 예전부터 하던 이야기를 한다.
"기본소득의 현대 이론을 정립한 대표 학자 필리페 판 파레이스는 기본소득이 기존 노동법이나 공공재적 사회보장을 대체하는 것이 아니며, 각국 사정에 맞게 점진적, 부분적으로 시작할 수 있다고 했다."
그러니까 말이다. 내 말이 그거다. "각국 사정에 맞게 점진적, 부분적으로"이미 기초연금 같은 거다. 각종 수당이고. 판 파레이스의 주장이 이런 거하고 다른 게 뭔가? 아니 게다가, 앞에서는 노동체제가 급변하고 있으며, 산업자본주의 메커니즘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현재의 고용관계라든가 사회보장체계에 문제가 있다고 주장하던 필자가 "기존 노동법이나 사회보장을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기본소득을 주장하는 이유는 뭘까?
뭐 더 들여다보고 공부를 더 해야겠지만, 일단 이번 기사나 기고에서도 기존에 제기했던 문제들의 답은 나오지 않는다. 오히려 "근로소득을 통해 재화가 분배되던 기존 방식도 재검토가 필요하다"고 하면서도 정작 재원확보에 있어서는 바로 이 근로소득이 발생하는 임노동이 있을 때에야 재원이 만들어질 수 있음을 계속해서 간과하는 이유는 뭔지 모르겠다. 그냥 금융거래이익에 대한 세금으로 다 퉁칠 수 있으니 임노동은 이야기할 필요가 없다는 걸까?
조만간 다 정리해서 책이라도 하나 내야겠다. 아, 이젠 공부따위 안 하려고 했는데. 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