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의 해법은 상식이다

말걸기님의 [위기라 하네] 에 관련된 글.

러일전쟁 당시 여순의 항만기지거점확보를 위해 벌어졌던 대규모 전투가 203고지 전투다. 여순항이 손바닥 들여다보듯이 내려다 보이는 얕으막한 언덕배기인 이 코딱지만한 언덕배기를 두고 러시아와 일본 양국의 병사가 수도 없이 죽어나갔다.

 

당시 만주일대의 병권을 쥐고 있던 자는 노기 마레스께였다. 전략적으로 중요한 거점인 203고지를 장악하지 않고서는 이 전쟁에서 승리할 수 없다는 판단을 한 일본은 노기에게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보병의 무한제공, 당시 일본 포병의 전문가들을 모두 노기에게 붙여준다. 이미 8월말 요양전투에서 2만 이상의 병력손실을 낸 노기는 9월 중순부터 203고지 쟁탈을 위한 전투를 개시한다.

 

그런데, 이 전투라는 것이 실상 전투라고 할 것도 없이 마냥 밑에서 포 쏘고 보병들 돌격 앞으로 시키는 것 이상의 전술이 없었다. '부시도(武士道)' 정신으로 무장한 일본 보병들은 돌격명령 한 마디에 소총 앞에 들고 산정에 보이는 러시아군 토치카를 향해 무작정 달려들 뿐이었다.

 

새카맣게 밀려올라오는 일본군을 보면서 러시아 병사들은 처음에는 쫄았겠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별다른 부담을 느끼지 않고 대적을 하게 된다. 담배 한대 입에 물고 새카맣게 올라오는 적들을 향해 기관총의 총구를 들이대는 것만으로도 얼마든지 제압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사방이 탁 트인 개활지와 다름 없는 언덕배기에서 불과 3개월 만에 일설에 따르면 일본군 10만명의 시체가 덮였다고 한다. 전투가 계속되던 11월 28일 하루동안 일본군 8000명이 사상당했다고 한다.

 

시체는 쌓이고, 말 그대로 '일장공성 만골고(一將功成 萬骨枯)'라는 고사성어가 무색하리만치 노기 마레스께의 작전은 작전이라고 할 것도 없는 상황이 되어가고 있었다. 이 때 나타난 사람이 고다마 겐타로였다. 만주 일본군 총사령부의 참모장으로 있던 자였는데 일설에는 노기의 친구였다는 이야기도 있다.

 

어쨌든 갑작스럽게 나타난 고다마 겐타로는 노기에게 작전권 이양을 요구한다. 사실 일반적으로 군의 지휘체계를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고다마의 요구가 얼마나 황당한 것인지 잘 알 것이다. 상부의 지시도 없었고 그렇다고 해서 사전에 해당 작전을 같이 짠 것도 아닌 자가 느닷없이 나타나 지휘권을 달라고 하는 것은 군지휘체계를 완전히 물로 아는 행동인 것이다.

 

그런데 고다마의 요구에 응하는 노기의 태도가 걸작이다. 두말 없이 백지위임을 한다. 이게 멍청한 짓인지 현명한 짓인지에 대해서는 입장에 따라 의견이 다를 수 있는데, 어쨌든 노기는 군소리 않고 고다마에게 지휘권을 넘겼고, 지휘권을 양도받은 고다마는 그동안의 작전을 완전히 뒤집고 군을 통제하여 불과 이틀만에 203고지를 점령한다. 그리고 고다마는 뒷말 없이 지휘권을 노기에게 다시 넘기고 별다른 의전도 없이 원위치 하고 만다.

 

이후 러일전쟁의 경과는 다들 아는 사실이다. 203고지를 점령한 일본군은 여순항에 정박해있던 러시아 함대에게 정밀사격을 하여 근거지를 상실시켰다. 이틀동안의 포격으로 50척에 달하던 러시아 전함과 순양함은 모두 침몰했다. 훗날 레닌은 "여순의 함락은 차르체제 종식의 서막이었다"라고 회고했다.

 

여순의 함락은 이후 대마도 해협에서 치루어졌던 일본 해군의 러시아 발틱함대 괴멸로 이어진다. 불과 1시간만에 발틱함대의 절반에 달하는 군함이 침몰했다. 발틱함대 사령관 로제스 트벤스키를 비롯해 6100명이 포로로 잡혔고, 울릉도 근해까지 도주하던 최후의 함선은 끝내 자폭한다.

 

일본의 이러한 승전은 국제적인 이슈가 되었고, 윈스턴 처칠이 "일본이 우수한 도자기를 가져왔을 때 우리는 그들을 야만국이라 불렀다. 그러나 우수한 총과 칼로 러시아를 격파했을 때 우리는 비로소 그들을 문명국이라 불렀다"고 했을 정도다. 물론 일본의 발틱함대 격파의 배경에는 영국의 이해관계가 동원된 바가 있다. 만일 영국이 발틱함대의 수에즈 운하 통과를 허락했다면 발틱함대가 7개월이나 되는 기간 동안 아프리카를 빙빙 돌아 대마도 해협까지 오지 않았을 것이고 전황은 어찌 될지 모르는 상황으로 전개될 수도 있었으니까...

 

일본의 근현대사를 들여다보면 참 신기한 점이 없지 않다. 노기와 고다마의 관계도 그렇지만 예를 들어 가쓰 가이슈를 암살하러 갔다가 오히려 그의 의견에 동의하고 그를 따라 일본 해군을 태동시킨 사카모토 료마, 대정봉환을 이루어낸 사카모토 료마와 사이고 다카모리의 관계, 사이고 다카모리와 왕정복고의 대업을 함께 이루어냈음에도 불구하고 이후 정한론(征韓論)을 주장하던 사이고 다카모리와 적대관계에 선 기도 다카요시, 미천한 가문의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그 능력을 높이 평가하여 이토 히로부미를 성장시킨 기도 다카요시와 오쿠보 도시미치 등등...

 

이들을 보면 그 혼탁한 정치적 입장의 차이와 온갖 권모술수 속에서도 사람을 귀하게 여길 줄 알았다는 공통점이 있다. 일본이라는 국가를 위해 지금 무엇이 필요한지를 판단하고 그 판단에 따라서는 정적임에도 불구하고 그를 감싸고 보호할 줄 알았던 정치를 했다는 거다. 물론 이들 이후 일본이 본격적인 군국주의 체계로 돌변하면서, 그리고 태평양 전쟁을 유발하고 아시아 일대를 유린하면서부터 이러한 현상도 사라지게 되지만 어쨌든 일본 근대사에서 이들의 행적은 상당히 독특한 측면에서 시사점을 준다.

 

지난번 행인의 글에서 행인이 지적했던 "특정정파의 몰지각"은 다른 것이 아니다. 말걸기가 지적한 바, "정치영역에서는 '진정한 진보의 가치'를 설정하고 그 기준으로 특정 정치집단을 단죄할 수 없다"는 부분에 대해서 일정정도 동의한다. 내 나름의 진보에 대한 가치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진정한 진보의 가치"라고 설정할만큼 주제넘은 짓은 하지 않는다.

 

문제는 "진정한 진보의 가치"가 무엇이냐의 문제가 아니라 적어도 사람 귀한 줄은 알아야 한다는 점이다. 자기 정파에서 주도적인 위치에 있는 사람이라서 지도부로 내보내는 것이 아니라 쥐뿔 내세울만한 경력이 없더라도 진짜 쓸만한 사람을 내보내는 과단성이 없다는 거다. 이 문제는 NL-국민파만의 문제가 아니라 모든 정파조직에 공히 해당되는 이야기다.

 

그동안 어느 정파조직에도 속하지 않고, 필요에 따라 연대대상을 고려해왔던 행인은 어떻게 보면 박쥐같은 모습일지 모르겠으나 최소한 정파조직의 이론적 도그마에 함몰해서 사안을 판단하거나 이해관계의 방향을 설정하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인의 비판은 상당한 부분 NL-국민파로 향해 있으며, 이러한 비판이 말걸기의 지적처럼 "완벽하게 현재의 정파구도로 빨려들어간다"는 점 역시 수긍한다.

 

김정진이 말하는 바, 소위 '독수리 5형제 의식'에 대해서 역시 일정부분 동의한다. 행인 역시 소위 활동가 내지는 운동가라는 사람들이 "민중을 위한다고 이야기하기 전에 자기 자신부터 위"해볼 것을 권유하기도 했다. 그러나 말걸기가 지적하는 것처럼 "현실진단과 문제의 발견... 이 의식을 공유하느냐 하지 않느냐가 바로 운동권이냐 아니냐를 판가름 ... 이런 공유의식은 '선민의식'"이라고 하는 정도로 그들의 의식구조를 폄하할 문제는 아니라고 판단한다.

 

오히려 그런 의식을 외부와 공유하는데 매우 어색해하는 활동가들의 모습에서 심각한 위기를 느낀다. 의식의 공유라는 것은 내가 가진 생각과 타인이 가진 생각이 일치할 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공유는 일정한 부분의 공유를 이야기하는 것이지 전부의 합치를 말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바로 이 점을 생략한 채 합치만을 요구하다보니 사람 알기를 소모품 정도로 아는 정치활동이 이루어지고 있다.

 

게다가 말걸기는 오픈프라이머리 내지는 인물론에 대한 행인의 관점을 "진보의 이념에 부합하느냐를 미리 판단하는" "오류"라고 지적한다. 재밌는 것은 행인이 오픈프라이머리나 인물론을 진보적이지 않다고 생각한 적이 없다는 거다. 오픈프라이머리나 인물론이나 이것은 진보적이냐 아니냐와는 관계가 없는 이야기다. 비유하자면 주민소환제 내지는 국민소환제라는 것이 과연 진보적이냐 하는 문제와 같다.

 

주민소환제 내지 국민소환제라는 제도를 "진보적"이라고 주장하는 분들이 가지는 오류는 그러한 제도를 진보진영에서만 사용할 수 있을 것이라고 착각하는 것이다. 주민소환제든 국민소환제든 그것이 가능할 수 있는 것은 바로 그러한 제도를 이용할만큼의 힘을 누가 가지고 있느냐의 문제다.

 

오픈프라이머리나 인물론 역시 똑같은 사안이다. 그건 진보진영이던 보수진영이던 어디나 할 수 있는 일이다. 문제는 그러한 방법을 취할 때 그것이 김윤철이 이야기하듯 "직접적인 접촉을 통해 이념과 정책을 뽑아내서 새로운 '눈높이 교과서'를 써야"한다는 취지를 달성할 수 있느냐 없느냐이다.

 

직선제가 민주주의의 실질적 내용까지 담보해주는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있을지 모르겠지만, 직선제만큼 대중과의 "직접적인 접촉"을 가능하게 하는 제도가 결국 어떤 것을 가능하게 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된다. 마찬가지로 당이 정해놓은 진보의 잣대라는 것이 때로는 "개인과 집단들과의 접촉"을 방해할 수도 있지만, 오히려 그것이 없는 정당이 과연 정당인가라는 질문을 유발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훨씬 넓은 밖을 보고 정치를 하라는 거다"라는 말걸기의 말은 유효하다. 행인이 전 글에서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주저리주저리 해놓은 것도 역시 그런 의미에서였다. 행인은 "진보는 이래야 한다"를 주장하고 싶지 않다. 오히려 행인은 당 지도부던 활동가던 정파조직원이던 누구던 간에, 자신이 부정하는 짓거리를 자신이 하는 엉터리없는 모순적 행동을 하지 말기를 바라는 거다. 혁신이고 나발이고 간에 내가 비판하는 집단과 똑같은 행동을 하는 상황에서 진보고 변혁이고 주장해봐야 비웃음 사기 딱 좋다는 것이다. 더 간단하게 이야기하면 상식적인 짓을 하자는 거다.

 

그 상식적인 일 속에는 정파건 뭐건 관계 없이 정말 필요한 사람이라면, 그리고 앞으로 큰 일을 할 사람이라면 당장의 손익계산을 접어두고 보살피고 키워내자는 거다. 일본이 자국 근대사에서 이러한 모습을 보였던 사람들을 전범으로 계속 그러한 기풍을 유지했다면 어쩌면 태평양 전쟁 없이도 아시아 일대를 이미 석권했을 수도 있다. 우리 입장에서는 그러한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는 점을 다행으로 여겨야할 것이겠지만.

 

노기 마레스께가 귀국해서 메이지 천황에게 여순에서 자신의 지휘실수로 수만에 달하는 사상자를 낸 것에 대해 사죄하고, 책임을 지고 할복하겠다고 고한다. 메이지 천황은 이에 대해 불가하다고 이야기하면서 "내가 죽기 전까지는 허락할 수 없다"고 이야기한다. 그로부터 7년 후 메이지천황이 사망하자 노기는 천황의 장례식에 맞춰 자신의 아내와 할복한다.

 

노기 마레스께는 여순전투의 승리에도 불구하고 무능한 지휘관의 표본이 되어버릴 수도 있었다. 그런데 그는 지금 일본 안에서 발틱함대를 괴멸시킨 도고 헤이하찌로와 함께 군신으로 추앙받고 있다. 지 배를 가름으로써 적어도 자신이 저지른 사태에 대한 책임을 진 것이 높이 평가받았을지도 모른다. 우리 운동권 안에서, 할복까지는 아니더라도 진정 인민들 앞에 자신의 과오에 대한 책임을 지는 모습이 얼마나 있을까? 앞으로 얼마나 있을까? 민주노동당 안에서 그런 모습을 보이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행인이 바라는 당 위기의 돌파는 딱 그정도 수준이다. 진보니 뭐니 하는 거창한 것이 아니다. 딱 요정도 수준을 원하는 것, 그것 뿐이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06/08/16 10:19 2006/08/16 1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