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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바도르 아옌데] 2편

홍실이님의 [살바도르 아옌데 1편] 에 관련된 글.

2. 인민전선에서 대통령 선출까지

 

아옌데는 인민전선이 무너지고 1970년 대통령으로 선출되기까지 여러 차례 유력한 정치적 관직을 역임했다. 그는 주로 유권자들 사이의 인기 덕분에 좌파 세력에게 전국적 중요성을 가진 인물이 되었다. 그는 3번에 걸쳐 상원의원에 출마했는데, 세 번 모두 각기 다른 곳에서, 매번 깜짝 승리를 이룸으로써 전국적 평판과 함께 믿을만한 대통령 후보로서의 입지를 구축했다. 그는 당선될 가능성이 희박한 지역에서 두 번이나 출마하는 (1961년 발빠라이소Valparaiso, 1969년 아이센Aysen과 마가야네스Magallanes) 상당한 정치적 용기를 보여주기도 했다. 그가 얻어낸 이 인상적인 승리는 좌파 인물들 중 그 누구도 하지 못할 방식으로 선거전에 진출하는 그의 능력을 보여주었다. 이를 기반으로, 그는 세 차례에 걸쳐 대통령 후보로 추천되었고, 1958년과 1964년에는 다시 활성화된 사회주의/공산주의 동맹의 명목상 대표를 맡게 되었다.


 하지만, 어떤 면에서 본다면, 그는 정치적으로 외로운 인물이었다. 그는 당내 많은 분파들로부터 유일하게 믿을만한 대통령 후보라는 점을 마지못해 인정받았지만, 이들에게 인기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이 시기의 사회당은 다양한 이념과 개인적 문제로 (종종 매우 심각하게) 분열되어 있었다. 당은 종종 온건 노선을, 때로는 매우 급진적인 노선을 선호했다. 당은 좌파 내 두 힘의 연합만이 권력 획득의 기회를 만들 수 있음을 결국 인정했지만 공산당과의 관계는 여전히 쉽지 않았다. 아옌데는 수많은 사회주의 전사들의 시간을 잡아먹던 장시간에 걸친, 결론 나지 않는, 그리고 때로는 무의미한 논쟁들에 거의 시간을 투자하지 않았다. 그는 같은 당의 동료들보다는 다른 당의 성원들과 개인적 친분이 더 두터웠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의 윤택한 삶, 두드러진 프리메이슨 활동, 엘리트 집단 사이를 쉽게 누비고 다니는 것에 의심의 눈초리를 보냈다.


 그러나 아옌데는 결코 사회주의 호사가는 아니었다. 그는 쿠바 혁명의 열렬한 옹호자였고, 피델 카스트로(Fidel Castro)의 좋은 친구가 되었으며, 수많은 국제 혁명운동에 자신의 이름을 빌려주었다. 그는 1969년에 베트남을 방문하여 호치민(Ho Chi Minh)을 만났고, 체 게바라의 게릴라 패잔병들이 쿠바로 피신할 수 있도록 볼리비아에서 칠레까지 상원의장으로서 그들을 호위해주었다. 급진적 사회주의에 대한 그의 믿음의 진정성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으며, 1960년대 칠레에는 빈곤과 박탈이라는 현실적 문제가 여전히 상존하고 있었다. 1970년, 그의 생각을 실천에 옮길 기회가 왔다. 그는 기독민주당, 우파 후보와 경합한 3각 경쟁에서 1/3을 약간 넘는 득표로 대통령에 선출되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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