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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과학의 상품화 1부

하드디스크의 자료들이 '지나치게' 엉켜 있어서, 오늘 맘 먹고 몇 시간 동안 정리... 공부한답시고 이런저런 논문이랑 자료들은 정말 많이도 퍼다놨더군. (심지어 중복된 자료들도 종종 발견......ㅜ.ㅜ) 구슬이 서말이라도 꿰야 보배라는 속담을 다시 떠올렸다. 저거만 다 읽고 되새김질 했어도 말이지........... ㅡ.ㅡ 예전에 번역해둔건데, 콩 반쪽도 나눠먹는다는 심정으로 공유... 다른 몇 챕터도 시간 나면 번역하고 싶다만 과연 그 귀하다는 '시간'이 날 지는 모르겠음. ----------------------------------------------------------------- 변증법적 생물학자 The Dialectical Biologist by Richard Levins and Richard Lewontin 번역 : hongsili (2005.2) 제 8장. 과학의 상품화 근대과학은 자본주의의 산물이다. 새로운 지역으로의 팽창, 생산의 전환, 새로운 상품의 창조, 더 많은 이윤을 낳는 생산 방식의 창출, 그리고 이 모든 것에서 다른 이들보다 앞서 나가려는 자본가의 필요 - 이들이 바로 근대 과학의 경제적 토대가 되었다. 한편 근대과학의 이념적 토대는 이러한 자본가의 필요 뿐 아니라 부르주아 혁명(개인주의, 사상의 자유시장에 대한 믿음, 국제주의, 민족주의, 그리고 권위를 지식의 근거로 삼지 않으려는 성향)의 정치 철학과도 부합한다. 자본주의가 발전하면서 과학의 참여 방식 또한 발전해왔다. 과학은 귀족(궁정악사와 광대까지 포함하여)을 위한 사치재로부터, 봉건적 신학이론에 대한 반대 투쟁의 중요한 이념적 무기이자 실질적인 경제 문제들을 해결하는 자원의 기능을 해왔다. 18세기 말, 산업과 농업 분야에서는 오랜 침체 끝에 발명과 창조의 뚜렷한 성장세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대영제국의 경우, 1750~1780년대에 특허 등록의 숫자가 92건에서 477건으로 늘어났다. 이 즈음 농업학회가 창립되었고, 가축 교배와 관리는 발전을 거듭하여 헤레포드 (Hereford) 같은 품종을 만들어냈다. 18세기를 거치면서 런던에서 거래되는 소의 무게는 두 배로 늘어났으며 양의 무게는 세 배 증가했다. 또한 19세기 초에는 최초의 농업 학술지가 발간되었다.


부르주아 혁명의 지도자들은 과학이 가진 군사적, 상업적 잠재력을 일찍이 간파했다. 가장 오래된 학회들로는 1662년에 설립된 왕립학회, 1780년 뉴잉글랜드의 혁명 지도자들이 설립한 미국 학술원, 프랭클린의 미국 철학회(1768), 그리니치의 해군천문대(1675) 등이 있다. 프랑스 정부는 1795년에 에꼴 폴리테크니끄(Ecole Polytechnique)를 설립했다. 나폴레옹은 전쟁 때문에 인도로부터의 인디고 수입이 중단되자 과학자들로 하여금 이를 대체하는 합성염료를 개발하도록 지시했으며 심지어 군수품 개발에 나서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유럽 국가들이 정복한 열대 지역에서는 생물학적 자원에 대한 체계적인 조사와 목록 작성이 이루어졌으며, 이는 린네(Carolus Linnaeus)의 지도력 하에 계통분류 생물학의 번성을 가져왔다. 미국에서는 농업과 광업의 발전을 위해 과학적 지식이 중요하다는 인식이 널리 퍼졌으며, 1862년까지 모렐 법안(Morrell Act)을 통해 농업과 공학 기술을 위한 공유지 교부 대학 설립이 이루어졌다. 산업혁명의 첫 세기 내내, 과학은 도로나 등대 같은 자본주의적 팽창의 외부효과(externality)로서, 그리고 특정한 문제를 해결하는 수단 (이를테면 파스퇴르가 당시 프랑스 와인 산업을 위협하던 파이토포라 Phytophora를 동정한 것처럼)으로서 그 역할을 넓혀왔다. 그러나 이 때까지 과학은 아직 상품이 아니었다. 그것의 응용은 불확실했으며 잠재력은 아직 충분히 드러나지 않았고, 그 산물은 여전히 경험적인 혁신에 대한 사후 설명으로 나타나곤 했다. 상품의 생산, 판매를 위한 재화와 서비스의 생산에 인간 노동을 투입하는 것은 분명히 자본주의보다 앞서 나타났다. 그러나 자본주의 하에서 경제 활동의 상품 형태는 인간 생활의 모든 측면으로 점점 더 깊숙이 침투했다. 1607년, 세익스피어는 “아테네의 타이몬 (Timon of Athens)”에서 이러한 상품화를 개탄했다. "황금? 노랗고 반짝이는 소중한 황금? ... 이것들은 이렇게 검은 것을 하얗게, 역겨운 것을 정당하게, 그릇된 것을 올바르게, 평범한 것을 고귀하게, 늙은 것을 젊게, 비겁한 것을 용감하게 바꿀 것입니다. 아, 신이시여! 이것이 왜? 신이여 이것이 무엇이란 말입니까? 왜 이것이 당신의 사제들과 종복들을 당신 편으로부터 끌어내고, 튼튼한 남자들의 머리맡에서 베개를 빼앗아간단 말입니까 이 노란 색의 노예는 신앙을 졸라매고 부서뜨리며, 저주받은 이들을 찬양하고, 백발의 나환자들을 경배하게 만들며, 도적들에게 직함과 존경을 부여하고 그들을 인정받게 할 것입니다. 원로원들과 함께 ..." 2세기 후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공산당선언(1848)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 부르주아는 그들이 지배력을 획득한 모든 곳에서 온갖 종류의 봉건적, 가부장적, 목가적인 관계들을 끝장냈다. 그들은 사람들을 ‘타고난 상전들’에 묶어 두던 갖가지 봉건적 끈들을 무자비하게 갈가리 찢어버렸으며, 적나라한 자기이익과 냉랭한 ‘현금 지불’ 이외에 사람들 사이의 어떠한 관계도 남겨두지 않았다. 그들은 종교적 열정, 불타는 의협심, 속물적인 감상주의의 가장 경건한 황홀경마저 이해타산의 차가운 물 속에 익사시켜버렸다. 그들은 인간적인 가치를 교환가치로 변화시켰고, 헤아릴 수 없는 불가침의 공인된 자유들을 대신하여, 저 하나의, 비양심적인 자유 - 거래의 자유 -를 확립했다.... 또한 부르주아들은 지금까지 명예롭고 경외에 가득 찬 존경을 받았던 모든 직업들의 빛나는 후광을 여지없이 발가벗겨 버렸다. 이들은 의사, 법률가, 성직자, 시인, 학자를 임금 노동자로 바꾼 것이다. " 이전에는 인간 상호작용의 직접적 결과였던 활동들, 이를테면 오락, 정서적 지지, 학습, 여가, 아이 돌보기, 심지어 혈액과 장기 공여, 혹은 자궁의 쓰임새 같은 것들마저 시장으로 들어왔으며 인간관계는 비인격적인 거래 뒤에 숨어버렸다. 인간사의 새로운 측면들이 상품화할 때마다 일부에서 저항이 표출되기도 했는데, 이는 이전 가치의 절하에 맞서는 분노의 형태로 나타났다. 시장에 반응하여 빵 값이 자유화되었을 때, 영국 노동계층에서는 빵을 얻기 위한 폭동이 일어났다. 통신 수단이 상업화되고 정보 독점이 가시화되자 1980년대 유네스코의 제 3세계 대표단들이 주도하여 이에 대한 우려를 표명하고 새로운 정보 질서를 요구하기도 했다. 또한 보건의료의 상품화는 사람들로 하여금 국가보건 서비스와 건강보험 문제를 제기하도록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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