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이면과 맥락

살다보면, '실상'을 잘 알지 못한 채 '에이~ 그까이꺼' 하면서 폄훼하는 경우들이 의외로 많다.

 

마르크스의 적자임을 강조하며 그 분의 뜻을 헤아리는데 공을 들이는 좌파 훈고학계에서 어쩌면 가장 입에 담지 못할 단어는 '사민주의'일지도 모른다.

심지어 훈고학적 지식이라고는 눈꼽만큼도 없는 나같은 변방의 서생조차  '그까이꺼 사민주의'는 (반동보다 더 질이 나쁜) 변절의 대명사처럼 여겨졌던 시절이 있었으니.... 

 

박근갑의 저서 [복지국가 만들기 - 독일 사민주의의 기원] (문학과 지성사 2009) 을 읽으면서, 과연 이 당시 독일 노동자들과 사회민주당의 전략/전술이 정말 최선의, 바람직한 것이었는가 하는 논의를 떠나, 어떠한 고민에서 이런 행보를 걷게 되었는지 (물론 완전 자발적인 선택이라고 볼 수도 없지만)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 돌아보면, 그동안 나는 역사적 맥락과 내적 동력에 대한 이해는 전혀 없이, '사민주의란 근본적 변혁을 가로막는 개량주의', '조합주의, 도대체 왜 저런 비효율적 제도를?' 이 정도의 단순화 논리만을 가지고 있었더랬다. 

 

 

 

이 책은, 1848-1914년에 이르는 격동의 시기, 독일의 복지국가 프로젝트가 태동하고 자리를 잡던 그 시기에 과연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었는지, '복지정치'를 둘러싸고 사민주의 세력이 어떻게 성장하고 변화해갔는지를 아주 생생하게 그려내고 있다. 

물론, 이 책 한권을 통해 그 복잡했던 시기를 다 이해하기란 어림도 없는 일이다.  더구나 사람 이름 외우는 데 천부적 무능력을 타고난 나에게, 역사책은 역시.... ㅡ.ㅡ 비스마르크, 라살, 로만, 베른슈타인, 그리고 엥겔스 (!) 말고는 다 그 사람이 그 사람... 헷갈려 죽는 줄 알았음.... ㅎㅎ

 

어쨌든 이 책은, 오늘의 한국사회에서 사회보장과 (아직 스스로 정의조차 하지 못하는) '공공적' 서비스의 확충을 이야기하는 나같은 사람들에게 많은 고민거리를 던져주었다. 백년 전 독일 사민주의자의 문제의식과 딜레마가 오늘날 우리와 그리 다르지 않다는 것이 그닥 좋아보이지는 않는다 ㅡ.ㅡ

 

문제의식과 더 공부해봐야 할 것들...

 

* '사회보장'의 근본목적은 무엇인가?

보장 혹은 서비스의 내용을 보자면 사실 비스마르크가 생각했던 '독일 제국의 복지'와 좌파가 꿈꾸는 복지에 별 차이가 없다. 하지만, 좌파 - 당시 사민주의 초기 운동은 비스마르크의 안과 이어진 수정안들에도 격렬히 반대했었다. 이는 '의미론' 투쟁이라 할 수 있었으며,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 고민의 지점이다.

이를테면, 선거전날이 되면 보수우익 정당이나 비교적 급진적인 진보정당이나 사회복지 관련 정책에 그닥 차이가 없어진다. 보수적 온정주의 - 포퓰리즘 - 경제개발의 토대 (인적 투자) - 사회적 비용의 최소화 - 사회권 보장 등 목적과 철학적 배경에는 폭넓은 스펙트럼이 존재하지만, 과연 '그들의 것'과 '우리의 것'이 가진 본질적 차이를 선명하게 드러내기란 쉽지 않다.

  

* 민주적 통제와 참여의 문제!

독일은 왜 북구유럽 같이 조세에 기반한 국가건강보장제도를 취하지 않고, 사회보험 방식의, 그것도 비효율적으로 찢어져있는 '조합주의적' 방식을 택한 것일까? 기존 조합들의 소위 '조합주의적' 활동 지향 때문?

하지만, 보험조합이 정치적으로 엄혹했던 시기에 어떻게 노동자들을 조직하고 '훈련'하는 정치학교가 될 수 있었는지, 그리고 자본과 국가로부터 독립된 노동자 자치의 경험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깊게 고민해본 적이 없었던 것 같다. 

몇 년 전, 공공병원 확충에 대한 고민 속에 미국과 캐나다의 일부 모범적인 공공병원 사례들을 돌아보면서, 처음으로 진지하게 사회민주적 통제와 참여의 문제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백년 전 독일 노동자들의 고민에 비추어본다면, 오늘날 한국에서 각종 사회보장 제도/프로그램의 확충을 이야기하는 이들의 고민은 '어떻게, 누가'라는 부분에 상대적으로 소흘한게 아닐까? 한편으로 국가의 계급적 속성을 논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국가만이 이를 보장하고 운영할 수있는 유일하고 효율적인 주체인 것처럼 여기는 것이 아닌가 싶다. 

 한편 한국의 건강보험 통합논쟁에서도 형평성과 효율에 대한 담론은 활발했지만, 민주주의와 참여에 대한 논의는 거의 찾아보기 힘들었던 것 같다. (가물가물 기억이... ㅡ.ㅡ 혹시 나만 모르고 있었남???)  이름은 비슷한 통합/조합 논쟁이지만 당시 독일에서의 논쟁과는 초점 자체가 다른....

 한국사회에서, 각종 국가제도, 혹은 위원회에 공익위원이나 노동계 대표 몇 명 포함시키느냐를 넘어서는, 참여민주주의에 대한 뭔가 새로운 논의들이 시작되어야 할 듯 싶다.  절차적 민주주의와 실질적 민주주의가 결코 순차적이거나 분리된 것이 아니라는 최장집 교수의 이야기는 여기에 닿아있다. (공공복지 논의와는 또 별도로, 선출되지 않은 권력에 대한 통제 문제까지!)

 

* 상호부조, 연대의 원리와 책임성

노동자 계급 내부의 연대, 노동자 개인들 사이의 상호부조라는 원칙과 참여민주주의/자치행정의 운영방식이 긍정적이라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으나, 이를 위해 국가와 자본의 기여를 하나도 인정하지 않겠다는 발상은 어떻게 판단해야 할지 곤혹스럽다. 사실, 문제의 발생 책임이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특히 건강보험이나 산재보험은, 기업이 부담하고 책임을 지는 것이 적절할 것 같다. 하지만 노동계급과 사민주의자들이 우려했던 것은, 그로부터 비롯되는 독립성의 훼손.... 말하자면, 물질적인 실리보다는 '원칙' 이 더욱 중요했던 것이다.

 현실에서, 성수동 노동자건강센터의 건립과 관련해서도 비슷한 논쟁이 지속되고 있다. 물론 현재의 정치적 상황에서라면 어차피 공적 기금을 제도적으로 지원받는 것이 불가능하지만, 만일 상황이 허락한다면 그러한 지원을 받는 것이 바람직할 것인가? 고민하는 대상의 규모는 다르지만, 그 본질은 같다고 본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과연 그러한 조직이 목표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분명하게 정의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이러한 맥락에서, 성수동 센터는 제도로부터 독립된 자치기구를 지향하는 것이 적절하다는 게 지난 3년간 고민의 나름 결론.... 과연 적절한 것이여???

 

* 프레임의 인정? 전술과 전략?

독일의 노동자들과 사민주의자들이 복지국가 전망과 의회주의 전술을 채택한 것은 결국 체제 혹은 지배집단이 만들어놓은 프레임 안으로 들어간 것이다. 현존 질서를 인정하지 않고 급진적 변혁 전략을 추구할 것인가, 아니면 프레임 안에서 최대한을 얻기 위해 싸울 것인가?

 물론 역사적 경험을 보자면야 전자를 위해 죽기살기 싸워야 후자라도 얻게 되는 경우가 일반적인 것 같기는 하다. 하지만 이건 사후 평론이고, 막상 해당 시기에 어디까지를 전략적, 전술적 목표로 두고 싸워야 할지 판단하기란 참 쉽지 않다. 무조건 최대치를 이야기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알아서 깎아주며 싸우다간 그나마도 못 얻기 십상이고.....  물론 팔짱끼고 서서 관전평만 한다면야 가급적 급진적으로, 근본적인 문제제기를 하는 것이 뽀대가 난다. 그런데 현실은 그렇지 못하고, 무언가 구체적인 답을, 더구나 작은 가시적인 성과들이 모여 큰 흐름을 이루어낼 수 있다고 생각되는 경우에는 판단을 하기가 참참참 어렵다... ㅜ.ㅜ 백년 전 독일 사민주의자들이 갈팡질팡 했던 것도 참 공감이 되더라니... ㅡ.ㅡ

 

* 사족이지만, 그 시기 독일에서 의회주의와 제도화 전술을 두고 벌어졌던 좌파 진영의 논쟁이 80/90년대 한국 사회에서 재현되었던 것은, 생각해보면 참 뜬금없다. 지금은 제목조차 가물가물한 마르크스의 고타강령 비판을 들먹이며, 합법정당과 개량주의 운동을 비판했던 이들은 지금 어디서 무엇들을 하고 계실까???

  

* 역시 사족인데, 이 책이 번역서가 아니고 국내 연구자의 저서라는 사실이 새삼 놀랍고도 고마운 마음... 나도 이런저런 번역 작업을 했고, 또 지금도 하고 있는 것들이 몇 가지 있지만, 지식 수입과 중개 노릇은 이제 슬슬 접어야겠다는 반성을 부쩍 하고 있다. 학문적 지평의 확대에서 번역 작업의 소중함을 폄훼하려는 것은 결코 아니다. 연구자로서, 한국사회의 맥락에서 본인의 학문적 성과물을 성찰하고 정리해내지 못하는 미숙함에 대한 자기반성....

 

 

독일 사민주의 이야기하다, 엉뚱한 길로....

저자가 특강 같은 거 한 번 해주심 참 좋을 거 같은디.. 질문할 것도 많고....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