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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항쟁들이 진정한 저항인가?

다함께 51 호

이러한 항쟁들이 진정한 저항인가? - 크리스하먼

http://www.alltogether.or.kr/

 

이러한 항쟁들이 진정한 저항인가?

 

[크리스 하먼이 미국이 지원하는 우크라이나, 레바논 등의 ‘민주항쟁’에 대해 사회주의자들은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지를 살펴본다.]






독재정권과 준독재정권 들은 세계 도처에 존재한다. 이 모든 곳에는 분노하고 저항하고자 하는 여러 부문의 대중이 있다.

내가 최근 방문했던 이집트의 예를 들면, 호스니 무바라크 대통령이 1981년부터 독재자로 군림하고 있다. 무바라크 정권은 지난 24년간 비상사태를 선포했고, 어떤 사회 단체도 국가로부터 독립적으로 조직을 건설할 수 없다.

이것은 노동자와 농민의 투쟁을 고무하고 지원하길 원하는 사회주의자들에게 나쁜 영향을 미쳤다. 또, 자유롭게 자신을 표현하고자 하는 자유주의 지식인들에게 나쁜 영향을 미쳤다.

이는 무슬림형제당같이 온건한 이슬람 운동과 좌파 무슬림에도 해를 끼쳤다.

또, 무바라크를 좋아하지 않지만, 서구식 자본주의적 민주주의로의 이행을 바라는 사람들에게도 나쁜 영향을 미쳤다. 이런 집단들은 모두 억압받고 있으며 정권과 충돌할 수도 있다.

이런 상황에서 운동이 분출하면 적어도 처음에는 독재정권에 대한 그들의 일치된 반대 때문에 각 집단들 간의 차이점은 덮어진다.

그러나 이는 불안정하고 모순적인 상황을 낳는다. 이들 운동 가운데 일부는 노동자나 하층 중간 계급이나 농민 등 인구 대다수의 요구를 동력으로 삼고 있다.

이 때 주요 쟁점은 보통 실업·인플레이션·빈곤 등이다. 이는 1998년 인도네시아 봉기와 최근 에콰도르·아르헨티나·볼리비아 봉기의 주요한 배경이었다.

좀더 애매한 상황들이 존재한다. 많은 독재 정권들이 애초에 미국의 지지를 받아 수립됐지만, 미국이 나중에 그 독재 정부에 반대하는 저항을 조종하고 이용하려 할 수 있다.

이것은 미국이 한때 지지했지만 그 뒤 사이가 틀어진 정권에 반대하는 저항일 경우에 특히 두드러진다. 시리아의 예를 들어보자. 시리아 정부는 1991년 걸프전 때 미국의 동맹국이었다.

시리아는 약 30년 전에 우익 팔랑헤 당 ― 미국·프랑스·이스라엘이 후원한 ― 에 맞서 투쟁하는 레바논 좌파와 팔레스타인인들의 저항을 진압하기 위해 레바논에 군대를 보냈다.

현재, 이라크의 석유 통제권을 직접 장악하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부시 주변의 네오콘들은 중동 정부들을 손 봐 더 확실히 미국 편으로 만들려고 한다.

네오콘들은 독재 혹은 준독재 정권을 미국식 자본주의적 민주주의로 바꾸려고 한다. 그들은 자본주의와 제국주의를 지지하는 본질적으로 동일한 정책을 추구하는 정당들이 참가하는 선거를 통해 구성된 정부가 레바논과 시리아를 통치하기를 바란다.


미국은 특정 반정부 운동들을 친미적 방향으로 유도할 수 있는 방법을 개발하기 위해 노력해 왔다. 미국은 운동에 막대한 자금을 제공하고 운동 지도자를 선택하려 했다.

몇몇 반정부 지도자들은 더 나은 사회를 위해 싸우길 진정으로 원한다. 그러나 작년 말 우크라이나 같은 경우에, 반정부 지도자들은 자기 지위를 끌어올릴 새로운 방법을 찾고 있던 부패한 옛 지배 집단의 구성원들이었다.

물론 우크라이나에서 거리로 나온 사람들 중 다수는 사유화로 한몫 잡은 마피아식 집단들이 지배하는 억압적이고 비민주적인 사회를 끔찍이도 증오했다.

그러나 그들이 지지했던 운동은 하나의 마피아식 집단을 또 다른 마피아식 집단으로 교체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었다. 이 과정에서 그들은 중부 유럽의 지배권을 놓고 미국과 러시아가 벌이는 치졸한 공작에도 이용당했다.

이러한 정황들을 잘 판단하려면 누가 관련됐고 그들이 무엇을 위해 싸우는지를 매우 구체적으로 관찰해야 한다. 다른 상황에서는 세력 균형도 우크라이나와는 많이 다를 것이다.

1980 ∼ 81년에 폴란드에서 일어났던 연대노조 운동은 지식인들이 투옥될 위험을 무릅쓰고 조직했던, 노동자들의 요구를 전면에 내세운 진정한 운동이었다.

이는 민주적인 자유, 진정한 노동조합을 조직할 권리, 더 나은 임금과 노동조건 등을 요구하는 노동자 대중의 자생적인 운동을 촉발했다.

이 때 미국은 연대노조 운동을 어떤 식으로도 지지하지 않았다. 운동이 패배한 뒤인 1981년 말에 가서야 미국은 운동의 지도자들을 회유했고, 그들에게 미국식 세계관을 심기 위해 돈을 쏟아 붓기 시작했다.

1998년 인도네시아의 운동은 미국의 동남아시아 주요 동맹 정부 중 하나에 맞서 싸웠다. 그러나 미국은 수하르토 정부를 민주적 외양을 취하지만 본질적으로는 수하르토와 같은 목표를 추구하는 정부로 대체하려고 무척 애썼다.

1986년 필리핀의 독재자 마르코스를 전복하고 “민중권력”이라는 말을 탄생시킨 운동은 순수한 대중운동으로 시작했다. 그러나 그 뒤로 필리핀의 지배계급은 새 정부가 근본적으로 마르코스와 같은 노선을 따르도록 하기 위해 미국과 함께 노력했다.

아래로부터의 압력이 한껏 고조될 때, 지배계급의 일부 분파들(과 주로 미국)이 그런 압력이 걷잡을 수 없이 폭발하기 전에 먼저 변화를 추진하려고 했던 경우는 많다.


사회적 위기가 심화하는 동안에도 미국은 기존 정부를 계속 지지할 수 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반정부 운동을 재정적으로 지원하고, 미국 재단과 비정부기구를 이용해 반정부 운동 지도부에 침투하기 시작할 수도 있다.

1970년대 후반 일련의 학생운동과 노동자 투쟁은 브라질의 군사독재를 약화시키기 시작했다. 장군들은 불만을 달래기 위해 선거 허용을 약속함으로써 이른바 “개방화” 과정이 시작됐다. 

상층계급은 자신들만 선거에 출마하고 당선될 수 있도록 조처를 취했다.


1987년 남한에서는 거대한 시위의 물결이 있었고, 1988년에는 파업들이 벌어졌다. 상황을 통제하기 위해 4년 뒤 선거 시행을 약속하라는 압력이 군부독재 정권에게 가해졌다. “안전한” 야당을 만들어 내는 주의깊은 과정이 있었고, 그 결과 폭발은 없었다.

지금 미국이 이집트 정부에 요구하고 있는 것도 바로 이런 조처다. 무바라크는 선거를 치르겠다고 약속했지만, 미국은 무바라크를 패배시킬 수 있는 현실적인 가능성은 오직 가장 명망 있는 자본가 집단에게만 있다고 판단하고 있다.

좀더 급진적인 반대 세력에 대한 억압은 계속될 것이다. 그들은 이번 선거를 묵인해 주고 선거 결과를 받아들인다면 몇 년 후에 그들도 입후보할 수 있을 것이라는 말을 듣게 될 것이다.


이런 시나리오에 맞서 사회주의자들은 두 가지 일을 해야 한다. 우리는 분명 민주적 권리를 지지해야 한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우리는 과거 독재정권을 수립했던 사람들의 이익을 추구하는 데 이용당하지 않겠노라고 말해야 한다.

그러는 한편, 사회주의자들은 옛 정권의 위기를 이용해 독립적인 요구를 내놓고 노동계급의 힘을 강화하며 지배 계급내 어떤 인물이 당선되든 간에 상관 없이 그에 맞설 수 있는 역량을 길러야 한다.

레바논 사회주의자들은 시리아의 레바논 점령을 지지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사회주의자들은 또한 이스라엘의 시리아·서안지구 점령과 미국의 이라크 점령에는 찬성하면서 시리아 군의 레바논 주둔을 비난하는 자들의 위선을 지적해야 한다.

사회주의자들은 미국의 중심 계획이 이스라엘의 레바논 점령에 저항하는 세력을 공격하는 것이라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시위가 있을 때는 바로 이러한 쟁점들이 제기돼야 한다. 그러나 미국의 계획을 추종하는 동원에 참가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이집트 사회주의자들은 이 기회를 이용해 무바라크 대통령에게 당장 물러나라고 요구할 기회가 눈앞에 다가왔다. 무바라크와 관련된 신자유주의 정책, 비상계엄, 노동조합 통제와 같은 것들도 함께 없어져야 한다.

만약 사회주의자들이 그 같은 요구들을 주장한다면 그들은 미국이 의도한 것과는 다른 상황을 만드는 데 일조할 수 있다. 아무리 강대국일지라도 다른 나라에 개입해서 “정권 교체”를 선동하는 데에는 언제나 위험이 뒤따른다.

독일 정부는 제1차세계대전 중이었던 1917년에, 볼셰비키 지도자 레닌과 멘셰비키 지도자 마르토프를 태운 기차를 러시아로 보내면 상황을 자기들에게 유리하게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들은 분명 러시아를 격변에 빠뜨렸다. 그러나 1년 뒤에는 독일에서도 혁명이 일어났다!

지금 당장은 레바논의 수도 베이루트의 거리에서 우파 기독교 민병대가 주도하는 시위가 일어나고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것은 미국의 레바논 폭격을 기억하고 있고 레바논 인구의 40퍼센트를 차지하고 있는 시아파 무슬림을 자극할 것이고, 그들이 거리로 나설 수도 있다. 그들의 요구는 지금 들리는 요구와는 완전히 다를 것이다.

미국의 네오콘들은 어느 사회에나 자신의 비전에 협력할 자본가 계급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들이 바로 네오콘들이 의존하고 협조하며 권좌에 앉히길 바라는 자들이다. 그러나 그들은 피폐해진 중간 계급과 끔찍한 생활수준을 견디도록 강요당해 온 대다수 노동자와 농민 들이 있다는 점을 간과한다. 그들은 미국이 원하지 않는 방식으로 거리로 나설 수 있다.

1백 년 전에 레온 트로츠키는 1905년 러시아 혁명에서 자본가들이 민주적 개혁을 요구하길 회피했지만, 노동자들이 이런 요구를 채택해 사회주의적 요구와 결합시켰다고 지적했다. 트로츠키가 연속혁명이라고 불렀던 그 과정은 중동에서 미국의 지위를 위협하는 악몽이 될 수 있다.


번역 조민정






[크리스 하먼은 영국 사회주의노동자당(SWP) 중앙위원이자 계간지 ≪인터내셔날 쇼셜리즘≫의 편집자다. 국내에서는 ≪민중의 세계사≫(책갈피), ≪세계를 뒤흔든 1968≫(책갈피) ≪신자유주의 경제학 비판≫(책갈피), ≪저항의 세계화≫(북막스) 등 여러 권이 번역돼 있다.
그는 8월에 ‘다함께’가 주최하는 ‘전쟁과 변혁의 시대’에서 연설하기 위해 한국에 올 예정이다.]



크리스 하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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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령의 현실은 전혀 바뀌지 않았다 / 포럼안내

총선 뒤 새로 구성될 이라크 정부의 윤곽이 드러나고 있다. 다만 이 정부를 ‘새 정부’라고 부를 수 있을지 ― 새롭지도 않고 정부라 부르기도 뭐하다 ― 가 의문이다.

그 정부의 요직 ― 대통령, 부통령, 총리 등 ― 은 미국이 전에 세웠던 ‘꼭두각시’ 정부들에서 한자리씩 했거나 지금 하고 있는 자들이 차지하게 될 것이다.

최근 통일이라크연맹(UIA) ― 시아파 최고성직자 알 시스타니가 이끄는 연합으로 이번 총선에서 과반수 의석을 차지했다 ― 이 총리 후보로 지명한 알 자파리는 미국이 점령 이후 조직한 과도통치위원회의 초대 의장을 지내다가, ‘주권이양’ 뒤에는 임시정부의 부통령을 맡았던 인물이다.

‘이라크리스트(IL)’의 총리 후보인 알라위 역시 임시정부에서 대통령을 지내고 있다. 물론 둘 다 미국이 임명했다.

나머지 인물들도 부시가 자랑하는 “자유”나 “민주주의” 따위와는 한참 거리가 멀다.

쿠르드애국동맹(PUK)의 잘랄 탈라바니는 대통령 자리를 노리고 있다. 그는 이라크 북부에서 저항 세력 소탕에 앞장서고 있는 친미 부역 세력이자 부패한 폭군이다.

이라크 침공 당시 미국의 앞잡이 노릇을 한 찰라비는 처음에 총리 자리를 고집하다가 핵심 요직인 경제·치안 장관 자리를 제안받고 한발 물러섰다.

이들 가운데 어느 누구도 미군 철수를 요구하지 않고 있다.
총선에서 미군 철수 일정을 제시하라는 요구를 내걸고 다수당이 된 UIA의 지도자들은 선거 뒤 미군과 타협으로 나아가고 있다.
유력한 총리 후보인 자파리는 AP 통신과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미군이 있어도 테러가 일어나는데, 미군이 없으면 어떻게 되겠나? 먼저 테러리스트들을 뿌리뽑아야 한다.”

이것은 ‘점령 종식의 출발’이라고 지도자들이 호소해서 투표에 참가한 시아파 대중의 열망을 완전히 거스르는 것이다.


진정한 현실은 선거 뒤에도 점령과 학살이 계속되고 있다는 것이다.

2월 말에 미군과 이라크군은 서부 안바르주(州) ― 이번 총선 참가율이 2퍼센트에 불과했다 ― 에 대한 대대적인 공격을 시작했다. 히트, 바그다디, 하디타야, 라마디 등의 도시들이 야간통행금지조치 하에서 미군의 전면적인 공격을 받고 있다.

라마디는 저항 세력이 사실상 통제하던 곳이다. 이번 작전을 위해 전투기와 AC-130 폭격기가 동원됐다.

<워싱턴타임스>는 “새 이라크 정부를 워싱턴의 ‘꼭두각시’로 묘사하려는 노력”은 “넌센스”라고 말했다. 지금 이라크에서 돌아가는 상황은 “이라크 선거는 민주주의의 진전”이라는 주장을 믿는 것이야말로 “넌센스”임을 보여 준다.

( '다함께' 50 호에서 발췌 )



 
마포사회포럼은 반전반자본주의 노동자운동 '다함께'가 주최합니다.
포럼에서는 사회 연대와 공익을 위한 캠페인과 주장을 소개하고 공유할 수 있습니다.
포럼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어 서로의 경험과 주장을 함께 나누는 토론 광장입니다.
 
제25회 마포사회포럼
 
총선 이후 이라크, 민주주의의 봄날은 왔는가
일시 : 2005년 3월 16일 수요일 오후 7시30분
장소 : 
책사랑방 ( 지하철 신촌역 6번 출구앞 40m 직진 티파니호프 건물 5층)
문의 : 016-378-1872
블로그 :
http://blog.empas.com/wp2020 
* 책사랑방은 1인당 이용료가 3천원입니다. 참가비를 준비해 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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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 &quot;전쟁에서 사람은 '표적'일 뿐이다&quot;

출처블로그 : 모여라! 꿈동산♣♧♣ - 김문성의 블로그

 

 

"전쟁에서 사람은 '표적'일 뿐이다"

 

울부짖는 이라크 아이의 사진이 다시금 일깨운다

 

유만찬

▲ 두 손이 부모의 피로 흥건하게 젖은, 이라크 여자 아이가 공포에질려 울부짖고 있다. 현장에 있던 'Getty News'의 크리스 온드로스(Chris Hondros)라는 사진작가가 포착한 장면이다. 출처 news.bbc.co.uk  

얼핏 봤을 땐 작품사진인 듯했다.

명암이 뚜렷했고, 사진에 나온 아이의 표정이 생생했다. 조금 더 눈을 가까이 대니 작품이 아니라 현실이었다.

밝은 쪽: 땅바닥에 주저앉은 여자 아이는 입을, 얼굴 반만큼의 크기로 벌린 채 울고 있다. 양 손엔 피가 흥건하게 묻어 있고, 앉은 자리 앞바닥이 핏자국으로 선연하다.
어두운 쪽: 언뜻 드러나는 바지는 군인임을 짐작하게 하는 ‘국방’색이다. 그는 오른 손으로 서치 라이트를 켜고 있다. 서치 라이트는 울부짖는 아이를 향하고 있다.

5~6살 쯤 돼 보이는 이라크 여자 아이였다.

아일랜드 신문 ‘아이리쉬 타임스(The Irish Times)' 인터넷 홈페이지 20일자는 사진과 관련한 기사를 짤막하게 전했다.

“이라크의 한 부부가 승용차로 여행을 하던 중 다섯 명의 자녀들이 보는 앞에서 미군이 쏜 총에 맞아 숨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어린이들은 목숨을 건졌으나, 온 몸이 피로 젖은 채 공포에 질려 비명을 지르면서, 자동차 밖으로 나왔다. 미군들은 어린이들을 병원으로 데려갔다. 미군 당국은 워싱턴 포트 루이스의 제25사단 제5스트라이커(Stryker) 여단 1대대 소속 군인들이 새벽 순찰을 하고 있을 때, 정지하지 않고 군인들 방향으로 다가오는 자동차를 향해 발포했다고 발표했다.
미군 홍보처는 이 사건에 대해 애도의 뜻을 표한다고 말하면서도, 군인은 (이라크에서)자동차 폭탄 공격이 성행하는 상황에서, 예상 가능한 위험에 적절한 대응을 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크리스 온드로스(Chris Hondros)라는 사진작가가 이 사건을 목격, 당시의 상황을 극적으로 담았다. 이 사진들은 미군이 자동차로 길을 가던 한 부부를 총을 쏘아 죽게 하는 장면을 생생히 포착했다.
자동차 뒷좌석에 타고 있던 어린이들은 살아남았고, 한 어린이는 총탄이 스치는 경상을 입었다. 9일 이라크 바그다드에서는 자동차에 의한 네 건의 자살폭탄 공격이 일어나, 28명의 사람이 사망한 바 있다...“

사건의 전말은 더 이상 알려지지 않을 것이다.

숨진 부부, 그리고 부모의 죽음을 눈앞에서 바라본 다섯 아이들은 끝내 익명으로 남을 것이다. 으레 전쟁에서는 억울한 죽음도, 애타는 사연도 싸늘한 통계 속에 묻혀버리고, 충격적인 한 컷의 사진도 일상적인 풍경으로 스쳐가니까.

부부에게 총질을 한 미군들도 울부짖는 아이들을 보면서 ‘조금은’ 미안한 감이 들었던 가보다. 사진을 보면, 아이들을 병원에 옮기느라 부산했던 분위기가 느껴진다. 미군 당국에서도 이례적으로 애도를 표한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미군 당국이 덧붙인 한 마디 말이 개운치 않은 뒷맛을 남긴다. “예상 가능한 위험에 적절한 대응을 했다.”

언젠가 미국의 한 언론에 이런 기사가 게재된 적이 있었다. ‘총탄’의 전쟁 이전에, ‘언어’의 전쟁이 도사려있다는 내용이었다.
군 당국은 이라크에 파병되는 병사에게 “이라크 인은 사람(person)이 아니라, 표적(object)이다. 평상시에도 이라크 인을 지칭할 때 사람(person)이 아니라, 표적(object)란 말을 사용해야 한다. ‘표적’을 죽였을 땐 가책이 남지 않는다”며 세뇌시켰다고 한다.

미군 당국의 발표는, 이번 사건이 최근 이라크에서 벌어진 차량 자폭 공격이 잇따른 상황 속에서, 민감해진 병사들이 우발적으로 저지른 ‘실수’쯤으로 치부하고 있다. 그러나 자폭 공격의 위험성을 이유로, 아무 자동차에나 총질을 해대는 것이 용납되지는 않을 것이다.

새벽녘에 일가족이 탄 자동차를 향해 방아쇠를 당긴 군인들의 가슴 속에는 무엇이 자리 잡고 있었을까. 차에 타고 있던 사람들은 죽어도 그만, 살아도 그만인 ‘표적(object)’이 아니었을까. 그리고 그들의 눈에, 죽은 ‘표적’이 남긴 아이들은 무엇이었을까. ‘표적’이었을까, ‘사람’이었을까.

사진 속의 이라크 아이는 부모의 처참한 죽음을 생생히 목격했다. 든든했던 엄마, 아빠는 순식간에 온기를 잃고, 어린 딸의 두 손에 싸늘한 피만 남긴 채 떠나갔다. 아이가 얼마나 놀랐을까. 그리고 살아가면서 얼마나 많은 밤을 가위눌린 채 지새워야 할까.

전쟁은 그 자체로 인간성을 말살하는 행위임을, 한 컷의 사진이 다시금 일깨운다.









▲ 'Getty News'의 사진 작가 크리스 온드로스(Chris Hondros)가 극적으로 포착한 장면들. 출처 news.bbc.co.uk  

2005/0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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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 레바논 사태와 중동 정치 전망--Alex Callinicos

출처블로그 : MediaNet SUMBOLON
No 1942 Socialist Worker(영국) 2005년 3월 12일

레바논 사태와 중동 정치 전망

민주주의의 창백한 그늘

앨릭스 캘리니코스(Alex Callinicos)

하나의 제국을 와해하기 위해 사용되었던 방법들이 이제 또 다른 제국을 확장하기 위해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은 놀라운 아이러니이다.

국제 업무를 담당하는 미 국무부 차관 폴라 도브리안스키(Paula Dobriansky)는 지난주에 이렇게 말했다. “그루지야에서는 장미 혁명이 일어났고, 우크라이나에서는 오렌지 혁명이 일어났고, 가장 최근에는 이라크에서 보라색 혁명이 일어났다. 레바논에서 우리는 ‘삼나무 혁명’이 무르익는 순간을 목격하고 있다. 이 나라 국민이 진정한 민주주의와 외세로부터의 독립이라는 대의 아래 집결하고 있는 것이다.”

“외세로부터의 독립”이라는 말에는 잠시 웃지 않을 수가 없다. 조지 부시와 자크 시라크(Jacques Chirac)가 한 목소리로 시리아의 레바논 철군을 요구하는 것은 우리 지배자들이 얼마나 뻔뻔스러운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이다.

미군 15만 명이 주둔하고 있지만 이라크는 아마도 “외세”로부터 자유로울 것이다. 프랑스 역시 자신의 과거 아프리카 제국으로 계속해서 군대를 파견했고, 가장 최근의 희생자는 코트디부아르였다.

그러나 부시와 시라크의 기호를 다룰 때 우리는 그들의 위선을 당연한 것으로 간주해야 한다. 정작 흥미로운 문제는 워싱턴 신보수주의자들의 꿈이 실현되고 있느냐이다.

전직 수상 라픽 하리리(Rafiq Hariri) 암살에 뒤이어 레바논에서 발생한 사태는 스탈린주의를 일소한 혁명들과 비교해 볼 때 일련의 민주적 혁명 과정의 시작일까?

일부 이라크 전쟁 반대자들이 그렇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이라크 침공이 중동에서 민주주의에 대한 압력을 강화했다는 사실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고 《가디언》의 조너선 프리들랜드(Jonathan Freedland)는 말한다. 그러나 실제로 레바논의 “삼나무 혁명”은 진정한 민주화 투쟁의 창백한 그늘일 뿐이다.

지난주 토요일자 《파이낸셜 타임스》는, 순교자 광장(Martyrs Square)에서 시리아 철군을 요구하는 항의시위를 조직중인 공동 행동의 책임자 마이클 나프쿠르(Michael Nafkour)와의 인터뷰 기사를 실었다. 기사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베이루트의 중간 계급이 저녁에 광장을 찾아 암살 사건 이후 벌어지고 있는 소수의 대중 시위에 참여하는 것은 이제 유행이 되었다.”

“민주주의 혁명”이 제국주의자들의 지배 기술로 타락했다. 워싱턴이 자신을 지역 엘리트와 수완가들의 정권 교체와 결부시키는 수단으로 전락한 것이다. 이것이 현 시기 레바논 사태에 대한 정확한 평가이다. 여기서 우리는 미국과 이스라엘의 진정한 성공도 추가로 기록해 두어야 할 것이다.

시리아 대통령 하페즈 알-아사드(Hafez al-Assad)가 레바논에 파병한 것은 1976년 4월이었다. 레바논 좌익과 팔레스타인인들의 내전 승리를 저지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미국의 지원과 이스라엘의 묵인 하에서 이 작전을 결행했다.

그러나 1982년 이스라엘이 레바논 남부를 침략하면서 혼란과 살육이 난무하자 아사드는 이슬람 급진파인 헤즈볼라(Hizbollah)가 이끄는 쉬아파 민병대의 부상을 지원한다. 헤즈볼라는 결국 레바논 남부에서 이스라엘 방위군을 축출했다.

이스라엘은 헤즈볼라와 시리아의 연계를 오랫동안 전략적 위협이라며 비난해 왔다. 결국 하리리 암살 사건이 아리엘 샤론(Ariel Sharon)과 워싱턴에 있는 그의 동맹자들에게 찾고 있던 구실을 제공해 주었다. 정말이지 암살 범행의 하수인들이 시리아 정보 부대의 멍청이들이 아니라 이스라엘 비밀 첩보 부대 모사드(Mossad)의 공작 대가들일 것으로 의심하지 않을 수 없는 지경이다.

하리리는 사우디아라비아 정권과 밀착되어 있었다. 그는 사우드 왕가와 계약을 맺은 주요 토건업자로 부상하면서 40억불 규모의 기업 제국을 건설했다. 결국 하리리 암살 사건으로 시리아는 아랍 세계에서 고립되고 말았다.

현 시리아 대통령 바샤르 알-아사드(Bashar al-Assad)가 지난주에 리야드(Riyadh)로 날아가 사우디아라비아의 지배자인 압둘라(Abdullah) 왕세자를 만났을 때 그는 강경한 어조로 레바논에서 철수하라는 얘기를 들었다. 주말에 아사드는 굴복했고 단계적 철수를 발표했다.

워싱턴이 이 지역에서 미국과 이스라엘에 유리한 세력 균형을 가져온 1승을 거두었다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승리가 정말 필요한 이라크에서 이 사태가 부시 행정부를 어떻게 도와줄지는 완벽한 미지수이다.

“보라색 혁명”과 관련한 그 모든 요란한 선전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이라크에서 (쿠르드족 지구를 제외한) 전 국민이 압도적으로 점령에 반대하는 상황과 직면해 있다. 지난주에 이라크에서는 1500번째 미군 병사가 사망했다. 당연한 얘기지만 이 사실은 크게 공표되지 않았다.

 

★ 兪在寅 옮김/sumbolon@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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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 생태적 야만주의와 ‘환경제국주의’

출처블로그 : himammo님의 블로그

생태적 야만주의와 ‘환경제국주의’

 


- 과학기술은 밝고 어두운 양면을 지니고있다 -
 

 
 
 

 

생태계 파괴와 자원 고갈을 부추기는 과학기술


현대 물질 문명 사회를 만들어온 주역이 과학과 기술이라는 점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의 불행은 과학과 기술이라는 두 개의 개념이 왜곡된 채 하나의 개념으로 통합되어 사용되고 있는 데서 비롯되고 있다.

 

역사적으로 자본주의 논리상 여기에는 철학적 사고가 비경제적인 불필요한 요소로 자리잡았기 때문이다. 즉 과학기술을 이용하여 돈벌이가 된다면 공기나 물 그리고 모래통과 석탄을 가지고 필요한 수많은 원료와 상품을 만들어내면 될 일이지, 무엇 때문에 누구를 위해 만들어야 한다는 사고는 불필요하다는 것이다.

‘과학(science)’이란 말의 어원은 ‘scienti’라는 라틴어에서 유래하고 있으며, 이 단어는 ‘안다(scio)’는 뜻을 가진 동사의 추상명사이다. 프란시스 베이컨이 “아는 것이 힘이다”라고 한 것은 바로 이런 의미를 지닌 과학을 일컫는 것이며, 따라서 과학은 철학적 의미가 아닌 단?지식을 의미한 것이라고 본다. ‘기술(technology)’이라는 말은 ‘mechane’라는 그리스어로 ‘방법’ 또는 ‘절차’에 관한 계획을 고안해 내는 일과 이를 실천에 옮기는 방법을 일컫는다.

자본가들은 과학기술을 이용하여 세계 도처에 신속히 침투하여 노동의 분화를 촉진시킴으로써 원주민과 노동자를 돈벌이의 객체로 전락시켰다. 이것은 인간의 동질화를 가져와 토착적인 생산성과 문화적 다양성의 파괴를 증대시켰다. 뿐만 아니라 자연의 분화도 촉진시켰다.

 

예컨대 과학기술을 상업용 목재를 생산하는 데 이용하기 시작했다. 산림은 한 가지 나무로 대체됨으로써 종의 다양성 파괴가 촉진되었다. 생물종의 절반 이상이 서식하고 있는 열대우림이 파괴되었으며, 그곳의 일부는 대규모 인공 조림으로 대체되었다. 때문에 열대우림은 지금 생물학적·유전학적인 사막으로 전락하고 있다. 그것은 생물종과 개미 연구의 독보적인 권위자이고 퓰리처상을 두 번이나 수상한 에드워드 윌슨(1929∼)이 자신의 저서 『생명의 다양성』(1992년)에서 1년에 2만7000종의 생물이 멸종되고 있다고 주장한 점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사라져가는 지구생물들
 
 
존 포스터 교수는 내가 번역한 『환경혁명 --- 새로운 문명의 패러다임을 찾아서』(1996년, 동쪽나라)에서 “지난 40여 년 동안 지구 전체의 삼림 가운데 특히 생물종의 보고인 열대림의 벌목량이 해마다 잔존 열대림의 2%로 계속 제한된다고 해도 100년 후에 남아 있는 열대림마저 대부분이 사라질 것”으로 추정하고, “만일 열대 지방에 있는 나라들의 인구 증가율과 똑같은 수준으로 벌목될 경우 30년 이내에 모두 사라지게 될 것”이라고 경고한다.
 
그리고 그는 “오늘날 인간은 식품 공급량의 80%를 20종의 생물종에 의지하고 있으나, 현재 식용 가능한 식물만도 7만5000종에 이르고 있다”고 한다. 지금 인간의 능력으로는 멸종되고 있는 종의 효용성을 채 밝혀보지도 못한 채 수많은 생물종이 지구상에서 사라지고 있다. 이러한 현상이 오늘날처럼 계속될 경우 생태계 파괴로 인해 지구는 더 이상 생명체가 살 수 없는 사막으로 돌변할 우려가 높아지고 있다.
 
생태계는 일종의 유기체와 같은 복잡성과 상호 연계성을 띠고 있고, 고무줄에 비유할 수 있다. 그것은 복원력이 있는 반면, 일정 정도를 넘어서는 외압이 가해지면 순식간에 연쇄적이고 장기적인 파급 효과를 미쳐 회복 불가능한 상태로 돌변하는 특성을 지니고 있다.

1940년대 이후 단 20여 년 동안에 인류 역사상 생태계에 돌이킬 수 없는 가장 해로운 물질들이 대부분 만들어졌다. 이러한 물질의 축적은 생태계의 복원력을 크게 손상시키고 있다. 이른바 석유화학산업으로 촉진된 오늘날의 합성 제품 시대는 자연의 순환 작용으로 분해되지 않고 장기간 생태계 전반에 치명적인 타격을 가하는 유해 물질을 엄청나게 쏟아내고 있다. 그 결과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엄청난 종이 상실되고 생명체를 학살하는 결과를 초래하고 있다.

 

 

 

또한 과학기술의 발달은 자원의 고갈을 더욱 촉진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전문가들의 분석에 따르면, 현재와 같은 수준으로 에너지원이 채취될 경우 앞으로 석유는 50년, 우라늄은 60년, 석탄과 천연가스는 200년이면 바닥이 날 것이라고 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불필요한 것마저 자동화를 추진함으로써 에너지 자원의 낭비를 더욱 부추기고 있다. 그 이유는 오로지 돈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돈보다는 후세를 위하는 양심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사람의 손으로 여닫으면 될 출입문마저 굳이 전기를 이용하는 자동화로 바꾸지는 않을 것이다.

 

 

 

지구적 차원의 불평등과 ‘환경제국주의’

이제 우리는 근본적인 변화를 모색하지 않으면 안 될 역설의 시대에 살고 있다. 18세기 산업혁명 이후 눈부시게 발달해 온 근대 과학기술의 힘을 이용하여 오로지 돈을 더 많이 벌기 위해 자연에 대한 정복과 통제력을 가속화해 왔지만, 지난 200년 동안 이루어진 그러한 힘의 행사는 새로운 차원의 지구적 위기를 만들어냈다. 그것은 “하느님, 우리를 닥쳐올 위기에서 구원해 주십시오”라는 기도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과학기술의 발달과 함께 오존층 파괴, 계속 확대되는 사막화, 산성비, 삼림 벌채, 지구온난화를 포함한 급속한 기후 변화, 전염병의 만연, 생물종의 소멸, 에너지원의 고갈 등 이른바 전 지구적 차원의 환경 위기가 가속화되어 왔다. 역설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지난 100년 동안 세계 경제는 1300%나 성장했지만 빈부 격차는 계속 확대되어 왔다.

 


 

 

지난 1972년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유엔 인간환경회의’가 개최된 이후 1992년 브라질 리우에서 ‘유엔 환경개발회의’가 개최되기까지 20년 동안 선진국을 중심으로 한 중심부와 후진국을 중심으로 한 주변부의 빈부 격차는 더욱 벌어졌다. 그래서 주변부의 40여개국 이상은 자연 환경을 포함한 모든 삶의 조건이 과거 20년 전보다 더욱 악화되어 왔다.

어디 이것뿐인가. 1750년 무렵에 선진국과 후진국의 1인당 소득 수준은 거의 같았다. 그런데 1930년 무렵에 선진국 1인당 소득은 780달러(1960년 달러 가격 기준으로)인 반면 후진국은 190달러로 1750년 수준에 머물렀다. 1960년에서 1989년까지 세계 부의 배분에서 가장 부유한 20%와 가장 가난한 20%가 각각 차지하는 비율은 30대 1에서 60대 1로 그 격차가 엄청나게 벌어졌다.

앙드레 군더 프랑크가 주장한 것처럼 이들 국가는 지금도 ‘저발전의 성장’이라는 구조적인 경기 침체라는 악순환의 굴레 때문에 해마다 몇백만 명이 순전히 기아로 죽어가고 있지만 손도 못 쓰고 있는 실정이다. 각종 전염병으로 죽어가면서 자기가 무슨 병으로 죽어가는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더욱 늘어나고 있지 않은가.

과연 식량이 부족해서 그런가. 그렇지 않다. 유엔식량기구(FAO) 통계에 따르면 지금 세계는 이들을 충분히 먹이고도 남을 식량이 있다. 절대량이 부족하여 해마다 몇천만 명이 기아로 죽어가고 영양 실조로 고통을 당하고 있는 것도 아니고 보면, 우리는 이제까지 성장과 발전이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이었는가에 대한 의문을 마땅히 제기해야 한다. 이와 함께 과학기술의 문제점과 성장의 속도를 조절하는 문제에 대한 논의를 새롭게 시작해야 한다.


 

 

 

20세기 중반 경제 개발을 통해 못 사는 나라들을 도와 주겠다는 미국과 구소련 중심의 발전 패러다임은 파산 선고를 받은 지 이미 오래이다. 특히 1990년도를 전후하여 냉전의 종식과 함께 새롭게 형성된 세계 질서는 인류의 미래에 대한 전망을 더욱 어둡게 만들고 있다.

 

1995년도 세계무역기구(WTO)의 출범과 함께 이제 세계는 인류 역사상 가장 치열한 ‘경제 전쟁’, ‘무한 경쟁’, ‘생존 전쟁’을 치를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내몰리고 있다. 따라서 경제적 불균등과 지구 환경 파괴의 심화는 선진국의 특별한 조치가 없는 한 돌이킬 수 없는 상황으로 치달을 것이라는 점은 불을 보듯 훤하다.


 

 


 

 

 

1992년 6월 브라질 리우에서 세계 정상들이 ‘유엔 환경개발회의’를 열고 지속가능한 발전을 위한 이른바 ‘리우 선언문’에 서명했지만, 이것의 본질은 이제 선진국이 지구 환경을 위해 오염 저감 방안을 추진할 테니 제3세계 국가들도 이에 동참하고 자기들의 환경 기술을 수입하라는 저의를 담고 있다. 다시 말해서 명목상 좋은 의견을 담고 있음에도, 그 선언문은 선진국과, 개발도상국을 포함한 후진국 간의 경제적 불균등 문제와 환경 파괴의 기여 문제 등 더욱 근본적인 의견 마찰을 숨기고 있는 것이다.

지구온난화의 주범으로 지목받고 있는 이산화탄소 배출량 하나만 보더라도 현재 미국 한 나라가 세계 총 배출량의 25%를 차지하고, 선진 공업국의 전체 배출량은 71%를 차지하고 있다. 1980년대 말에 동유럽을 포함한 선진 공업국의 원자재 소비량은 전 세계 소비량의 81%에 이르고 있다. 철강은 81%, 자동차는 92%, 전기는 81%를 소비하였다.

 

미국인들은 115배의 종이, 320배의 자동차, 52배의 고기류, 그리고 46배의 전기를 각각 더 많이 소비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산업혁명 이후 지구를 지탱 불가능하게 만들어 왔고 지금도 그렇게 만들고 있는 주범이 바로 미국을 비롯한 선진 공업국들이라는 점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선진국이 ‘환경제국주의’로 전락하고 있다는 비난을 받아도 그들은 할 말이 없을 것이다.

 


 
환경재앙에 직면한 지구촌

 

 

 

 

생태적 야만주의의 종식은 사회 체제의 변혁에서부터

사회 체제에 대한 근본적인 전환이 없는 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과학기술은 생태계와 인류 문명의 파멸을 촉진하는 기제로 작용할 수밖에 없는 속성을 띠고 있다. 수많은 전문가들은 이런 비극을 막을 수 있는 기간이 앞으로 30∼40년밖에 남지 않았다는 점을 경고한다.

 

그러나 이에 반대하는 집단 ─ 대부분 권력가, 행정가, 대기업가, 다국적기업 세력 등 ─ 들은 환경 위기라는 주장에 대해, 과학적 불확실성과 자연의 자정 작용이 무한할 것이라는 이유로 근본적인 조치들을 한없이 미루고 있다. 다만 그들이 하는 일은 자동차의 매연을 줄이는 후처리 장치를 달거나, 기업가에게는 자살이나 다름없는 ‘소비를 줄이자’거나 ‘분리 수거를 잘 하자’는 등의 개인적 질서와 행동에 호소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더욱 충격적인 일은, 대다수 인류가 현대 과학기술이 만들어내고 있는 위기 ─ 환경의 파괴, 빈부 격차, 가공할 파괴력을 지닌 핵무기의 공포 등 ─ 를 과학기술의 발달로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막연히 믿고 있다는 점이다.

 

무책임한 기득권 세력들은 과학기술의 발달을 통해 석유와 석탄, 천연 가스와 같은 화석 연료가 고갈되면 핵발전으로, 그 다음에는 핵융합 발전을 통해 에너지 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는 점을 주입하고 있다. 심지어 콩알만한 인조 식량을 먹으면 현재와 같은 식사를 하지 않아도 될 것이며, 환경 오염으로 지구에서 살 수 없는 날이 오면 다른 혹성에 가서 살 수도 있을 것이라고 속삭인다.


 

 
지구온난화로 야기된 엄청난 자연재앙을 형상화한 ‘투모로우’
 
 

정치권력가, 행정가, 자본가 세력 가운데 무책임한 세력들은 오늘 당장 자본의 축적을 극대화하기 위해 이런 막연한 기대를 설파하는 데 열을 올리고 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과학기술이 누구의 도구가 되어 왔는가를 알고 있다면, 그들의 주장이 얼마나 무책임하고 반생태적인가를 알 수 있다.

지금 우리는 불가사의한 과학기술 혁명이 계속 일어날 것이라고 믿고 있다. 하지만 비행기의 개발과 같은 교통 혁명이 인류의 위기를 극복하는데 도움을 주지 못한 것과 같이, 오늘날 운운하고 있는 정보통신 혁명도 마찬가지 길을 가고 있다. 냉전 시대에 적의 동태를 감시했던 인공위성이 환경 오염을 촬영하는 데 활용될 수는 있다고 해도, 파국적인 위기에 처한 생태계의 파괴를 방지할 수 있는 근본적인 수단은 되지 못하고 있다.

교통과 통신 기술의 눈부신 발달은 이른바 지구촌 시대를 도래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이것은 기아로 죽어가는 인류를 신속하게 구하는 순기능보다는, 지구상에 빈곤과 착취를 심화시키는 역기능으로 더 많은 기여를 해 왔다. 역사적으로 1492년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 이후, 식민지 세력들은 앞선 자신들의 과학기술을 이용하여 지구 반대편의 더 많은 노동력과 자연 자원의 착취를 가속화하는 일에 몰두해 왔다는 점을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이제 과학기술을 돈벌이의 도구로 삼아온 세력들이 보여준 역사의 교만과 생태적 야만주의를 종식시킬 수 있는 힘을 모아야 한다는 점이 더욱 자명해졌다. 침략성과 표한성을 지닌 식민지 시대의 제국주의자들에게 인류와 자연을 계속 맡겨두었던 역설의 시대를 동시대를 살아가는 인류의 손으로 끝장내야 한다.

 

다시 말해서 과학기술이 발달하면 미래의 위기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는 역설의 시대, 불확실성의 시대를 종식하기 위해 양심있고 의식있는 60억 인류가 네트워크적 사고와 행동 조직체를 결성하여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이 공존할 수 있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창출하기 위해 힘을 모아나가야 한다. 더 이상 꾸물거릴 시간이 없다. 지금 시작해야 한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오늘의 지구적 차원의 생태계 위기는 자연의 위기도 아니고, 헐리우드 영화에서처럼 몇몇 탐욕스러운 인간의 잘못과 실수에서 비롯된 것은 더욱 아니다. 그것은 현대 과학기술이 만들어낸 모든 역설적인 위기와 마찬가지로 사회 체제의 위기에서 비롯되고 있다. 따라서 이러한 문제 해결의 구체적인 방안은 한 사회 체제를 어떻게 변화시켜 낼 것인가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기나긴 고난의 세월 속에서 쌓아올린 현대 문명 사회의 지속가능한 존속과 발전의 여부가 바로 당신의 손에 달려 있다는 점을 깊이 명심해야 한다.

 

조길영 / http://www.ilsangreen.net/green/go20.as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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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전운동이 다시 전진할 기회 / 마침내 드러난 팔루자의 진실

다함께 50 호

반전운동이 다시 전진할 기회 / 마침내 드러난 팔루자의 진실

 - 김광일  / 살람 이스마엘 

http://www.alltogether.or.kr/

 

반전운동이 다시 전진할 기회 - 김광일

 

3·20 행동은 무엇보다 반전운동이 부시의 거짓말에 속지 않고 있다는 것을 보여 줄 중요한 계기다. 부시는 1월 30일 총선이 이라크에 민주주의를 가져다 줬다고 호들갑을 떨고 있지만 점령은 계속되고 있다. 점령이 지속되는 한 반전운동은 계속될 것이다.

부시의 ‘아낌 없이 주는 나무’ 노무현에게도 파병은 여전히 아킬레스 건이다.

부시의 위기가 심화할수록 핵심 동맹국의 구실이 더욱 중요해진다. 점령군 주둔을 장기화하는 것뿐만 아니라 추가 파병의 위험도 존재한다.

2월 말에 호주 총리 존 하워드는 450명의 추가 병력을 파병하기로 결정했다. 노무현도 추가 파병의 유혹을 느끼고 있을지 모른다. 3·20 행동은 이라크 점령과 추가 파병을 반대하는 운동의 발판 구실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노무현 정부는 지난해 말 ‘개혁입법 사기극’을 벌였다. 그러나 한나라당 등 우익의 눈치를 보면서 ‘개혁 입법’을 2월 임시국회로 미뤘고, 그러다 4월 임시국회로 또 넘겼다. 4월 임시국회를 앞두고 건설되는 3·20 행동은 노무현의 ‘개혁 사기극’에 항의할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다.  

3·20 행동은 한국에서 건설할 중요한 반전·반신자유주의 투쟁의 기폭제가 될 것이다.

부시가 11월 APEC 정상회담 때문에 한국을 방문한다. 그리고 12월 홍콩에서 WTO 각료회담이 열린다. 반전운동은 이미 전쟁과 이윤의 관계를 연결시키는 정치적 급진화를 만들어내고 있다.

3월은 각 대학에서 등록금을 비롯한 교육환경 개선을 둘러싼 투쟁이 벌어지는 때다. 미국과 영국 학생들 사이에서 인기 있는 구호는 “BOOKS NOT BOMB”(폭탄이 아니라 책을)이었다. 3·20 행동에서 “점령지원이 아니라 교육에 더 많은 투자를”이라는 요구를 결합시킨다면 반전운동과 교육환경 개선 투쟁 모두에서 상승효과를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이다.

3·20 행동 건설은 지난해 8월 자이툰 부대 파병 강행, 11월 부시의 재선 때문에 다소 의기소침해진 한국 반전운동의 어깨를 토닥이며 운동이 전진할 기회를 만들어 주고 있다.



 

·민주노동당 대의원대회에서 3·20 행동 건설 촉구를 담은 반전 결의안에 393명의 대의원이 서명했다. 이것은 참석한 대의원 중 4분의 1에 해당한다.

·공무원노조 대의원대회에서 3·20 행동 참가를 호소하는 결의문에 120명의 대의원이 서명했다. 참석 대의원 중 3분의 1이 넘게 서명했다. 공무원노조 김영길 위원장은 공무원 노동자들의 3·20 행동 참가를 호소했다.

·서울대학생총연합(서총련)은 3월 투쟁 계획서에서 3·20 행동에 참가할 것을 호소했다.

·보건의료단체연합은 소속 회원 의사와 약사의 병원·약국에 3·20 행동 포스터를 부착할 계획이다.

·서울 지하철노동조합은 지하철 역사내 3·20 행동 포스터를 부착하기로 했다.

 

※ 3.20 행동에 관한 문의

파병반대국민행동 (www.antiwar.or.kr 02-2631-5055 antipabyeong@empal.com)

 

마침내 드러난 팔루자의 진실  - 살람 이스마엘

 

살람 이스마엘 박사는 1월에 팔루자를 구호차 방문했다. 이스마엘 박사(28세)는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하기 전까지 바그다드 청년의사회 대표였다. 그는 지난해 4월에 미군이 팔루자를 공습했을 때 부상자를 치료하기 위해 팔루자에 있었다. 그가 지난해 11월 조지 W 부시가 재선된 직후 미군이 어떻게 한 도시를 파괴했는지 증언한다.

 


 

처음 나를 엄습한 것은 형언하기조차 힘든 냄새였고, 그 냄새는 절대 가시지 않을 것만 같았다. 그것은 죽음의 냄새였다. 팔루자의 집· 마당·거리에서 수많은 시체가 썩어가고 있었다. 남자·여자·어린이의 시체들이 죽은 곳에서 그대로 썩어 가고 있었고, 그 중 다수는 들개들에게 반쯤 뜯긴 상태였다.

나는 그 뒤 며칠 동안 들은 얘기들을 평생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팔루자 근처에 위치한 임시 난민 수용소인 사클라위야에서 17살 된 한 소녀를 만났다.

“저는 팔루자의 욜란 지구에서 온 후다 파우지 살람 이사위입니다. 포위 공격이 시작된 뒤 우리 식구 다섯 명은 55살 된 이웃 노인과 함께 집에 숨어 있었어요. 11월 9일 미 해병대원들이 우리 집에 왔죠.

“우리 아빠와 이웃 할아버지가 현관으로 나가자 미군들이 발포했어요. 아빠와 이웃 할아버지가 즉사했죠. 군인들은 우리 언니를 마구 때린 다음 총으로 쐈습니다.”

지난 해 11월 12일 에야드 나지 라티프와 생후 6개월 된 아기를 포함한 그의 여덟 식구가  짐을 챙겨 한 줄로 서서 사원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그들은 사원 밖 대로에 다다랐을 때 고함소리를 들었지만, 그 소리가 무슨 뜻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에야드는 그 소리가 영어로 “지금이야(now)”였을 거라고 말했다. 그리고 발포가 시작됐다.

에야드의 아버지는 심장에, 어머니는 가슴에 총을 맞고 즉사했다. 에야드 형제 중 두 명도 각각 가슴과 목에 총을 맞았다.

저격수들은 에야드의 형제 중 한 명의 아내를 죽였다. 그녀가 쓰러졌을 때 다섯 살 난 아들이 달려와 그녀 시체 옆에 섰다. 그들은 아들마저 쏴 죽였다.

생존자들은 필사적으로 군인들에게 제발 쏘지 말라고 호소했다.

그러나 누구든 백기를 들 때마다 총을 맞았다고 에야드는 말했다. 몇 시간 후 그는 백기를 들었다. 그러나 미군은 그의 팔에 총을 쐈다. 마지막으로 그는 손을 들었다. 그러자 미군은 그의 손에 총을 쐈다.

나는 눈에 눈물이 가득한 한 할머니를 만난 기억이 난다. 그녀는 내 팔을 움켜잡고 어떻게 자기 집이 공중 폭격 때 투하된 미군 폭탄에 의해 부서졌는지 말해 주었다. 19살 된 아들 위로 천장이 무너져 내리면서 아들의 양쪽 다리가 잘렸다.

그녀는 지혈하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녀는 하나뿐인 아들이 죽을 때까지 그의 곁을 지켰다. 그는 4시간 만에 숨을 거두었다.

우리는 도시 북서부에 위치한 가난한 노동자 주거 지역이자 미군의 4월 포위 공격 당시 저항의 중심지였던 욜란 지구의 집들을 방문했다.

두 번째 공격 동안 미군은 마치 이 지역을 보복 대상 1호로 삼은 듯 했다. 우리는 이 집 저 집 돌아다니며 침대 위나 거실, 부엌 등에 죽어 있는 일가족의 시체들을 발견했다.

어떤 곳에서는 검은 옷에 탄약띠를 맨 전사의 시체를 발견했다. 그러나 집안에 있던 대다수 시체들은 민간인들이었다.

많은 이들은 실내복을 입은 채 였고, 죽은 여성들은 많은 얼굴을 베일로 가리지 않은 상태였는 데, 이는 집안에 가족 외 다른 남자가 없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무기도, 빈 탄약통도 없었다.

우리가 목격한 것은 대량 학살의 결과이자, 힘 없고 무방비 상태인 민간인들에 대한 냉혹한 학살임에 분명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점령군은 지금 자신들의 범죄를 은폐하려고 그 지역을 불도저로 밀어버리고 있다.

팔루자에서 일어난 일은 잔혹한 만행이다. 전 세계는 진실을 알아야 한다.

번역 조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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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연대 가능성을 보여 주다 / 모든 힘을 다해 투쟁을 건설할 때다

다함께 50 호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연대 가능성을 보여 주다 / 모든 힘을 다해 투쟁을 건설할 때다

 - 정동석(현대차 정규직 노동자)  / 전지윤 

 http://www.alltogether.or.kr/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연대 가능성을 보여 주다 - 정동석(현대차 정규직 노동자)

 

   

울산 현대차 5공장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농성 투쟁이 한 달 반이 넘게 계속되고 있다.

2월 21일에는 “이제껏 농성장의 많은 젊은 친구들이… 머리가 피로 범벅이 되고, 경비 여럿에게 무자비하게 밟히는 것을 지켜봐야만 했[던]” 비정규직 여성 노동자 5명이 “한 걸음 한 걸음 천천히 그리고 끝까지 나가볼랍니다”라며 무기한 단식 농성에 들어갔다.

현대사측은 이를 폭력으로 짓밟으려 했지만 여성 노동자들은 웃통을 벗고 결연히 맞섰다. 야만적인 탄압에도 굴하지 않는 투쟁에 갈수록 지지와 연대가 확대되고 있다.


현대차정규직노조 윤성근 전(前) 위원장과 현대정공 안현호 전(前) 위원장이 농성장에 결합했고 5공장 정규직 대의원회는 단전·단수 해제를 사측에 강력하게 요구했다. 그 때문에 사측은 2월 25일에 농성장 단전·단수를 해제해야만 했다.

나는 내가 속한 4공장 정규직 소위원 의장에게 5공장 농성장 지지 방문을 제안했다. 소위원 의장은 동의했고 지지금으로 노조 활동비 10만 원을 인출했다. 소위원 의장은 대의원 대표에게 다시 제안했고, 제안은 받아들여졌다. 

2월 24일 4공장 대소위원 10여 명은 5공장 비정규직 농성장에 지지 방문을 갔다. 도장부 탈의실은 단전·단수로 컴컴하고 바닥은 아주 차가웠다. 그러나 노동자들이 모여들어 촛불 몇 개를 피우자 서서히 밝아지며 금새 집회장으로 변했다. 비정규직 농성자들은 우리를 반기며 팔을 흔들고 파업가를 불렀다.

한 정규직 대의원은 농성장에 들어서자마자 “회사를 이대로 두면 안 된다! 빨리 어떤 조치를 취해야 되지 않겠냐”며 사측의 단전·단수에 화를 냈다.

다른 대의원은 “너무 늦게 방문해서 너무 미안한 마음이 든다”고 말했다. 비정규직 노조 비대위 위원장 조가영 동지는 “이렇게 대·소위원 동지들이 방문하니 우리는 절로 힘이 난다”고 반겼다. 

비정규직 노조는 해고된 1백여 명의 노동자들 생계비 지원을 위한 CMS 용지를 가져왔고, 나는 곧바로 그 용지에 5천 원을 적어 놓았다.

2월 27일에는 서울에서 민주노동당 당대회가 있었다. 당대회장에서 나는 민주노동당 울산시당 동지들, 민주노동당내 ‘다함께’ 동지들과 함께 현대차 비정규직 투쟁 지지 모금을 벌였다. 순식간에 1백34만 2천 원이 모금됐다.

다음 날 2월 28일, 나는 울산시당 이용진 북구지역위원장과 함께 조가영 동지를 만나 모금 결과를 말해 줬다.

조가영 동지는 아주 반가워하며 “최남선 동지의 분신 치료비 등 재정이 힘들었다.”고 했다. 또 “비정규직 여성 노동자들이 현재 7일째 단식하고 있는데, 경비들이 주위에 어슬렁거리면서 욕설을 하며 모욕감을 주고 있다. 그래도 단식자들은 병원에 실려갈 때까지 단식할 거라고 결의를 다지고 있다.”고 말해 줬다.

이 날 저녁, 울산 현대차에서는 2천5백여 명의 정규직·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모인 ‘원·하청 노동자 공동 결의대회’가 열렸다.

그 동안 연대에 소극적이었던 현대차 정규직 노조가, 이번에는 고무적이게도 전 공장 잔업을 거부하고 2천여 명의 정규직 노동자를 동원하는 열의를 보였다. 사상 최초의 원·하청 공동 잔업거부가 이뤄진 것이다.

집회에서 민주노동당 당대회에서 모금한 투쟁 지지금을 전달하며 이용진 동지는 “비정규직 철폐를 위해 민주노동당이 선두에 설 것이다. 현대차 비정규직 노동자들과 끝까지 연대하겠다.”고 밝혔다.

집회에서 현대차정규직노조 이상욱 위원장은 “어떤 정규직 조합원들은 우리의 고용 불안이 심각한데 지금 비정규직 동지들의 정규직화가 시기적으로 맞느냐? 이런 말을 합니다. 그러나 동지들! 비정규직 동지들의 정규직화 투쟁은 역사의 요구입니다. 저는 이 투쟁이 반드시 승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비정규직 동지들과 우리가 하나로 투쟁해야 합니다.”고 말했다. 이제 중요한 것은 이 말을 실천으로 옮기도록 하는 것이다.


한 비정규직 노동자는 집회 이후 “현자 노조 깃발과 비정규직 노조 깃발이 같이 입장하[는] … 그 광경을 지켜보면서 갑자기 가슴이 뭉클해졌다. 내 두 눈에서는 눈물이 흘렀다. 난 너무나 감동적이고 아름다운 광경을 보았다. … 참 보기 좋았다. 그래 바로 저거야. 저게 바로 ‘노동자는 하나다’ 라고 하는 거야.”라는 글을 노조 게시판에 올렸다.

소극적이었던 정규직 노조 지도부를 이만큼이나마 움직이게 한 것은 5공장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처절하고 영웅적인 투쟁이었다. 현대차의 투사들은 비정규직 노조와 5공장 농성 투쟁에 대한 지지와 연대를 건설하고, 무엇보다 정규직 노조 지도부와 노동자들을 이 과정에 끌어들여야 한다.

노무현이 4월에 국회에서 비정규직 개악안을 밀어붙이려는 지금, 현대차에서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연대하는 불법 파견 철폐 투쟁을 건설하는 것은 더할 나위없이 강력한 투쟁의 주춧돌이 될 것이다

 

모든 힘을 다해 투쟁을 건설할 때다 - 전지윤

 

비정규 개악안을 2월 임시국회에서 처리하지 않고 4월로 넘긴다는 저들의 거짓말에 노동자들은 한시름 놓고 있었다. 그러나 아니나다를까 노무현과 열우당은 우리의 뒤통수를 치며 2월 23∼24일 이틀간 개악안 통과를 시도했다.

저들은 공식적으로는 ‘이번에 반드시 통과시키겠다’고 말하고 비공식적으로는 ‘유보될 수 있다’고 흘리며 교활한 사기극을 펼쳤다. 재벌과 한통속인 한나라당은 민주노동당과 ‘처리 유보’를 합의하며 사기극에 힘을 보탰다.

 

열우당 장복심은 갑작스레 뒤통수를 맞은 노동자들을 우롱하며 “정치는 그때그때 다른 거지”라고 말했다.   

이런 태도 돌변은 전경련과 경총 등 기업주 단체들이 한나라당을 방문하는 등 개악안의 빠른 통과를 재촉하자 나온 것이다.

전국비정규직노조대표자연대회의가 말하듯 “정부의 ‘비정규보호법안’은 … 전경련과 경총의 법안이며 재벌과 가진 자들을 위한 법안임이 만천하에 드러난 것이다.”

이런 뒤통수치기 사기극을 통해 저들은 비정규 개악안을 ‘처리 직전’까지 조금 더 옮겨 놓았다. 열우당 이목희는 거드름을 피우며 “[이 법안으로] 당사자들끼리 사회적 대화를 하고 싶으면 말리지는 않겠다”고 말했다.

뒤통수를 맞은 민주노총은 2월 23일 ‘법안 통과시 즉각 사회적 교섭 페기와 무기한 총파업 돌입’이라는 배수의 진을 쳤다.

그러나 저들이 민주노총을 얕잡아 보고 뒤통수를 친 데에는 이수호 집행부의 잘못된 노선도 한몫 했다. 이수호 집행부는 노무현의 악랄한 노동운동 탄압과 공격이 뻔히 보이는데도 투쟁을 건설하기보다 ‘사회적 교섭’에 더 매달렸다.

지난 2월 1일 민주노총 대의원대회장에서 현대차비정규직노조 조가영 비대위원장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분신하고 다치고 터지고 있는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사회적 교섭을 할 수 있냐”고 분통을 터뜨렸다.   

민주노총 이수봉 대변인은 “총파업을 한다고 한들, 며칠이나 할 수 있겠나? … 솔직히 말하자면 힘이 약하니까 대화하자는 거다” 하고 ‘고백’했다.(<프로메테우스> 2월 7일 인터뷰)

또, “노무현이나 이해찬이나 이런 사람들은 그래도 막가는 판을 바라지는 않는다 … [비정규 개악안 처리 유보는] 사람과 사람과의 약속이다” 라는 말도 했다.

노무현과 열우당은 스스로 ‘우린 힘이 없다’고 고백하는 민주노총 지도부를 우습게 보고 뒤통수를 치며 개악안을 밀어붙이려 한 것이다.

 

더구나 대화에 매달리면 힘이 커질 수가 없다. 민주노동당 네덜란드 통신원 장광열 씨가 네덜란드 노동운동을 평가하면서 지적했듯이 “타협에 익숙해진 노동조합은 점점 투쟁력도 감소하게 마련”이다.

김영삼 정부 때인 1996년 노사관계개혁위원회에 민주노총 대표단으로 참여했던 공공연맹 양경규 위원장은 “노동계는 뭔가 해보겠다는 생각으로 사회적 교섭에 참가하겠지만, 현실적으로 자본과 정권의 들러리로 전락할 수밖에 없고, 개악안 통과의 의도치 않은 조력자로 위치지워질 것”이라고 지적했다.(<프레시안> 2월 18일치 인터뷰)

전국비정규직대표자연대회의는 “사회적 교섭에 대한 일체의 논의를 중단하고 법 개악 저지와 권리 입법 쟁취를 위한 총파업 투쟁에 나설 것을 … 피 끓는 절절함으로 호소”했다.

노무현과의 격돌이 잠시 미뤄진 지금 민주노총의 모든 인력과 자원과 고민은 ‘사회적 교섭’이 아니라 총력 투쟁을 건설하는 데로 돌려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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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노동당)제7, 8차 중앙위원회 - 날카로운 정치적 긴장이 표출되다 / 아쉬움과 우려를 남기고 끝난 당대회

다함께 50 호

제7, 8차 중앙위원회 - 날카로운 정치적 긴장이 표출되다 / 아쉬움과 우려를 남기고 끝난 당대회   

- 정병호(민주노동당 4기 중앙위원) / 이승민 (민주노동당)

http://www.alltogether.or.kr/

 

제7, 8차 중앙위원회 - 날카로운 정치적 긴장이 표출되다 

- 정병호(민주노동당 4기 중앙위원) 

 

지난 2월 19일 민주노동당 제4기 7차 중앙위원회가 열렸다. 이번 중앙위는 2005년 예산안 심의, 당 지역 조직 체계 개편, 북핵 관련 결의안, 사회적 교섭 관련 결의안 등 몇몇 안건을 놓고 논쟁이 벌어졌다.

특히, 민주노총의 사회적 교섭 논쟁과 북한의 핵 보유 선언이 불거진 상황을 반영해 팽팽한 긴장과 날카로운 이견이 표출된 중앙위원회였다.

중앙위원들의 서명을 받아 ‘민주노총 사회적 교섭은 재고되어야 한다’는 결의안이 제출됐다.

이 결의안은 “사회적 합의주의는 노동자의 미래가 아니라 현재의 투쟁력을 소진하는 자기살 깎아먹기일 뿐”이라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민주노총 이석행 사무총장은 신상 발언을 이용해 결의안을 사실상 반대하는 발언을 했다. 그러자 일부 중앙위원들이 야유와 고함을 질렀다.

이석행 사무총장은 중앙위원들의 토론 자체를 막기 위해 안건 반려를 요청했다. 아쉽게도, 2백여 명의 중앙위원 중 1백20명이 안건 반려에 찬성했다.

뒤이어 북핵 관련 결의안이 제출됐다. 이 결의안은 지난 2월 11일에 발표된 ‘북한 외무성 성명에 대한 최고위원회 논의 결과’에 대한 반발 성격이었다. 최고위원회가 미국만 비판할 뿐 북한 핵에 대한 비판적 언급은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반발로 이 날 제출된 결의안은 양비론적 견해를 취했다.

나는 ‘한반도 비핵화’ 원칙을 지지하면서도, 미국과 북한을 동일한 수준에서 비판하는 결의안의 내용에는 문제가 있다고 주장했다.

양비론적 견해는 현실의 세력 관계는 불균등한데 추상적으로 ‘균형적’ 비판을 하다 보니 실천적으로는 일관된 반제국주의 입장을 취하지 못하는 약점이 있다.

이정미 최고위원은 토론을 무마히기 위해 안건 반려를 요청했다. 이 최고위원은 북한 핵에 대한 무비판적 견해를 지니고 있다.
권영길 의원은 미국을 비판하는 내용을 담고 있는 중앙위원회 북핵 결의안은 국회내 “초당적 결의”를 어렵게 만든다는 이유로 안건 반려를 지지했다.

결국 중앙위원 다수가 안건 반려를 지지했지만, ‘동상이몽’이었던 셈이다.

이번 중앙위원회는 첨예한 이견이 존재하는 쟁점에 대해서 번번히 안건 반려를 함으로써 토론을 가로막은 아쉬움이 많은 자리였다.

 

아쉬움과 우려를 남기고 끝난 당대회  - 이승민 (민주노동당) 

 

2월 27일에 열린 민주노동당 당대회에서는 지난해 하반기 사업 평가를 놓고 긴 논쟁이 벌어졌다.

특히, 당의 국가보안법 폐지 투쟁 전술을 놓고 첨예한 견해 차이가 불거졌다. 사실, 이것은 지난해 하반기부터 계속되고 있는 논쟁을 반영한 것이다.

당 지도부는 지난 7차 중앙위원회에 “국가보안법을 철폐시키지는 못했지만 헌신적으로 투쟁했고, 수구·보수 대 진보·개혁 구도를 형성하여 한나라당을 반역사적·반국민적 정당으로 낙인찍었다”는 초안을 제출했다.

그러나 당시 중앙위원회는 열린우리당의 기회주의성을 효과적으로 폭로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비정규직 투쟁을 효과적으로 배치하지 못했다는 평가를 추가했다.

당대회에서는 이런 중앙위원회의 평가를 뒤집는 시도가 있었다.

신석진 대의원(인천)은 국가보안법 투쟁을 통해 “한나라당을 반역사적·반국민적 정당으로 낙인찍었고, 열린우리당을 무능하고 기회주의적인 정당으로 각인시켰으며 진보 개혁의 대세적 흐름을 조성했다”는 수정안을 제출했다.

그러자 민동원 대의원(서울 양천을)은 수구·보수 대 진보·개혁의 흐름을 조성해 한나라당을 폭로했다는 평가를 삭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두 수정안은 모두 부결됐다.

사실, 국가보안법 투쟁의 핵심 문제는 당 지도부가 열린우리당과의 ‘개혁 공조’에 발목 잡혀 독립적으로 운동을 건설하지 못한 것이었다.

지난해 사업 평가를 둘러싼 논쟁이 지리하게 벌어진 데다, 지나치게 많은 의사 진행 발언 때문에 나머지 중요한 안건들을 토론할 수가 없었다.

당 지도부는 시간과 장소의 제약을 들어 일부 안건들(2005년 사업 계획, 당헌과 강령 개정)을 찬반 토론 없이 표결했다.

게다가 예산안과 대의원들이 당대회 시작 전부터 대회장에서 열의 있게 발의를 준비한 반전 결의안, 사회적 교섭 재고 결의안, 북핵 관련 결의안 등은 모두 중앙위원회로 위임됐다.

상당수 대의원들은 이런 중요한 안건들을 최고 의결 기관인 당대회가 아니라 중앙위원회로 위임하는 것에 대해 문제제기를 했다.

사실 이번 당대회는 당이 대규모로 성장하고 나서 처음으로 열렸다. 그 때문에 많은 대의원들이 커다란 열의를 가지고 당대회에 참가했다. 새벽 2시가 다 돼서도 대다수 대의원들은 자리를 지켰다.

그러나 당 지도부는 밤 10시부터 나머지 안건들을 중앙위에 넘길 것을 독촉했다.

이 때문에 당대회가 토론과 논쟁에 장이기보다는 점점 거수기 노릇을 하고 있다는 대의원들의 우려와 불만은 단지 기우만은 아닌 듯하다.

물론 일부 대의원들이 보여준 형식주의적 민주주의와 평당원주의도 진지한 토론을 어렵게 만드는 데 일조한 것은 사실이다. 이 점은 개선돼야 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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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압에 맞서 싸웠던 여성들 / 투쟁하는 여성들이 말한다

다함께 50 호

억압에 맞서 싸웠던 여성들 / 투쟁하는 여성들이 말한다  

http://www.alltogether.or.kr/

 

억압에 맞서 싸웠던 여성들 - 다함께

 

3월 8일은 국제 여성의 날이다. 이 날을 경축하며, 급진적 운동을 이끌었거나 여성해방과 사회주의를 위해 투쟁해 온 여성들의 말을 소개한다.


 

메리 울스턴크래프트 (1759-1797)

“얼마나 많은 여성들이 불만의 먹이가 되어 인생을 허비하고 있는가. 그들은 의사가 되거나, 농장을 경영하거나, 상점을 운영하거나, 독자적인 사업을 이용해 독립할 수도 있었던 사람들이다. 그러나 지금 그들은 연약한 감수성에 짓눌린 채 풀이 죽어 있다. 한때 그들의 아름다움을 눈부시게 만들었던 바로 그 감수성이 이제는 그들의 아름다움을 좀먹고 있는 것이다.

여성은 이성이 아니라 감정적인 존재로 만들어졌고 여성이 얻는 모든 힘은 그들의 매력과 연약함에서 생긴다는 지배적인 견해 때문에 여성들은 한없이 초라해지고 온갖 종류의 근심 걱정과 슬픔에 빠진다. 그런 것들을 추적하다 보면 한도 끝도 없을 것이다.

우리 여성들은 도대체 왜 창조됐을까? 누군가는 순결한 상태로 남아 있기 위해서라고 한다. 즉, 여성들은 늘 어린아이와 같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태어나지 않는 편이 더 나았을 것이다.”

 

울스턴크래프트의 유명한 저서 ≪여성의 권리 옹호≫에서. 최초의 페미니스트 중 한 사람인 울스턴크래프트는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을 보며 깊은 영감을 얻었다.
 
소저너 트루스 (1797-1883)

“남자들은 여자들이 마차를 탈 때 도와 줘야 하고, 도랑을 건널 때 부축해 줘야 하며, 어디서나 제일 좋은 자리를 여자들에게 내줘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내가 마차를 타거나 진흙 웅덩이를 건널 때 나를 도와 주거나 나에게 제일 좋은 자리를 준 사람은 아무도 없다! 나는 여자가 아닌가? 나를 보라! 내 팔을 보라! 나는 밭을 갈고, 씨 뿌리고, 수확한 것을 곳간에 채웠고, 어떤 남자도 내게 이래라 저래라 할 수 없었다! 그러면 나는 여자가 아닌가? 나는 남자만큼 일할 수 있고 (먹을 것을 얻을 수 있을 때는) 남자만큼 먹을 수 있고 남자만큼 채찍질도 견딜 수 있었다! 그러면 나는 여자가 아닌가? 나는 열세 명의 아이들을 낳았는데, 거의 다 노예로 팔려 갔다. 내가 어머니로서 슬피 울부짖을 때, 예수님을 빼고는 아무도 내 말을 들어 주지 않았다! 그러면 나는 여자가 아닌가?”

 

노예 출신의 소저너 트루쓰는 여성을 대하는 사회의 위선과 이중 잣대를 비판했다.

 

엘리자베스 드미트리에프 (1851-1910)

“파리가 봉쇄됐다. 파리가 포격당하고 있다. 대포의 굉음이 들리는가, 무장하라는 신성한 호소가 울려 퍼지는 것이 들리는가! 파리 시민들이여, 프랑스 대혁명기 여성의 후예들이여, 민중과 정의의 이름으로 베르사유로 행진했고, 국왕 루이를 포로로 잡았던 여성들이여 ― 프랑스 민중의 어머니이며 아내이자 누이인 우리들이 가난과 무지가 우리 아이들을 적으로 삼도록 놔둬야 하는가? 압제자들의 변덕 때문에 우리 아이들이 서로 죽이도록 놔둬야 하는가? 시민들이여, 결투가 시작됐다. 우리는 승리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죽음뿐이다.”

 

드미트리에프는 1871년 파리에서 이 선언을 발표했다. 노동자들은 파리를 장악하고 파리 코뮌을 건설했다. 그녀는 파리의 여성들을 조직하는 데서 핵심적인 구실을 했다. 그들은 바리케이드에서 코뮌을 방어하며 모든 구습에 도전했다.

 

클라라 체트킨 (1857-1933)

“우리가 전쟁을 계속하는 것은 그것이 남성과 여성 사이의 투쟁이 아니라, 유산 계급들의 정치 권력에 대항하는 전투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온 힘을 다해 투쟁을 계속할 것이다.

그 투쟁의 목표는 언젠가는 프롤레타리아트 전체가 남녀 구분 없이 자본주의 사회 질서에 이렇게 외치며 도전하는 것이다. ‘당신들은 우리에게 의지하고 있다, 당신들은 우리를 억압하고 있다, 그리고 당신들이 세운 건물이 어떻게 무너져 내리는지 보라.’”

 

체트킨은 독일의 지도적 사회주의자였다. 그녀는 국제 여성의 날을 제정하자는 호소를 이끌었다.

 

엘리자베스 걸리 플린 (1890-1961)

“‘응접실의 여왕’은 ‘부엌의 하녀’와 어떤 공통점도 없다. 백화점 소유주의 아내는, 주당 5달러를 받는 점원에게 유일하게 열려 있는 출구가 성매매라는 것을 깨달은 17살 소녀에게 자매 같은 관심을 전혀 보여 주지 않는다.

남성들의 형제애와 마찬가지로, 여성들의 자매애도 노동자들에게는 공허한 속임수일 뿐이다. 그 모든 잘난 체하는 위선과 역겨운 감상주의 이면에는 계급 전쟁의 사악한 모습이 숨어 있다.”

 

플린은 전통을 깨고 남성 노동자와 여성 노동자 모두를 조직한 전투적 노조인 세계산업노동자연맹(IWW)의 지도적 조직자였다. 매카시의 마녀사냥이 절정에 달했던 1951년, 그녀는 2년 동안 투옥됐다.

 

실비아 팽커스트 (1882-1960)

“내가 이스트 엔드에 도착했을 때, 어머니들은 쇠약해진 아이들을 데리고 내게 다가왔다. 나는 환자의 눈에서 굶주림을 봤다. 그 때 나는 다시는 이전의 내 직업으로 돌아가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나는 여성 참정권 활동을 한 죄로 몸서리칠 만큼 야만적인 투옥과 강제 급식을 당하는 것을 여러 차례 목도해 왔다. 나 또한 투쟁을 벌여 왔고, 내 수명은 그 때문에 단축될 것이다. 

당신 주변의 사람들이 모두 굶주리고 있는데 당신 같은 사람들은 잘 먹고 잘 사는 것은 잘못됐다.

자본주의는 잘못된 사회 체제이고 없어져야 한다. 나는 자본주의를 없애는 데 내 삶을 바칠 것이다.”

 

1920년 선동죄로 기소돼 법정에서 한 연설. 예술가이자 전투적 여성 참정권론자였던 팽커스트는 런던의 빈민가 이스트 엔드에서 여성들을 조직했다. 러시아 혁명에 고무받은 그녀는 가족[어머니를 포함해 팽커스트 집안의 여성들은 영국의 유명한 부르주아 페미니스트들이다 ― 편집자]과 결별하고 자신이 “볼셰비키임이 자랑스럽다”고 선언했다.   

 

로자 룩셈부르크 (1871-1919)

“배반, 부도덕, 피바다, 탐욕 ― 이것이 자본주의 사회의 모습이다. 

문화, 철학, 윤리, 질서, 평화, 그리고 법치의 가식을 쓴 깨끗함과 단정함과 도덕이 아니라 게걸스러운 야수, 무질서한 악마의 연회, 문화와 인간성을 위협하는 역병이 있을 뿐이다. 따라서 그것은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독일·프랑스·러시아·영국의 노동자들이 취중 몽상에서 깨어나 형제애 속에서 서로의 손을 굳게 잡고, 전쟁광들의 괴성과 자본주의 하이에나들의 소란스런 울음을 노동자들의 우렁찬 함성으로 압도하기 전까지 광기는 멈추지 않을 것이고 유혈낭자한 지옥의 악몽도 끝나지 않을 것이다.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

 

룩셈부르크는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혁명가 중 한 사람이고, 독일 사회주의 운동의 좌파를 이끌었다. 그녀는 이 글을 제1차세계대전 동안에 썼다.

 

아룬다티 로이 (1961- )

“우리가 모두 제국주의와 신자유주의 프로젝트에 정말로 반대한다면, 그렇다면 우리의 시선을 이라크로 돌립시다. 우리는 점령에 반대하는 세계적 저항이 돼야 합니다. 우리의 저항은 미국의 이라크 점령의 정당성을 인정하지 않는 것에서 시작해야 합니다. 그것은 제국이 그 목표를 달성하는 것을 실제로 불가능하게 만드는 행동을 뜻합니다. 그것은 병사들이 전투를 거부해야 한다는 것, 예비군들이 복무를 거부해야 한다는 것, 노동자들이 배와 비행기에 무기 싣기를 거부해야 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우리는 지금 전쟁중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아룬다티 로이는 [영국 최고의 문학상인 부커상] 수상 경력이 있는 인도 소설가이며 자본주의와 전쟁에 반대하는 전 세계 운동의 지도적 인물이다. 이 연설은 2004년 1월 세계사회포럼에서 한 것이다.

 

투쟁하는 여성들이 말한다  - 다함께

 

● 박덕준  (전교조 여성위원장)

 

대부분의 여성 교사 노동자들은 맞벌이 부부인 경우가 많습니다. 직장인 학교도 다녀야 하지만 가정에서 살림도 해야 하는 이중고에 시달리고 있어요.
전교조 조합원 가운데 약 60퍼센트가 여성(전체 교사들 가운데 여성 비율은 훨씬 높아요)이지만, 전교조 간부 중 여성 비율은 훨씬 떨어져요. 이것은 여성의 능력이 부족해서 생기는 현상이 아니에요.
예를 들면, 교장이나 교감은 교사들을 대상으로 한 근무평점에서 남성에 비해 여성을 낮게 평가해요. 여성들이 집안일 등을 이유로 ‘칼퇴근’하는 것이 나쁘게 평가받는 이유가 되곤 하죠.
또 각 학교에 시간강사, 기간제 교사 같은 비정규직 교사 노동자들이 있고, 영양사, 행정실 회계보조사, 조리사, 전산보조 직원 등과 같은 분들이 학교 비정규직노동조합을 결성해 활동하고 있습니다. 비정규직 교사와 학교 비정규직노조의 구성원들도 대체로 여성이 훨씬 많아요.
따라서 대학의 경우 학교 내에, 중고등학교 내에서는 지역 내에 탁아방을 설치해 줄 것을 교육부에 요구하고 있어요. 여성의 권리를 위한 이런 요구들을 “역차별”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이것은 역차별이 아니라 그 동안 여성들이 얼마나 억압적이고 열악한 현실에서 일해 왔는지를 반증해 주는 것일 뿐입니다.
오늘날의 사회에서도 여성 억압은 여전히 존재하므로, 오늘날 국제 여성의 날을 기념하는 것은 당연히 의미가 있어요. 남성을 이기고 억누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엄연히 존재하는 여성에 대한 차별을 극복하기 위해서죠. 평등한 세상으로 가는 길에 여성들도 인간으로서 누릴 수 있는 권리를 요구해야 합니다.

 

● 김경숙 (전국학습지산업노동조합 대교지부 서울지회 준비팀장 )

 

저는 학습지 교사한 지 굉장히 오래됐어요. 1990년에 입사해서 16년 간 일해 왔어요. 근속연수로 치자면 회사에서 탑10에 들 정도인데 월급이 오히려 줄었어요. 지난 10년 간 정규직 임금이 10배 인상됐다면, 학습지 교사들은 오히려 10년 간 월급이 5분의 1로 줄어들었어요. 어떠한 보장(4대보험 같은)도 없고, 월급도 권리보장도 없고 회사가 시키는 대로 모든 일을 해야 하는 억압적인 분위기에서 일하고 있어요.
우리는 90퍼센트 이상이 여성이에요. 그런데도 모성보호는 하나도 안 되고 있어요. 회사는 그냥 우리를 소모품으로밖에 취급하지 않아요. 임신하면 그냥 그 날로 계약해지돼요. 애낳고 다시 돌아오면 그 동안의 경력은 하나도 인정받지 못해요. 
이런 일들은 여성노동을 비하시키는 일이에요. 출산율 저하가 사회적 문제라고 하지만 애 낳을 조건부터 사회가 만들어줘야 합니다.
노동조합을 하면서 노동자라는 인식을 많이 느끼게 됐어요. 2003년에 학습지 업계에서 현장투쟁이 많이 폭발했어요. 노동청 앞에서 1년 동안 매주 한 번씩 시위했어요.
학습지 교사들은 평균 근무기간이 8개월밖에 안 되기 때문에 연속성을 갖기가 어려워요. 자본을 상대로 한번 파업해 보는 게 투쟁의 목표입니다. 그러기 위해 현장투쟁이 한 차례 끝난 후에도 조합원을 꾸준히 관리하자는 목표를 세우고 있습니다.


● 라디카  (네팔 출신 이주 노동자)

 

1992년에 한국에 올 때는 TV에서 본 것처럼 크고 깨끗하고 안전한 공장에서 일하게 될 줄 알았어요. 와 보니 우리가 일하는 공장은 매우 작고 대부분 지하에 있었어요. 네팔에서 대학 다니다 왔는데 여기 와서 아침 7시부터 새벽 2시까지 일하는 게 너무 힘들었어요. 그렇게 힘들게 일했는데 사장이 월급도 안 주고 도망갔어요.
공장에서 일하다 보면 남자나 여자나 똑같이 일하는데 여자라고 차별해요. 우리는 이주 여성 노동자니까 차별이 더 심하죠. 한국 여성들에게는 생리 휴가도 있는데 우리는 그런 거 전혀 없어요. 한국 사람들이 일 끝나고 가도 우리는 남아서 일하고, 쉬는 날도 나와서 일했어요.
추석 때 사장이 또 우리에게만 일을 시켰어요. 저와 한 남성 이주노동자가 일을 하지 않겠다고 버텼죠. 근데 그 공장은 제가 일을 하지 않으면 그 라인 전체가 멈추는 곳이어서 결국 사장은 다음부터 반드시 야간·휴일 근무를 하면 수당을 주겠다고 약속을 했어요. 처음에 동료들은 제 말을 믿지 않았는데, 진짜 돈이 나왔어요. 모두 깜짝 놀랐죠.
2003년 10월 정부가 이주노동자를 단속해 추방하겠다고 발표한 다음부터 농성을 시작해 1년 가까이 했어요. 농성 처음 할 때는 너무 추웠어요. 우리는 세수도 못하고, 샤워도 못하고 그렇게 지냈어요.
우리 권리를 찾아야 하니까 힘들어도 버텼어요. 앞으로도 이주노동자들 계속 올 테니까, 내가 이 활동하다 잡혀도 지금 자리를 만들면 그 사람들은 지금보다 잘 지낼 수 있잖아요.
작년에 처음으로 여성의 날 집회에 갔어요. 여성의 날은 여성들의 날, 여성들의 축제였어요. 이 집회에서 우리는 이주 여성들의 상황을 알릴 수 있었어요. 또 한국의 여러 여성 노동자들의 상태와 문제도 알게 됐어요.
여성과 남성은 똑같은 노동자이니 함께 싸워야 해요. 그래야 여성들의 문제도 쉽게 해결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여성의 날에 한국 여성들과 이주 여성들이 함께 모일 거예요. 여기에 한국 남성 노동자들도 많은 관심 가져 줬으면 좋겠어요.

 

● 정금자 (서울대병원 간병인지부)

 

여성들이 많이 활동한다고 하지만 활동할 때 남녀 차별도 심하고 또 주부들이 일하는 일터가 너무 좁아요. 간병인 일터는 40·50·60대 여자 주부들이 마지막 갖는 일터인데, 급여가 너무 적어요. 최저임금도 안 돼요. 시급 1천6백60원, 8시간 일해서는 40~50만 원도 못 돼 이것으로 가정을 일굴 수 없으니까 자기 몸을 다 불태워서라도 24시간 일해야만 가정을 일굴 수 있어요.
여성들은 나약하다, 순종적이라는 얘기가 많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 안 해요. 저는 지금 우리 여성 노동자들이 자랑스럽고 당당하다고 느껴요. 제 주변 우리 조합원들 80명이 다 여성이지만 힘들고 고통스러워도 그걸 기쁨으로 해 내요.
2003년 8월 31일에 병원이 폐쇄된 뒤 다음 날 부터 투쟁을 시작했어요. 병원 현관 앞에서 단식 투쟁도 하고 2층 로비에서 철야 농성도 하다가 12월에 출입금지가처분을 당했어요. 우리는 12월 2일 인권위원회 점거농성을 했어요. 그 때 ‘다함께’랑 함께한 거 같아요.
2004년 2월에 노동청 점거 농성에 또 들어갔죠. 25일에 점거농성 들어갔다가 27일에 경찰력 투입으로 쫓겨났다가 4월 26일에 서울대병원 노조하고 (사측이) 교섭해서 이겼어요. 서울대병원처럼 온몸을 던져서 [비정규직 투쟁을] 하는 데가 없어요. 서울대병원 노조가 없으면 저희는 지탱 못해요. 우리는 특수고용직이라 노동 3권이 없어 교섭도 못해요.
간병인은 가장 힘없는 자들이었어요. 20년, 30년 직장에 다녀도 ‘없는 사람’이었어요. 전국에 20만 명이라는 거대한 숫자를 말할 수 있는 위치에 올려놓은 게 노동조합이에요. 노동조합은 이 땅의 가장 열악하고 힘없는 자들을 위해서 가장 필요한 조직이기 때문에 그에 동참하고 있어요. 그래서 저는 자랑스럽고 당당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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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TO에 맞서기 위해 50개 나라의 활동가들이 모이다

다함께 50 호

WTO에 맞서기 위해 50개 나라의 활동가들이 모이다  - 김어진 / 박준규

http://www.alltogether.or.kr/

 

WTO에 맞서기 위해 50개 나라의 활동가들이 모이다 - 김어진 / 박준규

 

2월 26∼27일에 홍콩시립대학교에서는 50개 나라에서 온 2백40여 명의 활동가들이 모여 WTO에 맞서 싸우기 위한 국제회의를 열었다.

특히 아시아 활동가들이 많았다. 남반구초점, 주빌리사우스, 글로벌익스체인지 같은 NGO뿐 아니라 홍콩의 노동조합 활동가들, 인도네시아 우편노조, 대만 통신노조, 인도 노동조합 등 노동자 운동이 성장하고 있는 나라에서 온 활동가들이 눈에 띠었다.

한국에서는 전농, 다함께, 아래로부터 세계화, 한국노총의 활동가들이 참가했다.

홍콩 정부와 언론은 이 회의 때문에 상당히 긴장했다. 한 홍콩의 언론은 세계의 ‘테러리스트들’이 WTO를 무산시킬 계획을 하기 위해 모일 것이라고 보도했다고 한다.

그러나 국제 여론을 의식한 탓인지 홍콩 정부는 이 회의의 대표단들을 만나고 싶다며 한발 물러섰다. 경찰청장은 현지 준비단체인 홍콩민중연합(HKPA)과 만날 의사가 있다고 언론에 발표했다.

참가자들의 투쟁 의지와 사기는 매우 높았다. WTO “각료회담을 무산시키자”는 구호와 주장을 쉽게 접할 수 있었다.

홍콩민중연합의 아우롱은 홍콩 노동자들도 WTO 때문에 많은 피해를 입고 있다고 주장했다.

“더 많은 일자리가 중국으로 넘어갈 것이다. 홍콩 자본가들은 서비스·항공사·컴퓨터 산업 등을 중국으로 이전하고 있다.”

필리핀의 아시아태평양리서치네트워크(APRN) 활동가 토니는 “WTO는 필리핀에서 광산업 사기업화를 부추기고 있다.”고 폭로했다.

WTO가 아시아의 농민을 죽이고 있다는 폭로도 많았다. “북반구뿐 아니라 남반구에서도 국가의 농업 보조금은 모조리 기업들한테 가고 있다.”


 

‘남반구초점’의 니콜라 블라드는 G20에 대한 환상을 경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지금 WTO 협상 과정의 핵심국은 미국·호주·캐나다·브라질·인도 5개국이다. 그런데 브라질과 인도의 농업장관들은 농민의 이해가 아니라 농업 기업의 이해를 대변하고 있다. 그들 대부분은 농산물 기업의 사장들이다.”

WTO에 맞서 노동자들이 단결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었다.

홍콩내 필리핀 이주 노동자 단체 활동가는 “만리장성은 홍콩의 정규직 노동자들과 홍콩내 이주 노동자들 사이에 있지 않고 WTO와 전체 노동자들 사이에 있음을 보여 줘야 한다.”

참가자들은 WTO에 맞선 전략을 놓고 매우 다양한 입장을 지니고 있었지만, WTO에 맞서 공동의 동원 필요성에는 모두 공감했다. 

12월 13일 각료회담 개막일과 18일 폐막일에 대규모 집회와 행진이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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