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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 년 정리하기

방 정리도 안하는놈 ( 극소수의 분들은 알고 있다. 하이에나새끼가 사는 지하동굴이 어떤 곳인지. 과연 하이에나들이 그렇게 지저분하게 해놓고 살까? -_- ) 이 2004 년을 정리하는게 좀 그렇기는 하지만 그래도 왠지 찜찜함다.


개인적으로 가장 큰 변화는 '다함께' 가입임다. 엄밀히 말하자면 2003년 12월 초순쯤에 가입했지만 그때는 어리버리 하게 넘겨서리 별로 평가할것도 없심다. 온라인에서 데굴데굴 놀다가 좋은 인연이 닿아서 가입하게 되었는데 사실 가입서 쓸때 아무것도 아닌 주제에 시건방 떨었던거 생각하면 사자굴에 기어 들어가고싶은 심정임다. -_-;;


덕분에 아직도 완전히 정리하지는 못했지만 '좌파 민족주의' 부터 '노동자의 힘' 경향까지 이것저것 뒤죽박죽으로 되어있던 머리속이 어느정도는 틀을 잡아 가는거 같고, 무엇을 지향해야 하는지, 무엇을 해야 할것인지가 보다 분명해 졌슴다. 뿐만 아니라 온라인에 갇혀있던 때의 제한적인 행동에서 보다 적극적으로 함께 할수 있었슴당. 예전에는 뉴스를 보며 분노만 했을뿐 아무것도 할수 있는게 없어 게시판에 분노의 말들만 한가득 써놓곤 했었는데, 이제는 진정 세상을 바꿀수 있는 힘이 어디에서 나오는지, 어떻게 싸워야 하는지에 대해서 분명해 졌심당.


그치만 아직 멀었다고 생각함당. 능력보다 더 많은 기대를 해주신분들도 있었지만 실망스러운 모습만 보여준거 같아서 역시 사자굴에 기어 드가고 싶슴당. 뿐만 아니라 여전히 어리버리 하고, 겁도 많슴당. 지난번 공무원노조 파업출정식 할때 안내를 하면서도 속으로 얼마나 조마조마 했는지 모름다. 항상 그래왔듯이 신년에는 잘 해야지, 좀더 나아져야지 하는 생각은 있지만 그것이 또 공염불이 되어버리면 어떡하나 걱정도 됩니당. 내년 이맘때쯤에 또 비슷한 이야기를 토닥거리고 있다면 암담할 뿐이겠지요.


민주노동당 입당도 빼놓으면 섭섭해 할겁니당. 다소 부족한 부분들도 있고 가끔씩 깜짝쇼를 벌여서 좀 그렇지만 어쨌든 이 사회가 잘못되었다고 느끼는 많은 사람들이 민주노동당을 지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당원임이 자랑스럽기도 합니당. 역시 제대로 role-play 를 못하고 있어서 문제가 되긴 하지만 ;;


그 다음은 역시 직장을 옮긴것. 안 좋은 일로 나와서 한달가량 놀다가 다른곳에 입사가 되었는데 실질임금이 좀 오른것이나 임금체불이 없다는것, 일하기 편하다는 점등은 좋은데 근무시간이 늘어났다는것은 별로 환영할만 하지 못하다는. 특히 토요 격주 휴무가 사라져 버린건 타격이 좀 있슴다.


다음은, 글쎄, 아, 뒹굴고 있는 온라인 사이트가 엄청나게 많아졌다는 정도랄까나. 작년까지 많아야 5~6 군데를 돌아다녔었는데 지금은 대충 세어봐도 15 군데는 넘는거 같슴다. 사실 그냥 즐겨찾기 목록만 늘어난건 아닌거 같슴다. 짐승은 이제 더 이상 '온라인' 자체만으로 희망적인 무언가가 될거라고 생각하지 않슴다. 온라인을 대하는 근본적인 가치관이 바뀌었다고 해야 할까나... 암튼 늘어난 목록 덕분에 광고 한번 할때 시간은 더 걸림다. -ㅅ-;


그 다음... 없심다. -_- 없던 앤이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것도 아니고, 매달 갚아야할 빚은 더 많아져 버렸고, 집으로 부터의 압박도 마찬가지고, 등등.


글고보니 단촐-_- 하기도 하고 더 정확하게 말해서 무미건조한 축생임다. 요즘은 알콜성 치매증세가 심해져서 내가 이걸 왜 두들기고 있는지도 모르겠심다. 일이나 할걸. -_-


암튼 추운 날씨에 다들 건강 조심하시고 2005 년 멋지게들 시작하시길. 희망하는 모든 일들이 다 잘되시길 바래봅니당.


그럼... 철푸덕 _(_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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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럼에 초대합니다 - 자본주의 이후의 삶

 

 

 

마포사회포럼은 반전반자본주의 노동자운동 '다함께'가 주최합니다.
포럼에서는 사회 연대와 공익을 위한 캠페인과 주장을 소개하고 공유할 수 있습니다.
포럼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어 서로의 경험과 주장을 함께 나누는 토론 광장입니다.

 

 

일시 : 2005년 1월 12일 수요일 오후 7시30분
장소 : 신촌 책사랑방 ( 지하철 신촌역 6번 출구앞 )
연락처 : 019-391-2789
블로그 : blog.empas.com/wp2020
* 책사랑방은 1인당 이용료가 3천원입니다. 참가비를 준비해 주세요 ^^

 

 

얘기해볼 거리들

 

미래 사회에서도 경쟁은 필요하지 않는가
여성억압은 사회주의에서도 있지 않았는가
모든 혁명은 관료화하지 않는가
인간 본성 때문에 다른 세상은 불가능하지 않는가
사회주의는 실현 가능한가
구 소련이 사회주의였나
'민주적 사회주의'는 가능한가

 

 

읽을 거리들

 

다른 세계의 구상

자본주의 이후의 삶은 어떨까, 조너설 닐 <미국의 베트남 전쟁>의 저자
반자본주의 선언, 알렉스 캘리니코스, 책갈피, 제2장, 제3장
파레콘, 마이클 앨버트, 북로드
역사의 복수, 앨릭스 캘리니코스, 백의, 제4장 시장을 넘어서
알렉스 캘리니코스와 마이클 앨버크 사이의 토론[영어]
주대환 민주노동당 정책위의장의 사회민주주의
서유럽 사회주의의 역사, 이안 버첼, 갈무리, 제1부
노동 계급 문화는 있는가?, 린지 저먼 영국전쟁저지연합 소집자

 

 

혁명의 진실들

 

민중의 세계사, 크리스 하먼, 책갈피, pp. 519~548
러시아 혁명의 진실들, 빅또르 세르쥬, 풀무질
러시아 혁명은 어떻게 패배했는가?
'중국 사회주의'의 진실
소련 여성과 페레스트로이카, 하니 로젠버그, 한울[절판]
알려지지 않은 사회주의자 이야기
헬렌 켈러 아인슈타인 존 레논 조지 오웰 외; <진보정치>와 <다함께> 가운데

 

 

 

존 바에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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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함께] 2005년 대학 총학생회 선거를 돌아보며 /

다함께 45 호

2005년 대학 총학생회 선거를 돌아보며 / 여전히 강력한, 그러나 위기를 겪는 조직 좌파

- 정병호

http://alltogether.or.kr/

 

 

2005년 대학 총학생회 선거 결과를 두고 학생 운동 내에서 논란이 많은 듯하다. ‘비운동권’을 표방하는 후보가 연세대, 이화여대, 한양대, 성균관대, 한국외대, 서강대 등 수도 서울의 주요 사립대학에서 대거 당선했다는 점 때문이다.

 

<조선일보>와 같은 우익들은 이 점을 이용해, 마치 운동권 쇠퇴와 비운동권 강세가 장기적 추세인 양 호들갑을 떤다. “비운동권의 약진은 …… 학생운동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이 늘어났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아쉽게도 일부 학생 운동 활동가들도 이런 패배적 생각을 공유하는 듯하다. 학생운동 내에서도 “운동권과 비운동권의 구분은 무의미해졌다”는 평가들을 심심치않게 듣게 됐다.
그러나 올해 선거를 사회 전체의 세력 관계와 연관지어 바라본다면, 이러한 분석이 사실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올해 선거는 대중 급진화와 노무현의 우경화 과정에서 진행됐다는 점에 큰 영향을 받았다.

 

노무현 정권은 자본가 계급의 일부 뿐만 아니라 피억압 대중 조직의 일부에도 자신의 지지 기반을 두고 있는 포퓰리즘 정권이다. 이 점 때문에 탄핵에 반대하는 시위 규모와 노무현의 파병 강행에 반대하는 시위 규모 사이에 커다란 격차가 발생했던 것이다.
그런데 탄핵 이후, 그리고 최근에 가속화되는 노무현의 우경화 때문에 노무현의 왼쪽 지지 기반에 정치적 공백이 생겨났다. 지난 2002년 대선 때 노무현을 지지했고 올해 초 탄핵에 반대했지만, 노무현의 우경화를 접하고 실망하면서 아직 새로운 정치적 거처를 찾지 못하여 혼란스러워 하는 사람들이 주변에 광범위하게 존재한다.
바로 올해 대학 총학생회 선거는 노무현의 우경화에 따라 노무현 왼쪽 지지 기반이 급진화함과 동시에, 이 급진화가 아직은 학생 운동 조직 좌파의 이데올로기보다는 오른쪽에 머물면서 형성되는 정치적 공백을 메우기 위한 경쟁의 장이었다. 이 때문에 운동권과 비운동권이 이데올로기적으로 중도자유주의 혹은 중도좌파적 스펙트럼으로 수렴되는 것처럼 보이는 현상이 벌어졌던 것이다.

 

가령 이화여대의 경우 탄핵반대 운동에 적대적이던 우파적 후보가 당선했는데, 이들이 선거 운동 기간에는 탄핵반대 운동과 반전 운동에 대한 우파적 입장을 분명하게 드러내지 않았다. 자신들의 우파적 원칙을 그대로 내보였다가는 분명히 낙선할 것이라는 급진화 압력이 작용했을 것이다.
반면 학생 운동 좌파들은 대다수 급진 좌파이기 때문에 앞서 지적한 정치적 공백을 메우기 위해서는 나름대로 타협이 필요하다는 점을 인식하고 있었다. 실제로 학생회는 공동행동기구이므로, 당연히 이전의 관성대로 정치조직의 강령을 학생회에 그대로 적용하는 방식을 고수하는 것은 현명한 태도가 아닐 것이다. 게다가 경제불황의 심화에 따라 학생들이 느끼는 교육서비스 저하와 경제적 압력의 증가에 대한 불만을 투쟁으로 조직해야 한다는 압력이 어느 때보다 커졌다.

 

이런 상황에서 학생들의 교육환경을 개선하는 복지 공약이나 등록금과 청년 실업 문제 등을 주요 정책으로 내놓는 것을 두고 ‘운동권의 비권화’라고 비판하는 것은 부적절한 비판일 것이다.
그러나 일부 운동권 후보들은 타협의 정도가 지나친 경우도 있었다. 가령 서강대의 한대련 계열과 연세대의 한대련+PD 계열 후보들은 학생회의 ‘정치적 중립성’ 압력에 타협함으로써 의도치않게 비운동권 후보의 의제에 더 힘을 실어주는 격이 됐다.
고려대와 서울대의 반미청년회 계열 후보들은 노무현 왼쪽의 정치적 공백을 좌파민족주의적 의제로 메우려 했다. 그런데 이들은 “강한 나라 강한 고대”, “동북아 물류, 교통의 중심지. 경제강국 COREA” 같은 슬로건을 내세우면서, 한국 지배계급과 노무현이 갖고 있는 아류제국주의적 열망에 무비판적인 태도를 취하는 과도한 타협을 취했다.

 

사실 올해 총학생회 선거가 앞서 지적한 정치적 공백을 메우기 위한 경쟁이었다면, 그 공백을 누가 메우느냐는 전적으로 정치적?조직적 영향력에 달려 있다. 서울대, 경희대, 고려대 같이 학생 운동 조직 좌파들이 강력한 곳에서는 비운동권이 이 공백을 메우지 못했다. 반면 비운동권이 당선된 한국외대나 신촌 지역 대학들의 경우 좌파가 취약해진 대학들이었다.
학생 운동 조직 좌파가 일부 대학에서 취약해진 데에는 복합적인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대체로는 조직 좌파의 이데올로기 위기와 학생회 개입의 문제점에서 찾을 수 있다.
조직 좌파의 이데올로기적 위기는 그들이 추구했던 대안 사회(북한 혹은 소련)가 위기를 겪으면서 커졌다. 이 과정에서 조직 좌파 내에서 점차 이데올로기적 분화가 촉진되고 있는 듯하다.

 

게다가 부분적으로는 정치조직과 학생회를 뒤섞어서 활동한 문제점도 있었다. 이것이 낳는 두 가지 측면의 문제점을 지적해보겠다.

 

첫째, 공동행동기구인 학생회를 정치조직처럼 운영하다보니 새롭게 급진화하는 학생들을 충분히 개방적으로 대하지 못했다. 이 때문에 우리는 몇 년 전부터 학생들의 급진화가 종종 기존 학생운동 조직의 영향력 밖에서 표현되는 것을 보게 됐다. 가령 여중생 촛불 시위나 탄핵 반대 시위 등에서 많은 학생들이 학생 운동 조직 좌파가 운영하는 학생회와 별도로 개별적으로 참가했다.

 

둘째, 정치조직이 학생회 활동에서 비롯하는 개량주의적 압력들로부터 자유롭지 않게 돼, 급진 정치조직의 이데올로기를 발전시키거나 활동가들을 이데올로기적으로 재생산하는 능력이 저하됐다.
앞서 나는 공백을 메우느냐는 좌파의 영향력에 달려 있는 것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좌파가 얼마나 회복하느냐에 따라 내년 선거 결과는 올해와 또 달라질 수 있다. 실제 몇 년 째 비운동권이 당선된 성균관대의 경우,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조직 좌파들이 몰락해 커다란 공백을 낳게 됐지만 최근 연대회의와 한총련 등의 좌파들이 그 공백을 메우기 시작했다.

 

역대 비운동권을 표방한 총학생회는 대부분 학생들의 경제적 권익을 보호하는 데에도 운동권 총학생회보다 못한 경우가 많았다. 이 때문에 비운동권이 단과대 학생회까지 뿌리를 내리거나, 비운동권의 강세가 오랫동안 지속되는 대학은 거의 드물었다.
이는 앞서 언급한 ‘비운동권 대세론’이 큰 그림에서 보자면, 설득력이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기존 운동권의 정치적 위기가 영향력의 축소를 가져오긴 했지만, 여전히 건재하다.

 

또한 새로운 급진화의 분위기가 나타나고 있다. 물론 학생들의 의식 급진화가 곧바로 행동으로 표현되지는 않고 있다. 이는 학생들을 짓누르는 사회적 압력이 경제 불황 때문에 매우 커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종류의 급진화는 폭발적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 우리는 여중생 촛불시위나 탄핵 반대 시위 등에서 언뜻 이런 잠재력을 보았다.

 

새 세대 학생운동은 우익에 맞서는 운동, 학생들의 교육 서비스와 경제 조건 악화에 맞서는 투쟁, 전쟁과 신자유주의와 같은 세계적 부조리에 맞서는 급진적 저항을 얼마나 더 굳건히 건설하느냐에 따라 성패가 달려 있을 것이다.

 

여전히 강력한, 그러나 위기를 겪는 조직 좌파

 

 

학생회 선거가 다가오면 어김없이 ‘학생운동 위기’론이 유행한다. 물론 늘 보수 언론의 과장이 섞인다. 그럼에도 위기를 부정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

 

1990년대 후반부터 제기된 위기론은 아직도 뚜렷한 해결책이 나오지 못한 채 학생 활동가들의 머리를 짓누르고 있다.
학생운동의 사회적 파급력이 전보다 약해졌다는 점, 학생들 사이에서 학생운동 조직들이 부분적으로 지지를 잃었다는 점, 학생운동 조직들이 활동가 재생산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점 등이 위기론의 내용들이다.

 

학생운동 위기의 원인은 두 측면에서 접근해 볼 수 있다. 먼저 기존 학생운동의 이데올로기 위기를 들 수 있다.
학생운동의 주요 정치경향 중 하나이던 PD 경향은 애초 소련을 모종의 ‘사회주의적’ 대안으로 삼고 있었는데, 1990년을 전후로 소련·동구권이 몰락하자 위기를 겪게 됐다.
1970년대 서구의 급진 좌파들이 스탈린주의에 환멸을 느끼면서 포스트모더니즘으로 전환한 것처럼, 소련·동구권 몰락 이후 PD 경향은 ‘정체성 정치’를 포함해 다양하게 분화해 간다.
PD 경향 중 연대회의는 기존 PD가 “노동자계급이라는 ‘자명한 주체적 환상’”에 빠져 있었고, “계급투쟁 중심성에 대한 선험적이고 기계적인 승인”을 갖고 있었다고 자기 비판하며 노동계급(투쟁) 중심성을 버렸다.
그리고 “투쟁은 하나가 다른 하나로 환원될 수 없다”면서 신자유주의에 피해를 보는 세력의 “다차원적인 투쟁”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대장정≫ 34호, 2001년 3월).

 

전학협의 전신 학생연대는 “자유로운 인간들의 공동체”를 지향하면서 맑스주의를 반권위적 아나키즘에 가깝게 해석했다.
그 영향을 받은 전학협은 2002년 사회당 대선 패배 뒤 급속히 자율주의로 기울어졌고, 올해에는 급기야 전학협을 해체하고 각 학교에서 소규모 자율주의 토론그룹으로 남게 됐다.
한편, 주체주의자들이 지도한 NL 경향은 소련 몰락 후에 PD만큼 큰 위기를 겪지는 않았다. 이들이 대안으로 삼던 ‘우리식 사회주의’ 북한이 소련과 동구권이 몰락했는데도 건재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주체주의가 민족주의를 전폭 수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NL 경향은 한반도에서 제국주의적 억압 경험으로 말미암은 대중의 좌파 민족주의 정서와 상당히 융합할 수 있었다. 이런 이유들 때문에 1990년대 대부분 동안 NL 경향이 다수가 될 수 있었다.

 

그러나 1990년대 중반 들어 가시화한 북한의 식량난과 경제위기 때문에 NL 경향 내에서도 북한을 대안으로 삼는 것에 대한 회의가 자라나기 시작했다.
이른바 남한 운동의 주체적 역량을 강화해야 한다는 주장이 고개를 들면서, NL 경향 내부에서 분파들이 생겨났다(가령 사람사랑 분파 출현).
주체주의자들이 학생들 사이에서 다소 지지를 잃은 것은 정권의 탄압과 마녀사냥 탓이 컸지만, 이렇듯 이들이 추구하는 대안이 많은 학생들에게 설득력이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한편, 학생운동 위기의 다른 한 원인은 학생들의 객관적 처지 변화와 관련돼 있다. 1990년대 후반부터 심화된 경제 위기의 영향으로, 학생들이 불안정한 노동시장에 종속되면서 원자화한 점을 들 수 있다.

 

이는 주로 학생회 위기로 드러났다. 취업 준비, 학점 경쟁, 아르바이트 등 때문에 학생운동이 주된 영향력을 행사해 온 학생회에 대한 학생들의 관심과 참여가 떨어졌다.
물론 학생회 위기를 전적으로 객관적 한계 탓으로만 돌릴 수는 없다. 학생들의 원자화는 일면 현실 순응적 태도로 드러났지만, 실제로는 만연한 청년실업, 등록금 인상, 교육 서비스 하락 등 때문에 커다란 불만을 잉태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소련·동구권 몰락 뒤에 지적 회의주의가 풍미했음에도, 1990년대 후반부터 학생과 청년들 사이에서 서서히 급진화가 진행됐다.
IMF를 경험하면서 미국에 대한 반감이 증대했고, 대선에서 ‘진보적’ 후보에 대한 지지가 꾸준히 증가했다. 대학에서 홍세화, 진중권 등 사회비판적 지식인들이 인기를 끌었다.

 

그러나 기존 학생운동 조직들은 스탈린주의적 관성 때문에, 급진화하는 개인들을 개방적으로 대하려 하지 않았다.
학생회 집행부를 자신의 정치 조직의 강령에 동의하는 사람들로만 구성한다든가, 학생회를 학생들의 의사와 무관한 자신들의 정치 투쟁 일색으로 운영한다든가 하는 오류를 범했다.
사실, 기존 운동권의 비민주성은 정치적 대안의 문제점과 떼어 내어 생각할 수 없다. 기존 운동권은 스탈린주의라는 자신들의 정치적 대안이 설득력이 없게 되자, 비정치적이거나 비민주적인 방식으로 학생들을 만나게 됐다.
가령 한총련 공식 행사에서 문화제나 장기 자랑 등이 주종을 이루고, 기존 학생운동 조직이 주도하는 연합체에서 토론보다는 형식적 규율이 강조되는 것은 이와 연관돼 있다.

 

이 때문에 우리는 몇 년 전부터 학생들의 급진화가 종종 기존 학생운동 조직의 영향력 밖에서 표현되는 것을 보게 됐다.
가령 여중생 촛불 시위나 탄핵 반대 시위 등에서 많은 학생들이 학생운동 조직 좌파가 운영하는 학생회와 별도로 개별적으로 참가했다.
작년과 올해 서울대 총학생회는 소위 ‘비운동권’을 표방했는데도, 반전 운동에 다른 어느 운동권 총학생회 못지 않은 열의를 보였다.

 

이는 학생운동 위기론이 일면적이라는 사실을 보여 준다. 기존 운동권의 정치적 위기가 자신들의 영향력을 축소시키긴 했지만, 새로운 급진화 분위기가 나타나고 있다.
물론 학생들의 의식 급진화가 곧바로 행동으로 표현되지는 않고 있다. 이는 학생들을 짓누르는 사회적 압력이 경제 불황 때문에 매우 커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종류의 급진화는 폭발적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 우리는 여중생 촛불시위나 탄핵 반대 시위 등에서 언뜻 이런 잠재력을 보았다.

 

새 세대 학생운동은 반전·반자본주의·반우익 운동의 성장을 고무하는 데에 얼마나 더 굳건히 나서느냐에 성패가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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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함께] 운동 내 논쟁 - 탈북자의 국내 입국을 환영해야 한다

다함께 45 호

운동 내 논쟁 - 탈북자의 국내 입국을 환영해야 한다 - 최일붕

http://alltogether.or.kr/

 

 

주체주의자들은 남한(또는 제3국)에 입국하는 탈북자를 ‘사실상’ 환영하지 않는다.
내가 ‘사실상’이라고 강조한 이유는 그들이 탈북자의 국내 입국을 ‘반대한다’고는 결코 분명히 말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으레 그렇듯이 자신들의 스탈린주의적 입장을 은폐하기 위해 정치적으로 솔직하지 못한 태도를 취하고 있다.

 

주체주의자들의 주장은 이렇다. 1995년 대홍수 이후 북한 주민 가운데 일부가 양식을 구하러 중국에 가는 일이 생겨났다.
그들의 대부분은 양식만 구하고 곧바로 귀국한다. 장기 체류하고 있는 나머지도 대부분은 북한 귀환을 원한다. 오직 극소수만이 남한이나 제3국으로 망명한다.
그러므로 재중국 ‘탈북자’는 대부분 어느 나라에나 있는 불법체류자일 뿐이다. 그런데도 탈북자의 남한 입국이 증가하고 있는 것은 순전히 기획탈북 때문이다.
기획탈북 조직자들은 북한 체제의 전복을 기도하는 미국 정보기관들과 남한 우익단체들, 그리고 탐욕스런 중국 브로커들로 이뤄진 국제 커넥션이다.

 

그러나, 음모에 ‘유인’돼 ‘사실상의 납치와 인신매매’로 입국하는 것만 제외하면 탈북자가 ‘어느 나라에나 있는 불법체류자일 뿐’인데도 왜 그들의 강제송환을 (암묵적으로) 지지하는 것일까? 주체주의자들은 한국에 오는 남아시아 출신 이주노동자의 강제추방도 지지할까?
그들은 탈북자들이 남한 입국 후 여러 고통을 겪고 있다면서도  그것에 대해 어떻게 해야 한다는 얘기는 한 마디도 하지 않는다.
때로 일부 주체주의자들은 남한 거주 탈북자들의 정착을 정부가 지원해야 한다고 말한다(가령 12월 2일 5시 고대법대 신관에서 열린 토론회에서 반미청년회 정태흥 대표의 답변).
그러나 기획탈북을 통해 들어왔다 해서 환영하기가 내키지 않는 사람들을 위해 정부가 돈을 쓰라고 요구한다는 것은 모순이거나 생색일 뿐이라는 지적을 받을 수 있다.
결국 ‘기획탈북’에 의한 입국(‘기획입국’)이 원죄라는 것이다. 주체주의자들은 탈북자의 남한 이주를 사실상 반대하는 이유에 대해 북한 체제 전복과 침략을 위한 미국의 음모(‘기획탈북’)라는 견지에서 설명한다.

 

이런 주장의 문제점은 첫째, 미국이 북한 주민의 대량 이탈과 그들의 자국 입국을 원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북한인권법은 위선의 산물이다. 미국은 인권이라는 허울 좋은 이름으로 탈북자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데만 관심이 있을 뿐, 탈북자 인권과 수용에는 진정한 관심이 없다. ‘다함께’ 김하영 동지는 이렇게 지적한다.
“미국이 노골적인 대북압박을 해 온 1990년대 내내, 그리고 부시 정부 들어서도 평범한 탈북자들의 문제는 관심 밖이었다. 정치적 이용 가치가 높고 고급 정보를 가진 소수의 고위층을 제외하면 말이다.
“미국은 한국전쟁 이후 지난해까지 총 8명(김경필 전 베를린 주재 북한 이익대표부 서기관 부부 등 외교관·과학자 등)에게만 망명을 허용했다.……
“미국은 탈북자를 ‘프라이오리티[우선순위] 2’ 대상에 지정함으로써 이데올로기적 효과를 노리는 동시에, 탈북자의 한 해 망명 상한선을 정해 탈북자들이 몰려드는 것을 막으려 한다.
“2005년의 탈북자 망명 상한선은 5백 명 수준으로 결정될 예정이다. 쿠바인 망명 실제 허용이 망명 상한선의 10퍼센트 수준에서 이뤄진 것을 감안하면, 미국 정부가 탈북자 5백 명을 다 받아들이지 않을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벌써부터 미국 정계에서는 탈북자 수용의 문제점이 지적되고 있다. 예컨대, 최근 미 하원 법사위는 국토안보부에 서한을 보내 북한이 북한인권법을 악용해 간첩이나 테러리스트를 미국에 잠입시킬 가능성을 경고했다.
“미국은 이라크에서 온 난민(신청자)들에 대해 구금을 명하고 있다(국제앰네스티 한국지부 소식지 2003년 5∼6월).
“미국의 이런 위선은 이미 여러 차례 드러났다. 북한인권법의 상원 통과를 눈앞에 뒀던 올해 9월 27일, 미국측은 중국 상하이 미국인 국제학교에 진입한 탈북자 9명을 추방했다. 추방이 곧 체포와 강제 송환으로 이어질 것이 뻔한데도 말이다.
“북한인권법이 상하원을 모두 통과한 지난 10월 말에도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 러시아 블라디보스톡 주재 미국 총영사관에 40대 북한인(연해주 지역에서 일하던 북한 노동자)이 들어와 망명을 신청했다. 그런데 미국 총영사관측은 미국 망명을 허용하지 않기로 결정했고 그를 러시아 당국에 인도할 방침이다.
“지난 11월 23일에는 미국 워싱턴주 시애틀 이민법원이 북한 특수부대 지휘관 출신이라고 밝힌 탈북자의 정치 망명 요청을 기각했는데, 그 이유는 ‘북한 출신임을 증명하기가 어렵다’는 것이었다.
“난민들은 안전을 위해 신분증과 여권을 없애는 경우가 허다한데, 각국 정부는 이런 점을 난민 요청 기각의 사유로 곧잘 이용하곤 한다.……”

 

둘째, 주체주의자들의 주장과는 달리, 탈북자가 ‘기획탈북’ 조직자들의 접촉과 유인에 의한 사실상의 납치와 인신매매를 통해 국내 입국하는 것은 아니다.
탈북자가 만일 북한에서 어지간히 살 수 있었다면, 또 중국에서 체류 또는 거주할 권리가 주어졌다면, 남한으로 오지도 않을 것이다.
만일 북한 인접국들인 중국과 남한이 탈북자의 이주 권리를 인정한다면 기획탈북이 아예 필요가 없을 것이다. 주체주의자들은 기획탈북이 존재하는 이유에 대해 얘기하지 않는다. 이주와 왕래의 자유에 대해 침묵한다.
중국 체류자든 남한 입국자든 탈북자를 고통에 빠뜨리는 것도 바로 이주와 이주자에 대한 억압이다. 주체주의자는 북한·중국·남한이 이 자유를 억압하는 것을 비판하지 않는다.
오히려 주체주의자들은 해결책으로 기획탈북 근절을 요구한다. 이것은 북한·중국·남한 정부들이 기획탈북을 빌미로 북한 이탈 이주자를 억압하는 것을 사실상 지지하는 것이다.
지금 북한·중국 정부들은 북한 주민의 이주 자유를 억압하면서 ‘기획탈북’을 이유로 대고 있다. 남한 정부도 이런 태도를 부분적으로 공유하고 있다.

 

셋째, 주체주의자들은 기획탈북이 국제 문제를 일으킨다고 주장한다. 이 때문에 중국 정부는 탈북자 색출·송환을 하고, 이는 재중 북한인 불법체류자들의 삶을 더 어렵게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기획탈북이 국제 문제를 일으키는 것은 아니다. 탈북자의 존재를 둘러싸고 남북한과 중국·미국의 정부들이 ‘체제 우위’ 언쟁을 하는 것이 ‘국제 문제’의 실상이다.
브로커 등이 연루된 남아시아인들의 ‘기획이주’ 때문에 한국 정부와 필리핀·방글라데시·네팔 등의 정부들이 서로 갈등을 일으키지는 않는다.
진보진영이 이 가운데 북한 편을 드는 것이 옳은가? 오히려 아무 편도 들지 않고 오직 탈북자만을 옹호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들은 거의 다 피억압자들이다. 잘 먹고 잘 사는데도 조국을 떠나고 싶어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넷째, 주체주의자들의 북한인권법과 기획탈북 등 미국의 음모에 대한 반대는 북한 내의 억압에 침묵하는 한은 설득력이 없다.
물론 진정한 진보운동가라면 미국의 음모에 찬성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미국의 인권 미사여구에 가려진 위선을 들춰낼 것이다. 그리고 진정한 진보운동가는 미국의 대북 압박과 적대 정책에 반대한다.
하지만 전쟁도 아닌 고작 음모와 유인에 의해 붕괴될 위험이 있을 만큼 허약한 체제는 어떤 체제인가? 미국의 그 알량하고 위선적인 권리조항에 이끌려 수많은 북한인들이 탈북할 것이 두렵다면 그런 체제는 커다란 문제점을 안고 있다고 스스로 고백하는 셈이다.
1989년 동독의 숙련노동자들과 기술자들이 대거 서독으로 이탈했을 때, 그리고 몇 주 뒤 수백만 명이 베를린장벽 제거를 요구했을 때 결국 동독 체제의 문제점 때문에 그랬던 것 아닌가?
물론 서독 체제가 더 나았다는 것은 아니다. 동독인들의 환상은 분명히 환상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들은 그들이 과거에 살았던 체제가 더 좋았다고 향수에 젖지는 않는다. 만일 그렇다면 옛 동독 지역에서 가장 인기 있는 당은 스탈린주의 정당이어야 할 텐데, 그렇지 않다. 옛 동독 공산당(SED)의 후신인 민주사회주의당(PDS)은 사회민주주의 정당으로 변신함으로써만 생존할 수 있었다.
북한 주민의 중국 이동이 단지 대홍수로 말미암은 경제적 궁핍 때문이었다는 주장은 북한이 사회주의가 아니라는 반증일 뿐이다.
맑스주의에서 사회주의는 그 정의상 자본주의보다 진보하고 질적으로 우월한 사회다.
아무리 큰물과 큰 가뭄이었다지만 자연재해에 그토록 취약하고, 아무리 많은 이재민이었다지만 자기 인민도 제대로 먹이지 못하는 체제가 무슨 사회주의라는 말인가?
사실, 북한 경제는 1970년대 말부터 성장이 감속하기 시작해 1980년대 말에는 정체하고, 1990년대 대부분 동안에는 실제로 수축했다.
그것은 ‘우리식 사회주의’이기는커녕 옛 소련 경제의 리듬에 종속돼 있었을 뿐 아니라, 사실은 세계경제의 리듬에 종속돼 있다. 만일 북한 한 나라에서 사회주의가 가능했다면 이런 일은 일어날 수 없다.

 

다섯째, 주체주의자들은 궁극적 해결책으로 북한의 경제 사정과 식량 사정이 근본적으로 개선되는 것을 든다. 그래서 이를 위해 미국의 대북관계 정상화, 남북경협 강화, 대북 식량지원·전력 지원 등을 요구한다.
그러나 이것은 미국과 남한·일본 정부들이 그런 요구를 수용하는 제스처를 취할 때 그들에 대한 개량주의적 태도를 낳을 것이다.
이미 2000년 이후 김대중 정권 후반부에 이런 일이 일어났다.
제국주의와의 ‘평화공존’이 지속가능할까? 마르크스주의적 분석은 제국주의가 자본주의의 필연적 결과로 발전하는 자본주의의 특정 단계임을 강조한다.
북한 민중의 고통은 자본주의 세계 체제와 북한 체제가 그들에게 가하는 착취와 억압의 멍에 자체를 제거할 때 근본적으로 해결될 수 있다.
물론 그러기 전에라도 우리는 국내 입국하는 북한 출신 노동자·민중을 환영해야 한다.

 

미국의 음모가 사실일지라도 탈북자 인권 외면의 구실이 될 수는 없다. 미국 권력층의 일부가 장차 북한에 친미 정권을 세울 요량으로 해외망명 임시정부를 구성할 북한 관료 출신 극소수 탈북자들을 비호할 수 있다. 그럴지라도 그것 때문에 수많은 평범한 탈북자들의 불행이 외면돼도 되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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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함께] “대학평준화만이 해결책입니다”

다함께 45 호

“대학평준화만이 해결책입니다” - 강동훈 (정리)

http://alltogether.or.kr/

 

 

최근 출간된 ≪학벌사회≫의 저자 김상봉 ‘학벌없는사회’ 정책국장에게서 수능 부정의 원인과 해결책에 대해 듣는다


 

이번 수능시험에서 핸드폰을 이용한 부정 행위와 대리 시험 등이 밝혀지면서 일각에서는 처벌을 통해 시험의 정당성을 확보해야 한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이런 일들이 벌어지게 된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지난해 수능시험이 끝난 뒤에는 많은 학생들이 자살을 했습니다. 다행인지 어쩐지 올해는 자살한 학생은 거의 없지만 많은 학생들이 범법행위를 했다는 것이 드러났습니다.
결국 우리 나라 교육은 학생들을 극한에 몰아 자살과 범법행위 중에서 선택하도록 강요하고 있는 셈입니다.

 

어느 대학에 가느냐가 인생을 결정하는 상황에서 대학 진학은 생존에 직결된 문제고, 학생들의 신분을 결정합니다. 공부, 학문 다 웃기는 소리죠. 어느 대학을 나오느냐 하는 것은 인생이 걸린 일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학생들은 사생결단의 심정으로 이 경쟁에 임할 수밖에 없습니다. 교육의 본래 의미인 자기 실현과 계발은 사라지고 1점이라도 더 얻기 위한 경쟁만이 남았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부정행위는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법으로 막을 수가 없습니다. 인생이 걸린 일이기 때문에 다양한 기술이 개발될 겁니다. 돈 있는 집 부모들은 성형 수술을 해서라도 대리 시험을 치게 할 겁니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대학평준화를 도입하는 방법밖에 없다고 봅니다.


 

대학평준화는 왜 필요합니까?

 

평준화에 대한 이데올로기 공세가 너무 심해서 ‘평준화’ 하면 다들 하향 평준화를 얘기하고 평준화가 교육을 망치는 주범인 양 얘기하는데, 저는 교육이 평준화되는 것은 너무나 당위라고 봅니다.
지금 우리 나라 교육이 망가지는 이유는 [대학이] 서열화해 있기 때문입니다. 1류 대학과 3류 대학이라는 구분이 외피 상으로는 교육적으로 보이지만, 실질적으로는 획일적인 서열 속에서 사람들의 신분을 나누는 기준이 되고 있죠.

 

인간의 능력은 무수히 다양합니다. 교육이 정상화된다는 것은 각자가 다양한 소질을 다양하게 계발할 수 있도록 해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 나라의 교육은 한 가지 방식으로 줄을 세우고 모든 학생들이 시험 선수가 되길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 나라 교육의 모든 부조리, 경쟁력 저하, 모든 일탈의 원인이죠.
모든 사람이 똑같은 방식으로 시험선수가 돼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대학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각 대학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발전할 수 있도록 하자면 서열화를 없애야만 합니다.


 

최근에 쓰신 ≪학벌사회≫라는 책에서 대학평준화 방안을 제시하셨는데, 그에 대해 소개해 주시죠.

 

대학평준화가 추첨을 해서 학생을 배분하는 것은 아닙니다. 특정 대학·지역으로 몰릴 필요가 없는 구조를 만들어 주는 것이 대학평준화의 기본 취지입니다.
이것을 실행하기 위한 1차적 방법이 국립대학의 통합 네트워크입니다. 지금 서울대를 제외하면 지방의 거점 국립대학들은 이미 평준화돼 있습니다.
서울대를 묶어서 처음부터 평준화하자고 하면 무리가 있기 때문에 한시적으로 서울대 학부를 한 10년 정도 폐지하고 지방 국립대를 중심으로 통합네트워크를 구성하는 겁니다. 그리고 이것이 자리를 잡으면 그 때 서울대를 포함하는 겁니다.
그리고 그 때는 수도권 인구를 고려해서 서울대 학생 수를 대폭 늘려야 합니다. 예를 들어 베를린대학은 학생수가 10만 명입니다. 베를린 인구가 3백만∼4백만 명 정도인데도 그렇습니다. 따라서 서울대 학생 정원을 훨씬 더 늘려서 대중적 국립대학이 돼야 합니다.

 

그러면 사립대학들은 어떻게 하느냐 혹은 연고대가 나서서 설치지 않겠느냐고 얘기하는데, 그건 쉽게 되지 않을 겁니다.
국립대학은 지금도 사립대학에 비해 등록금에서 우위에 있고, 장기적으로는 국립대학들은 무상으로 가야 한다고 봅니다. 그러면 사립대학들은 경쟁이 안 될 겁니다.
장기적으로 사립대학은 공립대학 체계로 흡수해야 합니다. 지금 사립학교법 개정 문제에서 보듯이 사립학교 재단들은 교육을 할 자격이 없습니다. 사립학교법 개정 문제로 학교 폐쇄하겠다는 것을 보십시오.

 

한 걸음 더 나아가 실질적인 평준화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공직자 지역할당제’를 실행해야 합니다. 쉽게 말해 고시 할당제인데 방식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습니다. 지금처럼 고시를 계속 시행한다고 하더라도 인구비례로 고시를 할당하는 겁니다.
지금은 사법고시나 행정고시의 90퍼센트 안팎이 서울 지역 학교 출신입니다. 그리고 서울대, 연·고대가 60∼70퍼센트입니다. 그런데 인구비례로 할당하면 서울은 23퍼센트밖에 안 되죠. 결국 서울에 있는 대학에 기를 쓰고 올 필요가 없는 겁니다. 오히려 서울의 학생들도 지방의 대학들로 가게 될 겁니다.

 

미국의 경우에 의사나 변호사 자격증을 주 정부가 줍니다. 그러면 자연히 특정 지역으로 몰릴 이유가 없는 겁니다. 자연히 각 지역의 대학들로 분산되는 것이죠.


 

서울대 출신들이 정·재계를 장악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국립대 통합네트워크라는 것도 엄청난 저항에 부딪히지 않을까요?

 

시장주의자들은 말로는 시장에서 경쟁을 해야 좋은 결과가 나온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시장 경쟁은 독점이 없어지고 다양성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새로운 시도가 시장으로 들어오는 거죠.
하지만 모두가 대등한 상황에서, 독점이 없는 상황에서 서로가 다양성과 역동성을 갖고 경쟁하는 것이 필요한 것이지 기득권을 인정해 주는 것으로는 좋은 성과를 낼 수 없습니다. 지금 서울대학과 지방 국립대, 사립대 사이에 무슨 경쟁이 있습니까?
‘경쟁을 통해서 교육의 수월성을 담보한다?’ 그러나 한국의 고등학생들처럼 많은 공부를 하는 학생들이 어디 있습니까? 하지만 우리나라의 학생들처럼 대학 수학 능력이 부족한 학생들이 어디 있습니까?
그 까닭은 경쟁이 없어서가 아니라 경쟁이 왜곡됐기 때문입니다. 경쟁이 다양화해야 합니다.

 

그 말은 지금처럼 획일적인 시험 경쟁과 대학 서열은 안 된다는 겁니다. 각 전공 영역에서 경쟁을 할 때 진정한 경쟁력이 생길 수 있는 것입니다.
저는 서열화가 강고한 것처럼 보이지만 곧 무너질 거라고 봅니다. 왜냐면 최근 고교등급제가 얘기가 나오면서 그 전선이 분명해졌기 때문입니다.

 

지금 한국에서 시장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것은 독점을 인정해 달라는 것일 뿐이라는 점이 분명해졌고 이제 그것은 한계에 부딪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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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함께] 선거는 제국주의 점령을 안정시키지 못할 것이다

다함께 45 호

선거는 제국주의 점령을 안정시키지 못할 것이다 - 김용욱

http://alltogether.or.kr/

 

조지 W 부시는 “이라크인들은 [내년 1월]선거를 통해서 자기 운명을 스스로 개척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팔루자 학살도 선거를 안정적으로 치르기 위해서였다고 정당화했다.
그러나 이번 선거는 이라크인에게 선택권을 주기 위한 것이 아니다. 이라크인들에게 선택권이 있다면 먼저 점령을 끝낼 것이다. 미국은 지난 주 바레인에서 열린 이라크 지원 국제회의에서 대강의 철군 날짜도 밝히지 않았다.


 

11월 중순 수니파인 무슬림학자협회를 중심으로 47개 단체들이 선거 보이콧을 선언했다. 이것은 최근 언론에서 주목받은 17개 정당의 선거 연기 주장과는 의미가 완전히 다르다.
연기를 주장하는 자들은 꼭두각시 정부 총리 후보였던 아드난 파차치처럼 미군 점령을 지지한 자들이다. 이들이 연기를 요구하는 것은 선거에서 질 것을 우려하기 때문이다.
원래 선거 보이콧은 팔루자 대학살에 항의하기 위해서였다. 학살 이후 이른바 “수니파 삼각지대”에서는 반점령 정서가 더 극렬해졌다. 이것은 자연히 선거에 대한 극도의 불신으로 이어졌다. 
〈알 자지라〉와 가진 인터뷰에서 무슬림성직자연합의 압둘 살람 알 쿠바이시는 “외국 점령군이 있는 한 공정한 선거란 있을 수 없다!”고 일갈했다. 
사실, 이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정서이다. 팔루자 공격으로 죽은 사람의 수는 알라위 정부에 따르면 2천 명, 적신월사에 따르면 6천 명 이상이다. 
중동 전문 기자 패트릭 콕번은 이렇게 말했다. “한 도시를 박살내고, 대다수 주민을 난민으로 만든 다음, 그들 보고 점령군이 진행하는 투표에 참여하러 나오라고? 내가 들어본 가장 황당한 소리다.”

 

하지만 많은 시아파들이 선거에 참가할 것이다. 시아파의 가장 중요한 두 지도자인 알시스타니와 알사드르가 선거 참가를 독려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아파 지도자들이 선거 보이콧에 합류하지 않은 것은 매우 아쉬운 일이다. 이들이 선거 보이콧에 합류했다면 팔루자 학살과 미군 점령의 정당성에 결정타를 날렸을 것이다.
더구나 시스타니가 작성하고 있는 시아파 후보 리스트에는 심지어 알라위 같은 미국 부역자도 포함될 예정이다.
시아파 지도자들은 수십 년간 꿈도 꿀 수 없었던 시아파 주도 정부를 건립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타협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미국은 이 점을 이용하려 하고 있다.

 

하지만 시스타니와 사드르가 선거에 참가하는 것은 미국 정책에 동조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직접 팔루자 방어에 뛰어들지는 않았지만, 알사드르는 팔루자 공격을 비난했고, 지지자들에게 절대로 공격에 참가하지 말라고 권고했다.
사드르의 두 부관은 팔루자 공격에 격렬하게 반대했다는 이유로 체포당했다. 시스타니도 이러한 비판에 합류했다.
현재 그들은 선거를 점령을 끝낼 수 있는 하나의 수단으로 보고 있다. 바그다드의 대규모 시아파 거주지인 사드르 시에는 “독재 반대, 외국 점령 반대, 올바른 선거를 통해서만 이라크인들이 이라크를 이끌 수 있을 것이다.”라는 배너가 걸려 있다.

 

심지어 미국의 침략을 정당화하는 거짓말을 제공했던 아마드 찰라비마저도 “우리는 나자프 같은 대학살을 막아야 한다.”는 슬로건을 내놓으며 선거 후보로 나서려 하고 있다.
이것은 역겨운 일이지만, 그와 동시에 시아파 대중의 반점령 정서가 얼마나 강력한지 보여 준다. 많은 시아파 사람들은 지도자들이 부추긴 기대 때문에 선거에 기대를 걸고 있다.
한 시아파 상인은 AP와 인터뷰하면서 “투표일은 내 생애 가장 기쁜 날이 될 것이다. 선거를 통해 점령을 끝낼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물론 “선거를 통해 평화적으로 점령을 끝낼 수 있다”는 생각을 순진하다고 비판할 수도 있다.
하지만 더 중요한 점은 시아파가 선거에 참여한다고 해서 상황이 미국에게 유리하게 풀리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오히려 이러한 기대가 실망으로 드러나는 순간 미국은 더 커다란 저항에 직면할 것이다. 
이미 소수의 시아파들은 선거 이상을 바라보고 있다. 심지어 시스타니 지지자들 일부도 무장 저항에 참가하고 있고, 시스타니도 이것을 허용하고 있다.

 

선거를 앞두고 이라크인의 삶은 나아지기는커녕 더 악화하고 있다. 최근 <유엔개발보고서>에 따르면 60퍼센트의 농촌 인구와 20퍼센트의 도시 인구가 오염된 물을 마시고 있다.
침략 이후 영양 실조에 걸린 아동의 비율은 두 배로 뛰었고, 40만 명은 전염병에 시달리고 있다.
최근 바그다드의 전력 공급은 전쟁 이전보다 60퍼센트 이상 낮다. 팔루자 공습 이전 갤럽 여론조사에서 94퍼센트의 바그다드인이 전쟁 이후 살기 더 힘들어졌다고 답했다.
이러한 고통은 점령이 종결되지 않는 한 계속될 것이다. 애당초 모든 국제법과 UN조차 무시하고 침략을 강행한 미국이 선거 이후 협상을 통해 철군하지는 않을 것이다.

 

지금 선거에 기대를 걸고 있는 많은 시아파도 점령은 2004년 4월처럼 수니파와 시아파가 단결해서 단호하게 싸울 때만 끝낼 수 있다는 결론을 다시 한번 확인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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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19일, 세계 이주노동자의 날에 함께합시다. / 안와르 인터뷰

12월 18일은 지난 1990년 UN 이 '모든 이주노동자와 그 가족의 권리보호에 관한 국제 협약' 을 의결한 날로, 이주노동자 및 연대단체들이 이 법안에 대한 비준을 촉구하고 함께 투쟁할 것을 결의하는 날입니다. UN총회 의결이후 각국의 이주노동자들이 이 국제협약의 비준을 촉구하며 투쟁했지만 13 년이 지난 2003 년 에서야 겨우 20 여 개국의 국가들이 비준했을 뿐입니다.

대한민국은 이주노동자들을 수입할뿐 아니라 송출하는 국가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한국은 마치 일회용 젓가락, 건전지처럼 이주노동자들을 노동력으로 쓰다가 버리기만 할 뿐, 노동자로 인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한국판 노예제도 라고 악명이 높은 연수제도가 아직 온존하고 있으며, 노동권을 제약하고 기존에 일하던 노동자들을 마구잡이로 잡아다가 강제로 추방시키는 고용허가제의 시행을 강행하고 있습니다.

이주노동자들은 강제추방 중단, 미등록 이주노동자 전면 합법화, 고용허가제가 아닌 노동허가제, 작업장 이전의 자유를 비롯한 노동권 보장 등을 요구하며 지난 11월 28일 해단식을 가지기까지 만 일년을 넘는, 380 일 간의 명동성당 농성을 지켜냈습니다. 그 과정에 농성단 대표인 샤말 타파 를 비롯한 많은 이주노동자들이 체포되어 강제 출국 되기도 했으며, '죽거나 혹은 쫓겨나거나' 를 강요하는 정책에 좌절하고 분노하며 많은 이주노동자들이 스스로 목숨을 버리기도 했습니다.

그 동안 이주노동자들은 자신들의 문제뿐만 아니라 이라크 침략전쟁 반대를 비롯해서 한국인 노동자들의 문제에도 끊임없이 함께 싸우며 연대해 왔습니다. 그러한 활동들이 있었기에 한국 정부와 자본가들은 이주노동자들의 투쟁에 '반한 주의' 라는 딱지를 붙이고 '테러리스트' 라고 몰아붙이며 탄압을 강화하고 있는 것입니다. 정권은 체불임금 청산이나 사업장내 인권개선 요구 등 단순한 권리구제 요구는 반한활동에서 제외하고 있습니다. '테러리스트' 규정은 단지 이주노동자들이 '노동자는 하나다' 라는 사실을 일깨우고 앞장서서 실천해 왔다는 사실의 반증에 불과할 뿐입니다.

비록 강제추방이 진행되고 있고 노동허가제를 쟁취하지는 못했으며 농성단 해체이후 탄압이 더 강화되고 있는 측면도 있지만 이주노동자들의 문제를 그들 스스로의 힘으로 이야기하고 투쟁을 주도하며 한국 노동자들의 지지를 이끌어 낸것은 농성투쟁의 큰 성과이기도 합니다. 농성이 끝났다고 투쟁이 끝난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러한 성과들을 바탕으로 이주노동자 운동은 다시 시작할 것입니다.

노동귀족론을 내세우며 사회적인 동정심을 이용하여 정규직과 비정규직을 이간질 시키고 비정규직을 위하는듯 보였던 노무현 정권이 비정규 개악악법을 통과시키려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주노동자들에 대한 인종적, 민족적 차별감정을 이용하여 이주노동자를 공공의 적 으로 만들고 한국인 노동자와 이주노동자를 분열시키는 것 역시 전체 노동자에 대한 공격을 준비하는 것에 다름 아닙니다.

다시 시작하게될 이주노동자들을 위해서 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의 더 나은 삶을 위해서도 이주노동자 운동에 대한 더 강력한 연대를 건설하는것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돌아오는 일요일에 있을 세계 이주노동자의 날 기념 총력 결의대회에 함께 하는 것에서부터 그러한 연대를 만들어 갈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아래에 이번 노동자대회 일시와 연락처를 올려두겠습니다. 만약 오신다면 연락주세요.

그리고 아래쪽에 명동성당 농성단대표 안와르 씨가 '다함께' 신문과 인터뷰한 내용을 덧붙입니다. 일요일 더 많은 분들과 뵙기를 기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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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이주노동자의 날 총력 결의대회

일시 : 2004 년 12 월 19 일 (일요일) 오후 2 시
장소 : 서울 대학로 마로니에공원.
오시는 길 : 지하철 4 호선 혜화역 2 번 출구
연락처 : 018-503-7858 - 하이에나새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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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노동자 추방말라

 

 

다함께 45호
이주노동자 추방말라 - 안와르
http://alltogether.or.kr/

강제추방 중단과 미등록 이주노동자 전면 합법화를 위해 3백80일 간 명동성당에서 농성을 한 농성단 대표 안와르 동지가 농성 투쟁의 성과와 교훈에 대해 얘기한다.

이 농성은 우리가 스스로 결정해서 시작했다. 우리 자신의 힘도 너무 약하고, 아무 도움도 없이 우리가 농성을 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있었다. 그러나 단속을 피해 숨어 있는다고 해결될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 분명했다.

이 농성 투쟁의 가장 큰 성과는 우리 문제를 자신의 목소리로 요구한 것이다. 우리는 농성 시작할 때, 다음날 다 잡혀갈 수도 있지만 그래도 싸우겠다고 결의하고 들어왔다. 그 동안 한국 사람들은 이주노동자들이 외국 사람이고, 이 사람들이 한국에서 일하고 있다고만 알았지 우리가 얼마나 탄압받고 있는지 정말 몰랐다.

이 농성을 통해 언론도 우리 문제에 관심을 갖게 만들었다. 그리고 인권단체, 시민단체, 사회단체들이 많은 관심을 가져 줬다. 한국의 노동자들도 우리를 찾아와 얘기하면서 우리 문제에 관심을 보였다. 민주노총은 하반기 대의원대회 때 우리 요구를 포함시켰고, 내년 3월에는 노동허가제 입법안을 낼 계획도 갖고 있다. 당장 우리의 요구를 쟁취하지는 못했지만, 이런 것들은 매우 중요한 성과다.

이 농성 투쟁에서 연대가 정말 우리의 희망이었다. 우리는 [불법 처지라서] 움직이는 것조차 위험이 따랐다. 그 때마다 많은 연대 단체들이 우리를 보호해 주기 위해 함께해 줬다. 출입국관리소 앞에서 집회할 때도 외환카드 동지들이 없었으면 그 날 우리가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었다. 출입국관리소는 우리를 다 잡아가려고 공격했고, 외환카드 동지들이 목숨 걸고 싸워 줬다. 많은 한국인들이 우리의 문제를 자신들의 문제로 여기면서 투쟁 기금을 모아 주었다. 우리에게는 농성 시작할 때 10만원씩 참가비를 모은 것이 전부였다. 농성 투쟁에 든 1억 원 가까운 돈을 많은 동지들이 모아 줬다.

 

지역의 많은 이주노동자들도 단속을 피해 숨어 지내면서도 이 투쟁에 정말 관심이 많았다. 지역에서 이주노동자들이 1천만 원이 넘는 돈을 모아 줬고, 농성 기간 내내 우리 활동가들에게 지지금도 주곤 했다.
그러나 농성을 하면서 힘들고 가슴 아픈 일들도 있었다. 제일 힘든 건 많은 동지들이 자살했을 때다. 멀리까지 와서 힘들게 일하는데, 정부가 일을 못하게 하고 추방해서 사람들이 자살하게 만드는 건 정말 너무 화가 난다.
그리고 이런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같이 싸우던 동지들이 잡혀가는 건 정말 가슴이 아프다. 샤말 타파, 깨비, 헉, 굽타, 자히드를 생각하면 아직도 눈물이 나온다.

 

한국 정부는 우리가 정부 정책에 반대하며 농성한다고 우리를 테러리스트라고 공격한다. 우리가 테러리스트라는 말은 정말 말도 안 되는 얘기다. 정부는 인간 사냥식 단속에 대한 사회적 비판이 커지자 이제는 우리를 테러리스트로 몰고 있다.

처음 농성을 함께 시작한 동지들과 분열돼 농성장이 두 개로 나뉜 일도 아쉽다. 그리고 고용허가제에 대한 입장 문제 때문에 외노협 등과 공동 투쟁이 자꾸 무산된 것도 아쉬운 일이다. 외노협은 고용허가제 개정 입장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지금 당장은 고용허가제 폐지 운동은 함께하기 어렵지만 단속·추방 반대 운동은 함께해 나갈 것이다. 다행히도 이번 세계 이주노동자의 날 행사를 민주노총, 외노협, 이주인권연대 등과 함께 준비하고 있다.

이 집회에 많은 사람들이 함께했으면 좋겠다. 이주노동자들은 한국인들이 많이 오면 힘을 많이 받는다. 동지들의 연대가 우리가 계속 싸울 수 있다는 희망을 준다.

지금 우리는 매우 어려운 상황이다. 지역에서 이주노동자들은 감옥 생활을 하고 있다. 어디 가지도 못하고 일자리도 없고, 하루에 한 끼만 먹고 지내는 사람들도 많다.
낮에 길에서도 잡아가고, 밤에는 집에서 자고 있는데 문을 부수고 들어와 잡아가기도 한다. 우리를 때리고 가스총도 쏜다. 이주노동자들을 정말 인간으로 생각하지 않고 있다.
단속하다가 다치는 사람 생기면 길에 버리고 간다. 그래서 장애인이 늘고 있다. 의정부 한 유리 공장에서는 출입국 직원들이 공장에 들어와 단속하다가 도망치는 이주노동자에게 유리를 던져서 다리를 심하게 다쳐 이제는 걸을 수 없게 됐다.

정부는 고용허가제가 실패할까 봐 단속을 더 심하게 하고 있다. 우리는 2002년부터 고용허가제를 반대해 노동허가제를 주장하면서 많은 투쟁을 해왔다.
고용허가제는 우리를 매우 힘들게 하고 있다. E-9비자 받고 사업장 들어갔는데 사장이 월급도 제대로 안 주고 일만 계속 시키고 아무 말도 못하게 한다. 뭔가를 요구하면 자르겠다고 협박한다. 지금 불법 체류자가 18만 명이다. 비자가 만료돼서 늘어난 것만은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너무 힘들어 직장을 그만두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끝까지 남아서 싸우려고 한다. 지역에서 조금 움직이기만 해도 단속반이 나타나고 그러면 다시 조직이 흩어져서 너무 힘들지만, 그렇다고 이 제도를 받아들일 수는 없다.

 

 

분명한 건, 단속으로 우리를 다 내 쫓을 수는 없다는 것이다. 정부도 이 점을 잘 알고 있다. 우리는 계속 싸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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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터사이클 다이어리 - '마지막' 이 아닌 '시작' / 포럼 안내

 

2000 년 이던가, 이화여대에서 열린 인권영화제를 본적이 있었다. 지금은 인권영화제도 대중화 되었고 시내 극장등을 임대해서 열리고 있지만 당시만 해도 그 몇해전까지 영화제를 중단시키거나 방해하려는 정권의 압박이 심했던 시기라서, 상영장소가 대학의 캠퍼스로 한정될수 밖에 없었고 그만큼 영화를 보러오는 사람들의 숫자도 그리 많지 않았었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절대적인 인기를 모았던 작품이 하나 있었는데, 개막 및 폐회식에서 상영되었던 '에르네스토 체 게바라, 볼리비아 다이어리' 가 그것이다.


제목에서 보이듯이, 볼리비아 다이어리는 체 게바라의 마지막 투쟁무대였던 볼리비아 에서의 행적을 보여준다. 감독은 카메라를 들고 볼리비아로 건너가서 그곳에서의 체 게바라의 행적을 뒤쫓는다. 쿠바의 관직에서 물러난뒤 몇명의 동지들과 함께 볼리비아로 건너온 그는 현지 주민들을 게릴라로 조직해 투쟁을 시작하지만 압도적인 병력과 무장을 갖춘 미군과 그 지원하의 볼리비아 정부군에게 곧 쫓기게 되고, 결국은 CIA 요원에게 체포되어 사살당한다. 볼리비아 다이어리는 '20 세기 가장 위대한 혁명가' 가, 굶주림과 질병등 갖은 고난에도 불구하고 강철같은 신념을 가지고 있었음을 담담히 보여주는 다큐멘터리 형식의 영화였다.


그로부터 4 년뒤, 이번에는 '모터사이클 다이어리' 가, 무슨 무슨 영화제의 이름이 아닌 일반극장에서 당당히 상영되었고, 적은 개봉관 수에도 불구하고 롱런하면서 선전하고 있다. '볼리비아 다이어리' 가 게바라의 마지막을 기록한 영화라면, '모터사이클 다이어리는' 게바라가 혁명의식을 가지게 된 여행의 시작을 보여주는 영화다. '볼리비아 다이어리' 를 본 관객들이 이루어지지 못한 혁명을 아쉬워하며 일종의 비장감을 느꼈다면, '모터사이클 다이어리는' 를 본 관객들은 앞으로 만들어질 혁명을 기대하며 희망감을 가진다.


4 년 사이에 무슨 일들이 있었을까? 우선 1999 년의 시애틀 투쟁은 세계무역기구(WTO) 각료회담을 무산시키며 자본주의에 반대하는 새로운 투쟁이 시작되었음을 선언했다. 2001년 7월 제노바 G8[주요 8개국] 정상회담 반대 시위는 이탈리아 정권의 매우 폭력적인 탄압이 30만 명의 시위를 불러일으켰다. 체 게바라가 살해당했던 볼리비아는 2000년 물사유화 저지 투쟁을 시작으로 대중들의 투쟁이 거세게 타올라 3 년 만에 봉기를 성공시키고 대통령이 헬기를 타고 도망치게 만들었다.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에 반대하는 대중들의 투쟁은 미국의 이라크 침공에 따른 반전시위와 합류하면서 더욱 거세졌다. 2003 년 2월 15일에는 전세계적으로 1천5백만 명이 반전행동에 나섰다. 보수 신문 '뉴욕 타임스' 는 이를 두고 '(부시에 맞서는) 또 다른 슈퍼파워' 라고 불렀다.


신자유주의 정책들을 앞세운 자본주의가 전세계 민중을 상대로 '4차 세계대전' (8회 노동영화제 상영작 - 볼리바리안 혁명) 을 일으켰다면, 그에 맞서는 강력한 저항도 존재한다. 모터사이클 다이어리는 그와 같은 사회 분위기의 반영이다. 영화는 시대상을 반영하는 법이다. '볼리비아 다이어리' 가 피지 못한 혁명을 아쉬워 하며 게바라의 조문 정도에 머무르는것이 영화 제작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를 말해준다면, '모터사이클 다이어리' 는 다시금 활발하게 타오르고 있는 평범한 사람들의 투쟁과 그에 따른 활력적인 사회분위기를 반영한다. '볼리비아 다이어리' 가 마지막을 이야기 했다면, '모터사이클 다이어리' 는 시작을 이야기 한다.


영화가 시작할때 자막에 나오는 말처럼, '모터사이클 다이어리' 는 영웅적인 두 사람의 이야기가 아니다. 게바라의 영웅적 모습을 기대하고 극장을 찾은 사람이라면 너무나 평범한 에르네스토와 알베르토의 모습에 실망할수도 있다. 그러나 아르헨티나 에서 페루까지의 그 기나긴 여행, 여행에서 마주치는 민중들의 가난하고 불합리한 모순적 삶은 에르네스토에게 새로운 세상이 필요하다는 의지를 심어준 갚진 여행이었다. 영화 마지막에 상징적으로 등장하는, 한센병 환자들과의 작별파티를 위해 천식을 무릎쓰고 강을 헤엄쳐 건너는 장면에서 보여주듯이 그 여행은 게바라에게 성공이 보장되는 의사생활 대신 가난하고 고통받는 사람들과 함께 하려는 의식을 심어준 것이었다.


게바라와 함께 여행했던 알베르토는 아직 생존해서 쿠바에 살고 있다. 영화의 마지막, 이제는 완전히 늙어버린 알베르토 본인이 직접 등장해서 떠나는 비행기를 바라보는 장면이 나온다. 그 비행기는 페루에 정착하기로 마음먹은 알베르토가 돌아가는 게바라를 전송하던 장면을 연상하게 한다. 지금 나이든 알베르토가 바라보는 그 비행기에는 게바라 대신 누가 타고 있을까? 나는 우리 모두가 그 비행기에 타고 있을것 같은 생각이 든다.


p.s : 12 월 15 일 '모터사이클 다이어리와 그 이후 체 게바라' 를 주제로 마포사회포럼이 있습니다.
마포사회포럼은 반전반자본주의 노동자운동 '다함께'가 주최합니다. 이 포럼은 사회 연대와 공익을 위한 캠페인과 주장을 소개하고 공유하는 자리입니다. 자본주의가 아닌 다른세상, 체 게바라에 관심있는 분들의 참여를 기대합니다.


일시 : 12월 15일 수요일 오후 7시 30분
장소 : 신촌 책사랑방 ( 지하철 신촌역 6번 출구앞 )
연락처 : 017-375-5847
블로그 : blog.empas.com/wp2020
* 책사랑방은 1인당 이용료가 3천원 입니다. 참가비를 준비해 주세요 ^^;
 
 
얘기꺼리
 
- 체 게바라는 누구인가?
- 쿠바혁명의 성격
- 게릴라 투쟁으로 혁명을 앞당기는 것이 가능한가
- 오늘날 왜 '체 게바라'는 부상하는가
- 영화 얘기
- 기타

 

읽을꺼리
 
1.다함께
 
 
2.영화 <모터사이클 다이어리>
 
 
3.체 게바라 자서전과 평전

체 게바라의 라틴여행일기, 에르네스토 체게바라, 이후 
먼 저편, 체 게바라, 문화산책
체 게바라 자서전, 황매
체 게바라, 장 코르미에, 실천문학사
 
4.쿠바 혁명에 관해서
민중의 세계사, 크리스 하먼, 책갈피, pp716~721
쿠바혁명사. 레오 휴버만 외, 지양사(절판)
들어라 양키야, C. Wright Mills, 아침(절판)
(절판 된 책은 운이 좋아 헌책으로 구입하거나 국립중앙도서관이나 국회도서관에서 볼 수 있습니다. 좋은 책이기에 소개합니다.^^)
 
5.게릴라 투쟁과 제3세계 민족주의에 대해서
천안문으로 가는 길, 찰리 호어, 책갈피, 제2장 권력으로 가는 길
진정한 마르크스주의의 전통은 무엇인가, 존 몰리뉴, 책갈피, 6장 제3세계 민족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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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함께] 체 게바라의 생애와 유산

다함께 44 호
체 게바라의 생애와 유산 - 다함께 편집팀
http://alltogether.or.kr/



오늘날 체 게바라의 모습은 어디서나 볼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신화 속의 인물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을까?
무엇이 체 게바라를 정치적으로 만들었는가? 그의 생각은 어떻게 바뀌었는가? 짧은 생애를 산 그가 어떻게 전 세계적인 인물이 됐으며, 왜 그는 여전히 많은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고 있는가?



지난 몇 년 동안 체 게바라에 대한 관심이 대단히 높아졌다. 이것은 반자본주의 운동과 반전 운동의 폭발이 초래한 급진화를 반영하는 것이다.
멕시코의 사파티스타에서 유럽의 노동조합원들에 이르기까지 게바라는 반란과 반제국주의의 불멸의 상징이 됐다. 게바라의 저작이 다시 출간되고 있다. 심지어 영화도 있다.
최근 개봉된 <모터싸이클 다이어리>는 게바라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친 그의 라틴아메리카 여행을 묘사하고 있다.



아르헨티나 중간계급 출신의 이 신출내기 의사 청년은 이런 여행을 통해 정치화했고 헌신적인 혁명가가 됐으며 결국 그 이름이 쿠바와 동의어가 됐다.
게바라는 타고난 맑스주의자가 아니었다. 사실, 게바라가 처음으로 정치적 각성을 하게 된 것은 모터싸이클을 타고 라틴아메리카를 여행하면서였다.
그가 만난 원주민들은 궁색하고 가난에 찌든 삶을 살고 있었다. 그 경험은 게바라의 인도주의 정신과 동정심을 자극했다.
그러나 그의 삶의 경로를 영원히 바꿔놓은 것은 그가 의사 자격증을 취득한 직후에 떠난 여행이었다.



1954년 게바라가 과테말라에 이르렀을 때, 미국 소유의 식료품 회사들을 과감하게 국유화한 개량주의 정부가 미국의 후원을 받은 군사 쿠데타로 전복됐다. 이런 사건들 때문에 급진화한 많은 청년들 가운데 한 명이 게바라였다.
그 쿠데타 때문에 게바라는 멕시코에 망명중이던 다른 사람들과 만나게 됐고, 거기서 한 쿠바 청년 활동가를 만났다. 그 혁명가의 이름은 물론 피델 카스트로였다.
점차 정치화하고 있던 게바라는 이 만남을 계기로 삶의 방향을 결정했다.
이 청년들은 라틴아메리카 대륙이 미국의 거대 기업들의 이익에 맞게 운영되고 있다고 보았다. 그들은 스스로 반제국주의자라고 여겼다.
얼마 뒤 게바라 자신을 포함한 소수는 냉전에서 소련을 편들며 스스로 공산주의자라고 여겼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소련은 결코 사회주의 사회의 모델이 아니라 전체주의 국가였다.
이 집단이 구체화한 사상과 정치 전략이 그 뒤 몇 년 동안 라틴아메리카 지역의 많은 투쟁들에서 출발점이 됐다.



게바라는 이런 사상과 전략을 요약해 ≪게릴라전≫이라는 소책자를 썼다. 그는 게릴라 군대를 동원해 지배계급을 군사적으로 공격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게바라는 농촌이 주요 전쟁터라고 주장했고, 게릴라들의 용기와 의지로 객관적 조건을 극복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혁명을 시작할 수 있을 때까지 조건이 무르익기를 기다릴 필요 없다. 왜냐하면 반란을 일으킨 게릴라 집단이 그런 조건을 만들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하고 썼다.
그는 또 이 엘리트 집단이 대중을 대리해 혁명을 일으킬 것이라고 믿으며 이렇게 말했다. “게릴라 전사는 일종의 수호천사로서, 항상 빈민들을 도와주고 전쟁의 초기 국면에서는 되도록 부자들을 괴롭히지도 않을 것이다.”



그래서 처음부터 그의 투쟁관을 지배한 것은 남성 위주의 엘리트 집단을 조직해 그들을 군사적으로 ― 흔히 야만적인 규율로 ― 훈련시켜야 한다는 것이었다.
멕시코시티를 가로지르는 인수르헨테스 대로(大路)를 따라 17마일[약 27킬로미터]을 걷는 장거리 행군과 산악 등반 등이 그런 훈련의 일부였다.
게바라는 해발 고도가 높은 멕시코시티에서 생활하는 것 자체가 하나의 투쟁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왜냐하면 늘 천식에 시달린 그는 죽을 때까지 계속 호흡용 마스크를 달고 살았기 때문이다.



그 집단은 이제 구체적인 목표를 갖게 됐다. 그것은 쿠바에서 증오의 대상이던 바티스타 독재정권을 무너뜨리는 것이었다.
1950년대에 쿠바는 부유한 미국인들의 놀이터나 다름없었다. 카지노와 매음굴은 넘쳐난 반면, 평범한 쿠바인들은 대부분 가난하게 살고 있었다.
그러나 바티스타 정권을 타도하자는 운동은 거의 재앙으로 끝났다.
1956년 말 게바라와 그 동료들을 태운 배는 예정보다 늦게 쿠바 해안에 상륙했고, 바티스타 정권은 이미 알고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배에서 내린 82명 가운데 19명만이 가까스로 살아남았다.
게바라는 쿠바의 산악지대에서 게릴라 병사의 생활에 적응해 나갔다. 그는 자기와 함께 싸운 사람들에게 충성심과 공포심을 심어 주는 카리스마적인 지도자였다.
그 집단은 모두 심각한 신체적 고통에 시달렸는데, 특히 게바라는 끊임없는 천식 때문에 괴로워했다.



형편없는 무기로 무장한 이 오합지졸 게릴라 병사들이 1959년 1월 아바나에서 권력을 장악할 수 있었던 것은 바티스타 정권이 붕괴 일보직전이었고 내부에서부터 무너졌기 때문이다.
바티스타 정권의 패배는 라틴아메리카 지역에서 미국의 패권에 대한 커다란 타격이었다. 미국은 쿠바를 철저하게 봉쇄하는 것으로 보복했고, 그 봉쇄는 오늘날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쿠바혁명의 승리는 전 세계 혁명가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게릴라전 전략의 정당성이 입증된 듯했다. 그것은 정치적·경제적 배후조종에 익숙한 미국을 물리쳤다. 그 뒤 몇 년 동안 라틴아메리카 전역의 다른 많은 사람들이 그 전략을 모방했다.



게바라는 쿠바의 진정한 변화에 큰 기대를 걸고 있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런 기대는 실현될 수 없었다.
그 이유 가운데 하나는 혁명이 처음부터 근본적 약점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가장 중요한 점은 민주주의, 즉 노동자 통제가 실제로 확대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대다수 보통 사람들은 그저 구경꾼이었다. 그들은 그들 자신의 삶을 통제할 수 없었다.
오히려 새 정부는 생산을 증대하고 경제의 활력을 유지하기 위해 노동자들에게 계속 더 많은 것을 요구했다. 희생을 요구했고, 더 열심히 일할 것과 주말에도 자발적으로 일할 것 등을 요구했다.



모범을 보이기 위해 게바라는 늘 자기 사무실에서 늦게까지 일한 뒤에도 주말에는 육체 노동을 했다.
쿠바혁명의 공식 사진사가 된 유명한 사진사 오스발도 살라스의 책에 나오는 많은 사진들 가운데 하나는 게바라가 건설 현장에서 “자발적으로” 일하는 모습을 보여 준다. 이런 규율과 자기 절제 덕분에 게바라는 평범한 쿠바인들의 존경을 받았다.
그러나 자기 희생과 규율만으로는 부족했다. 그것만으로는 미국의 봉쇄가 초래한 결과를 극복할 수 없었고 대중 민주주의 ― 모든 사회주의 혁명의 근본적 특징 ― 의 부재, 대중의 사회 조직 참여 부재의 한계를 극복할 수 없었다.
선거도 없었다. 새 정부는 단지 스스로 임명할 뿐이었다.
사실, 피델 카스트로는 쿠바혁명과 새 국가를 사회주의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훨씬 나중에 소련 편에 붙은 뒤에야 그렇게 했을 뿐이다.
게바라와 그의 동료들이 집권 뒤 맞닥뜨린 딜레마는 중요했다. 그들이 미국에 반대한 것은 옳았지만, 그들의 잘못된 정치 전략 때문에 오늘날의 쿠바는 사회주의를 자처하면서도 시민적 자유나 민주적 절차도 부정하는 끔찍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게바라 자신은 더 많은 것을 원했다. 그는 쿠바가 점차 소련에 의존하는 것에 실망하고 좌절했다.
그는 혁명의 확산을 원했다. 그는 쿠바 혼자서는 살아남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것은 결국 말 그대로 자본주의라는 바다 위의 섬일 뿐이었다. 그는 결코 자신의 정신을 포기하지 않았고, “베트남이 하나, 둘, 셋, 아니 훨씬 더 많아야 한다”고 호소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전략에 사로잡혀 더 나아가지 못했다. 이것은 그의 생애의 비극적 모순이었다.
그는 세계를 변혁하기를 원했지만, 그가 의존한 정치 전략 때문에 그것은 불가능했다. 그래서 혁명을 확산시키려는 그의 방법은 여전히 게릴라전이었다.



그는 결국 쿠바에서 모든 관직을 사퇴하고 콩고로 가서 투쟁했다. 그 투쟁은 대실패로 끝났지만, 다행히 그는 살아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그는 볼리비아로 가서 또 다른 게릴라전을 수행했다. 그는 볼리비아 군대에 쫓겨다니다가 붙잡혀 미국의 군사 “고문단”이 지켜보는 가운데 살해당했다.
짧은 생애 동안에 게바라는 이미 전 세계에서 혁명과 반제국주의를 대표하는 인물이 돼 있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의 죽음을 슬퍼했다.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그를 저항의 상징으로 여긴다.



아마도 일부 사람들은 게바라에 대한 정치적 비판이 불쾌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게바라의 약점과 강점을 모두 살펴보는 것과 이 비범한 인물을 깎아내리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오히려 이런 고찰을 통해 우리는 게바라가 반자본주의·반제국주의 투쟁에 기여한 바를 훨씬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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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월 15 일 '모터사이클 다이어리와 체 게바라' 라는 주제로 포럼이 있습니다. 많은 참여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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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럼에 초대합니다 - 모터사이클 다이어리와 그 이후 체 게바라

 

일시 : 12월 15일 수요일 오후 7시 30분
장소 : 신촌 책사랑방 ( 지하철 신촌역 6번 출구 앞 )
연락처 : 017-375-5847

 

* 책사랑방은 1인당 이용료가 3천원 입니다. 참가비를 준비해 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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