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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액체근대(2)]..사적인것의 공적공간 침탈...^^;;

  • 등록일
    2009/06/21 10:11
  • 수정일
    2009/06/21 10:11

이어서 정리....ㅎㅎ

 

1. 해방

-- 장 폴 샤르트르가 언명했듯이 부르주아로 태어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부르주아로 살아야만 부르주아가 되는 것이다.

-- 내가 누군가이기 위해서는 누군가가 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은 근대적인 삶을 특징짓는,

    오직 근대적 삶에만 존재하는 요소이다.

-- 계급은 신분과는 달리 "합류"되어야 할 필요가 있었고,

       그 구성원들은 매일의 행동을 통해 지속적으로 갱신되고, 확인되고, 시험되어야 했다.

 

==> 결국 현대사회에서의 계급은 그저 자신에게 부여된 어떤 신분제적 질서는 아니라는 것이다.

       이를 다시 생각해 보면 노동자 계급이라는 것은 어쩌면 노동자 계급으로써 살아가면서

       스스로 매일매일을 지속적으로 확인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가령 소위 잘나가시는 정규직 노동자들은 그들 자신의 위치로보면  노동하는 계급이지만

       비정규직, 혹은 외국인 노동자들과 만나는 순간 어쩌면 스스로 부르조아계급화되는지도 모른다.

       결국 스스로 노동하는 계급임을 확인하는 것은 언제나 선택의 몫으로 남아 있는 측면이 있는것 같다.

       우리가 일상에서 비정규직 혹은 외국인 노동자들을 볼때 어떻게 바라보고 함께 하는냐가

       언제나 입으로써의 계급이 아닌 내가 살아가는 위치로써의 계급을 결정짓는 것 같다.

 

-- '공적인 것들'은 '사적인 것들'에 위해 식민화 되어 버렸다. '공공의 이해'는 공적인 인물들의

    사생활에 대한 호기심 정도로 격하되고 공공생활의 기술은 개인사의 공개적 나열과 사사로운 감정의

    공개토로(내밀할 수록 더욱 좋은)라는 협의의 의미로 축소되었다. 그러한 지위 격하에 맞서는

     '공적인 현안'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되어버렸다.

-- 그들을 공적무대에 오르게끔 촉구하는 것은 공공의 대의명분을 모색하거나 공공의 선

    혹은 공동의 삶을 영유하는 원칙이 의미하는 바를 조정하는 방안을 찾기위해서가 아니라,

    단순한 '네트워크'에 대한 절실한 필요이다.  리처드 세넷이 줄곧 지적하듯이,

    친밀함을 공유하는 것이 '공동체 건설'을 위해 가장 선호되고, 아마도 유일하게 남아있는

    방안인 것 같다. 이런 식으로 공동체를 건설하는 기술은 여기저기 산만하게 흩어지고

    오락가락하는 정서반응들처럼 나약하고 단명하는 '공동체들'을 양산한다.

     그 공동체들은 변덕스럽게 한 목표에서 다른 목표로 이동하며 정착할 항구를 찾아

     결론이 나지 않는 탐색을 하며 영원히 또도는 배와 같다.

     근심 걱정을 나누고, 고뇌와 증오도 나누지만 각각의 공동체들은 수많은 고립된 개인들이

     그들만의 고립된 개별적 두려움을 매달아 놓은 말뚝주위로

     일시적으로 집결한 '말뚝'공동체에 다름 아니다. 

 

==> 이는 우리 주위에서 흔히 볼수 있는 광경인 것 같다.

     최근의 시민사회단체의 행사들 그것도 진지한 토론의 자리에 가보면 결국 각자가 가지고 있는

     개인적 삶의 내밀함들이 너무나 쉽게 고백처럼 떠돌아 다니지만

     그런 고백들이 결국 공동으로 해결방안을 모색하는 것 같은 공적인 처리가 아니라
     그저 각 개인 스스로가 그저 공적인 영역에서의 자신에 대한 공감정도..?...그렇게   

     소비되고 만다는 것이다.

     이것이 나를 가장 많이 당황스럽게 하는 측면인데

     가령 함께 수업하였던 어떤 교사 혹은 다른 단체에서 활동가로 일하는 누군가를 만나다 보면

    너무나 쉽게 자신의 힘든 점들을 이야기하고 나로 하여금 공감 혹은 지지를 바라지만

   언제나 그것은 거기까지 이다, 그 해결을 위한 어떤 시도를 나름 구상하는 순간

   그 개인은 무척 당황하고 언제나 자신의 문제는 자신이 풀겠다고 냉랭하게 가버린다.

   사람들은 가끔 그렇게 이야기 나눌 무엇인가의 네트워크를 필요로 하지만

   그것은 언제나 사적인 것에서 끝난다는 것...

  즉, 모든 과제와 책임은 그저 자신의 것이라는 것을 확인하고 돌아갈 뿐이다.

   항상 그정도의 연계만을 바라고 그렇게 사는 것이 쿨한 세상이라고 느낀다

   물론 그래서 힘들어지는 자신의 삶은 또한 자신의 몫이라고 자조하면서 말이다.

  이것이 현재 우리들이 사는 모습은 아닐까..?

 

-- 자기주장을 할 권리와 그러한 자기주장을 실행 가능한 것 혹은 비현실적인 것으로 만드는

   사회환경을 조정하는 능력간에 도사리고 있는 간극이 갈수록 벌어지고 있다는 것이야말로

   유동적 근대의 주요모순 -- 우리가 시행착오와 비판적 사고, 과감한 실험을 통해

    그것과 집단적으로 대결하는 법을 역시 집단적으로 익혀야 할 필요가 있는 -- 인 듯 보인다,

-- '전기적인 해결책들'이 귀찮고 부담스러워서가 아니라,

    효과적인 '체제모순에 대한 전기적인 해결책들'이 없기 때문이며 그들이 원하는 대로의

    효과적 해결방안이 부족한 것을 상쇄하기 위해 상상의 해결책이 필요해진 것이다.

    그러나 해결책이 상상에 의한 것이든 진정한 것이든 모든 '해결책'이 합리적이고

    실행가능한 것처럼 보이기 위해서는 그 과제나 책임에서 '개인화'와 한편이거나

    동등한 것이어야 한다. 따라서 두려움을 느끼는 개인들이 비록 짧은 순간이 나마

    그들의 두려움을 집단적으로 의지할 어떤 개별적 말뚝들이 필요하게 되는 것이다.

-- 개인의 입장에서, 공적 공간은 사적인 근심거리들이 더이상 사적인 것이 아니게 되거나

    새로운 집단적 특성을 획득하는 일 없이 투사되는 거대한 은막에 지나지 않는다.

    공적 공간은 개인의 비밀이 공개적으로 토로되고 친밀감이 형성되는 곳이다.

    마치 가이드를 따라 정해진 관광 일정을 밟는 식으로 이러한 나날의

    '공적'공간을 여행하고 난 개인은, 법률상 개인의 위상이 더 강화되는 한편,

    그들이 홀로 살아가는 것처럼 다른 모든 개인들이 역시 그렇게 살아가고,

    각자 나름의 방식으로 비틀거리고 (일시적이라면 다행) 패배를 감내하고 있다는 

    확인을 새삼 갖게 된다,

 

==> 이 부분에서 아 !!....하는 감탄하는 마음이 살짝 들었다는....ㅎㅎ

  결국 우리들이 알게 모르게 고백이라는 것들을 지나치게 쉽게 행하고 그것을 통해

  감정적인 지지들을 받아가지만 그러면 그럴 수록 점차 그들은 개인화되어버린다는 거다

아 !! 누구나 저렇게 살아가고 있구나 싶어지면서

내일부터 나도 더 철저히 개인화되어 살아가야 겠다는것을 재확인하고 강화해 가는 식으로

공적인 영역들을 사용해 버린다는 거다.

물론 이런 것들이 온전히 개인의 탓이 아니라 유동하는 근대가 우리에게 숙명처럼 안겨줘 버린 

체제의 모습이 그렇다는거다.

그렇게 유동하는 근대의 체제에 익숙해져 버린 우리들이 어저면 

그런 근대를 극복하기 위해 집단적 모색과 집단적 해결의 자세를 취해야 하는 것은 명백하다.

그럴때 우리가 보심해야 하는 것 또한 그런 개인화 하려는 경향을 어떻게 공동화 할 것인가 이다.

이런 공공 혹은 공동의 해결모색이라는 것이 사람들을 무척 불편하게 만들고

또한 불안하게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들 공동체에서는 어떤 집단적 실험들이 가능할 것인가..?

 개인화 해버리는 경향을 버리고 어떻게 집단적 모색과 해결을 가능하게 할 수 있을 것인가..?

 

-- '동요되지 않는다'는 것, 통찰하지 않고도 사는 법에 익숙해진 사람들이

    통찰이 시작되는 것을 달콤한 해방의 전망으로 환영하는 일은 거의 없다.

    순진함때문에 가장 괴롭고 반역적인 친숙한, 그리하여 확고한 어떤 것으로 보이게 된다.

    또한 그런 악조건이 근거한 빈약한 발판을 꿰뚫어 보는 그 어떤 통찰도

    불신임, 의혹, 불안의 전조가 되며 이를 즐거운 기대감으로 맞이할 사람은 극히 적을 것이다.

    아도르노의 입장에서는, 비록 손쉬운 성공을 예언해주지는 않지만

    통찰에 대한 널리 유포된 적개심은 오히려 길조이다.

    순진한 이들의 속박은 생각하는 사람들의 자유이기 때문이다. "불가피한 고립"이 훨씬 용이해진다.

    "아무도 사지 않을 독특한 어떤 것을 팔려고 내놓은 자는 자신이 뜻하지 않는 경우에도

     교환으로부터 자유롭다." 이 생각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면 다른 생각으로 이어지는데,

     교환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원형적 조건으로서의 망명에 대한 생각이다.

     망명이 제공하는 상품은 어렴풋하게나마 사고 싶어하는 이가 있을 턱이 없는 그런 것 들이다. .....

     ...사유하는 사람의 초연함, 그의 일상적 생활방식이 생존가치를 획득하는 것은 바로 망명속에서다. 

 

==> 결국 망명이라는 것이 체제에서의 일종의 불구적 삶이라면 어저면 우리들이 취해야 할 자세는

그런 망명의 조건이라는 것 같다. 즉, 기거이 망명하려는 자, 기꺼이 불편함을 감수하려는자여야

한다는 것이고 따라서 순진한(?) 사람들이 통찰...사회/체제를 제대로 보기 시작하면서

혼란스러워하고 불편하고 힘들어 하는 것은 어쩌면 우리들에게는 행운일 수 있다.

그런 행운들 ....순진함 사람들에게 그런 불안/당혹스러움을 주는 것이

우리가 취해야 할 교육이 아닐까 싶다.

 

-- 실행하라는 명령도, 실행을 거부하는 것도 좋은 해결책이 아니다.

    전자는 불가피하게 지배로 변질되는 경향이 있다.

    결과에 대한 공리주의적 고려가 동기라는 윤리적 원칙을 앞지르고

    자유에 대한 갈망이 희석되고 왜골될 것이라는,

   새로운 억압들에 수반되는 모든 공포들이 자유에 부과된다.

   후자는 아마도 타협하지 않는 순수성이 자아도취적인 만족을 줄 수는 있겠지만

   결국 그러한 사유는 비효율적이고 황폐한 것으로 방치될 것이다.

-- 사유하는 삶과 행동하는 삶 사이의 딜레마는, 별로 탐탁지 않다는 점에서만 닮았다고 할

    두가지 전망중 택일을 하는 문제로 응축된다.

    사유를 통해 유지되는 가치들을 타락으로부터 잘 보호할 수록

    그들의 삶에 봉사해야 할 가치들이 그들 삶에서 차지하는 의미는 자꾸만 축소된다.

    그 가치가 그들 삶에 끼치는 영향이 클수록

    혁신을 촉구하고 장려했던 가치들에 상응하는 개선된 삶을 떠올리는 일은 점점 더 어려워지게 된다.

 

-- 자유로운 수행자의 운명은 그 얽힌 양상을 풀기는 커녕

    일일이 헤아리기도 어려운 이율배반들로 가득 차 있다.

    예컨대 인정맏을 만큼 견고해야 할 스르로 주조한 정체성이 끊임없이 변화하는

    변덕스러운 상황속에서 미래의 활동에 대한 자유를 해치치 않을만큼 만 유동적일 때 생기는

    모순을 생각해 보자. 혹은 이전보다 유례없이 커진 기대감이란 짐을 지게 된 사람들간의 협력에서

    드러나는 위태로움, 즉 제도적 뒷받침이 변변치 않아 더 커진 기대에

    맞서기가 더욱 어려워지는 상황이 그렇다.

    혹은 무관심과 강압의 험준한 암벽들 사이로 위험한 항해를 해야하는,

    다시 되찾은 책무가 처한 딱한 난관이 그렇다.

    혹은 의지할 데라곤 행동하는 자의 열정과 헌신밖에 없는데도 목표를 달성하려면

    그 행동의 완전함을 유지해줄 좀더 지속적인 접착력이 요구되는 모든 공공행동의 허약함이 그러하다.

    또는 철저하게 개인적이고 주관적으로 일관한 삶의 경험을 공공의 의제에 걸맞게

   공공 정책 문제로 일반화시켜 가다듬는 지독하게 어려운 일도 그렇다. 

 

-- 개인의 의지, 욕망, 목표가 어떻게 기능하고 그 용도와 의도는 무엇인지 전혀 개의치 않은 채

   새로운 의미를 창출하려는 경향인 창조적 능력과 창조적 리비도, 바로 이러한 것들이

   그저 바깥에 떠도는 수많은 자원들이거나 어떤 경우에는 장애물이 아닌가 하는 점이었다.

 

-- '소극적 자유'를 얻기 위한 투쟁이 벌어지고 이에서 승리했지만, 무게중심이 '적극적 자유',

   즉 선택의 범위와 선택과 관련된 의사일정을 결정할 자유로 옮겨지자

   투쟁은 깨어져서 산산조각이 났다.

   공적 권력은 그것이 지녔던 애초의 근사함을 잃고 억압적 가능성에 분개했지만

   합법화하는 그 능력의 상당부분 역시 잃게 되었다.

   해방전쟁은 끝난 것이 아니다.

   그러나 조금이라도 더 진척을 보기 위해서는 이제 공적 권력은 권력의 역사 대부분에 걸쳐서

   힘껏 파괴하고 제거하려 했던 것을 소생시켜야만 한다.

   오늘날 진정한 해방에는 '공적영역'과 '공적 권력'의 필요성이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

   더욱 요청된다.

 

==> 결국 결론은 공적 영역에 침투하는 개인화하려는 경향 혹은 '사적영역'의 공적 의제화를 막는 것

        지나친 사적 영역의 범람에 대하여 공공의 혹은 공동의 논의/의제/활동 을 복원하는 것이리라

        더이상 개인화해버린 개인들의 감정적 지지가 아닌

        그 개인들이 가지고 있는 의제들을 공공 혹은 공동의 의제화시키는 작업이 필요할 것이다.

        우리들 공동체에서도 우선은 이러한 개인화 하려는 경향들을 공공/공동의 행동 혹은 이야기로

       어떻게 바꾸어 나가야 할지.... 그 방식들은 어떻게 만들어지고 구현할 수 있을지 고민해 봐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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