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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동하는 공포(1)..영은 묻고 내가 답??

  • 등록일
    2009/08/12 14:52
  • 수정일
    2009/08/12 14:52

음..

한 두달전인가에 읽은책인데

나름 재미나게 읽었던 터라

영은이에게 읽어보라고 권하면서 나름 미션을 달았었다.

읽긴 읽되 나에게 설명해 보라고...ㅎㅎ

 

언제나 변함없이 읽어내는 영은이가 결국 시간내에 읽고

설명 겸 답을 해왔다.

음...그래서 읽고도 정리하지 않았던 책을 뒤늦게 정리할 까 싶기도 하다....ㅎㅎ

실은 읽고도 정리하지 않은 책들이 많아서

뭐...다음에 시간되면 그때하지 하는 게으름으로 뭉게고 있었는데

영은 덕에 스스로 반성하기도 했다....ㅎㅎ

 

근데 기억이라는 것이 요상해서

아 ! 잼나게 읽었었지 ? 하는 생각은 나는데

그 구체적인 내용은 까마득하다....

그래서 영은이가 묻는 것에 제대로 답할 자신이 없고 막막하기도 하다.

가장 중요한 것은 책이 나에게 없고 영은에게 있어서..

책 다시보면서 생각할 나름 빠져나갈 구명이 막혀 있다....갸갸갸갸

여튼

그래서 어떻게 할까 하다가

부족하지만

생각나는대로 써볼까 싶다.

 

 

[즉음의 공포]

 

영은

죽음의 공포는 리얼리티 쇼로 시작됩니다. 리얼리티 쇼로 추방, 해방, 사면 등의 단어들을 설명하고 있어요. <빅브라더> 는 한번에 한명씩 '추방' 해야하는 리얼리티 쇼에요.

 

여기서 추방이란 피할 수 없는 숙명 같은 의미로 설명되어있어요.

추방을 피하고 살아남을수 있는 확실한 길은 없고 정당한 추방도 없어요.

다만 추방해야하기 때문이에 추방하는 사람이 생기는것 뿐이죠.

근데 정말로 '추방'이라는 것이 그렇게 결정되고 성립되는지는 확신가지 않아요.

추방이라고 불리는 모든 경우에 수에 해당되지는 않다는 생각이에요. 

 

해방으로 넘어가면 해방이란 <빅브라더>가 가지고 있는 진실에 있어요.

그 진실을 <빅브라더>를 시청하는 사람들과 공유되고 있고 <빅브라더>라는 것으로 정당화되고 있어요

그러면서 사람들은 스스로의 느낌이나 의심, 예감을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되게 되죠.

그러면서 '해방'이라는 단어가 성립된다고 생각합니다.

그 진실은 뭐라고 설명 가능할까요?

 

사면으로 가요. 사면도 '해방'하고 비슷한가 싶어요.

사면은 퇴향적이면서도 전향적이에요.

이 말은 과거의 잘못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그래서 앞으로 나아갈 수 없죠.

그리고 전향적이라는 것의 그 사람들의 잘못들이 용서되면서 정당화 되기 때문이에요.

여기서의 용서도 어제 읽은 그 용서와도 관계있는것 같아요. 

이러한 리얼리티 쇼에서의 메세지는 혹은 진실은 주기적인 추방 과정에 얽힌 애환을 최대한 밑바닥까지

파헤쳐 보여주는것이 아닐까 생각해요.

 

음...

[지그문트 바우만]이 설명하고 있는 추방, 해방, 사면 등등의 단어들은

내 생각에 [근대적 시공간]이라는 시간성 혹은 역사성안에서 설명되어지는 것 같단다.

즉, 네가 계속 의문스러워 하는 것 즉, 우리가 인문학 수업을 하면서 단어자체가 가지는

의미들을 깊게 생가해 보는 것...특히 우리들의 일상적인 삶에서 단어들을 재음미해보는 것으로

[지그문트 바우만]의 단어 설명들을 이해하면

약간씩 동의하기 쉽지 않은 것...어긋나는 것들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는 거다.

 

가령 네가 [추방]이라는 단어설명에 가지는 의문도 실은 

[추방]이 갖는 사전적 의미 혹은 네가 생각하는 역사적 단어의 의미들로 보면 약간의 의문

즉, 모든 수에 해당하는 지에 대한 의심이 들기는 할거라는 거다...ㅎㅎ

 

여기서 생각해 보아야 할 것들은 

시청자들이 열광해서 시청하는 [리얼리티 쇼]라는 것이고 그 과정에 참여하는 다수의 사람들이

동의하고 의심없이 받아들이는 것에 대한 이야기인것 같다.

즉, 리얼리티쇼가 보여주는 우리들의 일상적 삶의 상징성이랄까 ?

 

우리의 실상적 삶들이 일종의 일얼리티 쇼라면

우리가 이런 리얼리티 쇼에서 이루어지는

추방, 사면, 해방 등등에 대한 반응들에 대한 이야기이고

이런 참여과정들로써 우리들의 근대적 삶들이 설명되어지는 측면이 있는 것처럼 보인단다.

 

즉, 우리가 인정하고 의심없이 받아들이는 

추방은 실제로 현실에서 특별한 이유가 없다는 것...

왜 ...?

그것은 사람들이 각각의 개인으로서 판단하고 무엇인가를 결정해야한 다는 것

그리고 그 결정된것들에 대하여 철저하게 개인적 책임들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회가 근대라는 것인데

이런 상황에서 사람들은 어쩌면 그런 개인적 판단, 결정, 책임을 회피하려고 한다는 것

따라서 부당하고 불편한 규칙일 망정 사람들은 순순히 받아들이고 인정하면서

동조자가 되어버린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 처럼 보인다는 거다

 

심지어 해방조차 

해방을 위한 자신들 즉, 개인들의 변화된 무엇인가를 스스로 의심, 판단, 결정 책임지기보다는

그것이 잘못되었을지 몰라도 

구체적이고 눈에보이게 제시되어지면 대중이라는 사람들은 

의심하지 않고 받아들인다는 거다...ㅎㅎ

( 아 ! 물론 그 대중들이 무식하거나 몰라서가 아니라 알면서도 동의하고 마는 것...

이 무서운 진실을 리얼리티 쇼아른 것으로 설명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거다...ㅎㅎ)

 

 

영은

 고대의 교훈담은 권선징악의 줄거리를 가지고 있어요.교훈담은 두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어요

첫째는 승리자는 추방에서 모면된 사람이고 복을받으며 그렇지 않은 사람은 벌을 받아요.

<빅브라더>와 <위키스트 링크>같은 리얼리티 쇼와 아주 비슷한 맥락이에요.

이렇게 이런 고대의 교훈담은 유동적 근대사회에서 수용되고 있어요.

근대사회에서 근대의 교훈담이 아닌 고대의 교훈담이 수용되고 있는 이유는

공포에서 눈돌리는 방법중 하나라고 생각해요.

사실 근대 교훈담과 크게 다르지 않지만요.

 

두번째는 착한일과 나쁜일, 복과 벌의 관계과 뚜렷하지 않아요.

이것은 추방에 특성에 있어요. '정당한 추방'이 없다는 것, 추방은 특별한 이유가 없다는 것이에요.

그렇기에 추방으로 이루어지는 교훈담이 착한일과 나쁜일, 복과 벌이 뚜렷하지 않은 것이죠.

근대의 교훈담은  복불복이에요. 복불복으로 추방과 벌이 떨어져요. 이유도 설명도 없이요.

 

(근대의 교훈담은 죽음의 리허설이라는 말이 있어요.

이것은 뒤에 나오는 죽음의 평범화와 관련이 있을까요?)

 

[지그문트 바우먼]이 보기에 근대의 가장 큰 특징은 결국 유동한다는 것...즉, 액체의 성질처럼

고정적인 형태를 가지지 못하고 모든 것들이 유동적으로 변화한다는 거다

변화가 눈에 보이는 구체성을 가지고 우리 삶에 개입하지 못한다는 거다.

즉, 우리에게 점점더 정해진 규칙, 규율들이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들에 있어서

스스로 그 규칙들을 만들어가고 새롭게 변형해야 한다는 것이 란다.

그런데 문제는 이 모든 과정들이 철저하게 각 개인의 책임으로 혹은 개인들이 치루어야 하는 일들로

부여됨으로써 각 개인들은 엄청 당혹하거나 과거 지향적이 되거나

아니면 생각하지 않는 것으로 선택을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근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이 고대 교훈담을 수용하는 방식이고

근대의 교훈담이 복불복 처럼 되는 이유이고

또한 그런 교훈담에서 죽음의 냄새가 난다는 것은 아닐까 ? 싶단다...ㅎㅎ

 

영은

죽음은 다른 것과 전혀 다른 것이 있어요. 완전한 상실. 끝이에요. 그러므로 피할 수 없는 공포가 되요.

원초적 공포.

모든 생명체가 죽음에 대한 공포를 가지고 있지만 오직 인간만이 죽음을 인식할 수 있다고 해요.

그거야 인간이 알 수 없는 것이지만요. 러한 공포를 회피 할 수 있는 방법이 몇가지 있어요.

 

첫번째는 죽음을 종말이 아닌 종료로 생각하는 것이에요.

죽음이후에 또 다른 세상이 있다는 거죠. 그렇기에 현생의 삶을 더 잘 살아가야 하는 것이구요.

오히려 죽음을 매순간 기억하라는 '메멘토모리'라는 말이 생겼죠.

죽음의 의미를 거꾸로 뒤집는다고 그러네요.

엄청난 공포를 엄청난 삶의 의욕으로요.그런데 이것의 변형판이 있어요.

자신의 삶을 불면성을 위해 사는거에요. 지속적 효과에요.

자신의 삶의 업적이 자신이 죽은 후에도 불멸하는 것이죠.

이것의 자신의 삶이 덧없고 허무한 것이 아니라는 위안을 줘요.

이 지속적인 효과는 두가지로 나누어져요.

 

첫번째는 개인적불멸성이 에요. 개인적불멸성은 개인성이 있어요. 특별해지고 유명해지죠.

여기서 자기만의 공유적 자아가 확보되요. 공유적자아란 다른사람과의 관계에 의해서 형성되는 자아에요.

개인성이 강조되니까 공유적자아보다는 자기동일적자아가 더 강하지 않을까 하는데

왜 공유적 자아를 강조하는 거죠?

보통 공유적 자아는 여러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형성되어지니까 확실하지않고 모호하고

여럿 다른 성격의 자아들이 혼란스럽게 섞여 있지 않을까요?

그리고 무수히 넓게 확산되어 있을 것 같기도 하구요.

그런데 개인적불멸성은 공유적 자아가 혼동되거나 혼란되어 있지 않고

'자기만의' 공유적 자아가 있다는 것일까요?

아무튼 개인적 불멸성은 역사속에서 기억될만할 업적을 남기는게 중요해요.

그만큼 삶을 열심이 힘들게 살아가야하는 거죠.

여기서 개인적불멸성은 명성은 불운 중 하나라고 얘기해요. 그렇다네요. 그리고

 

개인주의 혹은 개인성에서 왜 자기동일적 자아가 아닌 공유적 자아를 강조하는가 ...?..는 문제는

음...책을 읽으면서 난 당연하다는 듯이 받아들인 것으로 생각되어지는 군....ㅎㅎ

생각해 보면 개인주의에서 강조되는 것 그리고 리얼리티 쇼에 사람들이 광분하고 마치 함께 한다고

스스로 생각하는 것은 개인주의일수록 네트웍크 즉, 관계맺음이 더 중요해지기 때문인것 같다.

즉, 보다 사회주의적인 삶에서는 관계자체가 일상적인 측면이 있어서 각 개인들이 관게맺는 것

즉, 공유된 자아에 대한 추구들이 적어지지만

반대로 개인주의에서는 공유된 자아가 굉장히 중요한 것처럼도 보이고

더 근본적으로는 개인의로서의 자아라는 것은 실은 모든것들이

결국 타자와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것처럼도 보인단다.

즉, 개인만의 자아라는 것도 어차피 타자와 관게맺는 속에서 발견되고 체화되는 것이라는 거고

다만 문제는 그렇게 타자와의 관계에서 생긴 자아라는 것이

자신의 내부에 시선을 돌리는 것이 자아동일적 자아일테고 밖으로 시선을 돌리면 공유적 자아가 되는게

아닌가 싶단다...여기서도 결국 명성 혹은 역사적 업적이라는 것도

실은 고립된 자아에서 생가는 것이 아니라 타자와의공유된 자아에서만이

생길 수 있음을 이야기하는 것이리라 생각된단다.

음...업적이라는 것은 겱구 남이 인정해주어야 하는 것 역사적으로 다른 사람들이기억해주어야 하는 것이고

그런 것들을 자신의 불멸성으로 삼는 다는 것은

결국 자신이 가진 어떤 자아가 남들과  상호 관계맺어야 가능...즉 공유된 자아여야 하는 것이 아닐까 ?

갑자기 네가 질문해서 짧게 나마 생각해 보았단다....ㅎㅎ

 

영은

두번째로 몰개인적불멸성이 있어요. 몰개인적불멸성은 자신의 죽음으로서  얻어야해요.

그리고 이러한 몰개인적불멸성은 국가에 의해 이용되었어요.

이러한 불멸성은 그사람들의 삶과는 별로 상관이 없어요.

그들은 죽음으로서 평가되고 그들의 삶이 더욱 높게 평가되요.

 

이러한 불멸성은 사실 눈가리기에 불과하다고 생각해요.

죽음에 대한 공포는 자신의 존재가 사라짐, 끝에서 오는것인데

그저 자신의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하면서 잊으려는 발버둥? 이 아닐까요?

죽은 후의 불멸성때문이 지금 사는 삶을 바친다는건..... .....

그만큼 불멸성에대한 욕망이 크다는 것일까요?

 

죽음의 공포를 회피하는

두번째 방법은 종말에 대한 고민을 축소하는 것이에요. 

이러한 방법의 죽음의 해체와 평범화로 이루어져요.

죽음의 해체는 사람은 언젠가 죽는다는 사실을 무시하고 죽음이 예방가능하다고 가정하면서 시작되요.

그러면서 신적인 거대한 죽음의 의미가 축소되죠. 그러면서 죽음의 평범화가 와요.

죽음의 평범화는 죽음을 일상적인 영역으로 들여오면서 죽음을 평범하게 만들어요.

죽음의 경험. 2인칭의 죽음이 있어요.

3인칭. 자신과 관계없는 사람의 죽음은 우리에게 영원한 상실의 의미를 주진않아요.

하지만 자신의 친한사람의 죽음은 영원한 상실을 알게하죠.

공유적자아. 그사람과 공유했던 자아. 내 마음속의 그 사람의 부분이였던 것의 영원한 상실.

무엇으로도 대체할수없는 상실을 알게 되겠죠.

그러면서 죽음을 경험하게 하죠.

 

그리고 '두번째 걸러낸 죽음'의 경험이 있어요.

이건 관계에서의 상실이에요. 유동적 근대에서 인간적관계가 계속 약화되죠.

계속 약화되는 관계에서 새로운 관계가 계속 형성되고 또 관계가 계속 무너지죠.

이건 개인주의가 발달하면서 자신안으로 생각하는 것 때문이것도 같아요.

그런데 두번걸러낸 죽음이 정말 죽음의 평범화에 기여하는지 잘 모르겠어요.

2인칭의 죽음과 함께 세계의 상실을 알려주는 것 맞는데 죽음의 공포라는 것은

 자신의 존재에 대한 상실의 공포이잖아요.

잘 들여다보면 죽음의 공포가 정말 평범화 되어 있을까요?

또 다른 공포를 만드는 것이 아닐까요? 사실 그렇다고 피할수 없는 공포도 아니지만요.

 

그런데 '생명의 유한함은 인간관계의 깨지기 쉬움과 분별적 경향에서 여실이 나타난다.'라는

무슨 말인지 잘모르겠어요.

그런데 두번째 걸러낸 죽음은 추방과도 관련이 있어요.

인간관계의 상실이 살인. 이라는 것이에요.

그렇게 살인을 통해 인간관계의 상실에서 이익을 챙기는 사람과 희생자가 생겨요.

이익을 챙기는 사람은 인간관계의 상실이 하나의 해방으로 받아들이고 희생자는 추방으로 받아들이죠.

근데 여기서의 해방과 추방은 앞에서 얘기했던 해방과 추방과는 같은 맥락인가요?

사실 앞에서 추방과 해방등의 얘기가 나올때 이게 죽음과 무슨 상관이 있을까 하면서 의아했거든요.

그래서 여기서 나와서 그런가 했는데 사실 앞에서와 것과는 좀 차이가 있는 것같아요.

여기서의 추방은 추방의 이유가 있잖아요. 개인과의 관계에서도 그렇구요.

 

ㅎㅎ...

[지그문트 바우만]이 바라보는 것도 어쩌면 그런 관계의 상실일것 같단다.

중요한 것은 이런 죽음의 공포가 인간이 태어나는 순간부터 가져왔던 근원적 공포라면

결국 인류의 시작 즉, 태초부터 있어 왔었던 공포일텐데

왜 우리는 리얼리티 쇼를 보면서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 가 하는 것이 아닐까 ?

즉, 오랜 역사만큼이나 실은 죽음의 공포에 대한 이야기는 많을 듯 한데

유독 바우먼은 리얼리티 쇼를 가지고 우리에게 동의를 구하는 것일까 ?

그것은 실은 이러한 [죽음의 공포]를 자세히 설명하는 데 촛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런 공포들을 체화하고 극복하려는 우리들 각각의 개인들을 바라보는 어떤 시각이 있는 듯 하단다...ㅎㅎ

결론은 네가 본 것과 같단다.

 

영은

 근대는 사람들이 행복을 추구한데요. 행복에서는 불편함에서의 자유가 있어요.

실은 처음봤을때는 불편함에서 자유를 찾는다는 것인줄알았어요.

아무튼.. 불편함에서 자유. 불편함을 추방하는 것이잖아요. 이것에 대해서는 궁금해요.

결국 죽음에 대한 공포를 완전히 해소할 수 는 없고 다만 피하고나 미루는 일이라는 것이죠.

결국 죽음과의 전쟁에서도 패 한다는 것이구요.

 

결론은 그렇다는 거다

근대에 죽음에 대한 공포는 결국 패할 거라는 거다. 아무리 발버둥처도...?...ㅎㅎ

왜...?

근대에 사람들은 행복을 추구하지만 그 행복한 결국 불편함에서의 자유라는 거고

그 불편함이라는 것은 지극히 개인적인 경향이라는 거다.

이것이 근대가 가지고 있는 사회적 현상 혹은 근대의 표상이라는 거다.

결국 철저하게 고립된 개인들의 상태가

유동하는 사회에 기반하다보니

미쳐 준비될 수 없는 다양한 불편함들이 나타난다는 것이고

이를 기반으로 하여 살아가는 것에 대한 당혹, 불편함들이 결국 각각의 개인들에게

스스로 죽음을 회피하고 그저 리얼리티 쇼처럼

맹목적으로 동의하며 살아가는 삶으로써의 선택들을 하게 된다는 것이

그가 우리에게 묻는 것이 아닐까 싶다....ㅎㅎ

여튼 그의 관심사는 유동하는 공포에서 [유동하는]이 상징하는 근대의 삶의 방식이 아닐까 싶다..ㅎ

 

여튼 여기가지는 나도 허겁지겁 두서없이 답해 보았다....ㅎㅎ

 

영은이가 조금 더 생각하고 정리하고 물어본다면

나의 밑천이 바닥나겠지만

나름 그래도 재미난 책일고 정리하는 것은 될 듯해서 좋긴 하구나...ㅎㅎ

네가 분발하는 만큼 나도 분발해 보도록 하쥐....크크

 

다음에 네가 책 돌려주면 조금더 살펴보고

진지하게 답글을 써 볼께

우선은 그저 얄팍한 답변(?...맞는지도 헷갈림...크크)으로 만족하고 기다려주길 바란다...ㅎㅎ

 

여튼 영은 홧팅이다...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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