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간다20100608


이사한지 시간이 꽤 지났는데, 아직 전세금을 못 받고 있다. 임대차등기 쩌구쩌구를 해놓으려고 했는데, 아무리 뒤져도 계약서가 보이질 않았다. 작년 쯤, 계약서를 책갈피로 사용했던 기억만 어렴풋이.

 

책장에 꽂혀 있는 책 중 작년에 읽었을 책을 한권한권 빼서 넘겨보는데, 계약서를 책갈피로 사용한 것도 한심스럽고(넌 계약서가 넘쳐나냐, 버럭, 생각좀하고살자), 나도 돈 문제로 골머리 썩을 일이 생긴다는 것도 짜증스러웠다.

 

희극적인건, 한참 이책, 저책 뒤지다가, 지쳐서 반포기하고, 책이나 훑어보자는 생각에 한권을 뽑아 펼쳐들고 한장한장 넘기니, 맨 마지막 장에서 노란 종이가 흴끔 보인다. 탄성과 환성과 감사의 기도가.. 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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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람에게 오해 받는 게 견디기 힘들었고, 오해라는 걸 보여주기 위해 무던히 끄달리며 애썼었는데, 엊그제 보니 그런 마음이 가벼워졌다. 오해를 해도, 나에 대해 잘 몰라도, 뭐, 그러라지, 라는 편한 마음이 드는 게 신기하다. 조금의 평정심을 찾고 나니, 코끝이 잔잔하다. 이런 마음 상태가 오래가면 좋겠다. 누구에게도. 혹여나, 앙금이 남아있지 않을까 했는데, 나의 착각이었던 것 같다. 그걸 확인하는 순간 또 편해졌다. 상대방의 마음을 보지 말고, 내 마음을 봐야할 것인데, 계속 상대방의 마음에 내 마음을 맞추려 한다. 내 마음을 잘 돌보면, 오해 받는 걸 애닳아하지도 않고, 깊이를 재기 위해 애닳아하지도 않겠지.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실은 흘러다닌 것일 뿐이라는 걸 깨달으니, 조금은 허기진다.

2010/06/09 06:00 2010/06/09 06:00

보는거패왕별희

영화 자체에 몰입은 잘 안되네..(헌데, 내가 몰입하며 본 영화는 뭐가 있었나?) 문화는, 예술은 무엇일까? 요즘 책을 읽으며 나름 정리하는 건, 상대주의에 빠지는 건 모든 의미를 부정하고 해체의 효과를 남겨 바람직하진 않다는 것, 그렇다고 절대적 가치를 미리 상정해 놓는 것은 목적론으로 귀결될 것이라는 것. 시대를 넘어서려는, 그리하여 보편성을 획득하려는, 기울기/경향/등등의 말로서만 존재하는 것이지 않을까. 더 넓은 시대를 가로지르려는, 그리하여 부력을 밀치고 가장 깊숙이 내려앉으려는 그런 시도말이다.

아무튼, 영화안에서 경극은 결코 시대와 외떨어질 수 없고, 배우들의 노력과는 상관없이 적극적으로 시대에 부합한다. 살아남는 사람은 계속 살아남는다는 한숨이 무섭게 원대인도 죽었고, 자신을 팔거나 옆사람을 팔아야 살아남는다. 역사의 길이에 비해, 하다못해 삶의 길이에 비해서도 너무 짧은 흥망이 애처롭기도 하다. 살아남기 위해 그저 살았다고 하면, 더 초라해지는데. 그 속에서 이어져 온 것은 무엇일까.

주인공들 사이 관계는 잘 모르겠다. 애정일까, 집착일까. 안쓰런 건 쥬산.

문화혁명을 다뤘대서 봤는데, 그래, 아마도 그런 시기였겠지. 어떻게 살았어야할지 답이 서질 않는다. 지역 민주당이 한나라당과 똑같은 일을 하고 있는 게 떠오른다.

2010/06/09 00:13 2010/06/09 00:13

보는거델리카트슨 사람들 Delicatessen (1991)

소개해주신 덕분에, 잘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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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아이들의 도시와 같은 감독이다.

이 영화를 보고 나니, 이 영화는 물론, 잃어버린 아이들의 도시도 자본주의에 대한 풍자가 아닐까 싶어졌다.

 

고기가 없어, 사람을 잡아 먹는 동네.

푸줏간 주인은 사람의 고기를 팔아 곡식과 교환하고, 창고에는 곡식이 그득하게 쌓여있다.

푸줏간 주인의 실수로 다리 한쪽을 잃어도, 그 불평의 화살은 이방인에게로 향한다.

자신의 차례가 돌아오는 걸 피하기 위해, 다른 사람을 사지로 내보낸다. 서로 독립적으로 사는 것 같지만, 필요할 땐 합심해 희생자를 만든다.  델리카트슨 한편에는 매번 죽기 위해 노력하지만 죽지 못하는 부르주아 여성이 있고, 집세를 내지 못해 죽을 차례가 돌아오길 기다리는 가난한 할머니가 있다.

그리고 이런 지상세계의 사람들과 싸우는 지하세계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곡식이 부족할지언정, 사람 고기를 먹지 않는다.

영화는 집 바깥을 거의 보여주지 않는다. 설사 보일 때에도 음습하고, 비바람이 몰아친다. 집 내부는 당연히 어둡고, 또 장면의 한 축은 지하 또한 그리 다르지 않다.

 

지상을 자본주의, 지하를 현실사회주의 세계로 바꿨을 때 비유는 정확하게 겹쳐진다. 지하세계 사람들이 곡식만으로 살듯, 지상세계도 충분히 삶을 영위할 조건이 만들어져 있지만, 고기를 섭취하기 위해 희생자를 만드는 일을 포기하지 않는다.(곡식에는 화폐라는 은유가 겹쳐져 있다.) 이런 세상은, 왼쪽 수도꼭지를 틀면 오른쪽에서 물이 나오는, 뭔가 비틀어진 곳임에 틀림없다. 영화 안에서 푸줏간 주인을 격침시키는 것은, 지하세계의 사람들이 아니라 광대 뤼종과 푸줏간 주인의 딸 쥴리다. 이 둘의 '사랑'이 델리카트슨을 물로 깨끗이 쓸어내버린다. 푸줏간 주인이 죽고난 뒤, 첼로와 톱을 켜는 장면에서 하늘이 맑아져 있다. 지상/지하의 음습함과는 다른 세상이다. 뤼종과 쥴리는 지하세계에 도움을 요청하지만, 감독이 지하세계의 음습함에 동의하는 것은 아님을 시사하는 것 같다.  어두컴컴한 방안에 개구리와 달팽이를 키워 자생하는 사람은 공동체운동이 유비된다. 물이 쏟아지는 순간, 개구리를 방생하며 밝은 세상으로 뛰쳐나온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푸줏간 주인을 쓰러트린 건, 뤼종/쥴리가 아니었다. 궁지에 몰린 뤼종/쥴리는 실상 변변한 힘 한 번 쓰지 못했었고, 푸줏간 주인은 자신이 던진 부메랑에 맞아 죽게 된다. 생산을 늘리기 위해 고정자본을 소비하는 기술진보를 가속할 수록 최종적 파국에 가까워지는 자본주의.

 

군데군데, 기발한 상상력이 엿보이는 장치들, 멋지다. 저런 상상력, 닮고 싶어.

2010/06/06 11:45 2010/06/06 11: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