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는거

스포일러 있을거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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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쓴다는 게, 살아간다는 게 참 무거웠다. 크레딧이 올라가는 데 그 무거움 때문에 쉽사리 일어서지지 않았다. 잦아드는 화면이 그 아이와 주인공, 혹은 우리 모두가 눈앞에 둔 검은 물결 같았다.

 

-시라는 것은 아름다운 것. 누구나 시를 마음에 담고 있댔다. 시를 쓴다는 것은 본다는 것. 그 대상을 샅샅이 느끼는 것. 새들이 무엇을 노래하는 지 궁금해 하는 그녀에게 삶은 어쨋든 아름다움이 있는 곳이다.

하지만 시를 노래하는 입으로 음담패설을 뱉는 사람도 있고, 그녀의 삶도 평온하지는 않다. 시는, 삶은 그렇게 아름다움 보다 구질구질함이 더 눈에 띄는 곳이다.

-시를 쓰기 위해 대상을 본다는 것은, 내가 그 대상이 되어가는 일이기도 하다. 죽은 이의 삶을 반추하며 그 이의 마음을 짚어보는 것.

-왜 그랬냐며 손자를 뒤흔들지만 손자를 둘러싼 이불은 벗겨지지 않는다. 죄의식이 본성이라면, 본성에는 외투가 둘러쳐져 있어 그것에 접근하는 것을 방해한다. 그 껍질을 벗는 것은 자신의 나약함을 드러내는 일일지도 모른다. 그녀는 진절미를 내며 음악이 흘러나오는 컴퓨터의 전원을 내려버린다. 요란한 껍데기들에 대한 혐오가 있다. 하지만 그것은 그 껍데기 내면에 순수가 있으리라는 반증이기도 하다.

-그녀가 요구하는 속죄는 단호하고 가혹하다. 식탁위에 죽은 학생의 사진을 올려놓기까지 하지만 손자의 시선은 다른 곳을 향해 있다. 텔레비젼을 보고, 밥을 먹고, 오락을 하고.. 마음에 흠집 하나 나지 않았을 것 같은 그 태연함이 위태롭다.

-살구는 땅에 자신의 몸을 던진다. 다음 생을 위해. 추락은, 그렇다. 추락은 이 생이 아닌 다음 생을 기약하는 것이다. 노인의 성욕을 풀어주며, 뜸벅해지는 자신의 기억력을 보며, 삶의 구질구질함을 체화해가며, 그녀는 점점 시에 가까워진다.

-아름다움을 찾아 시를 쓰려는 행위는 현실의 고통을 외면하는 아름답지 못한 일이 될 수 있다는 역설을 깨닫고, 결국 아무것도 쓰지 못한 종이에는 빗방울이 떨어지고 형체없는 얼룩을 남긴다. 위자료를 건네는 건 속죄일 수 없다. 그녀는 손자를 경찰에 넘기며 배드민턴을 친다.

-그리고 그녀는 종국엔 자신이 그 아이가 되며, 시를 완성한다. 나를 뒤쫓던 것 모두를 사랑했지만, 검은물결 앞에 서게 된 그 아이. 아름답지 못한 삶을 피하지 않고 온전히 체화하는 것이 가장 아름다운 것이다.

 

박하사탕과는 달라진 것 같다.(밀양은 보지 않아서 잘 모르겠다. 그런데 사람들 말이 밀양과도 달라졌단다.) 그 땐 개인이 치르기엔 가혹한 죄값이라는 얘기를 던졌지만, 이번엔 오히려 치뤄지지 않는 죄값에 대해 얘기 던진다. 노무현의 죽음이 영향을 미쳤다고는 하나, 대상을 바꾸면 용산, 쌍용자동차, 삼성반도체, 곳곳에 만연한 죽음들에 대한 얘기이기도 하겠다.  전쟁지역에서 아이를 잃은 고통을 호소하는 부모의 영상으로 영화가 시작하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타인의 고통을 바라보는 우리 모두가 그 고통의 원인을 제공한 가해자일 수 있지만, 그 고통을 내것으로 삼지는 않는다. 시를 쓴다는 것은 대상을 깊숙이 보는 것이고, 대상 내면의 문제를 찾아내는 것이다. 이 고통들에 내가 연관되어 있을 수 있다는, 시스템의 구조를 파악하는 것이다. 그래서 삶이라는 건, 속죄하며 괴로워하는 과정이어야 한다. 사람들은 외려 너무 떳떳이 살아가고 있는데, 그렇게 죄의식 없는 그들을 대신해 내가 죽을 수 있어야지 않느냐고 질문 던지는 것 같다. 그 속죄를 우리는 종교적으로는 익숙하게 알고있다.-Jesus

그리고 시를 쓴다는 건, 그 대상이 되는 것이다. 단지 그 대상을 관찰하고 세밀하게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그 대상이 겪은 고통을 혹은 환희를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 말이다. 이건 자신이 가해자가 될 수 있음을 인식하는 것, 어쨋든 타인의 시선인 가해자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것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다. 속죄를 하기 위해서는 내가 그 사람의 삶을 체득해야 한다. 그 사람의 고통을 모르는데, 나의 잣대로 재는 것은 대상화시키는 방법의 하나일 뿐이다.

내 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순간을 말하는 장면에서 눈물이 났다. 아름답다는 건 삶의 풍진을 겪는 와중에 만들어지는 것이다. '가장' 아름다울 순간은 삶의 길이와 상관없이, 어느 때도 될 수 있다. 심지어 삶의 첫번째 기억일수도 있다. 그러고보면 아름답다는 것은 순간의 찬란함은 아니지 않을까? 나의 가장 아름다운 순간은 아직 도래하지 않았을까? 내가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순간은 어떤 순간인가? 도래하지 않은 찬란한 기억을 기다리는 게 아니라, 끝을 한정짓지 않고 지속되는 삶의 과정에 쌓여온 기억들을 다복다복 쓰다듬어 주는 속에서 아름다움이 만들어지는 것 같다. 그건 구질구질한 내 삶을 외면하거나 부끄러워 하지 않고 따뜻하게 되새김질 하는 일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게 문제겠다 싶기도 한데, 아무튼, 나이 든 여성의 몸이 그렇게 야할 수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정확히 어떤 부분이 마음에 걸리는 걸까.. 나이든 여성을 중성적인 존재로 생각하는것? 그래서 뒤집어 여성 일반을 성적인 대상으로 전제하는 것?)

 

시 다른 리뷰

http://blog.naver.com/melt21?Redirect=Log&logNo=140106947176

http://h21.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27394.html

2010/06/03 11:04 2010/06/03 11:04

지나간다지방선거

선거결과들이 찝찝하다. 예상외로 민주당이 강세를 보였다. MB심판 같은 허구적인 구호에 같혀 결국 신자유주의자들의 집권을 정당화시켜 준것이라는, 원론적인 이야기도 필요하겠고, 그래서 어떻게 활동할 것인지에 대한 계획도 필요하겠지.

김상봉씨가, 정권이 두려워하는 것은 다수 민주당 득표율이 아니라 진보신당 10% 득표라고 얘기했는데, 명쾌한 인식이다. 가끔 우리의 힘에 대해 설명하기 위해 예로 들곤 하는데, 콘서트 보러 모인 10만명은 아무런 위협이 되지 않지만, 다칠 각오를 하고 파이프를 든채 모인 1천명은 죽음의 공포를 불러일으킨다. 숫자가 중요한 게 아니지만, 현실 정치는 실재적인 힘을 쉽게 은폐시키고, 숫자놀음에만 시선을 맞추게 한다. 심상정씨는 결국 그 시선에 갇혀 놀음에 빠져들었다.

심상정씨 뿐만 아니라 진보적이라는, 운동을 한다는 많은 사람들이 반mb전선을 외치며 계산기를 두들기고 있다. 역사를 바꿔온 것은 아래로부터의 저항이라는 것을 이해하는 것처럼 얘기하지만, 현실정치의 프레임에 갇히면 그런 역사인식은 실종된다. 역사를 공부한다는 것은 바로 이점을 익힌다는 것일텐데, 광주의 영령들이 혁명적이었던 건 죽을 줄 알면서도 싸웠기 때문이다. 죽음을 피하고서 총을 버릴 수 있던 기회가 있었지만, 내 다음 사람에게 비겁의 기억을 남기지 않기 위해 패배하는 것을 선택했다. 광주의 정신이 사라진 이유는 바로 그 죽는 법을 잊어버린 데 있다. 자신의 위치를 겸손하게 역사의 흐름 속에서 찾지 않고, 오만하게 결정적 국면의 역사를 바꾸는 자로 남고자 하는 것 말이다.

mb를 심판하겠다는 것은 결국 내가 죽지 않고서 싸울 방법을 찾기 때문에 나오는 것이다. 될법한 것과 그럴싸한 것의 절충이잖은가? 그리고 mb를 심판하는 것이 중요하고 커다란 국면이라는 '대의'명분은, 내 손으로 큰 흐름을 바꿔내서 역사에 흔적을 남긴다는 생각이 전제된 것이다. 이건 혁명을 희화화 시키는 훌륭한 방법이기도 하다. 언제나 임박한 파국을 외치며 양치기 소년이 되어, 자신을 장렬한 투사로 포장하는 것.

심상정은 살고자 했고, 그래서 모두가 죽게 되었다. 4대강을 심판할 유시민은 결단코 박지연씨를 추모하지는 않을 것이다. 박지연씨의 죽음을 추모하는 것은 4대강을 심판한 뒤로 미뤄도 되는 일인가? 그렇게 죽음에는 경중이 있는가?  대의가 아닌 것은 끼어들 여지조차 없어졌고, 자신을 역사의 주체라고 생각하는 오만함 덕분에 역설적으로 역사는 대의를 주관하는 소수의 손에 맡겨진다. 기억되지 않는 죽음들에 대해 심상정씨는 어떻게 책임질 것인가? 그 이전에 심상정씨를 그렇게 압박했던, 반mb전선을 꾸리자던 그 치들은 어떻게 책임질 것인가? 특히, 민노당, 당신들은 역사 앞에 어떻게 무릎꿇을 것인가? 대의를 위해 어쩔 수 없다는 말은 박정희 이래 수구 꼴통들에게서 듣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될법한 것에 파리 몰리듯 달겨드는 게 아니라, 나를 그저 묵묵히 벼려내고 버티어내는 것이다. 그게 아무리 보잘 것 없는 것이라 할지라도.

2010/06/03 04:15 2010/06/03 04:15

지나간다20100530

심상정씨의 사퇴소식을 듣고, 마음이 너무 아팠다.

결국 진보정당 운동은 파국을 맞았구나.

나머지 후보들에게 얼마나 상처가 클지..

사퇴한 당사자의 마음은 얼마나 괴로울지..

당이 몰락하는 걸 지켜보는 지지자들의 마음은..

 

민노당이 민주당의 비판적지지 세력이라는 건 공공연했지만

진보신당마저 이렇게 무너지고 나니

그 10 몇년 동안 만들어온게 아무것도 남지 않았구나 싶어 눈물이 났다. 이만큼을 만들기 위해, 자신이 가진 것을 모두 던졌을 이들이 떠올랐다.

 

냉철하게 보자면, 예견된 일이었고, 진보정당이 파국을 맞은 것은 실상 이미 오래된 일이겠지만,

노동운동도, 학생운동도, 내 나이만큼이나 다지고 만들어져 왔던 것들이 야금야금 사라져 가는 걸 깨달을 때면 허무해 견딜 수가 없다.

 

모든 게 다 사라지고, 내 발바닥 만큼, 딱 그만큼의 발판만 남아, 온 몸의 털을 세운 채, 발톱이 벗어날새라 아둥거리고 있다.

 

정말, 알수가 없다. 내가 이렇게 만든 것일까? 다른 누구의 탓일까? 아니면 언제나 이랬던 것일까? 그래서, 언제나 이렇게 괴로워하고 날세우며 '견뎌야' 했던 걸까?

 

 

 

 

선거운동을 하면서, 내 진심을 다하고 싶었다. 그런데 진심을 다하는 게 보통 몸을 혹사시키는 것으로 이어진다. 같이 하는 다른 사람들에게 날카롭게 채근댄 것 같아, 미안했다.

아, 이것도 경계를 못찾겠다. 절실하다면, 이만큼은 해야하는 거라고, 그런 생각 때문에 사람들이 절실하지 않다고 재단해버리곤 한다. 그런데, 실제로 절실하지 않은 게 맞는 것 같기도 하고, 한편 설령 그렇다 해도 그렇게 단정하는 게 별로 좋은 효과를 남기지 않는다는 것 때문에 어느만큼의 기준을 가져야할지 도저히 모르겠다. 내 기준이 과도한 걸까, 과도한 거라면 어느만큼으로 조정해야할까, 과도한게 아니라면 그걸 어떻게 전달하고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이것과 별개의 일로 한 친구를 다그쳤더니, 그 친구가 울음을 터트릴 뻔 했다. 잘못했다고, 미안하다고 싹싹 빌었는데, 내가 사람을 아프게 하는데는 재주가 있는 것 같아 주눅들었다.

2010/05/31 06:00 2010/05/31 06: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