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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의 화가 모네

오늘 그동안 벼르던 모네전에 다녀왔다.

 

포스터

 

전시가 6월 26일까지인 줄 알고 포기하고 있었는데,

지난 금요일 집회에서 지금도 하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토요일 혼자 가려고 했는데,

아내도 함께 가겠다고 했다.

 

자화상

 

광화문에서 차에서 내려 비오는 덕수궁길을 아내 그리고 성연이와 함께 걷는 것도 좋았다.

 

오디오 가이드 대여료가 2,000원이다. 비싸다.

그림을 볼 때 대부분은 설명조차 잘 보지 않는 나지만, 아내와 성연이도 함께 봐야하고, 또 내가 참 좋아하는 화가인지라 '밑져야 본전'이라는 심사로 오디오 가이드를 빌렸다.

 

너무 기대를 해서인가. 얼마 보지 않아 뭔가 이상했다.

홍보된 것과 달리 전시물은 모네를 제대로 보여줄 수 있는 일류 컬렉션이 아닌 것이 분명해보였다.

 

       수련 - 한국일보

 

모네는 '빛의 화가'로 불리운다. 그만큼 빛에 따라 바뀌는 '인상'을 중시했다고 한다.

빛을 얼마나 중시했는지 심지어 사물의 고유한 색이 있다는 것조차 믿지 않았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나 전시물은 모네의 빛을 보여주기에는 충분해보이지 않았다.

물론 '새외 변방에 사는 백성에게 이 정도라도 감지덕지가 아닌가' 하는 마음에 고맙게 들러보았지만 말이다.



위의 말은 모네가 한 말이라고 한다.

물론 이 말 자체가 모네가 추구하였던 무궁무진한 깊이를 느끼게 하지만, 과연 내적 갈등 없이 그것이 가능했을까? 더욱이 사회주의 이념을 가졌다고 하는 그이였기에 말이다. 그에게 사회주의란 무엇이었을까?

 

그의 그림에는 인물조차도 자연의 일부로만 그렸던 듯 싶다. 인물은 얼굴 표정에 의해서 개성이 드러나고, 많은 상징과 이야기를 담고 있으련만, 모네의 그림에는 심지어 그가 사랑했던 까미유의 얼굴조차 윤곽만 있을 뿐이다.

 

인물조차 자연의 일부로, 자연과 동등하게 녹여서 그렸고, 사물의 본질이나 상징보다는 외부의 빛에 의해 변하는 사물에 더욱 천착하였던 그에게는 까마귀나 강렬한 눈빛이나 길을 막고 있는 커다란 교회와 같은 강한 상징이나 '카리스마'는 보이지 않는다. 다만 세상에 대한 '겸손함'과 '따뜻함'이 엿보인다.

 

사회주의자라면 어쩔 수 없이 접근하고, 도전하게 되는 게 본질에 대한 탐구와 변혁욕구가 아닌가 한다. 그러나 그는 다른 길을 간 것 같다. 그러면서 그가 그리고자 했던 세상은 무엇이었을까? 과연 그렇게 하여 정확히 그릴 수 있을까? 이 세상을?

 

음. 정확히는 모르겠다. 다만 나도 한번 도전해 보고싶을 뿐이다. 내 운명도 다른 것을 갈망하여도 따라갈 수 없는 운명이 있음을 점점 깨달아 가면서 말이다.

 

       성연이/ 방학 체험학습에 증거로 제출하자고 꼬셔서 한방^^


        아내와 성연/ 이제 식당으로 간다는 생각에 기분이 좋아졌는지 왠일로 V자까지 짓는 성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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