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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믿는다는 건

1.

사람을 믿는다는 건 어디까지 가능할까.

 

노장사상의 창시자인 장자는

정말 효자였다고 한다.

(설마 기준이 뭐냐고 따지시는 분은 없겠지.)

장자의 엄마도 참으로 자애로우신 분이였다고 하고...

 

어느날 장자가 반역을 하여 위기에 몰렸다는 소식을 듣고

친구 하나가 헐레벌떡 장자네 집으로 와서 어머니에게 말했다.

'어머니 얼른 피하셔야 합니다. 장자가 반역을 했답니다.'

 

아들이 결코 반역을 저지를 사람이 아님을 확신한 엄마도

세번째 친구가 와 똑같은 말을 했을 때 짐을 싸서 몸을 피했다고 한다.

 

사람을 믿는다는 건 무엇일까.

어디까지 가능한 것일까.

 

 

2.

다시 주변으로 돌아오면

 

친한 친구, 또는 선후배, 또는 심지어 연인이라도

맘먹고 의절하려고 한다면,

난 5분의 시간이면 충분할 것 같다.

 

5분의 시간이 지나면

죽어도 다시는 보고싶지 않겠다고 결심하게 만들 수 있는 관계

우리의 보통 관계라는 게, 믿음이라는 게

그정도 아닐까.

 

마치 살얼음처럼 깨지기 쉬운 관계 말이다.

 

 

3.

그럼에도 나도, 그리고 또 많은 이들도

사람의 관계에 집착한다.

믿음에 집착하고...

 

살얼음 같은 믿음의 토대 위에

우정이든, 사랑이든 관계의 집을 짓고 또 짓는다.

 

그 집이 근사하면 할수록

욕심을 내고, 또 내고...

끝모를 곳까지 나아갈 수 있을 것만 같기도 하고...

 

그러다가 모든 게 무너지면

일순 상심하고, 절망한다.

상심과 절망의 정도가

가졌던 관계의 크기, 무게, 깊이에 비례하기도 하고...

물론 관계의 크기와 깊이는 주관일 수밖에 없겠지만...

 

 

4.

관계의 무너짐을 겪고 또 겪으며,

상처에 또 상처가 덧대어지면서

사람의 관계에 경계를 긋는 이들이 많지만,

 

그렇게 변하는 이들이

어른스럽다고 인정받을 지 모르지만,

 

그러나 설령 또 상처 받을 지도 모른다는 것을 알면서도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 모든 희망이 있기 때문일까?

 

사람과 사람의 관계 말고는 희망을 걸 곳이 없기 때문일까?

 

아님 그냥 천성 때문일까?

 

이유야 무엇이든 어떠랴.

미숙하다고 또는 비현실적이라고 손가락질을 받아도,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소중하게 여기고, 희망을 거는 이가 난 좋다.

 

 

5.

누군가를 진정으로 이해하게 됐다면 아무리 늦었다 해도,

아무리 아니라고 해도 그건 분명 사랑인 거다.

- 이병률 [끌림]

 

'이해'에 '진정'이 아닌 게 또 어디 있으랴...

남에게 보이기 위한 '이해'가 아니라면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난 이병률의 표현 중에 '진정으로'라는 구절을 빼고싶다.

'진정으로'라는 표현이 자칫 쌍방향 확인의 결과인 듯 한 오해를 낳기 때문이다.

 

이미 확인된 것을, 이미 사랑으로 확인된 것을

또 다시 사랑이라고 얘기한다는 것은

'호박은 호박이다'라고 얘기하는 것처럼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족을 붙이자면

'이해'한다는 것만 해도,

그것이 아무리 주관적일지라도,

얼마나 어렵고 소중한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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