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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내린다.

1.

어제는 비가 내렸다.

몇날 며칠을 내릴 것처럼

한결 같이 내렸다.

 

방안에서 무심히 빗속을 거닐면서

난 이미 비에 푹 젖어 심장에 까지 물기가 배인 것 같았다.

 

행주산성 들머리에 있는 커다란 반송

 

이미 비에 푹 젖었음에도

난 우산을 들고 집을 나섰다.

 

우산을 든 것은

순전히 남들의 도드라진 시선을 불편해 하는 내 소심한 성격 탓이다.

 

차창 밖 풍경은

번진 듯, 흔들리는 듯 흐릿했다.

 

알 수 없는 것...

아니 깔끔하게 정리하고 싶지 않은 것...

내 마음도 흐릿하고, 흔들리지만

그렇게 그대로 내버려두고 싶었다....

 

텅빈 산책길로 안개가 내려오고 있다.

 

 

2.

비오는 토요일

그러나 행주산성엔 아무도 없었다.

 

자연이란

그 자체로 무수한 사연을 간직하고 있고,

심지어 드라마도 가지고 있다.

 

토성 위로 난 산책길/ 칡향이 싱그럽다.

 

숲은 때로 내 얘기를 대신 해주기도 하고,

나를 자신들의 얘기 속에 숨겨주기도 해준다.

 

행주산성 커다란 문을 들어섰다.

비에 젖어 더욱 검게 보이는 아스팔트길을 천천히 올랐다.

몇 걸음 더 오르니 안개가 다가왔다.

몽롱하고 편안했다.

 

숲은 깊고 서늘했다.

 

 

3.

봄꽃이 지고, 가을 단풍이 오기 전이지만

행주산성 숲은 그대로 포근하다.

 

행주산성에는 유난히 칡덩쿨이 많다.

 

넝쿨 속엔 꽃대가 소복이 올라오고 있다.

 

햋볕이 거칠 것 없는 한 여름 낯

숨을 헐떡거리며 이파리들이 축축 느러지도록 왕성한 광합성을 할 때면

칡꽃 뿐만 아니라 칡넝쿨에서도

몽롱하고 들큰한, 말 그대로 농염한 향기가 진동한다.

 

만약 8월에 2차선 산길을 간다면

에어콘을 끄고, 창문을 열고 천천히 달려보시라

어디선가 유혹적인 향기가 스쳐지나간다면

십중팔구 그것은 칡향일 것이다.

 

아직은 칡꽃이 피기엔 이르다.

그래도 칡에선 향기가 난다.

농염함 대신 푸릇하고 싱그러운 향기가...

 

위의 나무자락을 걷어내지 못하는 사진도 내 소심한 성격을 반영하고 있구나...

 

 

4.

행주산성 토성길 위로 난 산책길은

마사토가 그대로 드러난 흙길이다.

빗물에 튕긴 모래알들이

샌들 속으로 들어와 날바닥을 걷는 느낌을 준다.

 

안개에 쌓인 숲속은

깊고 서늘하다.

큰 숨을 들이쉬고 깊이 바라보지만

이내 시선은 흐려지기만 한다.

 

행주산성에서 바라본 넓고 잔잔한 한강

 

넓은 잔디밭이 나오고 온갖 기념조형물들이 나오면

그곳이 정상이고,

넓은 한강이 제법 보인다.

 

이곳에서 옆으로 난 샛길 끝에는 진강정이 있다.

천길 낭떨어지 위에 호젓이 자리잡았다.

나는 이곳에서 맥주 한캔을 마시고 싶었다.

그런데 무수한 유흥시설이 밀집한 산밑 마을에는 구멍가게조차 없었다.

 

행주산성에서 가장 호젓한 곳에 자리한 진강정

 

 

5.

나는 행주산성을 올랐다가

한강변으로 난 산책길을 지나

내 힘이 닿는 데까지 멀리멀리 가고 싶었다.

 

그러나 ...

난 그냥 발걸음을 돌렸다.

 

안개에 잠긴 산책길...

 

달라졌기 때문도 아니다.

달라지길 바래서도 아니다.

강과 풀과 나무들이 주는 위안이 불필요해서도 아니다.

그냥 그렇게 멈추고 싶었다...

그냥 그렇게 모든 걸 유보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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