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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 올레

1.

 

지난 9월 11일

드디어 고양 올레 첫번째 함께 걷기를 했다.

 

올해 나의 목표 중에 하나가 고양 올레길을 만들기였다.

그러나 게으른 성정에 재촉하는 이 없이 혼자서 하니 영 진도가 나가지 않았다.

 

그러던 중 고양시 '민우회'에서 고양시 올레 걷기를 한다는 얘기를 들었고, 함께 하자는 제안을 들었다. 너무 반가워 무조건 같이 하자고 했고, 일단 하루 걸을 수 있는 약 10km 구간을 정해봤다.

 

초록색이 걷기 구간이다. 맨 아래 동그라미가 고양시청으로 우리가 출발한 지점이다.

맨 끝부분은 문봉동 느티나무 근처, 고봉동 동사무소 옆이다. 그곳에는 사도세자의 장인인 홍봉한의 무덤이 있기도 하다. 그리고 주황색선은 북한산에서 고봉산에 이르는 산줄기 중, 우리가 걸은 구간 중에 있는 산줄기 표시이다.

 

 

출발 집결지는 9월 11일(금) 오전 9시 30 고양시청 앞이었다.

도착해보니 사람들이 별로 없다.

보통 민우회 올레걷기의 경우 15명 쯤 온다고 해서 10명 이상 오리라고 생각했는데,

총 5명이 참가했다.

민우회 이여로 대표는 미안해했지만, 사실 내게 미안해할 일은 아니다.

 

본격적으로 산길로 접어들기 전 밀양박씨 선영 앞

 

시청 안 나무그늘 아래서 서로 인사를 하고 오늘 걸을 구간에 대하여 간략하게 설명했다.

내 취미가 묘지기행이라 그런 측면에 많이 이야기를 하겠지만, 오늘 걷는 구간은 그냥 걷기로도 좋을 것 같다는 그런 얘기였다.

물론 함께 고양 올레길을 만들어 보자고 제안도 했다.

 

출발하고 곧 나타나는 북한산에서 고봉산에 이르는 주능선길/ 능선이 평탄해 군사도로가 넓게 나 있다.

 

 

2.

 

오늘 대략적으로 걸을 구간은 위의 위성사진에서도 보이지만,

고양시청 - 대궐약수터 - 고양왕릉 - 사리현동 - 현달산 - 고봉동 동사무소 홍봉한 묘이다.

 

주교동 박씨 선영에서 산길을 조금만 접어들면 산 속에 2차선 아스팔트길이 나온다.

이 길은 북한산에서 고봉산에 이르는 주능선에 난 길이다.

길은 식사동으로 이어지지만, 군부대가 한쪽을 차지해 가로막고 있는 군사도로다.

덕분에 일반차량은 거의 다니지 않아 맘 놓고 걸을 수 있다.

 

대궐약수터/ 공양왕이 이 샘물만 마셨다고 하는데, 사람들이 시멘트로 발라서 물을 가둬놓은 탓인지 지금은 식수 부적합 판정을 받아먹을 수 없다.

 

대궐약수터에서 아스팔트길로 오르는 산길/ 약 100m인 이 구간이 이날 걷기 구간 중 경사가 가장 급한 난코스(?)였다.

 

 

대궐약수터는 옛날 공양왕이 이곳에 숨어 살 때 이 샘물만을 마셨다는 전설이 있다.

지난 8월 수질 검사에서 불합격 판정을 받아 지금은 마실 수 없지만,

그래도 물이 시원해 손이라도 씻고 가려고 걷기 구간에 넣었다.

 

대궐약수는 이 근처 사람들에게 많이 사랑받는 샘물이다.

약수터를 중심으로 모임도 만들어졌는데, 이 모임을 하는 사람들이 보다 많은 사람들이 이 물을 마실 수 있도록 한다고 시멘트로 큰 물저장고를 만들었고, 전기로 물을 뿜어 올리도록 장치를 했다.

 

그 때문인지, 물은 이제 식수로 적합하지 않아 그저 지나는 이들의 데워진 얼굴과 손을 씻는 물로만 기능하고 있을 뿐이다.

과욕이란 그런 것이다. 그런데, 누구도 과욕을 인정하지 않는 것 같다.

과욕을 인정한다면 시멘트를 깨고, 옛날처럼 물이 졸졸 나오는 조그만 샘물로 되돌려 놓아야 할 터인데...

 

 

3.

 

군사도로 끝에는 군부대가 커다랗게 자리 잡고 길을 가로막고 있다.

우리는 오른쪽 산길로 접어들었다.

여기서부터는 본격적으로 산길, 들길이다.

 

이량의 후손으로 보이는 이의 무덤에서 시대별 문인석 양식을 설명하는 풀소리/ 묘지기행이 취미인지라 내가 보기에도 설명을 하는 풀소리가 참 행복해 보인다.

 

 

산길을 접어들어 조금 내려오면 조선 명종 때의 권신(權臣 ) 이량(李樑 )의 무덤이 나온다.

 

이량의 무덤에서/ 풀소리는 완전 신났다~ ㅎ

 

 

이량은 1519년(중종14년)에 태어나 1563년(명종 18년)에 죽은 분으로 효령대군의 5대손이다.

아시다시피 명종은 즉위 초에는 어머니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했고, 외삼촌이 윤원형이 권력을 한 손에 장악하고 쥐락펴락하였다.

문정왕후가 죽고 나서 명종은 외삼촌인 윤원형을 견제하고 싶었다.

그래서 그 문제를 가지고 당시 왕후인 인순왕후 심씨(仁順王后 沈氏)와 상의했고, 인순왕후는 이량을 추천했다. 이량은 인순왕후의 외삼촌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량은 윤원형보다 한술 더 떴나보다. 여우 싫어서 쫓아내니 호랑이 들어온 꼴이랄까.

이량은 틈만 나면 당시에 이름난 선비들을 대거 숙청하려고 했고, 이 과정에서 또 다른 권력자이며, 자신의 조카이자 인순왕후의 동생인 심의겸과 부딪쳤다.

(심의겸은 동서분당의 한 주역이 된 그 사람이기도 하다.)

결국 이량은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하고자 조카인 심의겸과 처남이자 심의겸의 아버지인 심강을 숙청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오히려 심강, 심의겸 부자에 의해 권력을 잃고 귀양을 가 그곳에서 생을 마감했다. (자세한 내용은 다음 기회에 시리즈로...)

 

암튼 당대의 권력을 한 손에 쥐었고, 이조판서로 인사권을 장악한 사람치고는 무덤 아래에 신도비조차 없다. 후대의 명망 있는 선비 중에 누구도 신도비문을 써주지 않았거나, 후손이 몰락했거나 둘 중 하나 때문이리라. 후손이 몰락하지 않았으니 전자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무덤 옆에는 최근에 세워진 신도비가 있다. 그 신도비에는 거꾸로 소인들의 참소를 받아 배소(귀양지)에서 죽었다고 쓰여 있다. 아무리 자기 조상을 미화해도 참으로 후안무치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기묘사화를 일으켜 사림으로부터 지탄을 받은 심정의 손자 심수경은 평생 자신의 할아버지의 죄과를 짊어지고 근신으로 일관하여 오히려 세상으로 인정을 받고 우의정에까지 이른 바 있다. 심수경 같이는 못한다고 하지만, 어찌 이렇게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자기 조상이라고 미화를 한단 말인가.

 

 

 

이량 묘에서 공양왕릉으로 가는 논둑길/ 벼가 막 익기 시작해 까실까실하고 고소한 벼 익는 냄새가 난다.

 

 

 이량묘에서 공양왕릉은 바로 건너다 보인다.

공양왕릉을 가는 길엔 농로와 논둑길이 있다. 모처럼 걷는 논둑길이 참 좋다. 특히 벼 익는 냄새와 오랜만에 보는 논둑에 심어진 녹두가 참 좋았다.

 

공양왕릉이 있는 왕릉골 일대/ 율원군은 이량의 증조할아버지이고, 이량의 묘는 그 근처에 있다. - 고양시문화재분포지도

 

 

옛 무덤을 가면 나는 인물, 무덤양식, 문인석 등 석물의 양식 등을 본다.

인물은 기존에 가지고 있는 역사지식에 비문을 보면서 보다 상세히 알 수 있는 정보로 파악을 할 수 있다. 그러나 역사지식이나 비문의 정보 말고도 묘지는 나에게 많은 얘기를 해준다. 얘기를 해준다는 건 내가 상상할 수 있는 게 많다는 뜻이다.

 

공양왕릉에 서면 참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멸망한 고려의 마지막 왕으로써 공양왕이 흥미를 끌기도 하지만, 공양왕릉 위로 들어선 사대부들의 무덤을 보면서 또 이런저런 생각을 하게 된다.  공양왕이 망한 왕조이지만 그래도 왕이었는데, 완전 무시하고 릉 위에 버젓이 무덤을 썼다. 저 사대부들은 무슨 마음으로 이곳에 무덤을 썼을까. 그들에게 공양왕은 어떤 존재였을까.

 

공양왕릉(나무 울타리가 처져있는 부분)과 그 위로 있는 사대부들의 무덤 - 사진 고양답사연합회

 

고양왕릉이 조선에서 공식적으로 인정된 것은 태종이 재위 16년(1416)에 공양왕으로 봉하고 고양현에 무덤을 마련하면서부터이다. 공양왕릉 위의 사대부 무덤 중에 제일 먼저 생긴 것은 정자양의 무덤이다.

 

정자양은 세종 때 병조판서를 지내고, 안평대군의 장인인 정연의 둘째 아들이다. 그리고 송강 정철의 큰증조할아버지 이기도 하다. 어찌됐든지 정자양이 이곳에 무덤을 쓴 것은 조선왕조가 공식적으로 공양왕릉을 인정한 이후의 일이다. 그러니 이곳에 무덤을 쓴 사대부들은 밑에 있는 무덤이 공양왕릉임을 익히 알면서도 자기 조상의 무덤을 썼음이 틀림없다.

 

정자양의 무덤에서 비석 양식에 대하여 설명하는 풀소리/ 이 비석은 조선초기의 전형적인 비석양식으로 비석 위가 투구를 닮았다고 하여 일명 '투구형 비석'이라고도 한다./ 참고로 참 좋은 재질의 화강암 비석이다.

 

 

그 사대부들 무덤 맨 위에는 신광한의 무덤이 있다. 그리고 정자양의 무덤을 제외하고는 모두 신광한의 후손들의 무덤으로 보인다.

 

신광한은 정자양의 외손자이기도 하다. 정자양 가문이 이 땅을 외손인 신광한 가문에 묘지로 내주면서 이곳은 고령신씨 소유로 넘어간 것 같다.

 

신광한. 그는 성종15년(1484년)에 태어나 명종10년(1555년)에 죽은 이로 신숙주의 손자이자 당대의 대문장가이며, 동시대 학문권력을 장악하는 대제학을 역임한 사람이다.

 

기재(企齋) 신광한의 무덤/ 바로 밑으로 정자양의 새 비석이 보인다.

 

 

신광한의 무덤에는 신도비가 없다. 동시대 학문권력을 장악한 이의 무덤치고는 참으로 예외적이다.

왜일까?

 

신광한은 기묘사화 때 조광조 일파로 몰려 20년 가까이 벼슬길에서 물러나 있어야 했다. 그러다가 중종 32년(1537년)에 다시 등용되어 이조판서 등을 역임한다.

 

1545년 명종이 즉위하고 을사사화로 수많은 선비들이 죽음을 당했다. 을사사화는 명종의 모후인 문정왕후와 외삼촌인 윤원형 등 이른바 소윤파(小尹派)가 인종의 외삼촌인 윤임 등 대윤파( 大尹派)를 숙청하면서 발생한 사화이다. (이 사화에서 송강 정철 가문은 완전 직격탄을 맞는다. 정철의 큰누나가 인종의 후궁이었고, 둘째 누나가 당시 대윤파에서 왕으로 추대했다고 하여 효수된 계림군의 부인이었다.)

 

신광한은 을사사화에서 소윤파에 가담하였고, 그 공으로 공신칭호를 받으면서 곧바로 우찬성으로, 양관 대제학으로, 좌찬성으로 승진한다.

 

조선왕조에서는 정치적으로 결코 복권시키지 않는 부류가 있다. 그 중에 사화를 일으킨 주역들이 당연히 포함된다. 심정과 남곤, 김안로, 윤원형 등등이 그 부류이다. 조선의 선비들은 아마 신광한도 이 부류로 여긴 것 같다. 그러니 신도비를 써줄 이가 없었을 것이다.

 

나는 신광한의 무덤에서 최근 이명박 정부의 총리로 지명된 정운찬을 생각한다. 그리고 사람이 오래 사는 것이 꼭 좋은 일만이 아니구나 하고 생각하기도 한다. 신광한이 명종이 즉위하기 이전에 죽었다면... 그리고 정운찬이...

 

 

4.

 

신광한의 무덤을 지나면서는 사리현동 마을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산길이다.

이곳은 간혹 산악자전거를 타는 이들이 다닐 뿐 거의 인적이 없는 곳이다.

 

공양왕릉에서 사리현동 마을로 향하는 산길

 

산초

 

여물어가는 산밤

 

 

이 산길에는 산밤도 많지만, 요즘은 산초도 많다.

산길은 참 호젓하지만, 그만큼 외져서 혼자 오기는 힘든 곳이기도 하다.

 

사리현동 마을부터는 좁은 마을길이다.

차도 다닐 수 있지만, 차도 사람도 거의 만날 수 없는 도시 속의 농촌의 호젓한 길이다.

 

사리현동 마을 논가에서 만난 거위(?)

 

길가에 떨어진 밤을 까는 일행들

 

사리현동에서 식사동으로 넘어가는 고개를 넘자마자 오른쪽으로 비포장도로가 나타난다.

이 길은 현달산 뒤로 난 길로, 요즘은 시골에서도 보기 힘든 비포장도로가 이색적이다.

 

길옆으로는 칡넝클이 우거져 있고, 풀 섶에는 방울새 떼가 폴짝폴짝 날아다녔다.

동네길 길옆에는 맨드라미며, 채송화가 예쁘게 자라나고 있어 옛날 시골을 연상하게 한다.

 

현달산 뒤의 비포장길

 

 

5.

 

처음 난 이 길을 2시간 30분이면 걸을 수 있을지 알았다.

그러나 예정보다 1시간이 더 걸린 3시간 30분이 걸렸다. 

그렇게 시간이 더 걸린 것은 무덤에서 내가 말을 너무 많이 한 탓도 있지만, 걷는 구간이 그만큼 좋아 자주 걸음을 멈추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우리는 마지막 행선지인 홍봉한의 무덤은 가지 않기로 했다.

홍봉한의 무덤을 멀리서 보는 것으로 만족하고, 일정을 끝내고 식당으로 향했다.

 

홍봉한의 묘/ 사도세자의 장인이다. 그에 대하여 할 말은 많지만 다음 기회로 미룬다. 

 

 

나는 이번 올레길을 계획할 때 우선적으로 고려한 것은 '걷기에 좋은 길'이었다.

그리고 그 사이에 역사적인 유적(주로 무덤이지만 )을 끼워 넣었다.

앞으로도 그런 원칙을 지켜나갈 것이다.

 

그리고 '올레'라는 명칭보다는 다른 이름을 짓고 싶다.

그러나 워낙 올레라는 이름이 유명해서 거의 일반명사화 할 정도라 나도 일단 그 이름에 편승해보기로 했다. 이름이야 천천히 지어도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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