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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 여행기 1 - 제주시내

사실 사는 것이 점점 어렵고, 지치고, 무섭기도 하다...

주변을 돌아봐도 힘겹게들 고군분투 하지만, 성과는 미미하거나 의미없는 것이 되버리기 십상이다.

그러니 여행기를 올리기도 쑥쓰럽고 무안하다.

 

그래도 오랜만에 방치된 블로그에 자그마한온기를 불어넣는다는 심정으로 포스팅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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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1일 드디어 제주에 발을 디뎠습니다.

 

저에게 제주도는 아끼고 또 아꼈던 여행지였습니다.

너무나 아꼈나요.

모든 것에 적절한 시기가 있듯이, 시기를 놓친 저는 이제서야 제주도에 가게 되었습니다.

 

3시 15분 비행기를 예약했습니다.

일행들은 늦은 시간에 오지만, 저는 제주시를 보고싶어서 비행기 시간을 늦추지 않고 그냥 제주로 향했습니다.

 

 

 용두암 가는 길

 

 

 도로변에 피어난 코스모스

 

 

커다란 야자나무 가로수.

제주에서 가정 먼저 만난 이국적 풍경입니다.

 

저는 걸어서 제주 시내를 한 바퀴 돌고 싶었습니다.

공항에서 관광지도를 얻어 가야할 곳을 표시해두었습니다.

 

용두암 - 용연 - 제주목관아 - 제주항 - 삼성혈 - 버스터미널

 

각각 의미가 있었습니다.

용두암은 각종 사진에서 워낙 많이 본 풍경이라 들르고 싶었습니다.

용연은 제주목관아 가는 길에 있기에 들르기로 한 것이고요.

제주목관아는 사실 제가 제주시 관광을 하고자 결심하게 한 주된 목적지입니다.

예전에 허응당 보우(虛應堂 普雨, 1515~1565) 스님이 이곳에 귀양와 당시 목사(牧史)인 변협에 의해 맞아 죽은 곳입니다.

최고 지성에 대한 편협한 종교적 광기에 의한 살해...

잔인하지 않은 살해가 어디 있겠습니까마는 보우에 대한 살해가 전 조선역사를 통털어 가장 잔혹한 정치적 살해라고 생각합니다.

 

어찌됐든 그렇습니다.

 

제주항은 예전부터 육지의 뱃길이 닿던 곳이기에 그곳에 가서 풍성한 상상을 하고 싶었습니다.

삼성혈은 사실 시간이 날지 안 날지 자신이 없었습니다.

 

 

 용두암

 

 

용두암까지 가는 길은 멀었고, 포장도로에서 올라오는 복사열은 높은 습도와 만나 푹푹 쪘습니다.

그래도 바닷가는 시원하더군요.

 

용두암에 다다랐습니다.

사실 저는 별 감흥이 없었습니다.

사진으로였지만 너무나 많이 본 풍경이었기에 그럴 겁니다.

아니면 너무나 알려진 풍경에 대한 저의 선호가 없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용두암 근처의 조선시대 무덤

 

 

 용연

 

 

용연에 갔습니다.

제주시를 관통하는 한천(漢川)은 하류에서 바다 쪽으로 깊은 협곡을 만들었습니다.

이곳에 바닷물과 만나는 지점에 호수처럼 깊고 잔잔한 물이 있는데, 이곳이 용연입니다.

 

예전에 이곳에 유배 온 관리들이 이곳에서 뱃놀이를 즐겼다고 합니다.

변방의 유력자들은 비록 당장은 변방으로 귀양을 왔지만 한 때 중앙무대의 주역이었고, 언제 다시 중앙무대의 주역으로 복귀할 지 모를 귀양객들을 극진히 대접한 것 같습니다.

 

 

 용연 옆에 있는 정자

 

 

 용연 옆 벤치

 

 

 용연 옆 산책길

 

 

용연에서 제주목관아 가는 길목에 제주 향교가 있습니다.

이곳에도 잠깐 들렀습니다.

참 잘 보존되었다는 느낌이었습니다.

 

 

 제주 향교 내부

 

 

 공자님께 제사를 지내는 대성전에 들어가는 문/ 높이가 매우 낮아 고개를 숙여야만 합니다.

 

 

 제주목관아 정문인 진해루

 

 

제주목관아에 갔습니다.

길가에 있는 커다란 정자인 관덕정은 수리중이라 온통 천으로 가림막을 쳐 놓았습니다.

옆으로 가니 정문인 진해루 문이 잠겼습니다.

여기저기 기웃거리고, 주변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관람시간이 지났답니다.

내가 도착한 시간이 6시 20분인데, 6시까지만 관람이랍니다.

 

세상에...

여기를 목적으로 온 것인데...

 

한참을 두리번 거리다 이웃에 있는 우체국 건물로 올라갔습니다.

그곳에서 몇 컷 찍었습니다.

 

 

 제주목관아 사진/ 맨 오른쪽 뒤 건물이 목사가 정사를 보던 연희각입니다.

 

 

조선 사대부에 의해 요승(妖僧)으로 블렸던 보우스님.

그러나 과연 그는 사대부들이 주장한 대로 요승이었을 뿐일까요?

 

그의 시 한편을 보지요.

 

    한적한 곳

  

    암자는 겹겹 구름 속

    본디 사립문도 없다네

    늘푸른 삼나무와 저녁햇살 어린 국화 하나

    서리맞은 열매 떨어지고

    스님은 여름지난 옷을 꿰매나니

    이 한적함이 내 옛 뜻이거늘

    돌아갈 길 잊고 시 한편 읊네

 

그리고 그가 죽기 직전에 읊었다는 임종게(臨終偈)를 보까요.

 

    허깨비가 허깨비 고을에 들어

    오십여 년을 미치광이처럼 놀았네

    인간의 영욕을 다 겪고

    중의 탈을 벗고 푸른 하늘에 오른다.

 

    幻人來入幻人鄕

    五十餘年作戱狂

    弄盡人間榮辱事

    脫僧傀儡上蒼蒼

 

   (동국대학교 역경원 ;<한글대장경> 김상일 번역)

 

그의 시에서도 보이지만 그는 당대 대표적인 지성 중 한명이었습니다.

그러나 후원자인 문정왕후(명종의 모후)가 죽자 이율곡을 비롯해 수없는 사람이 보우를 죽이라고 상소를 했고,

조정에 도달한 상소문만 1,000여 통이었다고 합니다.

 

결국 제주도로 귀양을 갔습니다.

당시 그곳의 수령은 목사 변협(邊協)이었습니다.

이 양반은 무과를 거쳐 제법 출세한 벼슬아치였는데, 일설에 의하면 그곳으로 귀양 온 보우스님에게 매일 동헌 주위를 쓸게 했고,

또 매일같이 지역 무뢰배를 시켜 보우스님에게 주먹질을 하게 했답니다.

결국 그렇게 해서 보우스님은 죽었습니다.

지성에 대한 무뢰배의 모독...

 

아무리 죄인이라도 귀양지에서 관리가 임금의 명령 없이 죽이면 큰 죄가 됩니다.

죽은 지 몇 달 뒤 보우의 죽음이 임금에게까지 알려졌지만, 변협은 죄를 받지 않습니다.

임금은 노했지만, 당시 관리들은 모두 변협을 감쌌기 때문입니다.

 

다시 제주목관아의 동헌자리인 연희각을 바라봅니다...

지금도 힘겹게 비질을 하는 한 노인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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