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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물에서 찾기일상 속에서 문득 시간을 낸 짜투리 여행과 여행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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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5/01/21
    늦가을 호사
    풀소리

늦가을 호사

늦가을 호사

난 오늘 여의도 샛강에 갔다.
점심을 먹고 창밖을 내다보니 아직 지지 않은 플라타너스 잎새 위로 늦가을 찬비가 내리고 있었다. 비먹은 검은 차도와 검은 흙, 안개 속에 희미한 여의도, 나는 우산을 집어들고 길을 나섰다.

내가 근무하는 사무실에선 63빌딩이 있는 여의도와 샛강이 보인다.
물론 책상에서 창밖을 보면 대방동 쪽으로 아파트가 제멋대로 삐죽삐죽 솟아있는 사이사이로 다닥다닥 붙은 집들로 빼곡한 그런 특별할 것 없는 도회풍경이다. 그런데도 창밖을 생각하면 제일먼저 여의도와 샛강이 떠오르는 건 그곳이 숲이 있고, 계절이 있기 때문이다.

걸어서 5분 거리, 넘어지면 코닿을 거리인데도 나는 선뜻 발걸음을 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7월 말, 이 사무실에 나오면서부터 나는 샛강을 바라봤다. 그리고 수없이 마음속으로만 그곳을 거닐었을 뿐이다.

사실 여러번 스쳐지나기는 했다. 번번이 열린 여의도 집회 때는 샛강 위로 난 서울교(옛 여의도 광장에서 영등포로 넘어가는 다리)를 지나야 했으니까 말이다. 그런데 그 순간 그곳이 보이기나 하랴. 설령 보인다하더라도 그저 스치는 맑은 풍경일 뿐이지....

가을이 되면서 꼭 한번 가봐야지 맘먹었다.
지척인데도 잘 되지 않는다. 아마 지척이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가을이 깊어가고, 매일 지나는 행주산성에 단풍이 짙어질수록 샛강이 겹쳐졌지만, 김주익 열사로부터, 바로 옆 근로복지공단의 이용석 열사까지, 여러 동지들이 목숨을 내 놓으며 투쟁을 하는 동안 감히 가볼 생각도 해볼 수 없었고, 틈도 나지 않았다.

오늘은.. 하고 나섰다. 어제 10만 농민의 투쟁이 있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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샛강에 다다르는 길은 의외로 멀었다.
여의교를 건너서도, 신호등이 있는 건널목을 3개나 건너야 했다.
마지막 낙엽을 떨구는 비에 젖은 나무, 아직도 제법 단풍잎을 매달고 있는 나무... 윤중로 벚나무 가로수다. 상엽이 홍어 이월화(霜葉紅於二月花)라 했던가. 빗물 머금어 연노랑분홍주홍빛 투명한 벚나무 단풍잎은 너무나 아름답고, 가로수 긴 회랑 끝 사선으로 가을의 '빛'이 제법 남아있다.

비가 오는 평일 점심시간이라서 그런지 샛강 생태공원에는 아무도 없다. 나는 내 고향 앞강 비내섬 키큰 갈대숲 속으로 걸어가듯, 아직 푸른 이파리를 달고 있는 버드나무 듬성듬성 난, 말라 누운 갈대 사이로 난 길을 따라 들어간다.

샛강 생태공원에는 산책로가 있고, 사이사이에 연못이 있다.
지하철 암반의 맑은 지하수를 수원으로 하는 연못이지만, 샛강의 개흙과 섞여서인지 흐린 하늘을 이고 있는 물빛은 탁하기만 하다. 물위로 들어나게 박아놓은 말뚝 위엔 잿빛 왜가리가 목을 한껏 움츠리어 어깨에 기댄 채 꼼짝 않고 비를 맞고 있고, 작은 비오리 네댓 마리는 탁한 물빛과 갈대빛깔에 숨어 올망졸망거린다.

텅 빈 샛강 생태공원은 엷어진 추위만큼이나 엷어진 감성을 가진 내겐 호사스러울 정도로 늦가을 정취를 흠뻑 담고 있고, 드넓다.

 

<2003. 11.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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