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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물에서 찾기일상 속에서 문득 시간을 낸 짜투리 여행과 여행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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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5/06/28
    마음수련원
    풀소리
  2. 2005/04/22
    여의도 꽃진 거리를 가다.(1)
    풀소리
  3. 2005/01/29
    영동 양산면 금강가를 가다.(1)
    풀소리

마음수련원

마음수련원

 

사이버노동대학에서 운영하는 수련원이다. 충북 영동에 있다.
지난 6월 24일(금)-25일(토) 1박 2일 동안 우리 노동조합은 간부교육수련회를 그곳에서 가졌다.

 

        마음수련원에서 본 앞산/ 황악산 자락이다.



마음수련원이 있는 충북 영동군 매곡면 공수리는 백두대간 바로 밑으로, 고개 하나를 넘으면 김천이다.
멀리 높다란 황악산 자락이 보이고, 추풍령 높이의 약간 지대가 높은 지역임에도 밝고, 넓다. 풍수지리에 문외한이라도 동네가 참 좋아 보이는 곳에 마음수련원이 있다.

 

학교 옆으로 노송 군락이 있는 걸로 봐 유래가 있는 마을이 틀림없어 보인다. 마을 유래비를 보니 이미 신라시대부터 마을이 있었고, 지금 마을 이름인 사야(沙也)는 당시 이름인 '샛별'에서 유래됐다고 한다. 동네 이름도 예쁘다.

 

       김진숙 지도위원/ 작음 몸에서 어찌 저련 정열이... 정신 없어 사진 한장 찍지 못해 오마이에서 퍼왔다.

 

사람이 절대 모자라는 노동조합인지라 행사 하나 하려면 정신이 없다. 첫 강은 김진숙 지도위원의 "더 이상 자본에 밀리지 말자"는 주제의 「노동자의 삶과 철학」 강의였다. 나는 모처럼 처음부터 끝까지 들으려 했지만 어쩔 수 없다. 이 일 저 일로 분주한데 복도에 웬 허름한 농군 아저씨가 있다. 음, 이곳에서 일하시는 아저씨구나 하고 무조건 인사를 건넸다. 빙그레 웃음으로 맞인사를 하시는 아저씨 얼굴을 보니 낯이 익다. 사이버노동대학의 김승호 선배님이다.

 

        열강으로 유명한 김승호 선배님/ 농군 모습 사진을 찍으려 다음날 찾아다니니 일이 있어 일찍 서울로 가셨다고 한다.

 

김승호 선배님은 몸이 안 좋아 휴식년을 얻고 6개월 째 이곳에서 요양하며 마음수련원을 관리하고 있다고 한다.

 

김진숙 지도위원의 강의는 하종강 선생과 또 다른 맛을 줬다. 뭐랄까. 같은 식구 이야기 같은 현장의 냄새가 물씬 풍긴다. 강의 중간 중간에 반백의 나이 드신 선배님들도 어깨를 들썩이며 훌쩍인다.

 

       발표력 강화훈련/ 간부들은 의외로 다들 발표를 잘 했다.

 

두 번째 강의는 「발표력 강화 훈련」이다. 교육과 실습 그리고 평가가 어우러진 3시간 30분의 대형 강의다. 주강사인 대구협의회 최현귀 부장은 특유의 뚝심과 카리스마로 강의를 진행했다. 교육의 효과가 있었나? 간부들은 발표를 예상보다 훨씬 잘 했다.

 

세 번째 강의는 공공연맹 나상윤 정책위원장의 「간부활동론」이었다. 난 또다시 이것저것 챙겨야 하는 관계로 듬성듬성 들을 수밖에 없었다. 경험이 많은 나상윤 위원장 강의를 듣고, 다음 번엔 나도 한번 시도해보려고 했는데 아쉽다.

 

        강의에 열중하는 간부들/ 나상윤 위원장의 간부활동론 강의다.

 

저녁을 먹고 마지막 내 강의다. 「공영제 쟁취와 복수노조 대처」다. 제목에서 보여지듯 짬뽕강의다. 원래 두 강의를 억지로 하나로 뭉쳐놓았기 때문이다. 그나마 시간은 늦었다. 강의에 들어간 시간은 8시 40분이다. 강의실은 저녁이 되어도 여전히 찜통이다. 그리고 불빛을 따라 몰려든 모기와 각다귀들은 왜 그리 많은지. 아무리 간부수련회라지만 교육생들은 지쳐있었다.

 

나는 1시간 20분 이내, 10시까지는 강의를 마치겠다고 간부들에게 약속했다. 원래 계획된 강의 종료시간이 10시였다. 간부들은 좋아한다.

 

      이승복 석고상/ 이곳에서는 반공교육의 상징 이승복도 전태일을 따라 머리띠를 맸다.

 

방법이 없다. 복수노조 문제는 다음 번에 본격적으로 다뤄야 한다. 복수노조 관련해서는 유념해야 할 점만 추려 맛보기로 10분 정도 강의를 끝내고, 공영제 쟁취 강의를 했다.

 

10시 5분전에 강의를 마쳤다. 이어서 뒷풀이다. 영동 동일버스지부 동지들이 며칠간 낚시로 잡아 끌여낸 꺽지 매운탕은 간이 맞지 않아도 인기 만점이다.

 

일부 간부들은 여전히 찜통인 식당을 벗어나 운동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운동장에 나오니 너무나 시원하다. 모기 한 마리 보이지 않고, 하늘엔 별들도 떠 있고, 참 좋다.

 

     수련원이 있는 사야마을 농가 앞에 핀 접시꽃 군락

 

술잔이 돌면서 토론은 격렬해진다. 발표력 강화 훈련도 했겠다, 1분 스피치를 하자고 제안했다. 돌아가며 1분씩 이야기를 하는 것으로 1분 동안은 누구도 방해할 수 없다. 단, 1초도 초과해선 안 된다. 다만 부족하다 싶으면 1회에 걸쳐 찬스를 쓸 수 있다. 찬스 시간은 30초다. 다른 사람의 의견에 반대해도 자기 차례가 와야 발언할 수 있다. 모두 찬성이다. 정확성을 기하기 위해 초시계를 준비했다.

 

처음에는 잘 안 된다. 남들이 발언할 때 참견하는 버릇이 나온다. 여러 번 제지하면 8명이 한 바퀴 돌았다. 모두들 색다른 경험을 했다는 표정이다. 두 바퀴를 돌면서 사고가 발생했다. 한 간부의 발언에 다른 한 간부가 강력하게 반박했다. 차례가 왔을 때 발언을 하라고 해도 막무가내다. 역시 술의 힘이다. 술이 토론을 이겼다. 우리는 싹싹하게 패배를 시인하고 열심히 술을 마셨다.

 

      족구시합하는 간부들

 

아침은 직지사 앞에까지 가서 먹었다. 전날 먹던 인근 식당에 문제가 생겨서다. 직지사 앞 사하촌은 그야말로 번화가다. 관광지라 별 기대 하지 않았는데, 반찬이 의외로 깔끔하고 맛있다. 반주로 내준 송엽주는 또한 일품이다.

 

돌아와서는 오전 내내 체력단련대회다. 축구는 전날 피로와 음주 등으로 다칠 염려가 있어 족구 한 가지만 하기로 했다. 역시 남자들이란 단순하다. 공 하나면 잘 논다. 대진표를 짜고 시합이 시작되자 난 동네 한바퀴 돌아볼 겸 논둑길로 나섰다. 100년은 됨직한 소나무 옆으로 무덤이 있고, 그 위로 마을이 있다.

 

         숙인(4품 부인품계) 함양오씨지묘/ 낙락장송과 큰 무덤에 비해 작은 비석이 좋았다. 언젠가 자연으로 돌아갈 터인데, 왜 비석과 석물을 그렇게 호화롭게 하는지...

 

전통 기와집이 있어 가보니 재실이다. 순흥 안씨들의 경모재인데, 문짝이 떨어져 너덜거린다. 처마를 보니 맹맹이 집이 있다. 오랜만이다. 제비집도 드문데 맹맹이 집이라니. 맹맹이는 제비와 비슷한데, 뭔가 달랐다. 어딘가 색깔이 달랐던 것 같은데, 잘 생각이 나지 않는다. 집도 제비와 다르게 진다. 어릴 때 제비를 잡아먹는다고 해 맹맹이 집을 허물기도 했던 기억이 난다.

 

        경모재 처마에 짓고 있는 맹맹이집

 

수련원으로 돌아오는 길에 보니 수련원 뒷모습도 참으로 정겹다. 저런 학교들이 없어지는 게 너무나 아쉽기만 하다. 아이들이 이런 곳에서 뛰놀면 얼마나 좋을까.

 

     마을에서 본 수련원 뒷모습/ 참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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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의도 꽃진 거리를 가다.

꽃진 거리에는 사람들도 사라지고

텅빈 보도 가로수는 그저 가로수일 뿐이다.



불과 2-3일 전만 해도 꿈처럼 빛났을 벗꽃은

마침 불어온 비바람과 함께 모두 날아가 버렸다.

 



사무실 내 자리에서 고개를 내밀면 여의도 윤중로가 보인다.

벗꽃이 피고 지고, 사람들이 몰려오고, 몰려가고

 

자리에 앉아서, 때로 창가에 서서 봄이 익어가는 풍경을 바라봤다.

 

이따금 여의도를 가로질러 온 사람들 말이

여의도는 인산인해, 사람과 차들로 가득찼다고 전한다.

 


 

화려함이란 대가가 있는 법. 붐비는 사람들과 넘치는 상인들. 그곳에 있는 나.

그러나 나는 자신이 없다. 분비는 사람들 속에 섞이고 싶지도 않고...

 

나는 이렇게 꽃이 지고, 텅빈 거리를 거니는 것을 만족하고,

고개 들어 이미 져버린 가지마다 흰 벗꽃이 가득한 꽃천지를 상상한다.

 

이 거리를 거닐었던 많은 청춘들은 또 그 꽃들만큼 황홀하게 빛났을리라.

 

 

물론 아직도 띄엄띄엄 꽃잎을 온전히 달고 있는 나무들이 있다.

그러나 이제 막 피어난다고 계절을 돌릴 수는 없다.

혹시나 하고 왔다가 돌아가는 청춘남녀들의 실망처럼 말이다.

 

국회의사당 뒤로 해 여의도를 반바퀴 돌아 약속장소로 가겠다던 계획을 수정했다.

어느덧 촉박해진 약속시간 탓이겠지만, 어둠이 내리는 거리를 휘돌아 가고싶던 갈구가 사라졌기 때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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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동 양산면 금강가를 가다.

1.
나는 늘 여행과 답사를 꿈꾼다. 출장 등 특별한 일로 나들이를 할 때도 늘 창밖을 주시한다. 산과 들, 강가, 냇가 그리고 정자와 고가(古家), 고(古)무덤, 하다못해 문화재 등을 알리는 고동색 짙은 팻말만 봐도 눈길이 멈추지 않는다. 나의 의지대로라면 당연히 길을 멈추고 둘러볼 것이다.

빠듯한 생활에 여유로운 여행이나 답사는 쉽지 않다. 그러다보니 지나는 길에 또는 수련회 등에서 갑자기 시간이 나 들르는 여행이나 답사는 낯선 곳에서 만난 가인(佳人)과 불현듯 피어오로는 예기치 못한 사랑에 빠지는 것처럼 짜릿하다.

이름하여 자투리 여행이지만, 예기치 못한 짜릿한 즐거움은 ‘자투리’가 아니라 ‘온전한’ 그 무엇이다.

2.
산하 지부 간부 수련회장소가 충북 영동 양산에서 잡혔다. 영동군 양산면. 양산8경이라 하여 경치 좋기로 유명한 곳이다. 양산엔 예전에 한번 들린 적이 있었다. 그때도 수련회라 그 좋아하는 답사는 고사하고, 강가에서 발도 담그지 못하고 지나친 적이 있다.

이번도 다를 바는 아니라고 봤다. 지부 상황이 상황인지라 간부들은 결의가 높았고, 마치 군대 처음 간 청년들처럼 무주에서 이곳까지 20여km를 행군하여 왔을 정도로 분위기가 엄혹하여 어디 한눈길 주기 쉽지 않을 듯해서 말이다.

<<강 건너 수련장에서 본 봉곡리>
아늑한 강가 마을로 정자가 있고, 사당이 있어 담박에 날 이곳으로 이끌었다

아무리 엄혹해도 눈요기를 막을 자 누구인가? 난 내심 눈요기라도 하겠다고 채비를 단단히 했다.

새벽 6시 기상. 역시 군대와 같았다. 20여km 행군에 한밤중 교육까지 마친 간부들은 굼뜨기는 해도 모두 시간 맞춰 일어난다. 취사조는 이미 5시부터 아침준비를 시작했다고 한다.

밖은 한밤중으로 너무나 깜깜하다. 새벽 구보는 안전을 위해 약간 미뤄졌지만, 그렇다고 안 할 수는 없다. 새벽 공기는 차지만 얼음냉수처럼 시원하다. 뚝방길을 돌아 한바퀴를 도니 동녘 하늘부터 조금씩 밝아온다.

<비봉산과 양산벌> 멀리 보이는 산이 비봉산이고, 바로 밑에 양산면 소재지가 있다.
금강까지 넓게 펼쳐진 평야가 양산벌이다. 삼국시대 신라와 백제의 경계지역으로 신라의 최전선이었다. 수없는 국경전쟁이 이곳에서 펼쳐졌으리라. 신라 왕족이며 화랑이었던 김훈운 장군이 백제의 급습에 맞서 싸우다 장렬히 전사한 일화를 담은
노래가 '양산가'라는 이름으로 오늘날에까지 남아있다.
금강가에는 '송호국민관광지'가 있을 정도로 풍경이 아름답다.

아침은 8시 30분에 시작하기로 했는데, 7시에 먹기 시작했다. 다음 일정은 10시부터다. 시간이 꽤 있다. 지부 간부들은 편을 짜 족구를 하겠다고 한다.

밝아오는 수련장 창문 너머로 금강 너머 정자가 있고, 사당이 있는 마을이 보인다. 음~. 저기 한번 가 봐야지.

이래저래 눈치 보다 혼자 수련장을 빠져 나왔다. 수련장은 영동읍에서 송호리국민광광지로 건너가는 다리 바로 아래 있었다. 다리에 올라섰을 때는 아침햇살이 막 퍼지고 있었다. 양산면 소재지 쪽을 봤다. 워낙 평지인데다 하우스들이 줄비해 면소재지는 보이지 않고, 아침햇살 받아 따뜻해진 비봉산이 보인다.

<다리 위에서 본 강선대> 강가 절벽위에 지어진 강선대는 늙은 소나무들과 어울려 정말 신선이 내려올만한 경치를 자아내고 있다.

강 건너가 목적지다. 강 한가운데는 용바위가 있고, 건너 절벽 위에는 강선대가 있다. 바위절벽과 노송이 어우러진 강선대는 그 자체로도 비경이다. 먼저 강 건너에서 보였던 정자로 향했다.

<채하정> 나를 이곳까지 오도록 유혹한 정자다.
강 건너에서는 참으로 아름다워 보였는데, 가까이 다가가니 잡초가 우거지고, 마루는 몇군데 깨져있다.

강 건너에서는 고색창연하게 보였는데, 가까이 가보니 잡초더미에 둘러싸여 있다. 집이란 게 원래 사람과 함께 해야 생기가 있는데, 요즈음 정자를 찾는 이가 없는가 보다.

채하(彩霞)정. '빛나는 노을'이란 이름이다. 원래 강선대 옆에 있었다고 하는데, 퇴락하여 이곳으로 자리를 옮겼다고 한다. 강가 이름난 정자라 옛 선비들이 많이 거쳐갔을 것이다. 정자에 걸린 여러 개의 편액은 시인 묵객들의 흔적이다.

<시골 정미소 풍경> 풍경으로 봐 이미 문을 닫은 듯 보이지만, 아직은 흙벽 하나 허물어지지 않은 온전한 모습을 하고 있다.
막 떠오르는 아침 햇살을 받아 빛나는 흙벽이 정겹다.

채하정 뒷편으로 정문이 있다. 임진왜란 때 진주성 싸움에서 전사한 이의정 장군 정문이다.

이곳을 지나 멀리 보이는 사당 쪽으로 향하는데, 마을 한복판에 정미소가 있다. 둘레에 잡초가 나 있는 것으로 볼 때 이제 문을 닫은 듯 하다. 그러나 흙벽이 아직 생생하고, 양철판들도 뜯기지 않은 것으로 봐 문닫은 지 얼마 되지 않는 듯 하다. 아침 햇살에 비친 정미소 흙벽은 정겹고 따사롭다.

<이의정 장군 정문>

 

이의정 장군의 사당과 무덤으로 향했다. 사당이야 최근에 지어진 것이니 보는 듯 아니 보는 듯 스치고 무덤으로 향했다. 진주성에서 3만 백성과 함께 전사한 장군이니 시신조차 찾을 수 있었겠는가. 후손들은 유품을 모아 무덤을 만들었고, 조정에서는 훗날 병조참의에 추증하였다고 한다. 조촐한 무덤과 신도비라는 명칭이 어울리지 않는 작은 신도비는 요즘 성역화시키는 커다란 무덤과 신도비에 비하면 보다 진정성이 느껴진다.

<소박한 이의정 장군 묘소> 진주성에서 전사하여 시신을 찾지 못하였다고 한다.
유품을 모아 무덤을 만들었고, 나라에서는 훗날 '병조참의' 벼슬을 추증하였다고 한다.

 

건너편 큰 무덤이 있어 오르니 최근에 조성된 무덤이다. 이의정 장군 후손이라고 하는데, 무덤과 비석은 장군의 것을 훨씬 능가한다. 습관대로 산을 오르고, 이 무덤 저 무덤 비석을 살핀다. 비석이며 상돌이 최근 것은 아닌데, 솜씨와 글 모양이 한결같다. 이씨 집안에서 언젠가 한꺼번에 만든 것인 듯 하다.

<마실가는 할머니> 아침 햇살이 온전히 퍼지지도 않았는데, 할머니는 아침마실에 나선다.

산에서 내려오는데 등이 굽은 할머니가 아침마실을 나선다. 아직 하얀 서리자욱이 채 녹지도 않은 산에서 내려오는 내 모습이 이상한가 보다. '동네가 좋아 구경해요' 나는 묻지도 않은 대답을 하지만 귀가 어두운 듯 할머니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은행나무> 할아버지도 아침마실길에 나섰다.
뒤에 커다란 은행나무는 이 마을의 오래된 역사를 말해주는 듯하다.

동네를 돌아 나오려는데, 멀리 큰 은행나무가 보인다. 흔히 보듯 보호수로 지정되었을 것이고, 몇백년은 됐을 성 싶다. 이 마을은 적어도 저 은행나무만큼은 오래됐을 것이다.

<강선대 강가> 강선대 옆 그늘에는 얼음 위로 눈이 녹지 않고 쌓여있다.
찬 날씨에 설 얼은 어름조각이 밀려와 '사각 사각' 부딪친다.

강선대으로 향하는 길에 강가에 나갔다. 물살 없는 후미진 강가에는 얼음이 얼었고, 아직 녹지 않은 눈이 쌓여 있다. 여울에 떠내려오는 얼음 조각이 이곳 얼음짱에 부딪쳐 사각사각 소리를 낸다. 사람없는 겨울강가, 참으로 오랜만이다.

 

강선대는 시멘트로 지어져 있다. 아마 군사정권 시절에 세워졌을 것이다. 정자야 보고싶지 않지만 정자자리야 눈맛이 오죽 좋으랴. 일단 올라가니 또한 경치가 좋다. 신선이 내려온 곳이라고 하나, 이곳에서 노닐던 사람들이 자신들을 지칭한 것이리라.

<강선대에서 늙은 소나무 사이로 본 금강> 강물은 용바위를 감싸고 유유히 흐르고, 멀리 송호관광지의 소나무숲이 보인다. 멀리 보이는 바위가 용바위다.
강선대는 멀리서 봐도 아름답지만, 누각 위에서 밖을 봐도 눈맛이 시원하다.
시인묵객들이 줄을 이었겠지만, 지금 강선대는 최근에 시멘트로 지어진 것이다.
아무렴 어쩌랴~~

다시 수련장으로 돌아오는 길에 다리 위에서 강선대를 보니 소나무 위로 햇살이 밝게 퍼지고 있다. 목욕하는 선녀를 보고 승천하던 용이 떨어져 바위가 됐다는 용바위가 멀리 강 가운데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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