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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동 양산면 금강가를 가다.

1.
나는 늘 여행과 답사를 꿈꾼다. 출장 등 특별한 일로 나들이를 할 때도 늘 창밖을 주시한다. 산과 들, 강가, 냇가 그리고 정자와 고가(古家), 고(古)무덤, 하다못해 문화재 등을 알리는 고동색 짙은 팻말만 봐도 눈길이 멈추지 않는다. 나의 의지대로라면 당연히 길을 멈추고 둘러볼 것이다.

빠듯한 생활에 여유로운 여행이나 답사는 쉽지 않다. 그러다보니 지나는 길에 또는 수련회 등에서 갑자기 시간이 나 들르는 여행이나 답사는 낯선 곳에서 만난 가인(佳人)과 불현듯 피어오로는 예기치 못한 사랑에 빠지는 것처럼 짜릿하다.

이름하여 자투리 여행이지만, 예기치 못한 짜릿한 즐거움은 ‘자투리’가 아니라 ‘온전한’ 그 무엇이다.

2.
산하 지부 간부 수련회장소가 충북 영동 양산에서 잡혔다. 영동군 양산면. 양산8경이라 하여 경치 좋기로 유명한 곳이다. 양산엔 예전에 한번 들린 적이 있었다. 그때도 수련회라 그 좋아하는 답사는 고사하고, 강가에서 발도 담그지 못하고 지나친 적이 있다.

이번도 다를 바는 아니라고 봤다. 지부 상황이 상황인지라 간부들은 결의가 높았고, 마치 군대 처음 간 청년들처럼 무주에서 이곳까지 20여km를 행군하여 왔을 정도로 분위기가 엄혹하여 어디 한눈길 주기 쉽지 않을 듯해서 말이다.

<<강 건너 수련장에서 본 봉곡리>
아늑한 강가 마을로 정자가 있고, 사당이 있어 담박에 날 이곳으로 이끌었다

아무리 엄혹해도 눈요기를 막을 자 누구인가? 난 내심 눈요기라도 하겠다고 채비를 단단히 했다.

새벽 6시 기상. 역시 군대와 같았다. 20여km 행군에 한밤중 교육까지 마친 간부들은 굼뜨기는 해도 모두 시간 맞춰 일어난다. 취사조는 이미 5시부터 아침준비를 시작했다고 한다.

밖은 한밤중으로 너무나 깜깜하다. 새벽 구보는 안전을 위해 약간 미뤄졌지만, 그렇다고 안 할 수는 없다. 새벽 공기는 차지만 얼음냉수처럼 시원하다. 뚝방길을 돌아 한바퀴를 도니 동녘 하늘부터 조금씩 밝아온다.

<비봉산과 양산벌> 멀리 보이는 산이 비봉산이고, 바로 밑에 양산면 소재지가 있다.
금강까지 넓게 펼쳐진 평야가 양산벌이다. 삼국시대 신라와 백제의 경계지역으로 신라의 최전선이었다. 수없는 국경전쟁이 이곳에서 펼쳐졌으리라. 신라 왕족이며 화랑이었던 김훈운 장군이 백제의 급습에 맞서 싸우다 장렬히 전사한 일화를 담은
노래가 '양산가'라는 이름으로 오늘날에까지 남아있다.
금강가에는 '송호국민관광지'가 있을 정도로 풍경이 아름답다.

아침은 8시 30분에 시작하기로 했는데, 7시에 먹기 시작했다. 다음 일정은 10시부터다. 시간이 꽤 있다. 지부 간부들은 편을 짜 족구를 하겠다고 한다.

밝아오는 수련장 창문 너머로 금강 너머 정자가 있고, 사당이 있는 마을이 보인다. 음~. 저기 한번 가 봐야지.

이래저래 눈치 보다 혼자 수련장을 빠져 나왔다. 수련장은 영동읍에서 송호리국민광광지로 건너가는 다리 바로 아래 있었다. 다리에 올라섰을 때는 아침햇살이 막 퍼지고 있었다. 양산면 소재지 쪽을 봤다. 워낙 평지인데다 하우스들이 줄비해 면소재지는 보이지 않고, 아침햇살 받아 따뜻해진 비봉산이 보인다.

<다리 위에서 본 강선대> 강가 절벽위에 지어진 강선대는 늙은 소나무들과 어울려 정말 신선이 내려올만한 경치를 자아내고 있다.

강 건너가 목적지다. 강 한가운데는 용바위가 있고, 건너 절벽 위에는 강선대가 있다. 바위절벽과 노송이 어우러진 강선대는 그 자체로도 비경이다. 먼저 강 건너에서 보였던 정자로 향했다.

<채하정> 나를 이곳까지 오도록 유혹한 정자다.
강 건너에서는 참으로 아름다워 보였는데, 가까이 다가가니 잡초가 우거지고, 마루는 몇군데 깨져있다.

강 건너에서는 고색창연하게 보였는데, 가까이 가보니 잡초더미에 둘러싸여 있다. 집이란 게 원래 사람과 함께 해야 생기가 있는데, 요즈음 정자를 찾는 이가 없는가 보다.

채하(彩霞)정. '빛나는 노을'이란 이름이다. 원래 강선대 옆에 있었다고 하는데, 퇴락하여 이곳으로 자리를 옮겼다고 한다. 강가 이름난 정자라 옛 선비들이 많이 거쳐갔을 것이다. 정자에 걸린 여러 개의 편액은 시인 묵객들의 흔적이다.

<시골 정미소 풍경> 풍경으로 봐 이미 문을 닫은 듯 보이지만, 아직은 흙벽 하나 허물어지지 않은 온전한 모습을 하고 있다.
막 떠오르는 아침 햇살을 받아 빛나는 흙벽이 정겹다.

채하정 뒷편으로 정문이 있다. 임진왜란 때 진주성 싸움에서 전사한 이의정 장군 정문이다.

이곳을 지나 멀리 보이는 사당 쪽으로 향하는데, 마을 한복판에 정미소가 있다. 둘레에 잡초가 나 있는 것으로 볼 때 이제 문을 닫은 듯 하다. 그러나 흙벽이 아직 생생하고, 양철판들도 뜯기지 않은 것으로 봐 문닫은 지 얼마 되지 않는 듯 하다. 아침 햇살에 비친 정미소 흙벽은 정겹고 따사롭다.

<이의정 장군 정문>

 

이의정 장군의 사당과 무덤으로 향했다. 사당이야 최근에 지어진 것이니 보는 듯 아니 보는 듯 스치고 무덤으로 향했다. 진주성에서 3만 백성과 함께 전사한 장군이니 시신조차 찾을 수 있었겠는가. 후손들은 유품을 모아 무덤을 만들었고, 조정에서는 훗날 병조참의에 추증하였다고 한다. 조촐한 무덤과 신도비라는 명칭이 어울리지 않는 작은 신도비는 요즘 성역화시키는 커다란 무덤과 신도비에 비하면 보다 진정성이 느껴진다.

<소박한 이의정 장군 묘소> 진주성에서 전사하여 시신을 찾지 못하였다고 한다.
유품을 모아 무덤을 만들었고, 나라에서는 훗날 '병조참의' 벼슬을 추증하였다고 한다.

 

건너편 큰 무덤이 있어 오르니 최근에 조성된 무덤이다. 이의정 장군 후손이라고 하는데, 무덤과 비석은 장군의 것을 훨씬 능가한다. 습관대로 산을 오르고, 이 무덤 저 무덤 비석을 살핀다. 비석이며 상돌이 최근 것은 아닌데, 솜씨와 글 모양이 한결같다. 이씨 집안에서 언젠가 한꺼번에 만든 것인 듯 하다.

<마실가는 할머니> 아침 햇살이 온전히 퍼지지도 않았는데, 할머니는 아침마실에 나선다.

산에서 내려오는데 등이 굽은 할머니가 아침마실을 나선다. 아직 하얀 서리자욱이 채 녹지도 않은 산에서 내려오는 내 모습이 이상한가 보다. '동네가 좋아 구경해요' 나는 묻지도 않은 대답을 하지만 귀가 어두운 듯 할머니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은행나무> 할아버지도 아침마실길에 나섰다.
뒤에 커다란 은행나무는 이 마을의 오래된 역사를 말해주는 듯하다.

동네를 돌아 나오려는데, 멀리 큰 은행나무가 보인다. 흔히 보듯 보호수로 지정되었을 것이고, 몇백년은 됐을 성 싶다. 이 마을은 적어도 저 은행나무만큼은 오래됐을 것이다.

<강선대 강가> 강선대 옆 그늘에는 얼음 위로 눈이 녹지 않고 쌓여있다.
찬 날씨에 설 얼은 어름조각이 밀려와 '사각 사각' 부딪친다.

강선대으로 향하는 길에 강가에 나갔다. 물살 없는 후미진 강가에는 얼음이 얼었고, 아직 녹지 않은 눈이 쌓여 있다. 여울에 떠내려오는 얼음 조각이 이곳 얼음짱에 부딪쳐 사각사각 소리를 낸다. 사람없는 겨울강가, 참으로 오랜만이다.

 

강선대는 시멘트로 지어져 있다. 아마 군사정권 시절에 세워졌을 것이다. 정자야 보고싶지 않지만 정자자리야 눈맛이 오죽 좋으랴. 일단 올라가니 또한 경치가 좋다. 신선이 내려온 곳이라고 하나, 이곳에서 노닐던 사람들이 자신들을 지칭한 것이리라.

<강선대에서 늙은 소나무 사이로 본 금강> 강물은 용바위를 감싸고 유유히 흐르고, 멀리 송호관광지의 소나무숲이 보인다. 멀리 보이는 바위가 용바위다.
강선대는 멀리서 봐도 아름답지만, 누각 위에서 밖을 봐도 눈맛이 시원하다.
시인묵객들이 줄을 이었겠지만, 지금 강선대는 최근에 시멘트로 지어진 것이다.
아무렴 어쩌랴~~

다시 수련장으로 돌아오는 길에 다리 위에서 강선대를 보니 소나무 위로 햇살이 밝게 퍼지고 있다. 목욕하는 선녀를 보고 승천하던 용이 떨어져 바위가 됐다는 용바위가 멀리 강 가운데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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