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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사블랑카> 이번엔 목사님이다

카이로로 돌아와 여행사를 돌아다니며 항공권을 알아본다. 인터넷에서 유럽으로 가는 저가항공권을 알아보았지만 대부분 영국이나 독일행이고 그나마 편도는 발권이 되질 않으니 비싸지만 여행사를 통하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 어차피 유럽으로 가는 저가항공권을 끊을 수 없다면 모로코를 거쳐 스페인, 이태리로 이동할 생각으로 카사블랑카행 항공권을 알아본다. 여행사마다 다녀 봐도 카사블랑카행은 이집트에어 단 한 종류뿐인데다 항공권 가격 또한 큰 차이가 없다. 우리 돈으로 대략 30만원 정도인데 문제는 출발 시간이 저녁 일곱시 단 한 번뿐이다. 모로코까지 비행시간이 대략 여섯 시간이니 저녁 일곱 시에 출발하면 두 시간의 시차를 감안하더라도 대략 밤 열한시에 도착하게 되니 택시로 시내까지 이동한다 하더라도 대부분의 호텔은 리셉션이 닫힐 시간이다. 에구.. 아무래도 공항에서 노숙을 해야 할 것 같다.

 

부랴부랴 서점을 뒤져도 모로코 가이드북은 통 뵈지를 않더니 우연히 숙소에서 론리 지중해편 한권이 눈에 뛴다. 아쉬운 대로 한 귀퉁이에 있는 모로코 정보를 복사를 해 둔다. 여행이 길어지면서 깡만 느는지 오로지 론리 복사본 24장만 믿고 아무런 정보도 없이 비행기를 탄다. 같은 비행기에 배낭 여행자가 있으면 같이 숙소까지라도 갈까 했더니 웬걸 크지도 않은 비행기엔 온통 모로칸들 뿐이다. 아무래도 노숙을 피하긴 어려워 보인다^^. 주는 밥 먹고 주는 간식 먹고 꾸벅꾸벅 졸다가 보니 어느새 카사블랑카 공항이다. 입국 절차를 마치고 공항에서 연결되는 기차역으로 내려가 보니 카사블랑카행 기차는 이미 끊어지고 아침 6 50분에 다닌다는 표지만 환하게 불을 밝히고 있다. 혹시나 싶어 공항 밖으로 나가보니 택시만 두어 대 보일 뿐 삐끼하나 없이 조용하기만 하고 심지어 비까지 추적추적 내린다. 다시 배낭을 메고 공항으로 들어온다. 공항 이곳저곳을 뒤져 그나마 사람이 덜 다니는 대합실 한 켠에 누울 자리를 마련하고 잠을 청한다.

 

어느새 잠이 들었나 했는데 으스스한 한기에 눈을 뜨니 5시가 조금 넘어 있다. 잠이 들 땐 그리 춥지 않았는데 더 이상은 잠을 청할 수 없을 만큼 추위가 느껴진다. 하는 수 없이 침낭을 뒤집어쓰고 흡연실로 들어간다. 새벽이라 담배 피는 사람은 거의 없고 사방이 막힌 탓인지 대합실보다는 한결 따뜻하다. 잠시 몸을 녹이고 공항에 있는 ATM에서 모로코 돈을 찾아 기차역으로 내려간다. 6시가 훌쩍 넘었는데도 주위는 아직 깜깜하다. 유스호스텔이 있는 카사포트역까지 가는 기차표를 끊고 잠시 기다리니 기차가 온다. 차량 하나에 마주 보고 가는 4인식 좌석이 대여섯 개 가량 되는 미니 기차다. 중간에 기차를 갈아타고 카사포트역에 도착하니 주위가 조금 밝아 온다. 기차역에서 표지를 따라 유스호스텔을 찾아간다. 유스호스텔은 생각보다 싸고 깨끗하다. 휴우... 이번엔 안 헤매고 제대로 찾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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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사블랑카 시내, 유럽풍의 건물 사진은 왜 없는거냐구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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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시가지에서 바라본 메디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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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잠 자고 일어나보니 문제 발생이다. 겉은 멀쩡하기만 한 이 놈의 유스호스텔은 어찌된 일인지 더운 물이 나오질 않는다. 어쩐지 싸더라니... 공항에서 자느라고 상태는 말이 아니지만 이 날씨에 찬물로 샤워를 하다간 감기 걸리기 딱 좋게 생겼으니 그냥 모자 하나 눌러 쓰고 시내로 나가본다. 일단 신시가지나 둘러보며 동네 분위기나 익혀둘 생각이다. 카사블랑카 시내는 유럽풍의 건물들 사이로 아랍인들이 오가는 조금은 기묘한 느낌을 주는 곳이다. -모로코와 모나코를 헷갈리지 마시라. 같은 왕국이지만 모로코는 아프리카 서북부에 있는 아랍 국가다- 지나가는 사람마다 인사를 건네고 저팬이냐 차이나냐 묻는 건 여느 아랍 국가랑 다를 바가 없는데 여자들의 옷차림이며 거리의 모습은 여느 아랍 국가와는 또 느낌이 다르다. 대략 난감인건 이들의 공용어가 아랍어와 불어라는 건데 그래서인지 길가는 사람마다 불어로 인사를 건네고 뭔가 물어도 불어로 대답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니 으.. 영어 이렇게 안 통하는 나라는 중국 이래 처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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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디나안의 사람들, 아마 공동으로 수돗물을 길어가는 곳인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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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디나안의 사람들, 고깔모자의 전통복장은 왜 또 뒷모습밖에 없는거냐구 흑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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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날은 구시가지인 메디나와 핫산Ⅱ모스크에 다녀온다. 카사블랑카의 메디나는 성벽으로 둘러싸인 좁은 골목에 시장인 수크와 주거지인 카스바가 함께 공존하는 구시가지이다. 미로 같은 골목들로 이루어진 메디나 안은 현대적인 느낌의 시내와 달리 전형적인 아랍 서민들의 삶을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이 좁은 골목에 집들이 있고, 시장이 있고, 모스크가 있고 또한 모로코 사람들이 있다. 모로코인들의 전통적인 의상은 뾰족한 모자가 달린 긴 겉옷인데 이 옷을 입고 골목을 지나가는 사람들을 보고 있노라면 동화 속 나라의 마법사들을 보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든다. 복잡한 메디나의 골목을 지나 핫산Ⅱ모스크로 향한다. 바닷가에 세워진 이 현대적인 모스크는 모스크 자체뿐 아니라 바닷가에 놀러 온 현지인들로 가득하다, 여름에는 수영하는 사람들로 북적거린다는 해변은 추운 날씨 탓인지 낚시하는 사람들만 눈에 뛸 뿐 수영을 하는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다. 방파제로 막힌 파도가 높은 바닷가를 거닐기도 하고 모스크에 앉아서 사람들과 이야기도 하면서 하루를 보낸다.

 

모스크 옆으로 방파제가 주욱 이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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핫산Ⅱ모스크, 멀리서보면 바다에 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숙소로 돌아가기 전 다음 도시로 가는 버스표를 예매하러 터미널로 들어가려는데 뒤에서 낯익은 한국말이 들린다. 가끔 아랍어가 한국어로도 들리는 증상이 있어 왔기에 설마하고 뒤돌아보니 한국 아주머니 한 분이 양손에 짐을 들고 막 택시에서 내리는 중이다. 얼결에 인사를 하고 짐을 들어드리면서 어디 가시냐고 물었더니 터미널에 짐 부치러 나온 길이라고 하신다. 알고 보니 이 곳 카사블랑카에서 선교를 하고 계신 목사님이다. 내 상태를 가만히 보시던 이 분.. 도저히 안 되겠는지 당장 짐에 가서 씻고 밥이나 먹고 가라며 잡으신다. 씻을 수만 있다면 어디라도 따라 가고 싶은 마음인데 마침 여자 목사님이신데다 혼자 사신다니 조금 미안하지만 못 이기는 척 따라나선다. 카사블랑카 시내에서 택시로 목사님집까지 이동한다. 간만에 욕조에서 때도 밀고 푸짐한 저녁까지 얻어먹고 돌아온다. 아예 자고 가라시는 걸 다음날 짐을 가지고 다시 오기로 하고 일단 호텔로 돌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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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예배가 끝날 무렵 교회로 짐을 들고 찾아간. 목사님 집에 짐을 풀어 두고 코이카에서 파견 나왔다는 신자 하나와 셋이서 근교 해변으로 나간다. 이번엔 방파제로 막힌 바다가 아니라 탁 트인 바다다. 어차피 인위적인 구분이긴 하지만 이 바다는 대서양이라니 새삼 신기한 마음이 든다. 목사님이 사주시는 양고기 구이를 점심으로 먹고 돌아와 밀린 빨래를 돌리고 나니 그간의 묵은 때가 확 가시는 것 같다. 다음날은 슈퍼에서 장도 보고 오후에는 벼룩시장도 다녀오고 편안하게 이틀을 보낸다. 게다가 끼니마다 한국 음식에 한국 텔레비젼까지 나오는 집에서 뒹굴거리니 모로코가 아니라 한국 어디쯤엔가 있는 것도 같다. 목사님은 또한 양말이며 로션 같은 이런저런 소모품을 챙겨가라고 내주신다. 괜찮다고 사양을 하는데도 자꾸 이것저것 챙겨주시니 죄송하기 이를 데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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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사블랑카 근교의 해변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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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모를 해변에서... 나다

 

며칠 더 머물고 싶지만 바르셀로나에서 로마로 가는 저가 항공권을 이미 끊어 둔 터라 모로코 일정은 조금 빠듯한 편이니 아쉬운 마음으로 목사님댁을 나선다. 그게 아니더라도 이집트에서 너무 퍼지는 통에 조금 빨리 움직여야 하는 형편이기도 하다. 한국 사람은 거의 못 볼 거라 생각했던 모로코 여행의 첫 도시부터 고마운 분을 만나고 보니 뭐 기독교 신자는 아니지만 하느님에게 감사라도 드려야 할 것 같다^^. 다음 도시는 카사블랑카에서 남쪽으로 여섯 시간정도 떨어져 있는 항구도시 에싸웨라다. 24장짜리 론리 복사본에는 그저 잠잘 곳과 먹을 곳만 표시되어 있을 뿐 이곳의 지도 하나 나와 있지 않은데 그저 유스호스텔 주인의 추천만 믿고 길을 나선다. 푹 쉰 뒤에 떠나는 길이라 그런지 정보가 없어도 발걸음은 가볍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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