똥구린내 나는 5년을담아"

2005/08/18 11:40
“똥구린내 나는 5년을 담아”

    
주봉희(52) 전국언론노조 방송사비정규지부 위원장이 시집을 출간했다.
한국비정규노동센터(소장 김성희)가 발행하는 ‘월간 비정규노동’에 틈틈이 써온 시를 책으로 엮은 것.
제목은 ‘어느 파견 노동자의 편지’.

2000년 5월말 해고돼 2004년 7월 복직하기까지 힘들었던 과정과 비정규 관련입법을 바라보는 파견노동자의 애환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시집 출간 기념식이 있었던 7월13일 아침, 서울 여의도 KBS본관 배차대기실에서 노사저널과 만난 주 위원장은 “좀 쑥스럽다”면서도 “파견노동자의 실상을 널리 알릴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전했다.

절망을 안겨준 파견법

지난 98년 7월1일부터 시행된 ‘파견근로자보호등에관한법률’(파견법)은 그에게 희망과 절망을 동시에 안겨줬다.
희망은 오해에서 비롯됐다.

“솔직히 방송차량 운전직들은 파견법 제정으로 들떠 있었어요. 2년이 지나면 직접고용이 된다니까요.
저만 해도 95년부터 KBS에서 일했으니까.
KBS에 고용되면 렌터카회사가 설립한 인력회사에서 파견돼 일하는 ‘이중파견’ 신분을 벗어날 수 있을 거라고 기대했죠.

참 순진했어요.”

그를 오해하게 만든 조항은 다름 아닌 파견법 6조3항. “사용사업주가 2년을 초과하여 계속적으로 파견근로자를 사용하는 경우에는 2년의 기간이 만료된 날의 다음 날부터 파견근로자를 고용한 것으로 본다.”

사용사업주가 2년이 되기 전에 해고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뒤늦게 노조를 만들었지만 역부족이었다.
노조 필증이 나온 다음날인 2000년 5월30일 해고통보를 받았다.
당시 파견기간 만료를 이유로 KBS, MBC, SBS, YTN 등 방송사 4곳에서 해고된 파견 노동자만 무려 849명에 달했다.
억압, 슬픔, 괴로움, 분노 등의 단어가 그의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때부터 시간이 날 때마다 여의도 공원 벤치에 앉아 시를 썼다.
군대(74~77년) 시절 10여편의 시를 ‘전우신문’(현 국방일보)에 기고했던 기억을 떠올리면서. 그는 해마다 2년을 주기로 해고와 채용이 반복되는 파견노동자의 현실을 ‘분노의 탁구공’이라고 표현했다.

“머리가 두 개 달린 자본의 법칙/ 돌고 도는 물레방아 인생으로 만들고/ 파견노동자는 탁구공인가/ 이리 갔다 저리 돌고/ 올해는 KBS 내년에는 MBC 후년에는 SBS/ 파견 노동자의 탄식은 분노로 넘쳐오른다”(‘우리는 탁구공이다’ 중에서).

4년30일의 기다림, 그리고 복직

주 위원장은 2000년 6월부터 복직투쟁을 시작했다.
혼자 KBS 앞에서 1시간이 넘게 해고의 부당함을 규탄하는 날이 쌓여갔다.
온갖 방법을 동원했다.
머리를 박박 밀고 ‘파견철폐’라는 빨간 글자를 새겨 넣기도 했고, 방송사 청원경찰들이 제지할 땐 온몸에 고추장을 바르고 밀어붙이기도 했다.
비정규직 집회현장이면 어디든 쫓아다녔고, 몸싸움도 마다하지 않았다.

오래지 않아 그는 ‘파견법 철폐 투쟁의 상징’으로 떠올랐다.
‘필승, 주봉희’라는 다큐멘터리 영화가 나올 정도였다.
하지만 경제적인 어려움을 비껴갈 순 없었다.
해고 당시 중학교 3학년이었던 딸은 누님 집에 의탁해 놓은 지 오래였다.
민주노총 서울본부를 비롯한 많은 활동가들이 그를 도와줬지만 역부족이었다.

단적인 사례 하나.
그는 2001년 여름, 명동성당에 사수대로 참여했다.
단병호, 이홍우, 양경규, 차봉천 등 노동계 지도부들이 농성을 하고 있을 때였다.

“가장 큰 이유는 밥 때문이었습니다.
적어도 사수대를 하면 밥 세끼를 먹을 수 있잖아요.
배고픔은 못 참겠더라고요. 좀 미안했죠(웃음).”

주 위원장은 노조 위원장으로서의 역할 또한 게을리 하지 않았다.
우선 ‘이중파견’을 ‘직접계약’으로 바꾸는 데 성공했다.
이를 테면, ‘KBS-렌터카 회사-인력회사’로 이어지던 구도를 KBS와 인력회사가 직접 계약하는 형태로 전환한 것이다.
24시간 맞교대 근무를 3교대 근무로 바꾸었다.

지난해부터 각 방송사는 도급업체에서 인력을 공급받는 방식을 택하고 있다.
그도 2004년 7월1일 KBS 자회사로 복직했다.
4년30일만의 일이었다.
이젠 파견노동자가 아니라 도급업체의 정규직(그는 “고용이 보장된 비정규직”이라고 했다)이 된 셈이다.
‘배차반장’이라는 직함도 받았다.

그렇지만 마냥 기뻐할 순 없었다.
그가 복직한 날은 2년 주기로 돌아오는 ‘파견노동자 해고의 날’이었기 때문이다.
출근 당일 아침, 그는 회사 앞 벤치에 앉아 착잡한 심정으로 시를 써내려갔다.

“내가 사랑하던 동지들의 피멍진 자리/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이 자리에 가슴팍 쥐어뜯으며/ 동지들이 떠나던 날/ 그리 슬피 울어주던 여의도 매미들과/ 그날을 그리워하며 울고 있소”(‘매미와 울다’ 중에서).

그는 시집의 후기에서 시집발간의 목적을 다음과 같이 밝혔다.
“패배의 연속 속에서 움츠리며 비겁하게 그늘에 숨어 글로써 문드러진 가슴의 응어리를 풀어야했던 나약하기 짝이 없는 한 늙은 파견 노동자는, 똥구린내 나는 세상을 만천하에 드러내고자 지난 5년의 세월을 시집으로 묶어보았습니다.”


▒ 주봉희 위원장은 1953년생. 언론노조 방송사비정규지부 위원장.
74~77년 공수부대 근무. 79년 쿠웨이트, 81년 사우디아라비아에서 건설일용직 잡부로 일함.
87년 통인익스프레스 노조 결성 후 초대 위원장 맡음.
89년 동양제과 영업사원으로 1년여 근무. 92년 SBS 운전직(파견)으로 입사. 95년부터 KBS에서 일함.
파견법에 의해 2000년 5월30일 해고. 4년30일 만인 2004년 7월1일 KBS 도급업체 직원으로 복직. 2005년 7월13일 첫 시집 ‘어느 파견 노동자의 편지’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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