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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르바비차

어제, <그르바비차>를 보았다.

아는 이가 소개해주었는데, 덕분에 오랜만에 시네큐브도 갔다왔네.

 

그르바비차는, 참 우울한 영화다.

우울했다.

 

보스니아의 '씨'를 말리겠다고 시작된 집단강간과

그로 인해 태어난 딸 사라.

영화는 출생의 비밀,을 숨긴채

살아가는 엄마 에스마와 딸 사라의 이야기.

 

하지만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우울한 영화, 였어야만 했을까.

의문이 든다.

 

처음, 그 문제로 영화를 만들었다고 했을때, 궁금했다.

보스니아 출신의 여성감독은 어떻게 이 이야기를 풀 것인가.

 

 

 

내가 <그르바비차>를 보며 우울했던건

에스마가 겪었던 '피해와 고통의 기억' 때문이 아니라,

그 피해와 고통의 기억을 갖고 있는 자,에 대한 재현방식 때문이었다.

 

그래, 사실 그렇다. 피해가 없다는 것은 아니다.

아버지의 전사증명서를 제출한 자녀는 수학여행비를 면제해주지만

그 전쟁으로 인해 가장 끔찍한 피해를 입었던 여자들의 아이들은

그 사실을 말할 수 없다. 꼭꼭 숨겨져 있으니까.

국가가 위기에 처했을 때 언제나 민족의 기표가 되는 여성들은

결코 민족을 위해 목숨바친 전쟁영웅이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피해자 여성은 꼭 이런 방식으로 재현되어야만 하는가.

영화 초반부터 시작된 복선,은 나에게 하나의 공식처럼 다가오기 시작했다.

자신의 팔을 누르며 장난치던 딸에게 화를 내고

버스 옆자리에 서있는 남자의 가슴에 놀라 버스를 내리고

가슴의 단추를 하나라도 더 잠그는 그, "순수한" 여자.

그녀와 약간의 로맨스를 보이는 남자는 영화 내내 말한다. 당신은, 역시 순수하군요.

 

생각해보았다.

만약, 피해자가 피해자답게 재현되지 않았다면 베를린영화제 황금곰상을 받을 수 있었을까.

그 우울함에 <여자, 정혜>가 겹쳤다.

어린 시절 강간으로 인한 트라우마로 신혼여행에서 돌아와버린 정혜는

내내 우울했지만 끝내 손에 쥔 칼로 그 놈을 죽이지 못했다.

마찬가지로 꽉 막힌, 갑갑한 느낌이다.

 

딸아이의 수학여행비를 벌기 위해 일하는 술집에서 에스마는

가슴을 부비며 군인과 춤을 추는 동료를 보고 또다시 훌쩍인다.

엉덩이를 내어놓고 남자들 앞에서 춤을 추는 댄서들과

엄청난 트라우마를 안고도 어쩔 수 없이 일을 해야 하는 에스마는

전혀 다른 종류의 인간처럼 느껴진다. 왜.

 

비교해볼 수 있을 것이다.

한국의 '위안부' 문제가 우리에게 재현되고 기억되는 방식.

 

같이 보았던 이는 <귀향>을 떠올렸다고 했다.

그래, 똑같지는 않지만,

귀향의 여자들이 주었던 삶의 에너지들을, 삶을 살아가는 힘들을 

<그르바비차>에서는 느낄 수가 없었다. 

 

딸 사라가 자신의 비밀을 알게 되고 둘 사이는 서먹서먹한 채 수학여행을 떠난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 그 마지막 손인사가, 어떤 메세지를 담고 있었다면.

차라리 이 영화는 딸이 그 비밀을 알게 된 순간부터 시작되는 것이 어땠을까.

생각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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