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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8/01/22
    그르바비차(5)
    은수
  2. 2008/01/14
    경계없는 페미니즘(8)
    은수
  3. 2007/12/16
    색, 계
    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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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잘못된 길(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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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2007/08/28
    피해자 중심주의, 성폭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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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2007/07/04
    성폭력의 개념화
    은수
  7. 2007/0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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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2007/06/24
    하우스 키퍼 제도(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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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2007/04/20
    공장이여 잘 있거라
    은수
  10. 2007/03/05
    선택(7)
    은수

그르바비차

어제, <그르바비차>를 보았다.

아는 이가 소개해주었는데, 덕분에 오랜만에 시네큐브도 갔다왔네.

 

그르바비차는, 참 우울한 영화다.

우울했다.

 

보스니아의 '씨'를 말리겠다고 시작된 집단강간과

그로 인해 태어난 딸 사라.

영화는 출생의 비밀,을 숨긴채

살아가는 엄마 에스마와 딸 사라의 이야기.

 

하지만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우울한 영화, 였어야만 했을까.

의문이 든다.

 

처음, 그 문제로 영화를 만들었다고 했을때, 궁금했다.

보스니아 출신의 여성감독은 어떻게 이 이야기를 풀 것인가.

 

 

 

내가 <그르바비차>를 보며 우울했던건

에스마가 겪었던 '피해와 고통의 기억' 때문이 아니라,

그 피해와 고통의 기억을 갖고 있는 자,에 대한 재현방식 때문이었다.

 

그래, 사실 그렇다. 피해가 없다는 것은 아니다.

아버지의 전사증명서를 제출한 자녀는 수학여행비를 면제해주지만

그 전쟁으로 인해 가장 끔찍한 피해를 입었던 여자들의 아이들은

그 사실을 말할 수 없다. 꼭꼭 숨겨져 있으니까.

국가가 위기에 처했을 때 언제나 민족의 기표가 되는 여성들은

결코 민족을 위해 목숨바친 전쟁영웅이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피해자 여성은 꼭 이런 방식으로 재현되어야만 하는가.

영화 초반부터 시작된 복선,은 나에게 하나의 공식처럼 다가오기 시작했다.

자신의 팔을 누르며 장난치던 딸에게 화를 내고

버스 옆자리에 서있는 남자의 가슴에 놀라 버스를 내리고

가슴의 단추를 하나라도 더 잠그는 그, "순수한" 여자.

그녀와 약간의 로맨스를 보이는 남자는 영화 내내 말한다. 당신은, 역시 순수하군요.

 

생각해보았다.

만약, 피해자가 피해자답게 재현되지 않았다면 베를린영화제 황금곰상을 받을 수 있었을까.

그 우울함에 <여자, 정혜>가 겹쳤다.

어린 시절 강간으로 인한 트라우마로 신혼여행에서 돌아와버린 정혜는

내내 우울했지만 끝내 손에 쥔 칼로 그 놈을 죽이지 못했다.

마찬가지로 꽉 막힌, 갑갑한 느낌이다.

 

딸아이의 수학여행비를 벌기 위해 일하는 술집에서 에스마는

가슴을 부비며 군인과 춤을 추는 동료를 보고 또다시 훌쩍인다.

엉덩이를 내어놓고 남자들 앞에서 춤을 추는 댄서들과

엄청난 트라우마를 안고도 어쩔 수 없이 일을 해야 하는 에스마는

전혀 다른 종류의 인간처럼 느껴진다. 왜.

 

비교해볼 수 있을 것이다.

한국의 '위안부' 문제가 우리에게 재현되고 기억되는 방식.

 

같이 보았던 이는 <귀향>을 떠올렸다고 했다.

그래, 똑같지는 않지만,

귀향의 여자들이 주었던 삶의 에너지들을, 삶을 살아가는 힘들을 

<그르바비차>에서는 느낄 수가 없었다. 

 

딸 사라가 자신의 비밀을 알게 되고 둘 사이는 서먹서먹한 채 수학여행을 떠난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 그 마지막 손인사가, 어떤 메세지를 담고 있었다면.

차라리 이 영화는 딸이 그 비밀을 알게 된 순간부터 시작되는 것이 어땠을까.

생각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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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없는 페미니즘

찬드라 탈파드 모한티, 경계 없는 페미니즘

 

흥미로운 책이다..

연구해보고 싶은 주제들과 고민들을 던져주는 좋은 글을 읽었네..

몇가지 메모.. 

 

-경계없는 페미니즘Feminism without borders

  경계는 봉쇄와 안전을 동시에 제공한다. 우리는 여성으로서 몸과 생활공간에 대한 완전함, 안정감, 안전함을 감히 주장한다는 이유로 종종 그 대가를 치르곤 한다. 이런 이유로 나는 "경계없는 페미니즘"을 선택하게 되었다. 그리고 최대한으로 확장, 포괄하는 페미니즘 비전은 경계를 넘어서는 것을 배워야 하는 만큼이나 경계에 주목할 필요가 있음을 강조하고 싶었다. 경계없는 페미니즘은 "경계를 상정하지 않는borderless" 페미니즘과는 다르다. 경계없는 페미니즘은 그 경계가 재현하는 단층선, 갈등, 차이, 두려움, 봉쇄를 인식하는 페미니즘이다. 경계없는 페미니즘은 단 하나의 의미를 띠는 경계는 없다는 것을 인식하는 페미니즘이며 국가, 인종, 계급, 섹슈얼리티, 종교, 장애를 통과하며 그 사이를 가로지르는 경계선들이 실재함을 인식하는 페미니즘이다. 그러므로 경계없는 페미니즘은 설정되어 있는 경계나 구획선을 넘나들면서 변혁과 사회정의에 대한 상상을 제공해야 한다. 나는 침묵하지 않는 페미니즘, 배타적이지 않은 페미니즘을 말하려는 것이다. 나는 다차원적이면서 동시에 편협함을 드러내는 경계들 간의 긴장에 주목하여, 우리 일상생활의 경계들을 통과하며 경계들과 더불어 그리고 경계들을 극복하는 해방의 잠재력을 지닌 페미니즘을 말하고 싶었다. (14)

 

경계들과, 경계들의 상호의존성, 단순한 합이 아니다..

구조와 행위성..그것을 드러내는 분석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됨..

 

-비판..

  나는 미국에 기반을 둔 내 입장에서 페미니즘에 문제가 되는 지점을 세 가지 정도로 지적하려고 한다. 첫째, 생기발랄한 여성운동과 미국학계에서 페미니즘을 이론화 하는 것 사이에 놓인 전적으로 계급-기반적인 간극이 점점 커져 학력을 중시하는 강단 페미니즘을 형성했다. ..둘째, 점점 기업화되는 미국문화와 자본주의의 가치를 당연시하는 경향에 깊은 영향을 받아, 기업이나 민족국가의 사다리에서 "여성의 출세"에 관심을 기울이는 신자유주의 혹은 소비주의(친자본주의) 페미니즘이 생겨났다. ..셋째, 일상의 현실에서는 정체성에 대한 배타적이고 자기만족적인 이해만 통용되어 (인종, 계급, 성, 국적 등등의) 정체성이 불안한, 따라서 단순한 "전략"으로만 비춰지는 상황에서, 본질주의적인 정체성의 정치학 비평과 정체성에 대한 포스트모더니즘적 회의주의의 헤게모니는 페미니즘 정치학과 이론을 협소하게 만들고 있다.(21)

 

-정체성에 대하여

내가 문제 삼는 것은 단순히 여성이니까 아니면 가난하니까 아니면 흑인이나 남미인이니까 하는 식으로, 존재 자체가 정치화된 대항적 정체성을 구성하는데 충분하다고 전제하는 바로 그 생각이다. 다시 말해서 정체성이라는 문제는 정말 중요하지만, 이것이 정치적인(혹은 페미니즘적인) 주체성이라는 자아준거적이며 개인주의적인 생각으로 결코 자동적으로 환원될 수 없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120)

 

내가 여기서 지적하고 싶은 것은 전지구적 경제속에서 여성들은 노동자이며 어머니이며 소비자이며, 또한 이 역할들을 동시에 맡고 있다는 것이다. 세계화 담론 속에서 여성을 단일하고 획일적으로 범주화하면 경험, 주체, 투쟁에 관한 생각들도 제약을 받게 된다. (367)

 

여성들에게, 노동자 정체성...혼종적인..나의 욕망대로 획일화하지 않을 것.

모순과 균열, 차이들..을 드러내는 작업...

그리고 그 가운데 공통의 이해관계는 어떻게 형성되는 것인가..

 

-차이를 넘어서는 대화

차이를 넘어서는 대화는 긴장과 경쟁 그리고 고통으로 가득하다. 매우 불평등하며 식민화된 이 세상에서 급진적이거나 비판적인 다문화주의가 서로 다른 문화간의 총합이나 공존으로 단순히 치환될 수 없는 것처럼, 대화를 위한 공정하고 윤리적인 기반을 특화시키지 않고서도 다문화적 페미니즘이 서로 다른 공동체의 페미니스트들 간의 대화를 가능하게 할 수 있다고 전제해서는 안된다.(191)

 

-페다고지

 그러나 경험의 중심성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배제로 이어지기도 한다. "경험"이 지배계급의 경험인 경우, 종종 그 경험은 침묵되기도 한다. 경험에 대해 '너보다 내가 더 진짜라는'  태도는 교사들에게도 적용된다. 예를 들어보자. 제 3세계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나는 제 3세계 사람들"을 위해" 말하려는 경향을 끊임없이 감시해야 한다....그러니까 종종 좌파자유주의 백인 학생들이 모든 유색인들을 그들의 진정한 목소리를 대변하는 사람으로 간주하는 것과 마찬가지의 방식으로, 학생들은 나를 토착민 정보원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이것은 학급에서 유색여성 한 명의(인간성, 자세, 태도 등에 대한) 특별한 "차이"가 그 집단 전체의 차이로 대표될 때 분명히 드러나며, 집단의 목소리가 개인의 목소리를 대체하는 것으로 전제될 때도 분명히 드러난다. ..그러므로 차이에 대한 특정한 페다고지의 코드화에 따른 어떤 특별한 문제는 인종과 젠더를 개인적이고 개별화된 경험의 측면에서 개념화하는 데서 생겨난다. 학생들은 종종 자신들이 제 3세계 사람들에 대해 "보다 감수성을 지녀야 하는" 것으로 결론을 맺는다. 이렇게 개별화된 개인의 태도를 매개로 이루어지는 지식의 공식화와 정치학은, 차이에 대한 가르침이나 배움에 포괄되어 있는 바로 그 지식의 정치학을 사장시켜버리고 만다.(305)

 

교육의 의미. 목적. 내용. 방법. 

결론이 이미 내려진 지식을 단순히 전수하는 것이 아니라면,

어떤 방식으로 교육이 이루어져야할까?

타자의 경험을 접할때 경계해야되는 태도...

최근에 관심을 갖고 있는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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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 계

 


  여러 가지 기대 속에 영화 <색, 계>를 보게 되었다. 제일 처음 줄거리를 보고서는 한국영화 <쉬리>를 막 떠올렸는데, 암울한 시대 배경에 미인계 작전이 눈물 짜는 사랑이 되는 ‘뻔한’ 스토리가 아닐까, 거기다가 ‘무삭제’ 개봉에 양조위 불알 얘기에..어찌나 광고를 하던지(^^), 보기 전에 참 많은 ‘선입견’들을 갖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의외로 영화를 보고 난 지금의 느낌은, 첫 번째로 뻔한 예상들을 ‘깨는’ 영화라는 것, 두 번째로는 그래서 여러 가지 흥미로운 고민지점들을 많이 남겨준다는 것이다.

 

  영화를 보고 나오는데 엘리베이터에서 “그러니까 결국 남자가 이긴 거잖아”라고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들었다. 이 얘기를 듣고 피식, 웃음이 나왔는데, 동시에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다. 영화 제목 <색, 계>의 ‘색’이 만약 어떤 식의 (경)‘계’를 넘게 하는 것이라는 의미라면, 결국 이 색계는 양조위가 아니라 탕웨이를 흔드는 것이 아닐까? 나에게는 이 영화가 탕웨이의 색, 계로 읽혔던 것이다. 의도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사실 영화 초반 홍콩에서의 탕웨이(왕치아즈)는 내내 어색하고 서툴기 짝이 없었다. 노라의 인형의 집을 공연하겠다던 여자애들에게 “(그런 부르주아적 연극이 아니라) 애국적 저항연극을 해야 된다. 연기는 투쟁의 일환이다”라고 말하던 그 남자애는 물론이고, 그렇게 어설프게 설득되는 과정. 그리고 “남자라면 죽은 오빠를 대신해 싸웠을텐데, 중국을 구하자!!”라고 외치던 왕치아즈의 대사며 연기는 완전 부자연스러운 느낌이었다. 어설픈 아마츄어 킬러들의 ‘살인’ 장면만큼이나, 그 장면에 아연실색하며 도망간 왕치아즈는 마치 자신의 몸에 맞지 않은 옷을 입은 느낌이랄까? 그런데 그에 반해, 이 영화에서 막부인은 왕치아즈가 수행하고 연기하는 느낌이 아니라, 훨씬 더 자연스러운 것처럼 잘 맞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 점이 참 흥미로웠다. 원래의 탕웨이인 왕치아즈의 모습을 관객인 우리들은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가 진행될수록 그 ‘원래’가 무엇인지, 무엇이 연기인지 실제인지, 의도인지 자연스러움인지 경계는 모호해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특히 이 영화에서 그 과정은 ‘낭만적 사랑’이라기보다는 ‘몸적 경험’, 사도마조히즘적 섹스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다이아 장면이 나왔을 때 관객들이 웃은 것1)은 왜일까? 순수하고 로맨틱한 낭만적 사랑과는 배치된다고 생각되는 격렬하고 거친 섹스 이후에, “내가 지켜줄게”와 함께 제공되는 사랑의 상징, ‘다이아몬드 반지’라니, 뭔가 안 맞아도 한참 안 맞는 느낌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여전히 사랑을 “비록 그것이 두 사람 사이의 일이라 해도 고도의 문명의 양식을 창조한다고 듣고, 역사를 변화시킨다고” 숭고한 그 무엇으로 듣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포비넬리가 지적하듯이 이런 사랑과 “다른 종류의 감정적 애착-욕망, 욕정, 사회적 책무들과의 사이의 선은 매우 희미하다”.2) 이 영화 안에서는 양조위는 탕웨이를 사랑한 것인가? 욕망한 것인가? 탕웨이는 양조위의 어떤 면에 길들여진 것인가? 그 길들여짐은 사랑과는 다른가? 여러 가지 질문들을 던져 볼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그 불분명한 사랑, 욕망, 욕정, 길들여짐, 친밀성 사이에서 ‘몸적 경험’들이 매개가 되고, 그것이 탕웨이라는 한 여자를 변형시키는 기제가 된다는 점이 매우 흥미롭게 느껴졌다. 사실 평일 낮에 백화점 영화관에서 혼자 영화를 본 덕인지, 내 주변에는 30대부터 60대까지 중 ․ 장년층 여성들이 굉장히 많았다. 실제로 아파트 촌 근처의 멀티플렉스 극장에는 평일 첫 회 관객이 150~200명에 이를 정도로 여성관객 비율이 높다고 하는데,3) 여러 기사에서 말하듯이 단지 ‘야하다’는 것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것 같다. 아니 오히려, 그 ‘야함’이 중년 여성관객들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지 좀 더 생각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주부들이 즐겨보는 아침 프로그램 ‘위기의 부부4)’ 편에도 매일 나오는 얘기지만, “우리 부부는 사랑이 없어”라는 언설 속에서 사랑을 설명하는 가장 큰 내용들은 ‘섹스’인 경우가 많다. 옥소리 ․ 박철 부부의 이혼공방에서 “지난 11년 동안 부부관계 10번도 안 해”5)라는 것이 큰 논란이 되었던 것에서부터 알 수 있듯이, 섹스리스 부부는 곧 사랑 없는 부부로 이해가 된다.  우리 사회가 ‘낭만적 사랑’의 신화를 끊임없이 유통시키고 재생산하는 구조이지만, 그럼에도 한편에서는 그 사랑이라고 믿는 것들에서 육체, 몸적 친밀성에 의해 구성되는 부분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잘 보여주는 대목이 아닐까. 이미 ‘나의 순결성을 지켜 주는 꽃미남 왕자님’이 허구라는 것을 깨닫고 있는 중년 여성들에게, 이 영화가 주는 매력은 분명 다른 어떤 것일테다.


  물론 이들의 s-m 섹스 관계를 보면서 참 많은 고민이 들었다. 특히 가장 처음에 섹스를 하는 장면을 보면서, 대부분 그러했겠지만 ‘강간’ 혹은 ‘성폭력’으로 읽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가학(남성)과 피학(여성)의 구도, 강제적이고 물리적인 폭력들에 대한 불쾌감과 거부감을 정당한 것으로 받아들이기에 앞서, 내 안에서 작동하는 도덕주의적 잣대 때문인가,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되었다. 그러다 양조위가 이 연기를 콘티없이 즉흥적으로 한 것이라는 기사를 보게 되었는데6), 양조위가 ‘이 대장’이라는 인물에 대해 너무나 몰입하고 있었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항일인사들을 체포하고 고문하며, 언제 자신을 노릴지 모르는 인간들에게 늘 신경을 쓰고 있는 이 대장에게 섹스는 폭력과 고문, 불안의 연장선상에 있었다. 그러나 이상한 것은, 이 ‘노골적인’ 폭력 앞에서 이것 때문에 너무 불쾌하거나 영화가 싫어지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영화 <친절한 금자씨>에서 최민식이 밥 먹다 말고, 자기 부인의 머리채를 잡고 뒤에서 섹스를 하는 장면과 유사하면서도 그 느낌이 달랐다. 최근에 본 성적 급진주의 논의의 영향 때문인지, 이 영화에서 유명한 클립체위 아니면 탕웨이가 양조위의 눈을 가리고 섹스를 하는 장면 때문인지, 이 장면도 하나의 s-m 퍼포먼스, 게임으로 이미지화 되는 것 같다.


  그리고 기억에 남는 것은 이 영화에서 ‘창녀’에 대한 언급이 몇 번 등장한다는 것이다. 그 장면은 두 군데가 있는데, 첫 번째는 ‘처녀’였던 탕웨이에게 함께 저항극단을 했던 친구들이 우리 중 여자랑 자본 남자는 하나뿐이라며 권하던 장면이다. 여기에 탕웨이는 “창녀랑?”이라고 불쾌해하며 되묻는다. 그리고 두 번째는 조계지의 술집에 찾아가는 장면인데, 방으로 이끌어가는 과정에서 술취한 일본군들이 붙잡게 되고, 이 술집의 여주인은 탕웨이에게 사과하며 “우리 아이(게이샤)로 착각하셨나보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마침내 양조위를 만나는데, 이 양조위에게 탕웨이는 당신이 왜 여기로 부른지 알고 있다며 “당신의 창녀가 돼 달란거죠.”라고 말한다. 그랬더니 양조위는 “창녀가 되는 법을 알기는 해?”라고 대답한다.  감독은 별다른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을 수도 있겠지만, 난 참 이 장면들을 재미있다고 생각했다. 첫 번째 이유는, 자기 자신의 ‘섹스 연습’ 앞에서 “창녀랑?”, 그 대사를 듣는 느낌은 참 역설적이었다. 사실은 자신의 섹슈얼리티를 자원화한다는 점에서 창녀와 그녀 사이의 경계는 매우 불분명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영화는 목적을 위해 ‘연습하는 몸’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그래서 일본군들이 지나가던 탕웨이를 게이샤로 착각하고 붙잡았던 장면은 그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준 것이 아닐까? 그리고 두 번째 이유는 창녀를 언급하던 첫 번째 장면과 두 번째 장면의 사이에, 몸적 경험을 매개로 변화를 겪는 탕웨이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포비넬리가 말하듯이 “친밀성의 진실은 우리가 그 사실을 아는 것이고, 그것이 일어났다는 것을 아는 신호는 우리가 변형되었다는 사실이다. 사랑의 일어남(happening)은 우리를 만든다.7)"는 사실, 버틀러가 섹슈얼리티란 나에게 귀속된 것이 아니라고 말할 때 나의 ‘몸’이 관계를 통해 부대끼고 그 자체가 나, 우리의 변형을 만들어낸다는 것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 해 볼 수 있는 대목이 아닐까.


  그러나 이 영화가 재미있었던 것은 이 모든 관계들이 매우 ‘불명확’하게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왕치아즈에서 막부인으로의 변화가 분명하게 그어진 선을 넘은 듯이 있는 것도 아니며, 스파이 임무에서 사랑으로 완벽한 전이가 일어난 것도 아니다. 물론 영화의 후반부 탕웨이는 양조위를 살려준 대가로 자신이 죽게 되지만, 내가 보기에 그를 살려준 이유도 옷깃에 붙어있던 약으로 자살하지 않았던 이유도 모두 분명치 않다. 순정을 지키기 위해서인가, 붙잡혀간 동료들과의 의리를 위해서인가. 내 생각에는 한 마디로 답할 수 없는 그 모호한 지점이 6캐럿 다이아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를 구태의연한 멜로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 같다. s-m 섹스, 사랑, 친밀성, 애국, 스파이, 동지, 의리, 그 모든 것들의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넘나들기 때문에, 이 영화를 단순히 진부한 ‘사랑’ 얘기나, 격렬한 ‘섹스’ 영화, 어느 하나의 카테고리로는 완전히 해석할 수 없을 것 같다. 그것이 이 깨는 영화, 색, 계의 매력이 아닐까...



1) “6캐럿 다이아몬드 시퀀스에서 영화는 거의 코미디 수준으로 떨어진다. 시사회에서 이 영화를 두번 보았는데 일반 관객 시사회에서 이 부분은 커다란 폭소를 유발시켰다.”, 김소영, “‘색’은 ‘계’를 넘어서지 못했다”,『씨네 21』 2007.11.15일자.


2) Povinelli(2006), The empire of love, p,178


3) “영화예매 사이트 맥스무비에 따르면 21일부터 집계한 ‘색, 계’의 관객 중 30, 40대의 비율은 57%로 지난주 박스오피스 1위인 ‘세븐 데이즈’의 39%에 비해 월등히 높다. 또 여성 관객의 비율도 62%로 ‘세븐 데이즈’의 54%, ‘식객’의 53%보다 높다.” 채지영, “ ‘옴 파탈’ 량차오웨이 덕에? ‘색, 계’ 100만명 돌파”,『동아일보』, 2007.11.27일자.


4) <생방송 오늘의 아침>이라는 프로의 ‘위기의 부부’ 고정 코너.


5) '디워 광풍'부터 '옥소리의 색,계'까지…2007 연예계 10대뉴스. 『마이데일리』.2007.12.03일자.


6) 김명신, “‘색, 계’ 왕조위-탕웨이, ‘충격의 정사신은 왕조위의 즉흥연기?’”,『한국경제』, 2007.12.07일자


7) Povinelli(2006), The empire of love, p,1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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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못된 길

잘못된 길(Fausse Route)

                                       by 엘리자베스 바댕테르(Elisabeth Badinter)

 

 

잘못된 길.

1990년대 이후의 급진적 여성운동에 대한 비판적 성찰, 이라는 부제가 달려있다.

 

바댕테르는 남성성의 구성성과 그 과정을 기술한 라는 책의 저자로 유명하다.

잠깐 딴 소리지만, identity를 '본질'로 번역한 건, 바댕테르의 책을 통째로 오독한거나 다름없다고 본다.

 

<잘못된 길>에서도 계속해서 주장하는 바이지만

바댕테르는 생물학적이고 본질주의적인 남성성/여성성에 철저하게 반대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바댕테르는 미국의 급진주의 여성운동에 대해 비판적인 견해를 제기한다.

 

바댕테르에 따르면 이들이 남성지배의 보편성을 주장하는 것은 오류이다.

왜냐하면 언제나 그 원인을 찾아들어갈때에는 

언제나 어느 곳에서나 자연스럽고 선천적이며 보편적인 것으로서의

'남성성' 그 자체의 문제로 환원시키기 때문이다. 

 

한편 이는, 반대편에서는 '여성성'이라는 이름으로 여성들의 다양한 경험을 단일화해버리는 효과,

남성 가해자/여성 피해자라는 구도로 여성들을 피해자로 희생물로 만드는 효과를 낳는다.

이러한 본질론적인 남성성/여성성에 기반한 페미니즘의 분리주의적 경향에 대해서

바댕테르는 본성에 호소하는 자연주의로의 복귀라고 비판하면서

그렇다면 어떻게 변화가능한가, 라고 다시 묻고 있다.

그런 점에서 저자는 '차이에 기반한 평등'이라는 슬로건 역시

고정되고 대립되는 이원주의에서 출발하는 것임을 지적한다.

이리가라이와 같은 이론가들 역시 예외는 아니다.

 

특히 바댕테르는 폭력, 강간에 관한 이론과 실천으로 유명한 드워킨, 맥키넌과 같은 페미니스트들에 대해 비판의 날을 세운다.

이들이 모든 종류의 성적 폭력을 강간과 동일시 한다던가, 이성애와 강간을 인과관계처럼 놓는다던가, 성관계에 있어서 '투명한 동의'가 가능한 것처럼 선전한다던가, 반 포르노 운동이 보수적 도덕주의와 결합하는 현상들에 대한 비판들이다.

 

바댕테르의 문제의식은 많은 고민들을 던져준다.

 

지금까지 섹슈얼리티의 문제는 젠더불평등의 문제로 곧바로 이해되어 왔다.

그러나,

김은실 선생님의 말대로 모든 여성들이 어느 정도는 젠더 연속선상에서 살아가지만,

그럼에도 각기 다른 맥락들을 젠더로만 환원할 수는 없다.

각각의 계급, 국가, 인종 등의 다양한 맥락을 삭제시킨

단수로서의 여성, 여성성으로는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예컨대, 성매매/성노동 논쟁은 강제/자발, 폭력/노동의 대립각 속에서 이루어져 왔지만

무엇이 진실이냐, 와 같은 방식으로 접근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하나가 정의(definition)가 되었을 때, 경합하는 여성들의 목소리는 묻혀져버리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모성에 기반한 여성성, 여성주의를 주장하는 것의 위험성, 딜레마.

 

그러나 바댕테르는 생물학적 본질주의를 그토록 경계하고, gender의 구성성을 강조하면서도,

자연으로서의 sex, 그 자체에 대해서는 별다른 문제제기를 하지 않는 듯하다.

gender와 마찬가지로 sex 역시,

남자, 여자, 성기를 기준으로 단 두 가지의 성이 존재한다는 것,

하늘이 내려주신 엄연한 '사실'이 아니라

역사 속에서, 갖가지 정치적 담론 속에서 구성된 것으로 볼 수 있는데.

바댕테르는 생물학,이라는 상수를 어디까지 인정하는지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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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자 중심주의, 성폭력

은수님의 [성폭력의 개념화] 에 관련된 글.
은수님의 [피해자 중심주의에 대하여] 에 관련된 글. 

...성적 자기결정권이 여성에게도 남성과 같은 권리를 부여하자는 주장이라면, 피해자 중심주의는 여성의 누적된 차별을 고려하여 남성과 다른 대우, 즉 ‘우선적’ 고려를 주장한다. 하지만 남성과 같음을 주장하든, 다름을 주장하든 이 두 가지 개념은 다음과 같은 동일한 인식론을 공유하고 있다. 첫째, 성폭력 사건의 가해자와 피해자를 고려하는 데에서, 남성과 남성의 차이, 여성과 여성의 차이, 혹은 개인들 사이의 차이보다는 사회적 범주로서의 남녀간의 차이, 즉 젠더를 가장 우선적으로 사고한다. 둘째, 두 개념이 전제하는 인식자는 남성이든 여성이든 사회적 제 관계로부터 초월적이며, 자신의 신체를 인식 과정에 개입시키지 않는, 시공간의 제약 없이 언제 어디서 대체하더라도 동일한 인식이 가능하다고 보는 보편자다. 이러한 보편 주체가 인식하는 성폭력 사건의 객관성은 특정한 사회적 맥락에서 성별 권력관계에 의해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사실’로 존재하게 된다. 셋째, 두 개념이 전제하는 인간은 자유주의(인본주의) 세계관에서 논하는, 사회 제 관계로부터 오염되지 않은, 투명하고 순수한 행위자다. 다시 말해, 모든 사회적 행위를 스스로 책임(‘선택’ ‘동의’ ‘결정’)질 수 있는 독자적인 주체라고 가정한다.


...자유주의 철학은 양성 간의 평등을 주장할 수 있는 근거인 동시에 걸림돌인 것이다. 모든 여성은 여성이지만 동시에 여성이 아니기 때문이다. 현재 성폭력 반대운동의 딜레마 중 하나는 “여성이기 때문에 성폭력 당한다”라고 하는 젠더 범주가 성폭력 피해를 주장하는 근거이기도 하지만, 실은 여성주의가 극복해야 할 인식이기도 하는데 있다. 성차별에 저항하기 위해 여성의 공통성을 강조하는 젠더 개념은, 한편으로는 여성을 성별 정체성으로 환원하여 모든 여성을 동질적인 존재로 만들고자 하는 가부장제에 기능적이다.


...피해자 중심주의는 오랜 세월 동안 객관성이 남성의 경험에 근거했기 때문에 이제는 여성의 경험이 객관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러한 인식은 객관성이 사회적 권력관계로부터 자유롭게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게 하며, 마치 여성주의가 가부장제 세계관을 대체할 수 있을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여성주의는 기존 남성의 입장에서 구성된 객관성이 틀렸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남성의 객관성을 역사화 ․ 정치화함으로써 부분화 ․ 상대화하자는 것이다. 객관성은 권력의 내용이 아니라 형식이며, 권력관계에 따라 변화 ․ 유동 ․ 이동하는 정치적 구성물이기 때문이다. 피해자 중심주의는 모든 피해 여성이 동일한 경험을 하며, 피해자의 경험이 그 자체로 객관적인 것 같은 오해를 유발한다.


...가장 큰 문제는 피해자 중심주의가 오히려 성폭력 사건의 객관성 증명 책임을 피해 여성에게 떠넘긴다는 사실이다. 성폭력 사건의 객관성은 피해 여성이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가 여성들의 목소리를 존중하는가, 아닌가에 달려 있다. 개인의 경험과 말하기 실천은 기억들 사이의 경합과 선택의 결과이며, 따라서 경험은 개인적이면서 동시에 사회적인 해석이다. 성폭력 사건의 객관성(‘사실’ ‘진실’)은 여성의 경험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라, 여성의 경험을 해석할 수 있는 특정 사회의 언어체계에 그 책임이 있으며, 이는 성별 권력관계에 의해 구조화된다.


...개인의 몸은 개인이 소유한 자원이 아니라 사회와의 관계 속에서 상호작용하는 운동하는 행위자다. 그러나 피해자 중심주의가 상정하는 여성의 몸은 피해 당시의 경험이 ‘고스란히’ 기억된 객관적인 그릇, 공간으로서의 몸이며, 여성 경험의 ‘객관성’을 주장하는 근거로 간주된다.

 

-정희진(2006),“성적 자기결정권을 넘어서”에서 발췌

 


 

 

그릇으로서의 여성의 몸, 몸/정신의 이분법을 넘어서,

여성들간의 차이, 젠더로 환원되지 않는 성폭력,

경험과 해석의 간극, 권력과 객관성..

성적 자기결정권이나 피해자 중심주의는

성폭력임을 주장하는 근거가 되는 동시에

또다른 여성들의 경험과 기억과 맥락을 삭제시킨다.

여성이기 때문에, 여성주의가 넘어야할 인식...

성폭력에 대한 개념화..아 정말로 어렵다..

정의가 불가능한 것에서 나는 명확하게 정리된 답을 찾고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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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폭력의 개념화

...(기존의 반성폭력 운동은) 성폭력을 법 담론 안의 범죄로 입증해야 했고 성폭력 사건을 '폭력행위', '사실'로 가시화시키는 데 역점을 두면서 여성의 특수한 맥락과 경험을 소홀히 하게 된다. 피해 여성의 다양한 목소리의 의미를 해석하기보다 다음 단계인 치유와 회복, 법적절차에서의 한계와 싸우는데 주력한다. 주관적인 피해자의 관점이라서 성폭력을 주장하는 여성을 신뢰할 수 없다는 남성 중심적 지배담론에 대한 부담 때문에 반성폭력운동 측은 본의 아니게 지배담론의 흐름을 비판하면서도 '폭력행위와 그 행위의 결과'를 가시화시키는데 주력한 것이다. 또한 성폭력 고소에 대한 지배권력 측의 명예훼손, 역고소 등의 반격은 반성폭력운동단체로 하여금 더더욱 성폭력이 성관계가 아닌 '강간/성폭력'임을 입증하게 만들었다. 왜 그것이 여성에게 성폭력일수밖에 없는가를 분석하여 성폭력이 구성된다는 것을 보이기보다, 그 사실(fact)의 존재함을 강조(증명)해야만 했다.

....특히 강간을 성관계로 만들 수 있는 남성권력 앞에서 폭력으로서의 성폭력 문제를 제기하는 페미니스트들은 여성주체를 '투명하게' 만들수밖에 없었다. 남성의 공격으로서의 폭력을 강조하기 위해서는 폭력의 대상을 무력하게 만들수록 그 효과는 커진다.....따라서 반성폭력 운동이 전제한 여성은 동질적인 피해자 여성이었다.

 

...모든 여성이 잠재적 피해자로 구성된다. 그래서 성적 쾌락을 추구한 여성은 피해자일수 없으며 피해여성은 성적주체일수 없는 이분화된 논리속에 여성들은 갇히게 된다.

 

...성적자기결정권을 주장하는 자유주의 이론에서의 강간에 대한 설명은..여성을 개인으로 간주하여 그녀의 성관계 안할 권리를 부정했다는 데에 있다. ....이것은 성별권력을 인정하지 않으며 개별적인 인간으로서의 남녀는 자연적인 성 역할을 부여받은 자율적인 존재라고 가정하는 지배담론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자유주의적 법 담론은 강간과 성관계의 구분을 '동의'의 문제로 놓고 몸의 결정권에 의미를 부여하는 듯 하나 여성과 남성의 관계, 특히 섹슈얼리티와 성별 권력의 문제를 간과했다는 비판을 면하기 어렵다. 동의의 문제로만 판단할 수 없는, 여성의 특수한 맥락적인 요소를 전혀 간주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결과 성폭력/강간은 몰성적인 개인간의 권리 침해의 문제로 환원된다.

 

....여성의 삶의 맥락에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특별히 거부할 필요가 없는 상대방의 성적 요구에 대해 셔성들은 다양한 의미로서 그 행위를 정당화한다. 그러나 다른 계기로 인해 그 관계의 변화가 생겼을 때 그동안 참았던 여러 행위에 성폭력이라는 의미를 부여하기도 한다. 관계안의 고통을 언어화하는 순간이다. 이처럼 여성들이 성폭력을 말하는 경우는 여성의 맥락에 따라 다르다. 또한 그 의미도 다를 수 있다.

 

....여성들이 성폭력을 문제화하는 것은 자율적이며 관계적인 여성됨, 성적인 통합성, 자존감의 침해를 언어화하는 것이다. 성별화된 관습에 의한 불편한/소통되지 않는/대상화된 느낌을 설명하려는 것이다. 그런데 자존감 침해는 없어진 것을 발견할 때의 느낌처럼 즉각적으로 오는 것이 아니다. 여성에게 부착된/여성이 소유한 섹슈얼리티를 도둑질한 것, 그 결과가 성폭력의 피해가 아니다. 피해란 성별, 나이, 경제적인 요소 등과 어린 시절의 성교육, 성규범, 여성에 대한 가치 등으로 구성되는 주체가 그 행위의 지속여부, 그 남자와의 관계, 그 행위로 인한 수혜여부 등의 현재의 조건을 협상해서 구성하는 느낌이기 때문이다.

 

....성폭력이 여성들에게 큰 피해/트라우마를 가져준다는 전제는 그렇지 않은 여성들에게 자신의 경험이 성폭력인가 아닌가의 질문을 가져오게 한다. 그것과는 다른 경험을 하는 여성들이 자신의 경험을 말할 수 있는 기회가 박탈되면서 모든 성폭력 경험자는 피해자화된다...이것은 결국 성폭력의 이미지를 고정시키고 심각한 죽음과 같은 고통과 피해를 강조하면서, 여성의 입장에서 고통의 피해가 없거나 쾌락이 존재하거나 아직도 상대방을 사랑하거나 등등 '성관계 같아 보이는' 성폭력은 성폭력으로 문제화하기에 어렵게 했다....그러나 성폭력을 말하는 여성들은 이렇게 단일한 피해자가 아니며 고통받는 피해자로서만 살아가지 않는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어떤 행위성(자율성, 선택, 권력, 공모, 협상, 저항 등)도 불가능하다고 주장하기보다 오히려 성적 위계의 맥락에 다양한 여성의 행위성을 새롭게 위치시키는 것을 고려할 수 있다. 여성의 제한된 위치와 조건 안에서 어떤 것을 선택하는 것이 자유롭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성의 위치가 어떤 선택도 불가능하게 할 정도로 그렇게 한계적이거나 제한적이지는 않다. 물론 여성 행위성의 인정이나 다양한 맥락의 제시가 여성의 고통을 드러내는데 역효과라고 말할 수 있다. 고통이 적은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까지 인정되지 않는, 다양한 방식으로 말해지는 여성의 고통과 그 고통에 대한 그 관계 내의 여성의 저항방식인 공모, 협상 때로는 무시 등의 행위성은 역의 개념이 아니다.

 

...인식주체로서의 여성이 자신의 경험을 어떻게 해석하고 있는지를 드러내며 여성이 그렇게 해석하는 판단의 기준을 드러낼 때, 남성에 의해 재현되는 하나의 여성성이 아닌 여성 주체성의 다양한 고통들이 드러날 것이며 이는 성폭력 개념을 다시 구성할 수 있게 한다.

 

....이 지점에 성폭력 피해 개념의 어려움이 있다. 여성들이 남성들의 요구에 투명하게, 행위하지 않고, 수동적으로 위치하고 있다면 반성폭력 운동은 정말로 쉬울 것이다.

 

 

 변혜정(2004), "성폭력 개념에 대한 비판적 성찰"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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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주의 여성'과 연애(1)

마감에 맞추어 허겁지겁 쓰기도 했고....여러가지로 부족한 글이지만...

내놓음으로써 비판받고 더 좋은 고민들을 하게 되겠지....^^

분량이 많아서 조금 나누어서 올려볼까 합니다.

지금 올리는 글은 문제제기 및 기존 논의 검토, 허정숙에 대한 소개, 연애스토리이고

이후에 이어지는 내용들은 섹슈얼리티에 관한 입장들, '사회주의 여성'의 연애가 이야기되는 방식, 범주화와 경계의 문제..

대략 소개하자면 그렇습니다. '계속보기'를 누르세요-

 

 

들어가며

 

   제일 처음 내가 ‘사회주의 여성’이라는 주제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막연한 호기심이었다. 신여성에 대한 책을 읽게 되면서, 이름조차 몰랐던 조선의 ‘사회주의 여성’들을 하나, 둘 알게 되었던 것이다. 최근에 이르러 신여성에 대한 연구가 비교적 많이 진행되고 있지만, 소위 ‘사회주의 여성’으로 분류되는 이들에 대한 연구는 그리 많지 않은 상황이다. 사회주의가 당시 일제 식민지 시대와 조선의 근대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하나의 흐름임에도, 실제로 그것을 실천했다고 불리는 이들, 특히 여성들에 대한 연구는 거의 전무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나는 가시화되어 있지 않은 ‘사회주의 여성’들이 누구인지, 어떤 삶을 살았는지 궁금했던 것 같다. 물론 거기에는 그 여성들을 ‘가시화’시킴으로써 내가 현재 얻고자 하는 욕구가 분명히 개입되어 있었던 점을 부인 할 수 없다. 지금까지 허정숙을 비롯한 ‘사회주의 여성’들에 대한 연구 흐름들 정리해보면, 처음에는 남성 중심의 역사 서술에서 주로 곁다리로, 보조적인 역할로 등장하였다. 예를 들어 허정숙이 활동했던 근우회의 경우 남성들이 중심이 되었던 신간회의 여성단체격으로 설명되었다. 이러한 설명 속에서 여성들은 그 자신의 활동보다는 ‘누구누구의 처’로, 예를 들어 주세죽의 경우 독립적인 존재이기보다는 박헌영의 아내로 유명한 식이었다. 물론 이런 점들을 비판하며 ‘여성들’ 자체에 주목한 연구들도 있다. 특히, 허정숙의 경우 그나마 잘 알려진 여성이라 연구들이 비교적 많은 편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허정숙이라는 인물을 소개하는 데 그치거나(서형실 1992,신영숙 2006), 조금 더 깊이 들어간 경우에도 주로 공식적인 활동, 사회주의 단체 활동(송진희 2004)에 초점을 맞춘다.

  내가 많은 ‘사회주의 여성’들, 그 중에서도 허정숙에게 관심을 갖게 된 것은 그녀의 ‘화려한’ 연애경력 때문이었다. 허정숙은 ‘조선의 콜론타이’로 불리며, 상대적으로 다른 여성들에 비해 잘 알려져 있는 인물일 뿐만 아니라, 특히 그녀에게 네 명의 남자애인이 있었던 까닭에, 붉은 연애의 실천으로 연애스캔들로 유명했다. 뿐만 아니라 그녀는 북한으로 간 이후에는 고위급 인사가 되기도 했다. 이런 측면에서 허정숙은 주목과 비난을 동시에 받는 논란이 되는 인물이었다. 나는 허정숙에 대해 알게 되면서, 허정숙의 연애에 대한 생각이 무엇이었는지, 또한 그런 생각들이 당시의 조선에서 어떻게 받아들여졌는지, 그 과정에서 어떤 갈등과 마찰이 있었는지를 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기존 연구에서 허정숙의 연애경험은 ‘화려한’ 것으로 묘사되지만, 그 자체로 의미를 갖지 않았다. 그녀의 연애는 “여성운동가로서 그녀에 대한 평가가 그것과(연애경력) 무관할 수는 없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이 점을 부각하거나 혹은 그 반대로 무시할 필요는 없는” 정도로 언급되거나, “너무 독특해 그의 활동을 여성운동가의 전형적인 활동 모델로 받아들이기는 힘들 것”(서형실 1992: 287), 혹은 “사상적 방황을 반영하는 것”(박석분 1994: 139)이라는 부정적인 평가가 있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 그 연애 경험은 “사회주의 여성해방론”에 입각하여(신영숙 2006) “붉은 연애를 실천했던”(최혜실 2006) 것으로 평가되기도 했고, 이와 같이 모순되는 평가들이 허정숙을 따라다녔다. 

  한편, ‘사회주의 여성’과 연애에 대한 연구 경향은 주로 콜론타이즘과 붉은 연애에 관련된 것이 많았다. 이들은 콜론타이의 『삼대의 사랑』,『붉은 사랑』과 같은 소설로부터 촉발된 논의를 소개하거나(이태숙 2006, 서정자 2004, 김경일 2005 외), 특히 연애사조의 변화와 함께 엘렌 케이로 대표되는 ‘자유주의’ 연애사상과 대립되는 지점 속에서 논의하였다. (김경일 2004, 홍창수 2004)

  이렇게 허정숙에 관한 자료를 찾고 그녀의 삶의 단편들을 하나하나 읽게 되면서 나는 점점 더 혼란스러워졌다. ‘붉은 연애’를 실천했다고 말해지는 실제 인물들의 삶은 어땠을까? 그것은 ‘자유연애’와는 어떻게 달랐나? 허정숙이 보수적인 담론과 남성적 시선 속에서도 ‘조선의 콜론타이’로 기억될 수 있었던 까닭은 무엇일까? 그녀를 설명하기 위해 붙은 ‘사회주의’는 어떤 의미를 갖고 있었던 것일까? 김미지(2004)의 글은 ‘여성 사회주의자’와 연애라는 문제를 보다 집중적으로 다루면서, 내가 제기한 의문들에 ‘사회주의의 시대’였기 때문이라는 간단한 답을 내리고 있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어떻게 이와 같은 것들이 가능했는지, 다른 여성들과의 공통점 혹은 차이점은 무엇이었는지 잘 드러나 있지 않다.

  나는 특히 관심을 가졌던 허정숙의 삶을 통해 ‘사회주의 여성’과 연애의 문제를 다루어 보고 싶다. 허정숙에게 연애는 어떤 의미였을까? 그녀는 세간의 말대로 정말 붉은 연애를 실천한 것인가? 그녀의 연애는 당대에 어떻게 받아들여진 것일까? 허정숙의 연애와 나혜석의 연애는 어떻게 같았고 또 어떻게 달랐기에? 개인의 삶을 들여다보는 것은 '독립투사화' 되어 있는 허정숙이란 여성이 갖고 있었던 균열과 갈등들을 보는 기회가 되었다. 또한 다른 남성들과 함께 아무런 의심도 없이 ‘사회주의자’로 분류되는 것에, 그리고 그 반대편에 ‘자유주의’ 혹은 ‘급진주의’ 여성이 대립되고 있는 것에 대해 의문을 갖게 되었다. 과연 연애를 둘러싼 사회적 담론 속에서 ‘사회주의’와 같은 경계는 어떻게 움직이는 것일까? 만약 그렇게 경계를 짓는다면 그것은 누가 경계를 만드는 것인가? 결론적으로 나는 허정숙의 연애를 통해 일반적으로 많이 통용되는 신여성에 대한 범주화에 대해 문제제기를 할 것이다. 그리고 허정숙에게 ‘사회주의’ 여성이라는 이름을 붙일 때 발생하는 정치적 효과가 무엇인지, 범주화의 욕구가 무엇인지 드러낼 수 있을 것이다.

  


 


 

허정숙의 삶의 궤적1)

  허정숙은 1903년 함경북도 명천에서 태어났다. 자료에 따라 1902년, 1903년, 1906년, 1908년 등으로 출생연도조차 정확하지는 않은데, 북한으로 간 이후에 40대 중반의 나이가 주는 이미지를 탈피하기 위해 출생연도를 늦추었을 것이라는 해석도 있다. (송진희 2004:3) 허정숙의 아버지 허헌은 변호사로 활동하면서 다양한 사상가들과 항일 운동가들의 재판을 변호하였다. 그의 아버지는 딸을 나라의 인재로 키우겠다는 기대를 갖고 있었고, 이런 덕분에 허정숙은 배화여고보를 졸업 한 후에 일본으로 유학을 갔다. 그러나 보수적이었던 아버지가 택한 관서학원은 수녀원 같이 엄격한 규율로 유명한 곳이었고, 그런 학교생활에 적응하지 못한 허정숙은 3.1 운동 이후 귀국하였다. 그리고 배화여고보 시절 자신의 스승이었던 차미리사의 권유로 당시 기독교 계열의 여성들이 만든 ‘조선여자교육협회’에서 활동하였다. 여기에서 그는 교육의 필요성을 강조하였고, 그 자신도 배움의 욕구를 느꼈는지 1921년 중국 상해로 유학을 떠난다.

  중국유학 길에서 그녀는 첫 남편인 임원근을 만난다. 그리고 임원근을 비롯하여 박헌영, 주세죽, 그리고 김단야 등의 활동가들과 만나고 사회주의 서적들을 접하게 된다. 임원근과 허정숙은 사랑하는 사이가 되고, 부친에게도 이 사실을 알렸다 한다. 1924년 귀국한 허정숙은 임원근과 결혼했으며, 1924년 말 첫 아들 표(일명 경한)를 출산한다. 이후 허정숙은 ‘신사상 연구회’(후의 화요회)를 거쳐 1924년 5월 창립된 ‘조선여성동우회’에 참가하였다. 또한 당시 허정숙은 남편 임원근과 함께 동아일보의 최초의 여기자로 입사하여 활동하였다. 그러던 와중 일명 신의주 사건으로 1925년 11월 조선공산당이 세상에 폭로되면서 임원근과 함께 검거되고, 허정숙은 곧 풀려났으나 임원근은 감옥에서 형을 살게 된다.

  이 때, 허정숙은 북풍회에서 활동하던 송봉우를 만나게 되고 세간에는 그들의 동거설이 떠돈다. 허정숙에게는 둘째 아들 길한이 있었다. 그녀를 비방하는 여론에 지친 상태에서, 결국 아버지와 함께 미국으로 유학을 떠난다. 1년 반의 유학을 마치고 1927년 말 귀국한 그녀는 근우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했고, 1930년에 일어난 경성 제 2차 학생시위에 가담하면서 감옥에 수감된다. 이후 감옥에서 배운 의학지식을 활용해 태양광선 치료소라는 병원을 경영하기도 했다. 송봉우와의 동거는 미국유학을 갔다 온 직후까지 계속되다가, 송봉우가 공산당 사건으로 체포된 이후 전향하자 관계를 끊어버린 것으로 알려진다. 그리고 세 번째로 만난 이가『조선일보』기자이자 사회평론가 신일용이며, 셋째 아들 영한은 이와의 관계에서 태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허정숙은 1930년대 중반부터 국내에서 활동하는 것이 어려운 조건이 되자, 훗날 연안파의 거두가 되는 최창익과 함께 중국으로 향한다. 중국에서 조선독립동맥과 화북조선청년혁명학교 등에서 활동했던 허정숙은 해방 이후 북으로 가서 활동하였으며, 이때에는 이미 최창익과의 연애가 끝난 상태였다. 최창익은 1946년 북에 가서 곧 결혼을 하였는데, 허정숙이 결혼식장에서 축사를 읽어주는 관계였다고 한다. 1957년 최창익이 연안파와 관련된 종파사건으로 숙청되었으나 북에서 허정숙은 줄곧 친김일성계로 있으면서 문화선전부장, 민주여성동맹 부위원장 등을 역임하며 1991년 아흔 살이 넘은 나이로 그의 생을 마감하였다.


허정숙의 연애를 들여다보기

-송봉우와의 연애를 중심으로


연애의 시대

  허정숙의 연애를 본격적으로 들여다보기 전에, 당시 1920-30년대 조선사회의 시대적 배경을 먼저 알 필요가 있다. 이 시기는 ‘연애의 시대’라고 부를 수 있을 정도로, ‘연애’가 본격화되고 유행하였다. 사실 연애는 초기에는 ‘love’와 같은 외국단어를 번역하기 위해 계발된 단어였다. 그러나 조선에 들어오면서 ‘연애’라는 단어는 다양한 관계의 사랑 중에 남녀 사이의 사랑만을 번역했다. 이와 함께 오랫동안 우리말에서 ‘생각하다’라는 뜻을 갖고 있었던 단어 ‘사랑’ 역시 남녀 간의 감정으로 의미변화를 겪는다. 그런 면에서 연애는 근대에 이르러 새롭게 등장한 상품 중 하나라 할 수 있다. 1920년대에서부터 본격화되기 시작한 연애라는 신상품은 등장하자마자 무서운 기세로 팔려나가며 “사랑 없이는 살 수 없다”와 같은 언설들을 낳았다. (권보드래 2003) 특히 당시의 다양한 매체의 대중화는 연애를 대중적인 현상으로, 유행으로 만들었다. 1920년대 소위 ‘문화통치’의 시대로 접어들면서, 조선사회에는 신문과 잡지의 창간이 폭발적으로 늘어났고, 교육을 통해 일정한 독자층과 필자 층이 형성되게 되었다. 이 시기에 조선의 담론 장에는 신여자, 신여성이라는 용어가 등장했으며, 특히『신여성』을 비롯한 여성잡지는 신여성 담론을 생산하는 장이 되었다. (김수진 2006) 그리고 여기에서 신여성과 연애, 결혼, 섹슈얼리티의 문제가 공식적인 지면을 통해 논의되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당시 허정숙의 연애는 어떻게 알려졌을까? 송봉우와의 연애를 중심으로 살펴보자.


조선공산당 내분의 주동자로 지목되다

  허정숙은 1926년 봄 둘째 아들 길한을 출산한 후, 1926년 12월 제 2차 조선공산당 대회에서 허정숙과 송봉우의 교제사실은 매우 민감한 사안이 된다. 당시 조선공산당을 주도했던 화요계는 북풍회를 포섭하려다가 실패하게 된다. 허정숙은 화요계, 송봉우는 북풍회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조선공산당에서는 북풍회원인 송봉우가 당의 정보를 얻기 위해 허정숙에게 의도적으로 접근했다고 규정하고, 이 둘을 조선공산당을 내분으로 빠지게 한 반역행위의 장본인으로 지목했다는 점이다. 2차 조선공산당을 주도했던 화요회계의 책임자였던 강달영은 코민테른에 이들의 관계까지도 모두 보고하였다고 한다.2) 더군다나 허정숙의 남편인 임원근은 제 1차 조선공산당 사건으로 구속되어 감옥에 수감 중이었다.

  당시 아버지 허헌은 사위인 임원근을 비롯한 제 1차 조선공산당 사건으로 수감된 이들의 변론을 맡고 있었는데, 이 일로 상당한 심적 충격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의 집에는 온후하든 아버지 허헌을 비롯하여 싸늘하고 떼리케잇트한 공기가 떠도는 것을 엇절길이 업섯다.”3) 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미국으로 떠나는 허정숙

  그리고 1년이 채 되지 않아 허정숙은 아버지 허헌과 함께 1926년 5월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게 된다. 그녀는 무엇 때문에 조선 땅을 떠났을까? 신문기사의 제목처럼 서양 시찰, 세계일주여행을 떠난 것일까? 당시 신문에는 “그동안 세상에 여론이 많고 여러 가지 변동이 많았던 (허정숙) 여사는 모든 것을 다 돌아보지 아니하고 사랑하는 아들을 어머니에게 맡기고 본연히 삼십일에 경성역을 떠나게 되었다고 합니다.”4)라고 보도를 전하고 있다. 그러나 이 대목에서 당시 세상의 여론이 그녀에게 결코 호의적이지 않았음을 추측해볼 수가 있다.

  그렇다면 허정숙 스스로는 이러한 상황에 대해 어떻게 말했을까? 당시 그녀가 쓴 글에는 직접적으로 여기에 대한 언급을 하고 있지 않다.


“우연한 일기회로 위대한 포부나 아름다운 동경을 가짐도 없이 기계적도 아니오 의식적도 아인 먼 길을 떠난거시였슴다. 더욱이 내가 본국을 떠나던 때는 본국의 사회는 내외의 큰 타격으로 동요상태에 잇섯고 일본에 잇는 우리 사회에는 상애회의 무리한 습격으로 대혼란상태에 잇는 때이엿슴니다. 이러한 환경에서 떠나가는 나의게는 양행의 깃븜이나 외국유람의 즐거움이라는 거슨 업섯슴니다. 그저 돌(석)에 마즌 듯 한 묵어운 머리와 수습할 수 업는 혼탁한 정신을 가지고 여정에 올은 거시엿슴니다.”5)


  물론 이 북미 인상기는 허정숙이 발달된 자본주의인 미국을 시찰하면서 느낀 바들에 대한 비판적 감상들이 대부분이다. (우미영 2004) 여기에서 그녀는 자신이 유학을 간 당시 상황에 대해서도 ‘조선의 동요상태’라고 말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렇게 명망 있던 여성운동가가 ‘우연한 기회에’ ‘위대한 포부도 없이’ 미국행을 택했다 말하면서 ‘돌에 맞은 듯 한 무거운 머리’라 표현할 정도라는 것은 또 다른 근심이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목은 아닐까. 그리고 그 근심이란 송봉우와의 연애설로 인해 비롯된 비난의 여론이었을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 또, 그녀가 1926년 10월 미국 콜롬비아 대학으로 유학하면서 서울로 보낸 편지6)에서도 “먼 곳으로 오고 보니 무엇이나 답답한 생각뿐입니다. 난마 같이 흐트러진 정신을 수습하려 여기까지 와서 애쓰나 용이히 수습되지 않고 오히려 더 복잡하여집니다.”라고 밝히고 있어, 미국으로 유학을 간 목적이 도피적인 성격이 짙음을 간접적으로 볼 수가 있다.


세상의 주목, 계속되는 논란

  한편, 허정숙이 떠나고 언론에는 허정숙의 남편이었던 임원근이 “옥중기”7)라는 제목으로 자신의 감옥생활을 회고하는 글을 싣기도 했다. 여기에서 임원근은 “사랑의 결정체인 귀엽은 아들 『표』를 안아 주고” 싶지만 “모든 것은 환상이엇다.”고 밝히고 있다. 왜냐하면 허정숙은 당시 미국으로 떠났고 아들은 조선에 남겨져 이별했기 때문이었다.


만날 때 감정으론 한 평생 이별이란 모를 너니 호사한 건 사람 마암 엇지엇지 하노라다 그대와의 구든 맹서 모도 다 일케 됏네. 만날 때 감정으론 한 평생 이별이란 모를너니 사랑으로 맛낫던 님 사랑 식어 사라지니 낡은 도덕과 거즛 형식 두 사람을 매여둘 힘이 업서 감각 업는 손길가치 스르르 푸너젓네.


  이와 같이 임원근은 자신의 심경을 담은 시를 글 속에 남기기도 했다. 아내가 떠난 임원근의 심경글이 당시 잡지에 실렸다는 것은, 세간에서 허정숙, 임원근, 송봉우의 이야기가 이미 잘 알려진 것이며, 이들에 대한 관심도 지속되었다는 점을 알 수가 있다. 

   1년 뒤에 ‘정신상의 모든 실겅키를 청산하고 새사람이 되어 귀국’8) 하였다고 말해지는 허정숙은 송봉우와의 관계를 지속한다.


허정숙씨와 송봉우군과의 관계는 이미 세상이 잘 아는 터이니 이제 새삼스럽게 다시 말할 필요가 업지만은 최근의 새 소식을 드르면 송씨는 아주 공연하게 허씨의 집에 드러가 동거를 한다고 한다. 수박 것 할는 격으로 서로 떠러져 허송세월(許宋歲月)을 하는 것보다는 증거품의 아들까지 있스니.9)


  이 색상자의 성격이 주로 사실 확인되지 않은 소문을 재미거리로 이야기하는 성격이 있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10), 이 기사는 그들의 연애에 대한 세상의 곱지 않은 시선이 귀국 후에도 여전히 지속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하는 일 없이 세월만 헛되이 보낸다는 뜻의 허송세월(虛送歲月)을 허송세월(許宋歲月, 허씨와 송씨가 달을 센다, 몰래 만난다)라고 바꿔씀으로써 그들이 공공연하게 동거함을 비꼬고 있다. 1925년 11월에 임원근이 체포되었고, 1926년 12월 송봉우와의 스캔들이 터졌고, 그 사이에 1926년 봄 둘째 아들 길한이 태어났으니, 누구의 자식인가를 확실하게 말할 수는 없겠지만 색상자는 ‘증거품인 아들’까지 낳았다며 이들의 관계를 공식적인 것으로 만들었다.   

 

 


1) 송진희 2004, 박석분 외 1994, 서형실 1992, 신영숙 2006, 홍정자 1994, 허근욱 1994 참고.

2) 서대숙 1985:82

3) 초사, “현대여류사상가들(3) 붉은 연애의 주인공들”, 『삼천리』, 제17호, 1931년 7월 1일.

4) “허정숙 여사 아버지 허헌을 따라 서양관광, 시찰, 수학여행을 떠남”,『동아일보』1926년 5월 30일.

5) 허정숙, “울 줄 아는 인형의 여자국, 북미 인상기”,『별건곤』제 10호, 1927년 12월 10일.

6) 박석분 1994:139에서 재인용

7) 임원근, “옥중기 (2)”,『삼천리』, 제9호, 1930년 10월 1일.

8) 초사, “현대여류사상가들(3) 붉은 연애의 주인공들”, 『삼천리』 제17호, 1931년 7월 1일.

9) “색상자”, 『신여성』 7권 8호, 1933년 8월

10) 연구공간 수유+너머 근대매체연구팀, 2005: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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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우스 키퍼 제도

요즈음 글쓰기 위해

1920-30년대 사회주의와 붉은 연애에 대한 자료들을 뒤적이는 중.

 

 

예전에 경성 트로이카를 보면서 궁금했었는데

언제 한번 '하우스 키퍼' 제도에 대해 자세히 연구하고 싶다.

 

 

..

게니아식 사랑은 소비에트 러시아에서조차 '물 한잔 마시는 것처럼 성을 가볍게 여긴다'고 비난을 받았는데, 일본과 식민지 조선에서는 '하우스 키퍼'제도와 겹치면서 일제가 당시 사회주의 여성 활동가들을 대중으로부터 격리시키는 가장 큰 무기가 되었다.

..

하우스 키퍼란 일본에서 심한 탄압을 받았던 공산당이 권력과 감시의 눈을 피하고 속이기 위해서 여성당원으로 하여금 아지트를 관리하게 한 제도 혹은 풍습을 가리킨다. 통상 당 상층 간부에게 젊은 여성당원이 짝지워진다. 그녀는 레포(운동원)나 아지트 유지, 문서의 관리 등을 맡고 세간에서 격리된 생활을 강요받는다. 게다가 당에의 '충성심'을 악용하여 '성적 봉사'까지 강요받는 경우도 있었다.

..

이순금이나 이경선 그리고 박진홍 같은 여성들은 1930년대 초 학생운동을 거쳐 혁명적 노동조합 운동과 당 재건 운동에 투신하고 일제 말까지 운동에 헌신했다. 그런데 이순금과 박진홍은 이재유를 사이에 둔 삼각 관계로 저널리즘에서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지하 운동에 몸담고 있던 이들 여성활동가들의 사상이나 내면의 성장을 읽을 수 있는 기록은 거의 없다. 이들은 직접글을 쓰지 않았다. 운동선상의 많은 지식인 남성들이 운동을 하면서 글도 쓴데 반해, 여성들은 '하우스 키퍼'로 활동하는 경우가 많았다.

...

일제의 검거를 피해 지하에서 오랫동안 활동한 이재유는 1933년 이순금과 동거하다가 1934년 1월 이순금이 체호된 후 1934년 8월부터는 박진홍과 검거하면서 일제의 검거를 피했다. 박진홍이 검거된 뒤에 이재유는 유순희와도 동거했다고 한다. 박진홍은 1935년 1월 체포되었고 옥중에서 이재유와의 관계에서 임신한 아기를 출산한 뒤 친정어머니에게 맡겼다. 이런 박진홍의 특별한 처지에 대해 당시 신문은 선정적인 투로 보도했다. 이순금과 박진홍은 감옥에서 마주쳤고 이재유와의 관계 때문에 약간의 갈등도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이재유가 1936년 12월 체포된 후, 일제의 조사를 받으면서 대중들의 신망을 잃을것을 두려워하여 이순금이나 박진홍과의 연애관계를 부인하자 '연적'관계였던 두 여성은 이재유의 반여성적 태도에 대해서는 함께 비판적 자세를 취했다고 한다. 이순금은 1937년 5월에 박진홍은 7월에 석방되어 나온 뒤, 이재유와의 관계를 청산하고자 노력했다. 이순금이 새로운 사람을 만나 결혼을 하면 박진홍도 이재유와의 관계를 정리할 수 있다는 것, 이순금이 결혼을 하게 되면 이순금의 결혼 지참금을 운동 자금으로 쓸 수 있다는 것, 두 가지 이유로 박진홍은 적극적으로 이순금의 중매에 나섰고 이순금이 약혼까지 했으나 모두 다시 검거되고 만다.

 

-이상경(2004) "1930년대의 신여성과 여성작가의 계보연구" 중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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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장이여 잘 있거라

 

Ruth Milkman(1997), Farewell to the Factory,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이종인 옮김,『공장이여 잘 있거라』, 황금가지, 1998

 

 루스 밀크만의『공장이여 잘 있거라』

-방법론적 검토를 중심으로 


 Ruth Milkman에 대하여

  루스 밀크만의 책은『젠더와 노동』이후 두 번째로 읽는 것이다. 산업관계와 노동연구자인 루스 밀크만은  젠더 사회학을 연구하고, ‘사회주의’를 곧잘 이론적 틀로서 사용하는 진보적 성향의 학자이다. 그녀는 ‘새로운 노동사’(new labor history)의 대표적인 학자로 거론되며, 신좌파(new left)로 분류되기도 한다. 자료를 검색하다가 나는 ‘Organizing the Unorganizable'3)이라는 글을 읽을 수 있었는데, 미국으로 온 이주노동자들의 관점에서 조직화와 노동운동의 부흥을 조망한 글이었다. 이러한 정치적 성향을 갖고 있는 그녀가 쓴『공장이여 잘 있거라』는 상당한 논란을 일으킬 만한 결과를 보여주고 있다.


 


 3) Ruth Milkman(2006), "Organizing the Unorganizable : The Unlikely Spark for a Rebirth of Labor", L,A Story: Immigrant Workers and the Future of the U.S Labor History, New York: Russel Sage Foundation, 2006, 오민규 번역, “조직화가 불가능해보였던 대중들을 조직하기 : 거의 불가능해보였던 ‘노동의 부활’을 알리는 신호탄”, 월간『비정규노동』, 2007년 1월호

 



 

자동차 산업의 구조조정과 노동자들

 『공장이여 잘 있거라』는 1980년대 이후 불어 닥친 미국 자동차산업의 구조조정을 뉴저지 주의 GM-린든 공장을 통해 분석하고 있다. 그녀는 “노동자들의 관점에서”(Milkman 1997:14) 구조조정과 명예퇴직이라는 상황을 보고자 했다. 10년의 연구를 통해 그녀는 노동자들을 크게 두 부류-명예퇴직자와 잔류자-로 나누어 비교 분석한다.

  기존의 연구들은 탈산업화가 노동자들에게 미치는 부정적인 영향들을 주로 다루어왔다. 책을 읽으면서 나는 영화 ‘로저와 나’를 떠올려 보았다. ‘로저와 나’는 미국의 진보적 다큐멘터리 감독인 마이클 무어의 1989년 작품이다. 마이클 무어는 자신의 고향인 미시간 주의 플린트 시의 GM이 11개의 공장을 폐쇄 결정하여, 어떻게 한 도시가 완전히 파산 상태가 되는지를 담아낸다. 지금까지 주로 접해왔던 탈산업화 혹은 구조조정에 대한 연구들과 그에 대한 이미지들은 마치 ‘로저와 나’에서 보여주는 것과 거의 동일하다. 실제로 우리나라에서도 90년대 말 구조조정 시기에 노동자들의 극심한 반대투쟁이 있기도 했었다. 그래서 탈산업화와 명예퇴직이 노동자들을 주변화시키고, 노동자들의 소외와 불안을 가중시킨다고 생각해온 것이 지배적이다.

   그런데 루스 밀크만은 자신이 직접 노동자들을 만나고 인터뷰해본 결과, 이와 같은 일방적인 가설들에 문제가 있음을 깨닫게 된다. 오히려 그녀가 관찰한 결과들은 기존의 가설들을 완전히 뒤집을 만한 것이었다. 노동자들은 공장을 떠난 것을 행복하게 생각했던 것이다. 그들은 자발적으로 명예퇴직을 선택해서 “공장이여 잘 있거라”를 외치며 떠나갔다. 남아있는 노동자들(잔류자들)은 일본식 ‘다품종 소량방식’을 모방한 적기체제의 도입과 노동자 참여라는 새로운 회사 정책을 기대하고 있었으나 결과적으로 이는 제대로 시행되지 않았고, 그들의 불만은 지속되고 있었다.


왜 노동자들은 “공장이여 잘 있거라”를 외쳤는가

  그렇다면 왜 이 노동자들은 자신의 일자리를 떠나는 것을 행복으로 느꼈는가? 공장폐쇄가 노동자들에게는 축복이었다고? 탈산업화는 노동자들에게 불행이 아닌 행복을 가져다주었단 말인가? 이것이야말로 지배적인 자본가들의 논리가 아닌가? 이런 식으로 이어질 수 있는 밀크만의 관찰 결과에 적지 않은 미국의 좌파 지식인 혹은 사회주의자들을 당황시켰다. 밀크만은 이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이러한 역설적 발견사항에 대한 해명의 실마리는 조사연구방법론에 있는 것이 아니라 특정 집단의 노동자들에게서 찾아야 한다.”(Milkman 1997:243) 즉, 밀크만이 보고 들은 것들이 잘못되었다, 아니다로 접근할 문제가 아니라 왜 이런 결과가 나왔는지, 노동자의 관점에서 다시 들여다 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녀가 보기에 “조립라인의 일이 일부 좌파 지식인들에게는 매혹적일지 몰라도 노동자 자신은 결코 그것을 낭만적인 일로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자신은 무자비하게 비인간적인 작업 리듬으로부터 도망치기를 간절히 소망했다.” (Milkman 1997:32) 즉, 노동자들에게 GM공장에서 일을 하는 것은 두 가지 측면을 갖고 있었다. 높은 임금과 훌륭한 사내 복지 시스템은 노동자들에게 경제적 안정을 가져다주었지만, 한편으로 끊임없이 소외감을 불러일으키는 노동현장과 권위주의적 감독 시스템은 노동자들을 억압하고 있었던 것이다. 노동자들은 공장과 조립라인의 처참함을 ‘노동공장’ ‘포로수용소’ ‘노예집합소’ ‘강제수용소’로 (Milkman 1997:80) 표현할 정도로 공장을 벗어나고 싶었던 것이다. 그리고 명예퇴직을 선택한 노동자들은 전자를 포기하면서 까지도 후자를 벗어나고 싶어했다. 이것은 포기한 것보다 선택하는 것이 가져다주는 만족이 더 크다는 점에서 일종의 ‘기회비용’인 셈이다. 따라서 노동자들은 ‘자발적’으로 ‘자신의 결단’으로 명예퇴직을 선택했다.

   물론 밀크만은 자신이 관찰한 이런 결과들을 결코 ‘일반론’으로 만들어버리지는 않는다. 아니, 밀크만은 오히려 이렇게 말한다. “탈산업화가 오히려 긍정적이라고 말해버리는 것은 잘못된 결론일 수 있다.”(Milkman 1997:244) 다만, “명예퇴직자들의 경험은 ‘어떤 조건’ 아래에서는 산업분야에서 다른 분야로 옮겨가는 것이 비교적 고통도 없고 때로는 이득이 되기도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Milkman 1997:174, 강조는 본인) 즉, GM-린든 노동자들의 이러한 반응을 고려할 때는 당시 현지의 상황과 명퇴를 받아들인 대부분의 노동자들이 연공이 낮으며 비교적 쉽게 새로운 일자리를 구할 수 있는 젊은 노동자들이었다는 점을 반드시 고려해야만 한다. 그리고 이러한 ‘특수한 조건’ 과 ‘전제’ 없이, 밀크만의 관찰결과를 ‘어떤 상황에서든’ 통하는 진실로 만들어버리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고 저자 스스로 밝히고 있는 것이다.


무엇을 보고 무엇을 말할 것인가

  밀크만의 작업들은 나에게 ‘무엇을 보고 무엇을 말할 것인가’라는 화두를 던져준다. 유선 ‘무엇을 볼 것인가’의 측면에서 나는 다시 한 번 직접 보고 듣고 느끼는 관찰의 중요성을 깨닫게 된다. 밀크만이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예를 들어 공장 내 팀제 도입에 대해서도 기존의 연구들은 “말단 연구자들이 이런 문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Milkman 1997:35)에 주목하지 않았다. 여기에는 노동자 계급의 의식에 대한 어떤 식의 가정이 미리 전제되어 있는 것일 뿐, 실제로 그 당사자들에 대한 연구는 없었던 것이다. 이런 경험들이 없이 책상에서 만들어내는 지식이란 필연적으로 현실과 괴리되는 것일 수밖에 없다. 

  또, 어떤 연구자들이라고 할지라도 자신의 가치관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문제와 가설을 설정하는 단계에서부터 관찰하고 결과를 도출하기까지의 전체 연구과정에 있어서 실증주의 방법론이 주장하는 것과 같이 ‘주관’을 배제한다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하다. 그러나 그러한 어려움들과 한계들을 인식하고 출발하는 것과 모르고 출발하는 것, 또 알고도 눈감는 것은 완전히 다른 연구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자신의 한계와 자신이 가진 특정한 가치관들을 인식하고 출발하는 사람들은 ‘연구자 본인을’ 거리 두고 객관화해서 성찰할 수 있는 가능성이 생긴다. 그 과정에서 자신도 몰랐던 자신의 오류들을 볼 수 있는 눈이 생기며, 그럼으로써 ‘진실’에 조금은 더 가까워질 수 있다. 그러나 많은 경우에 그러한 한계를 알면서도 눈을 감는다. 물론 다양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정치적인 영향력, 자신이 속한 학파 혹은 지지집단과의 관계에서부터 이전의 자기 자신의 가정을 뒤집어야 한다는 심리적 부담감까지 말이다. 그리하여 방법론 시간에 라카토스 이야기를 했던 것처럼 ‘다른’ 관찰 결과들은 기존의 핵을 더욱 더 강화시켜주는 계기가 되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나  자신이 비록 ‘보고 싶지 않는 현실’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있는 그대로’ 보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 이것은 어떠한 현상을 ‘진공 상태에서’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다는 의미가 아니라, 자신의 이념과 가설을 떠나 다른 각도에서 관찰해 보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만약 밀크만이 보고 들은 것을 눈감았다면 어떤 결과를 낳았을까? 밀크만 역시 연구를 하면서 많은 고민을 했을 것이다. “노동자들이 명예퇴직을 기쁘게 받아들이는 이 현상을 나는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내가 이것을 말했을 때 어떤 사회적 비난이 쏟아질까?” 등등. 그녀가 놀라운 것은 자신이 보고 들은 관찰을 정직하게 받아들인 진심어린 태도이며, 또한 그것을 말할 수 있는 용기이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어떠한 관찰 결과에 대해 ‘옳다 그르다’를 논하는 것이 아니라, ‘왜’ 그런 결과가 나왔는지를 구체적으로 파고들어가는 것이다. 필요한 것은 동일한 상황을 놓고도 다르게 해석할 수 있는 ‘관점’과 겉으로 드러나는 표피 이면을 볼 수 있는 ‘통찰력’이다. 마치 밀크만이 공장을 떠나 행복하게 살아가는 노동자들을 통해, 대공장 노동의 끔찍한 인간소외를 역설적으로 드러낸 것처럼 말이다.


고민지점들

   밀크만의 책을 읽으며 한 가지 궁금했던 점은 여성노동자들의 반응에 대한 좀 더 세밀한 분석이 필요하지 않은가 하는 것이다. 공장을 떠난 것을 후회했던 집단들은 대부분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이었는데, 이들은 노동시장에 재진입하기가 매우 어려운 조건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같은 맥락에 있다고 판단되는 여성노동자들의 경우에 공장을 떠난 것을 후회하는 이들은 별로 없었다. 나는 이 점이 매우 특이하게 느껴졌는데, 밀크만은 이에 대해서 여성노동자들이 “작업장에서 감독자들로부터 더 지독한 대접을 받고 동료 (남성) 노동자들과의 이해부족과도 싸워야 했기 때문”에 “남성보다 훨씬 더 심각하게 GM에 환멸을 느꼈기 때문일 것”이라고  (Milkman 1997:241)라고 서술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 대해 구체적인 분석이 존재하거나 여성노동자들의 생각이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것은 아니라, 이런 부분들이 궁금하게 느껴진다.

  그리고 밀크만의 책을 읽으면서 나는 다른 고민들을 해보았다. 우리가 보고 듣고 만나는 이들, 그들이 말하는 것은 모두 진실일까? 있는 그대로 관찰하고자 하는 태도가, 곧이곧대로 ‘사실’로 받아들이는 것으로 이어졌을 때 또 다른 오류가 발생하지는 않을까? 예를 들어 공장을 떠난 노동자들이 GM에 대해 혐오감을 드러내는 것은 실제로 그들의 노동경험이 그러해서 일수도 있지만, 다른 식으로도 생각해볼 수가 있다. 그러니까 싫어서 그만둔 것일수도 있지만, 반대로 그만두게 되면서 부정을 하는 것일 수도 있다는 말이다. 인간은 많은 경우 현재 자신이 하는 일을 정당화하고 자긍심을 느끼고자 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과거를 부정하는 것보다 현재를 부정하는 것이 더 힘들기 때문에. 그래서 바꾸어 생각해보면 어쩔 수 없어서, 별다른 희망이 없어서 명예퇴직을 선택한 노동자들이라고 할지라도, 자신이 이미 떠나버린 곳에 대해 부정적으로 이야기할 수도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꼭 GM노동자들의 경우가 아니더라도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가 아닐까? 합리화의 가능성이란 어떤 인간들에게나 존재한다. 중요한 것은 관찰대상자 ‘그들’이 말하는 것을 모두 진실로 받아들이는 태도가 아니라1), 말하는 이들(관찰대상자)조차도 어떠한 구체적인 맥락 속에서 판단하고 이야기하는가를 보는 것이 아니겠는가.



1) 이런 태도들을 성매매 논쟁 때 볼 수가 있었는데, 성매매/성노동을 주장하는 양쪽 모두 “이것이 ‘진짜’ 성매매 여성들의 목소리”라고 주장하는 방식은, 경합하는 여성의 목소리들을 제대로 담아내지 못하고 옳고 그름의 이분법 속에 갇히게 만들어 버리는 한계를 낳았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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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

권인숙씨가 쓴 <선택>이라는 책을 뒤늦게 읽게 되었다.

권.인.숙.이라는 이름 석자만으로도 가지게 되는 무게가 있는데,

이 책은 그런 그녀를 다르게 보게 만든다.

그녀가 비정치적이라던가, 그런 의미에서가 아니다.

100%페미니스트, 100%맑스주의자 같은 건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어떤 이들을 만날때 경외심을 갖게 된다.

그/녀들에게는 내가 매순간 느끼는 좌절감과 나약함 같은건 없을 것만 같다.

권인숙이라는 여성투사같은 이미지도 그 중의 하나다.

그런데 책을 읽으며

그녀 역시 끊임없는 자기모순 속에서

살아나가는 한 개인이라는 너무도 당연한 사실을 '새삼' 알게 되었다..

물론 그녀는 그런 자신을 직면하고 세상에 드러낸다는 점에서

나보다 훨씬 더 용기있고 성찰적인 분이다.

 

....

글이 참 좋다.

어려운 말들을 쓰지 않아도 구절구절 공감이 간다.

글을 쓰는 과정이 스스로에게도 얼마나 해방적인 것이었을까,

부러워진다.

 

나도 그런 글을 쓰고 싶다.

글을 쓰면서 내가 자유로워지는 느낌을 받고

글을 쓰면서 내가 보기 싫어하는 나를 성찰하게 되고

그러면서도 내가 아닌 이들과 소통할 수 있는.

 

 

 

 



...인간이 올바른 사회의식을 키워나가기 위해서는 얼마나 전면적인 검토가 필요한가 하는 점도 생각나게 하는 일화이다. 그래서인지 이글거리는 자의식에 짓눌리는 나를 버리고 새 인간이 되어야 한다는 절박감은 컸다. 그러나 나를 너무 부정하다보니 나는 운동의 명분에 모든 것을 내맡기듯 살고 있었다. 한편으로는 내가 갖고 있는 개인주의적 창의성, 정치감각이 온통 눌리는 느낌을 받았다. (p.31)

 

...사람들이 어떻게 다들 이런 아픔, 부채의식을 한 곁에 감당하고 살 수 있는지 그 지혜와 힘이 놀랍기도 하고 비현실적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물론 어느 하나의 감정과 고통과 기쁨이 대변하기에는 너무 복잡한 것이 우리 삶이고, 그래서 무수한 나날들을 이겨낼 수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근원적 슬픔과 보답하지 못하는 갈증을 상대하면서 살아가는 것 또한 삶인 것 같다. (p.77)

 

...그러나 굳이 내가 받은 가장 의미있는 교훈을 꼽아보라면, 사람 하나하나를 존중하는 의미와 실천이 단순히 앞으로 그래야지 맘먹는다고 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끊임없이 관찰하고 반성하면서, 작은 원칙과 작은 가치를 동반해서 쌓아나갈때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80년대, 큰뜻을 위해서 사심없이 나 자신의 기득권을 버렸지만 남녀의 관계, 동지간의 관계, 선후배의 관계, 여타 모든 인간관계에서 우리가 주장하는 큰 뜻이 어떻게 모순없이 관철될 수 있는지 크게 고민하지 못했다. (p.109)

 

...여성운동은 '사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라는 슬로건을 전면에 내세워왔다. 여성억압의 실체를 이야기하기 위해 써온 말이다. 즉 여성에 대한 억압이 사적이고 개인적으로 보인다 하더라도 사회, 정치적 억압의 한 부분이다. 그리고 사적이라고 믿는 말과 행동이 그런 구조적 억압을 만들고 유지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일상성을 이야기하고 사적 공간의 성역을 허물려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렇다면 그런 일상적인 억압행위를 의도적이든 아니든 저지르는 사람들의 책임을 어떻게 물을까? 또 정치적, 도덕적으로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정고미라는 "그런데 내 생각에, '사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라는 페미니즘의 명제는 사적영역에서의 억압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지 사생활에 대한 새로운 규범을 강요하기 위한 것은 아니다."라고 했다. 나도 이 생각에 동의한다. 한 개인의 세세하고 복합적인 삶과 존재의 가치가 몇가지 정치적으로 옳은 명제로 판단될 수는 없기에 과연 한 개인의 복잡한 일상을 일관성 있는 기준으로 판단하는게 가능한가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도 든다. (p.251).. 사실 한 개인이 모든 차별에 대해서 같은 깊이와 넓이로 일관되게 대응할 수는 없다. 우선 한 사람이 경험하고 반응할 수 있는 폭이 한계가 있다. 또한 사고방식과 능력, 어릴적부터 키워온 감수성의 차이에 의해서도 각각의 차별에 대한 반응정도가 다르다. 설혹 민감한 감수성을 가졌다고 하더라도 늘 실수하고 생각이 못 미치는 듯한 발언을 할 적도 많다...(중략) 개인의 불완전함뿐만이 아니더라도 사적인 공간에서 한 행동을 정치적으로 옳은가 아닌가 판단하는 그 자체도 위험하다. 개인성이 워낙 복합적이기 때문이다.....(중략) 그러나 외모차별의 현실에 비판하는 만큼이나 아름다움을 즐기고 싶고, 판타지의 세계에서 대리만족하고 싶은 욕구가 있다. 나 개인의 공간에서 반환경적이거나 정치적으로 틀린 일들을 하고 싶기도 하고, 긴장을 풀기 위해서 대중문화에 편하게 탐닉하고 싶은 마음과 당위에서 벗어나고 싶은 욕구도 있다. 즉 가치관을 일관성 있게 실천하는 면뿐 아니라, 다양한 욕구와 일탈과 모순의 복합체인 개인성의 영역이 분명히 있다. 물론 개인의 복합성을 이유로 개인적 영역에서 뭐든지 해도 괜찮다는 것은 아니다. 사적 영역에서 반복되는 일상적 각종 폭력이나 차별이 늘 편하게 용서되고 이해되야 하는 것은 더욱 아니다. 사회적으로 각 시기마다 역사적 맥락 속에서 옳은 것, 금지해야 할 것, 바꿔야 할 것 등에 대한 합의는 존재해야 한다. 그런 가치관을 개개인의 삶 속에서 또는 집단적으로 실천하면서 사회는 진보한다. 다만 각 개인에게 선택의 여지없이 단일한 기준을 적용하거나 강요하는 실천은 안된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다. 사적 억압의 실체를 벗겨내야 하지만, 그것은 개인적 차원에서 사적억압을 일거에 다 극복한 상태와는 다르다. 또한 정치적으로 올바름을 실천하는 개인만을 요구하는 것과도 분명 다르기 때문이다.(p.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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