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회견문

 

1. 2007년 6월 1일, 삼성 반도체 기흥공장에서 일하다 급성 골수성 백혈병으로 사망한 고 황유미씨의 산재보험 유족급여를 신청한 지 어느 덧 11개월이 지났습니다.

 

그동안 유족들은 슬픔에서 벗어날 겨를도 없이, 채 마르지도 않은 눈물을 닦으며 세상에 외쳐왔습니다. 길고 힘겨운 투병생활 끝에 결국 목숨을 잃은 황유미씨의 죽음 앞에, 한마디 위로는커녕 퇴사와 산재 포기를 종용해온 삼성 자본은 사과해야 한다고. 차마 말로 다 표현하지 못할 육체적 · 정신적 · 경제적 고통을 남기는 백혈병 피해자의 규모는 얼마나 되며 그 원인은 과연 무엇인지 투명하고 철저하게 진실을 밝히라고. 앞으로 두 번 다시 반도체 산업 노동자의 건강과 생명이 짓밟히지 않도록, 피해 노동자들이 먼저 나서고 전체 노동자들이 힘을 모아 싸우자고. 무노조 기업 백혈병 공장 삼성에 민주노조를 건설하자고.

 

그러나 아직도 삼성 자본은 아무 문제 없다는 식으로 시치미를 떼고, 주요 언론사들은 보도기사조차 실어주지 않으며, 노동부는 반도체 산업에 대한 조사를 서둘러 마무리하며 형식적인 대응으로 생색내기에 급급한 것이 현실입니다.

 

이 같은 악조건 속에서도 불행 중 다행인 것은, 그동안 고통받아온 피해 노동자들이 하나 둘씩 자신의 고통을 이야기하기 시작하고, 정당한 권리를 위해 힘과 뜻을 모으기 시작했다는 점입니다. 거대한 삼성 자본이나 전체 반도체 자본들과 맞서기에는 아직 우리의 힘이 턱없이 부족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요구와 행동이 너무나 정당하기에 쉼없이 의연하게 한발 한발 내딛을 것입니다. 언제나 그렇듯 세상을 보다 인간답게 바꾸는 힘은 짓밟히고 고통받은 노동자, 힘없고 약한 민중의 슬픔과 분노, 단결과 연대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우리는 이번에 또 한번 배우고 있습니다.

 

 

2. 그렇게 모인 피해 노동자들 중에 오늘 우리는 네 명의 백혈병 피해자들과 함께 이 곳 근로복지공단에 왔습니다. 기흥공장의 설비 엔지니어로 일하다가 두 아이와 아내를 남기고 서른살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야 했던 황민웅씨, 기흥공장에서 황유미씨와 동일한 공정인 3라인 3베이에서 일하다가 똑같은 시기에 똑같은 병으로 목숨을 잃은 이숙영씨, 온양공장에서 일하다가 병에 걸려 청춘을 저당잡힌 채 오랜 시간 투병 중인 김옥이씨, 그리고 바로 내일 골수이식 수술을 앞두고 오늘 이 순간에도 병마와 사투를 벌이고 있는 온양공장의 박지연씨가 바로 이 분들입니다.

 

노동자가 일하다가 얻은 모든 질병과 장애가 그러하듯이, 백혈병은 환자 본인의 신체적 고통은 물론, 이를 지켜보아야 하는 가족들에게 크나큰 정신적 고통을 남깁니다. 또한 수천만 원의 치료비와 생계 문제로 인한 경제적 고통도 매우 큽니다. 오늘 이 곳에 함께 한 네 명의 피해 노동자들과 그 가족들 역시 발병한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 이중 삼중의 고통 속에 지내왔습니다. 뿐만 아니라 “백혈병은 개인 질환이다”라는 근거없는 주장을 하며 피해 노동자들에게 퇴사를 종용하고, 위로금 몇 푼을 쥐어주면서 산재 신청을 포기하라고 회유하는 삼성 자본 때문에 수없이 고민하고 괴로워하면서 하루 하루를 견뎌왔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고통 속에서도 우리는 여기에 모였습니다. 우리는 삼성반도체에서 희귀질환인 백혈병 피해자들이 점점 늘어가는 것을 보았기에, 백혈병이 개인 질환이라는 회사의 근거없는 주장에 더 이상 속지 않습니다. 우리는 피해규모와 원인 정확히 밝히기보다는 돈으로 피해자들의 입을 틀어막으려는 회사의 행태를 보았기에, 우리 스스로 나서지 않으면 앞으로 더 많은 노동자들이 백혈병으로 고통받게 되리라는 것을 절실히 느낍니다. 그리고 재해 노동자에게 제대로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보장하고, 그 고통을 덜어주기 위한 제도가 바로 산재보험이라는 것을 알기에, 우리 역시 그 정당한 권리를 주장합니다.

 

 

3. 지금까지 노동부 산하기관인 근로복지공단은 사회공공보험인 산재보험을 관리하고 운영함에 있어서, 일하다 다치고 병들고 죽은 노동자들의 건강권을 지키는데 애쓰기보다는 보험 재정을 아끼는데 혈안이 되어있었습니다. 그 결과 8천억원의 흑자를 남겼다고 자랑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8천억의 흑자 뒤에는 “업무상 질환 인정기준 처리지침”, “요양업무 관리지침”, “집단민원 대응지침” 등 근로복지공단의 임의적이고 초법적인 내부지침에 따라 불승인과 축소변경승인 그리고 조기요양종결이 난무하는 가운데, 치료와 보상을 받을 최소한의 권리조차 짓밟힌 노동자들의 고통과 한숨이 있습니다. 산재보험을 통해 치료와 보상을 받는 것은 노동자들이 당연히 누려야 할 최소한의 기본권입니다. 이 권리를 지켜주라고 만든 기관이 이 권리를 짓밟는데 앞장서고 있으니, 참으로 끔찍한 현실입니다.

 

그 어떤 것도 노동자의 건강권을 침해해서는 안됩니다. 40여년 만에 개악되어 7월 1일부터 시행을 앞두고 있는 산재보상보험법도 예외일 수 없습니다. 근로복지공단은 그동안 행해왔던 건강권 침해 행태를 반성하고 환골탈태해야 합니다. 사회공공보험인 산재보험은 보험재정 수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노동자의 건강권을 위해 운영되어야 합니다. 근로복지공단은 말로만 “희망 드림”을 내세울 뿐 실제로는 “고통떠넘기기”에 앞장서온 행태를 즉각 중단해야 합니다. 일하다 다치고 병들고 죽은 모든 노동자들의 고통을 덜어주는데 앞장서야 합니다.

 

오늘, 거대 자본 삼성반도체에서 일하다 백혈병으로 투병중이거나 이미 소중한 생명을 빼앗긴 노동자들의 집단 산재신청에 대해, 근로복지공단 본부가 나서서 신속하고 책임있게 임하는 것부터 시작할 것을 촉구합니다. 삼성 자본의 눈치를 보기보다는, 삼성에서 일하다 병들고 죽은 노동자와 가족들의 절박한 요구를 보장하고 증진시키는데 앞장서기를 촉구합니다. 일하는 모든 이들이 치료받을 권리, 재활하고 보상받을 권리, 건강하게 살아갈 권리를 충분하고 쉽게 누릴 수 있도록 하는데 힘쓰기를 촉구합니다. 그리고 ‘결자해지’의 자세로, 근로복지공단의 반노동자적인 독소 지침들을 법제화한 개악 산재보상보험법을 전면개혁하는데 스스로 앞장서서, 노동자의 건강권을 제대로 지키는 기관으로 거듭나기를 촉구합니다.

 

 

 

 2008년 4월 28일
삼성반도체 집단백혈병 진상규명과 노동기본권 확보를 위한 대책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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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4/29 20:46 2008/04/29 20: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