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강경진압'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09/05/20 [인터뷰] 경찰 폭력 국가 상대 승소한 사백기씨
  2. 2009/05/20 경찰, 연행과정 화풀이 폭력 행사했다

[인터뷰] 경찰 폭력 국가 상대 승소한 사백기씨

View Comments

[인터뷰] 경찰 폭력 국가 상대 승소한 사백기씨

 

지난 5월 16일 경찰의 과잉폭력진압으로 수많은 노동자들이 부상을 당했다. 경찰의 폭력이 도를 더해가는 상황에서 지난 금속노조 하이닉스매그나칩사내하청 투쟁 과정에서 경찰의 과잉진압 과정에서 경찰이 던진 돌에 오른쪽 눈을 맞아 실명한 금속노조 캄코지회 사백기 지회장이 대한민국을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 부분 승소한 사실이 뒤늦게 밝혀졌다. 이에 사백기 지회장과 인터뷰를 가졌다. [당일투쟁속보]

어떻게 부상을 당했나?

2005년 하이닉스매그나칩 사내하청동지들의 투쟁이 본격화 됐다. 당연히 단일 노조로서 투쟁에 나섰다. 그런데 경찰의 대응이 너무 거셌다. 4월 1일 역시 정문, 북문 모두 어마어마한 병력을 풀어놨고, 맨몸으로 어깨싸움을 하는 노동자들에게 방패와 곤봉을 동원, 짖이겼다. 북문앞에서 도저히 견딜수 없어 젊은 동지들을 중심으로 그 자리에서 사수대를 구성 전경들의 방패와 공봉을 빼앗아 맞섰다. 나 역시 당시 지회장으로서 간부들과 함께 최선두에 서서 투쟁을 했다. 그런데 갑자기 오른쪽 눈에 엄청난 통증을 느꼈고, 피를흘리며 하나병원으로 갔다가 상처가 엄중해 충북대병원으로 이송됐다. 우안 전방출현, 홍채해리 등으로 우측 눈의 시력이 급격히 저하되는 상해를 입었다.

 

소송을 걸기에 많은 부담이 있었을텐데?

명백히 공권력의 폭력에 의한 부상이었다. 경찰특공대가 안전수칙을 지키지 않고 방패와 곤봉을 휘둘렀고, 비무장 상태인 노동자들에게 돌을 던지는 행위는 중대한 과잉진압이다. 당연히 국가가 배상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내가 소송을 걸고 국가와 투쟁을 하지 않는다면 이후 경찰의 폭력진압이 더욱더 기승을 부릴 것이고 무방비 상태인 노동자들은 계속 국가의 폭력에 노출되어있어야 한다. 그래서 민주노총 충북지역본부 자문변호사인 홍석조 변호사에게 상담, 소송을 결심했다.

 

재판은 어떻게 진행되었나?

2005년 9월경 대한민국을 피고로 "피고는 원고에게 금 2억1백원 및 이에 대하여 2005. 4. 1.부터 이 사건 판결선고일까지는 연 5푼의, 그 다음날로부터 갚는 날까지는 연 2할의 각 비율에 의한 금원을 지급하라"는 소장을 제출했다. 이후 2007년 7월 4일 청주지법 민사11부는 "국가는 사씨에게 1억6천6백여만원을 지급하라"며 원고 일부 승소 판결했다.  공권력의 무리한 강경진압으로 명백한 국가의 책임이지만, 30%는 불법시위를 벌인 원고에게 책임이 있어 이러한 판결을 내린 거다. 그런데 다시 정부가 항소를 했다. 그리고 2007년 11월 20일 대전고법 민사1부에서 열린 항소심에서 재판부는 화해를 권고, 변호사와 협의하여 화해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불법한 공권력 사용과 불법 파업에 대한 책임을 서로 50% 씩 인정, '국가가 1억1천만원을 원고에게 지급'하는 화해권고를 받아들이게 됐다.

 

결과에 만족하나?

솔직히 끝까지 가보려 했다. 대법원에서 확정판결을 받아 공권력 남용에 쐐기를 박고 싶었다. 그러나 변호사와 상의한 결과 대법까지 갈 경우 민사소송의 특성상 그 기간이 얼마가 될지 확신할 수 없고, 또한 책임에 있어 조정될 가능성이 있어 대법까지 가는 것이 실효성이 없다라는 판단을 했다. 아쉽지만 절반의 승리로 마무리 했다.

 

지금 눈 상태는?

오른쪽 눈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뿌연 안개속에 있는 것 같다. 왼쪽눈에 만 의존하다보니 무리가 와서 왼쪽 시력 역시 계속 저하되고 있다. 망막기증 이외에는 방법이 없다고 한다. 그런데 비용도 그렇고 얼마를 기다려야 할지... 정기적으로 치료하며 왼쪽눈을 최대한 보존하며 살아가는 수밖에 없다.

 

불편한 점은?

안압이 올라가면 안된다. 요즘같은 임단협 시기 신경을 많이 쓰고, 스트레스가 가중되는 때는 눈이 너무 아프다. 안압 때문에 가끔씩 즐기던 술도 못 먹는다.

 

현재 사백기 지회장은 우안의 일부 동공괄약근의 위축으로 시력저하, 동공장애, 망막변성 등이 남아 가동능력 상실율 32%로 영구 장애 상태이다. 불법한 공권력 과잉이 한사람을 평생 장애를 안고 살게 만들었다. 그런데도 아직까지 그 공권력은 반성을 않고 있다. 아니 오히려 더욱 날뛰며 정부에 저항하는 모든 이들을 불태워 죽이고, 곤봉과 방패로 토끼몰이를 하고 있다.

 

당일 사백기 지회장은 최선투에서 투쟁했다.

 

당일 이성을 상실한 공권력에 의해 수많은 노동자가 부상을 입었다.

 

 

2005년 4월 1일 당일 폭도로 변한 공권력 충북 경찰의 모습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
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09/05/20 17:59 2009/05/20 17:59

댓글0 Comments (+add yours?)

트랙백0 Tracbacks (+view to the desc.)

경찰, 연행과정 화풀이 폭력 행사했다

View Comments

"경찰, 연행과정 화풀이 폭력 행사했다"

동영상 속 주인공 증언

 

 

천윤미 미디어충청기자(moduma@cmedia.or.kr)

 

 

5.16 대전 노동자민중대회에서 신병이 확보된 후에도 경찰의 폭력이 계속 됐다는 증언에 이어 동영상이 발견되었다. 동영상 속 주인공이 확인된 만큼 “경찰이 연행자들에게 화풀이 성 구타를 했다”는 증언이 신빙성을 얻고 있다.

 

체포 이후에도 경찰이 뒤에서 쫓아오며 계속 폭력을 행사하고 있다. 여경은 보이지 않는다.
동영상 캡처,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본지가 입수한 이번 동영상에서 경찰은 이미 끌려가고 있는 남녀에게 달려들며 방패를 휘두르며 여성의 엉덩이를 군화발로 찼다. 네 다섯 명의 발길질에 끌려가는 흰색 옷의 남자가 휘청거렸으나, 부둥켜안은 남색 옷의 여자를 놓치지 않고 경찰이 끌고 가는 방향으로 끌려갔다.

본지는 이 동영상 속의 남녀가 바로 16일 연행되었다가 풀려난 김 순자(본지 칼럼기고가) 씨 부부임을 확인했다.

“내가 왜 앞에서 끌려나오냐?”, “후두부 맞은 뒤로 기억 안 난다”

당시 상황이 담긴 동영상을 본 남편 김 훈(40)씨는 “왜 내가 차량 앞쪽에서 검거당했냐?”며 김 순자 씨에게 수차례 물어볼 정도로 “버스 앞 쪽으로 끌려온 기억이 전혀 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김 순자 씨는 “남편이 기억이 없었다고 해서 정밀검사를 받을지 고민하고 있다”며 “후두부에 주먹만한 혹이 생기고 머리카락이 엄청 빠졌다. 남편 말로는 후두부를 맞은 이후 기억이 잠깐씩 나지 않는다고 한다”고 설명했다. 후두부 부위는 종합격투기에서 조차도 공격이 금지된 급소다.

이어 김 씨 부부는 당일 입었던 옷을 직접 입어보이며 “동영상에 맞고 있는 사람이 우리 부부”라고 확인시켜줬다.

 

자신이 맞은 부위와 그날 입은 옷을 보여주며 동영상 속의 주인공임을 확인시켜주었다.(김 훈씨)


당시 김 씨 부부는 집회가 끝난 후 버스를 타려다가, 갑자기 나타난 경찰들에 의해 집단 폭행을 당했다.

김 씨 부부는 “버스에 오르려는데 경찰이 방패로 얼굴 부위를 연이어 찍으려고 했다. 너무 놀라서 차량 뒤편으로 도망갔는데 여기저기서 경찰들이 우릴 둘러싸더니 방패로 찍고 발로 밟았다. 남편이 나를 재빨리 안아서 보호하고 나는 살려달라고 소리쳤지만, 경찰은 ‘야 더 밟아. 이 **들’이라면서 멈추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멀리서 달려오더니 날라차기, 여경은 없었다”

이들 부부의 증언과 동영상에 의하면 경찰은 이들 부부의 신병이 확보된 후에도 차량 앞뒤로 끌고 다니며 계속해서 폭행했다.

김순자 씨는 “이송버스로 끌려가는 와중에서도 경찰은 내 엉덩이를 수차례 걷어찼으며, 멀리서 달려온 경찰들이 날라차기로 몸 곳곳을 걷어찼다. 차량 앞뒤로 끌려다니며 곤봉인지 방패인지로 계속해서 가격당했다”고 설명했다. 당시를 떠올리던 김 순자 씨는 “수치스러웠고 우리는 사람이 아니었다”고 말했다.

당시 여경을 봤느냐는 질문에 김 순자 씨는 “우리는 남자 전경들에 의해서 끌려다니고 맞았을 뿐, 여경은 못봤다”고 답했다. 이에 대해 대전 경찰 관계자는 “16일 집회에 여경이 배치됐긴하지만 얼만큼 배치된 건지는 모르겠다”고 밝혔다. 이어 “연행 과정에 함께 배치된 건지는 잘 모르겠다”고 말했다.

이들 부부는 이후 둔산경찰서로 연행되었으며 경찰서로 가는 와중에 미란다 원칙을 고지 받았다. 당시 김 씨 부부는 “왜 우릴 연행하냐고 묻고 싶었지만 또 폭행당할까봐 무서워서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했다”고 했다. 더구나 이들이 탄 버스가 지나가는 곳마다 경찰들에게 폭행당하는 집회참가자들의 비명 소리에 이들 부부는 더욱더 “공포감을 느꼈다”고 밝혔다. 이들 부부는 17일 새벽 2시에 풀려났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
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09/05/20 11:54 2009/05/20 11:54

댓글0 Comments (+add yours?)

트랙백0 Tracbacks (+view to the desc.)

Newer Entries Older Entri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