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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D-Day를 준비하며

  • 등록일
    2005/03/12 14:58
  • 수정일
    2005/03/12 14:58
그래 9월 D-Day다!

오늘 아침에 출근하면서 계속 생각한 건데,
직장 생활을 청산할 준비를 슬슬 해야 할 것 같아.
먼저 생각한건, 회사의 룰에 묶여 그 일정대로 따르는 노예의 부지런함을 버리고
내 스스로 조직하는 부지런함을 습관화해야 한다는 거야.
근데 그게 얼마나 어려운 건지, 예전에 놀아봐서 아는데,
일없이 빈둥거리면 몸버리고 맘버리기도 쉽상이거든.
그래서 회사에서 일하는 것만큼의 빡빡한 스케줄은 아니지만,
늘 공허한 시간이 생기지 않게끔 스케줄을 관리하는 게 중요할 듯싶어.
그래서 지금부터 약 6개월 뒤에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 좀 열심히 생각해보려고 해.

또 한 가지는 돈쓰는 버릇을 확실하게 뜯어고쳐야해.
점심을 사먹는 밥값만 해도 이동네에서는 사오천원이 드는데,
조금만 부지런히 점심을 싸면 한달에 10만원정도를 절약할 수 있거든.
또 택시 같은 거 안타는 것도 중요하고(오늘은 늦어서 택시 탐 ㅜㅜ),
밖에서 되도록 밥 안 사먹도록 하고,
친구들과 휩쓸려 이리저리 카페나 술집에서 만나는 것도 자제해야하고,
쓸데없는 인터넷 쇼핑 같은 건 아예 싹을 잘라야 해.
요즘 돈 나가는 거 보면 “이러다가 이런 회사생활을 계속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하는
불안이 생기는 게, 이게 흔히 일반 직장인들에게 보이는 중독현상인거 같아.
내 주위의 직원들을 보면, 쇼핑에 중독되어 카드빚을 내는 사람들도 있고,
점심, 저녁을 별 생각 없이 근사한 패밀리레스토랑에서 척척 해결하는 사람들도 있거든.
생일날이면 남자로부터 10만원이 넘는 꽃바구니와 역시 10만원 이상을 호가하는 수입화장품을 선물로 받고
저녁에는 1인분에 3만 5천원 정도하는 그릴 스테이크가 나오는 근사한 레스토랑에서
한잔에 5000원 하는 와인과 함께 고기를 써는 삶이란,
예전에 너무 전형적이어서 비현실적으로 보였는데, 회사에 몇 년 다니고 보니
그게 전형이 아니라 몇몇 부류들은 실제로 그렇게 하고 있고,
또 그 부류에 속하지 못한 사람들은 언젠가는 그렇게 하고 싶다는 고결한 희망으로
하루하루를 세빠지게 일하고 있다는 걸 알게 돼.
남자는 능력이 있어 돈이 많아야 한다는 강박, 여자는 예뻐야 한다는 강박.
이 두 개의 강박이 무슨 수학공식처럼 아귀가 딱딱 맞는 게 아주 신기할 정도거든.
주말이면 2만원씩 돈을 내는 네일아트숍에서 손톱과 발톱 손질해야 스트레스가 풀리는 동료가 있는가 하면,
10만원을 호가하는 파마를 했다며 그날 점심은 컵라면으로 해결하는 동료도 있지.
살찌는 것에 대한 강박, 날씬해 보여야 한다는 강박, 피부가 고와야 한다는 강박,
그러한 강박들이 어쩔때는 나름대로 초연한 나를 물들이기도 해.
그러니까 싸구려 스킨 하나를 사러 들어간 화장품 가게에서 점원이
“어머 손님은 여드름이 나면서 얼굴은 너무 건조하군요.
그러면 이게 아니라, 저걸 써야해요.”하며 내미는 울트라 인텐시브 XX시리즈로 나가는
고가의 화장품을 내밀 때면, 나도 모르게 혹하게 된다는 거야.

요즘 일본어 시간에 읽는 책은 [탈 개발: 서브시스턴스 지향으로]라는 책인데,
내 나름대로 고개를 끄덕인 부분에 밑줄을 쳐보면,
개발주의의 강고함, 즉 개발주의가 생각의 전환만으로 바뀔 수 없는 이유란,
그것이 우리의 일상 곳곳에 스며들어 있기 때문이래.
이 사회에서 남보다 잘 살기 위한 경쟁해야 한다는 관념과 실천,
그리고 그러한 시스템이 스며있지 않은 영역이 없다는 거지.

과연 그래.

근데 어떤 사람들은 이런 얘기가 너무 비약하는 거래.
자기 같은 경우는, 남만큼만 살자주의라나? 그 말도 듣고 보니 그 말도 맞네.
내 주위에 남에게 폐 끼치지 않을 만큼만 소박하게 살고 싶어하는 사람도 많으니까.
그런데 찬찬히 뜯어보면 그 남만큼만 살자주의란
밑바닥까지는 떨어지지 말아야한다는 강박의 대표격인 거야.
그러니까 “남보다 잘살자”주의가 포져티브한 개발주의라면
“남만큼 살자”주의란 네거티브한 개발주의가 되는 거지.
남만큼 살자주의는 늘 앞에 “난 별로 욕심이 없어”하는 머리말을 달면서,
“근데, 이런 저런 집안이나 친구들 경조사에 부주는 꼬박꼬박 챙겨야지 인간 도리를 했다고 하겠지”,
“뭐 떵떵거리며 살진 못하겠지만 평생 살 집 하나쯤은 마련하고, 형편이 좀 되면 차도 굴릴 수 있었으면...”
“애가 생기면 기죽이기는 싫으니까 학원은 기본으로 한두 개만 보내야지” 하는
“소박한” 희망을 늘어놓는 게 일반적이야.
그걸 회사에 대입하면, ‘남보다 성공해야 한다’는 “사장 마인드”와는 조금 구별되면서
동시에 그것과 쌍을 이루는 “직원마인드”가 되는데,
결국에는 개발주의 마인드의 위계 속에 철저히 종속되어 있지.
그게 바로 직원들이 사장 앞에서 아무 말 못하고
제 삶을 아주 통짜로 내주어 버리는 시스템인 거야.
욱해서 사표를 던지려는 순간 애들 양육비며 학원비가 눈에 아른거리는 거지.

또 고등학교 때부터 “그래도 대학은 들어가야지”하는 거,
학교를 졸업하고도 “그래도 일은 대기업에서 해야지. 뭐 여건이 안 되면 좀 괜찮은 중소기업도 나쁘진 않아.”하는 것도
남보다 잘 살겠다는 게 아니라 남만큼만은 살자는 소박한 바램인 거야.
남만큼 사는 것만도 뼈빠지는 세상에서 남보다 못사는 건 또 얼마나 서러울까?
비정규직 블루칼라와 여성노동자, 실업자, 장애인, 이주노동자, 노숙자의 존재는
늘 이런 사람들에게 공포심의 대상으로 다가와서 “그래도 남들만큼은 살아야지”하고
마음을 다잡게 해주는 계기가 되지.
그래서 아마도 평생을 밑바닥과과 천장 그 중간에 존재할 수밖에 없는 그들,
“중간층”이건, “대중”, “시민”이건, “국민”이건, “서민”이건, 뭐라 부르던 간에
그들은 사실 위를 향해 뛰는 게 아니라, 밑을 공포스럽게 바라보면서  
어쩔 수 없는 중력으로 제자리걸음으로 도망칠 수 밖에 없는 생쇼를
평생 벌이게 되는 거지.  

그러니까 결국에 이 지긋지긋한 임금노동에서 벗어나는 길은,
그런 소박한 꿈보다 좀 더 근사하고 멋진 자본가의 꿈 혹은 대박의 꿈을 꾸던가,
아니면 그 꿈의 패러다임에서 벗어나는 길 뿐인 거지.
사실 개인적으로 전자에 더 재능이 있어 보이긴 하지만,
안타깝게도 후자를 더 훌륭하게 생각하는 날 누가 보면 "잉여"라 할 거야.

그런 후자의 삶의 방식을 거칠게 늘어봐 보면,
외부가 아닌 스스로에 의해 조직되는 삶,
소비와 안 친해지기,
노예의 부지런함이 아닌 자율적인 근검, 절약, 부지런함의 대안,
어제 할아버지가 얘기한 가라타니 고진이 말했다는, “의식적인 보이콧”,
비폭력 직접행동,
자급에 기반한 공동체 만들기,
잉여에서 필요로 탈출하기(소위 사회의 “잉여적” 존재들(잡민들)이 보다 쉽게 필요로 탈출한다는 것은 참 아이러니해),
학교독 회사독 조직독 빼기,
밑바닥으로부터 상상하고 거기에 적응하기,
결국엔 서브시스턴스로 돌아가는 사회를 만들기 등등.
내가 보기에는 이런 것들이 아까 그 후자의 삶을 이루는 것들인 것 같아.
사회니, 뭐니 하니까 거창해 보이지만,
개인적으로는 지긋지긋한 회사를 안 다니면서 어떻게 잘 수 있을까 하며
나름대로 고민한 것의 해답이야.

그러니까 근검, 절약, 부지런함 덕목으로 벤자민 프랭클린처럼 성공한 자본가가 아닌,
성공한 룸펜을 꿈꾸는 것이지, 멋지잖아?
그러고 보니 내 주위에 성공한 룸펜이 한 사람 있는데,
내가 늘 존경해마지 않는 조XX란 사람이지.
어쩔 땐 십 원 한 장 안 쓰는 모습이며, 회사도 안 다는 것이 이일 저일 시간 없다고
야박하게 구는 모습을 보면 인간미며 오만정이 똑 떨어지다가도
자본의 노예가 되지 않겠다며 철저히 자기를 조직하는 아나키스트인 그를
존경하지 않을 수 없어.

맞다, 맞다, 내 스스로의 생활을 조직하고,
또 그와 비슷한 사람들의 공동체를 만들지 않는다면,
이 사회에서 실낱같은 희망이라 해도 과연 진정한 희망을 발견할 수 있을까?
기존의 삶의 규모를 유지하게 위해 내일도, 내일 모레도, 노예노동에 매달려야겠지.
평생

그래 확실히 결심한다. 9월 회사 때려치우는 D-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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