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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8/04/17
    사고 싶은 자전거(2)
    무나
  2. 2007/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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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나
  3. 2007/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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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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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나
  5. 2007/0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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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2007/0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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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2006/09/14
    지붕 위에 몸을 묶고(5)
    무나
  8. 2006/0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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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나
  9. 2006/09/12
    지글대는 평화(1)
    무나
  10. 2006/07/10
    때리면 맞는다?(8)
    무나

사고 싶은 자전거

  • 등록일
    2008/04/17 12:39
  • 수정일
    2008/04/17 12:39

이 자전거 괜찮나?

다혼 우베공 08년 모델

http://www.roxette.co.kr/shop/shopdetail.html?brandcode=001017000022&search=&sort=order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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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잡혀갔다

  • 등록일
    2007/11/27 11:35
  • 수정일
    2007/11/27 11:35

마숨, 라주, 까지만

할딱 거리는 이주노조를 끈질기게 끌고온 이들이

오늘 아침 모두 출입국에 잡혀갔단다.

너무 어이가 없다.

몇 주 전에도 검, 나딤 등이 잡혀갔었다.

정말 암울하다...답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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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그리 호들갑인가 싶지만

  • 등록일
    2007/08/01 19:55
  • 수정일
    2007/08/01 19:55

돕헤드님의 [민중은 여성이다] 에 관련된 글.

 

돕의 연작에 대해 뭐 그리 호들갑인가 싶지만,

그의 글에 대한 나의 생각은 다음과 같다. 

 

전유와 전복을 시도할 때에는 여러가지 위험성이 도사리고 있다고 본다. 때론 전유와 전복은 유쾌하다. 특히 억압된 자가 억압한자가 만든 가치와 기호를 전유해서 유희할 때는 더욱. 하지만 그 와중에 전유하고 전복하려는 대상의 다양성과 그들이 위치해 있는 미세한 맥락, 변화, 역동성은 사라지고 만다. 따라서 정치화되며 화석화되고, 과장되어 일반화되기도한다. 돕이 클리토리스에 빗댄 여성은 그런 맥락속에서 정치적으로 "신비화"되어 있다고 본다. (에드워드 사이드에 따르면 서양이 오리엔탈리즘이라는 이데올로기적 재현체계를 만들어내고 신비화했듯, 그리고 대항세력이 오리엔탈리즘을 다시 신비화하는 것을 경계했듯.) 돕의 글에 나타나는 화자는 클리토리스의 쾌감이라는 생물학적 여성들의 경험적 사실을 자기 것으로 전유하려는 어떤 생물학적인 남자이다.

그것이 그의 말대로 자신의 남성성에 대한 반성에서 기인되었다고 하자. 하지만 그는 자신의 남성성을 전복하고 해체시키는 방법으로 “여성”이 되려고 한다. 그리고 마치 여성이 된 듯, 그는 여성의 “클리토리스”를 가져다 쓴다. 여기에 함정. 그의 “여성”이란 “내가 지향하는 새로운 주체성”, “ 내가 만들고 싶은 나 자신의 모습” 이라는 말에서 암시되듯, 그 속에서 현실의 여성은 사라진다. 여기서 “현실의 여성”이라 함은 생물학적으로 결정되었든, 사회적으로 구성되었든, 구성되면서 변해가든, 이 현실을 살아내야 하는 무수히 많고 다양한 실체적 존재. 이들이 클리토리스에서 느끼는 것은 그 수만큼 다양할 것이고, 클리토리스를 미워하거나 예뻐하는 방법도 무수하게 존재할 터. 또 클리토리스에 대한 감정도 매우 복잡할 것.

다양성으로의 열림으로 향해가야 할 전유와 전복의 방식이 현실의 여성을 내쫓고 안에서 문을 닫는다. 여성의 신비화로 인한 소외는 계속된다. 그가 생물학적 남자라는 사실은 확실히 이러한 혐의를 가중시키기는 하나, 결정적이지는 않다. 만약 어떤 생물학적 여성이 칼럼에 여성에게 강요되는 질 삽입 오르가즘을 비판하고 클리토리스 자극을 통한 쾌감을 자기 경험에 비춰 옹호하는 글을 썼다고 하자. 물론 그 여자의 글쓰기 방식에 따라 읽히는 방식도 달라지겠지만, 클리토리스 쾌감을 느끼지 않는 여성들은 소외되고 있는 자신들을 발견할 것이다. (모든 글에는 분명 소외가 존재한다. 소외 없는 글은 없지 않을까!)

그 여성 글쓴이가 오히려 친구들이나 주변 지인들과 수다를 떨 때에 무의식적으로 “글은 그렇게 썼지만 삽입 섹스를 할 때의 오르가즘도 정말 좋아”라고 말을 한다면, 나는 오히려 그 여자를 더 잘 이해하게 될 것이고 의사소통이 된다고 느낄 것 같다. 그 여성은 이데올로기적 규정이든, 전복적 의도이든, 자기의 외부 또는 내부에서 자기를 규정하려는 것에서 자꾸 미끄러지는 현실적인 존재로서 여자로 느껴질 테니까. 그러한 여유, 삶 속에서 자기를 규정하지 않는 풀어헤침, 전복한 것을 또 뒤집어보기, 반성한 것을 반성하기, 의식한 것을 의식하기, 자신의 모순을 바라보기가 가능할 것 같기 때문이다. (정치적 글은 이렇지 못하고, 문학적 글은 이게 가능하다. 그래서 문학이 좋다!)

헤드윅이 성기를 절제하면서까지 여성의 몸이 되기를 갈망한 것은, 그의 섹슈얼리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현실적 섹슈얼리티에 충실한 현실적 인물로 보인다. 영화가 갖는 정치성은 재현된 사회와 그를 둘러싼 맥락이 그의 존재의 전복성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글쓴이 돕헤드는 자신에게 스스로에게 없는 쾌감의 이름을 붙이려한다. 그래서 결과는, 물신적이며 정치적이고,  돕에겐 미안하지만  상투적이 되어 버렸다. 누군가 돕의 글에 여성을 전유하려는 남성의 시선을 발견하고 불편한 소외감을 느꼈다면, 그건 그 글의 상투성에서 기인한다고 생각한다. 더구나 그의 후속 글은, 여성을 자신이 바라는 민중상을 구축하기 위한 도구로 사용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기 충분하기 때문.

물론 여기서 정치적인 것을 비판할 생각은 없다. 누구나 다 정치성을 가지고 있으니까. 문제는 그 방법이다. 자신의 지금의 남성을 해체하려 한다면, 여성까지 해체해야 한다. (어떤 이는 섹슈얼리티까지 해체해야한다고 할 거다. 그러면 얘기가 넘 복잡해지고...)  그 둘은 서로를 구성하는 과정에 있지 않은가. 마친가지로 여성성을 이용해 민중성을 그리려면 자기가 빗대려는 여성성이 무엇인지 부단히 스스로 물어보고 점검해야 하지 않은가. "삶은 여자다"라고 선언한 니체가 왜 개마초인지..., 역대의 훌륭하다던 남성 철학자, 사상가, 운동가들이 무수히 여자를 삶아먹은 그 역사를 생각하면 돕의 글에 대한 반응이 충분히 이해가 가지 않을까. 돕의 의도가 진정 그렇지 않았을지언정, 사회와 역사적 맥락에서 그나 나나 자유롭지 않으니...

 


개인적으로 돕 개인을 비판할 생각은 추어도 없다.

그가 솔직하든, 덜하든, 잘 드러내든, 숨기든, 의사 소통이 되든, 안 되든, 어쨌든 그는 그다. 보여지는 그이고, 그를 잘 못보는 사람은 잘 안 보이는 그이고, 더 잘 보는 사람은 더 잘 보이는 그일 뿐이다.

문제는 진정성이 아닌 방법이 아닌가 싶다.
그리고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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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 자전거 타고 의정부 가기

  • 등록일
    2007/06/15 16:43
  • 수정일
    2007/06/15 16:43

일단 이번주 토요일은 친구들이랑 소박하게 의정부까지만 가자.

다음에는 동두천에 있는 소요산까지 가보면 어떨까?

자전거도 타고 산도 타고

 너무 힘들까?

 

http://travel.naver.com/community/post_blog_view.nhn?doc_id=152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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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데이 일지

  • 등록일
    2007/06/04 13:37
  • 수정일
    2007/06/04 13:37

또 떨었다 ㅜㅜ

몇 달전부터 나에게 귀신이 붙었는지, 특정 보스 앞에서

떠는 버릇이 생겨서 아주 곤욕스럽다.

내가 발표할 차례가 되자 가슴이 팔딱팔딱, 호흡곤란, 안면 홍조, 제어되지 않는 목소리 떨림

나 왜그런거냐... 정말 환장...

내 안에 들어앉은 빅브라더 귀신을 쫓아내기 위해

빨리 무당을 불러서 푸닥거리를 해야겠다.

대인공폰가? 이런 거랑 원래 암 상관이없었건만...

암튼, 기 센 인간들이 싫다~

 

-주말을 평가하는 먼데이 일지-

토요일: 회사사람들과 라이딩 쓰레기 산으로 만들었다는 난지도 하늘 공원, 올라가지는 못하고 쳐다보고 내려옴. 역시 자전거는 아침에 타야 바람도 없고 쭉쭉 잘 나감. 그리고 저렴한 MTB를 사려면 신중하게 골라야 한다는 교훈... 저녁에 마이그런트 아리랑 대안무역 판매 준비(명목)를 위해 들어닥친 인간들을 다행히 붑사마의 완전 채식 스파게티로 제압. 밤 12쯤 쫓아낼 수 있었슴. 

 

음식값 합산: 토마토 1000원 + 브로콜리 1500 + 청양고추 500 (피자에 고추를 넣는지 안 넣는지 붑사마 헷갈렸다고 함)  + 맥주 4000원 + 피자(Sk카드 할인) 22,000 - 피자 디디가 카드로 결제 (아싸!)

=  손님대접 6000원으로 해결 봄.

 

일요일: 마이그런트 아리랑에 돗자리깔고 옷 판매 시작. 날씨 장난 아니게 더움. 3000원짜리 베트남 쌀국수 사먹으려고 뙤약볕에 30분 이상 줄서 기다리다 뚜껑 열림. 근처 스넥코너에서 우동 사버림. 오후에 버거왕에서 주니어 세트와 팥빙수 접수, 문화연대로 이동. 쥐에잇 반대 행동 준비. 양머리 라이딩과 저고리 라이딩을 제안했으나 기각당함. 낮에 너무 땀을 많이 흘린 관계로 기가 모두 빠짐. 집에와서 어젯밤 먹은 애들 설겆이 와 청소. 옷판매를 끝내고 친구들과 밥사먹고 오겠다는 붑사마를 즉각 호출. 같이 닭도리탕을 먹으며 원기 보충

 

음식값 합산: 버거왕 주니어세트와 팥빙수 9,000 + 원기충전 닭도리탕 소짜(밥한공기 추가) 15000원

= 합이 24,000원

 

마이그런트 아리랑을 지킨 부깽과 붑사마에게 심심한 격려를,

나중에 와준 달래, 달군에게 달콤한 사랑을~

 

힘들고 알찬 주말이었으나

월요일 아침 완전 떨어버리고 말았슴 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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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정생 선생님이 돌아가셨다

  • 등록일
    2007/05/18 09:38
  • 수정일
    2007/05/18 09:38

프레시안 기사를 보고 알았다.

한참 이라크 파병 반대 운동때 자동차를 버려야 평화라는 그분의 글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로부터 공감을 얻어냈던가.

http://www.pressian.com/Scripts/section/article.asp?article_num=30070517184459&s_menu=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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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붕 위에 몸을 묶고

  • 등록일
    2006/09/14 03:30
  • 수정일
    2006/09/14 03:30

경찰과 용역이 들어온다는 13일 새벽

인권지킴이집 옥상 평화전망대에서

눈에 불을 켜고 불침번을 서는 친구들



 

 



경찰의 움직임이 포착되자 인권지킴이네 집을 지키러 다섯명의 활동가들이 전망대로 올라왔다. 나와 범생이는 옥상으로 올라가는 입구에 바리케이트 준비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에 설치된 바리케이트 거울... 이것도 방해물이 될까나 - -;

 

경찰들이 몰려옴. 예상대로 인권지킴이집을 에워싸고 출입통제.

사진찍고 있던 나는 기자증이 없다는 이유로 범생이와 함께 쫓겨남.

이후 고추밭에서 사진찍다가 또 쫓겨남.



 


 

경찰에 의해 끌여내려지는 이들, 절절한 비명과 외침...


 

한편, 인권지킴이네 집 철거가 진행되는 중, 근처 집에 들어가려던 주민들을 막고 서 있는 파렴치한 경찰들.

"바로 여기가 내 집이야."

"막어, 막어."

"여기가 내 집이래두, 이놈덜아."

"..."

"이 할머니 집에 가서 약 드셔야 한대요."

"..."



 

 


 

너희들의 철갑과 방패나마 이분들의 울분을 받아안을 수 있으면 좋으련만...

날아올 지팡이가 무서워 잔뜩 긴장하고 있는 어린 전경들



 

그 와중에도 불법채증.

 

 

결국 무너지는 인권지킴이네집


 

알XX이 그린 정신질환장애인 인권의 방을 자기 방으로 쓰던 범생이 눈물을 흘리고야 만다.

(범생이의 눈물 사진은 요청에 의해 싣지 않음.)

 

한편, 내가 인권지킴이 집 쪽에 집중하고 있는 동안, 4반에서는 대대적인 철거가 이미 한창 진행중이었다. 이미 쑥대밭이 된 잔해들... 할 말을 잃음...


 

하지만 지붕 위에 올라가 저항하고 있는 지킴이들도 많았다.

여기에도,

 

또 여기,



 

평통사집 위 문정현 신부님과 지킴이들

 

또 한편, 1반에서는 3채가 사수되고 있었는데...



 

그리고 1반의 다른 두 채를 지키는 사람들...

 

 

3시쯤 용역과 경찰이 거의 빠지고, 마지막으로 경찰이 두 인권 활동가가 지키고 있는 대추리 입구의 집을 부수고 활동가들을 연행하려고 해서 마을안 공소에서 열리기로 했던 미사를 철거하려는 집 앞으로 장소를옮겼다. 지붕 위에는 두 활동가가 싸우고 아래에는 주민들이 미사를 보고 그 주위를 경찰들이 에워싸고 있는 모습. 고등학교 이후에 한번도 그어보지 못한 성호를 가슴위로 그어보다.


 

주민분들과의 실갱이 끝에 경찰이 물러가고 1반의 집 3채를 덤으로 구하다.

 


 

문정현 신부님과 둘의 해우...

 

긴 하루

절말 기인 긴.

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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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지 않았다

  • 등록일
    2006/09/14 02:06
  • 수정일
    2006/09/14 02:06

지지않았다.

끝까지 잡아가겠다던 경찰들과 용역들이 물러가고,

인권활동가 두명이 마지막으로 지붕위에서 내려왔을때,

주민들과 지킴이들의 표정을 보고 난 알았다.

내려오면 잡아가지 않겠다며 ,

처진 눈의 무궁화 네개짜리 짭새가 능청스레 회유할때,

"몇 년 동안 싸우며 내 늬들의 구라를 잘 알고 있다"며,

땡비처럼 바락바락 대드는 지킴이와,

지붕에서 절대 내려오지 않던 활동가 친구를 보고,

난 알겠더라.

정부가, 국방부가, 언론이 60채가 넘는 가옥이 부수어졌다며,

주민들에게 패배를 선고할때에도,

우리가 지지 않았다는 것을.

몸을 지붕에 묶어 14채나 구했다고,

중여한 건 파괴된 60여채가 아니라, 살려낸 14채라고,

주민분들이 안도하는 모습을 보며,

그렇구나, 점점더 능숙해지는 우리들의 '지지않는 법'

점점더 말랑말랑해지는 대추리의 평화

 

5월 4일 보다 더 평화로운 오늘,

오늘보다 더 평화로울 그날,

오늘이 있어 그날이 온다.

꼭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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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글대는 평화

  • 등록일
    2006/09/12 23:10
  • 수정일
    2006/09/12 23:10
어제 천신만고 끝에 대추리를 들어올 수 있었다. 사실 가기 전에 갈까말까 한참을 망설였다. 처음에는 20:80이었던 마음이 80:20으로 돌변하여 결국은 오게 된 계기는 무었이었을까? 우선은 이번주에 빼기로 했던 썩은 사랑니를 안 빼보기로 했다. 그렇게 결심하고 나니 대추리에 안 갈 구실이 사라졌다. 여차여차 저차저차 천신만고 끝에 대추리엘 들어와서 어제는 밤새 경찰이 올까 망을 보았다. 화요일 새벽설, 거의 확실하다고 믿었는데, 이눔들은 오질 않는다. 새벽에 지친 몸을 뉘이고 11시께쯤 일어나서 천천히 밥을 먹고 도서관에서 피자매 발송업무를 보고, 저녁에 냉장고에서 막 쉬기 전인 두부를 요리했다. 먼저 노릇노릇 들기름에 두부를 지지고, 간장, 물엿, 마늘, 파, 고춧가루를 넣고 조리니 제법 근사한 두부 두루치기 완성이다. 대추리에 있으면 모든 것들에 일상의 평화가 깃들여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파괴와 전쟁을 앞둔 작은 일상의 외침들... 두부가 지글대며, 커피물이 폴폴 끓으며, 남비 뚜껑이 들썩이며...평화가 외친다. 아저씨 한분이 지킴이 집 앞 텃밭에 물을 대고 있다. 내일 새벽이면 곧 애들이 들이닥칠텐데, 그래도 일상의 본능, 평화의 본능은 그렇게 가늘고 길게 이어질 것이다. 호 수의 물줄기처럼 여리지만 줄기차게, 모든 집이 부숴진다해도, 그걸 믿고 싸우는 거다. 지지만 지지않는 싸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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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리면 맞는다?

  • 등록일
    2006/07/10 19:37
  • 수정일
    2006/07/10 19:37

그렇다. 우리의 힘으로는 절대 공권력을 이길 수 없다. 당해낼 수 없다. 새까맣게 도열한 전경들 앞에, 힘으로 내리누르는 그들 앞에 우리는 절대 힘으로는 당해낼 수 없다는 것을 안다. 우리는 원초적으로 비폭력이다. 상황이 그렇다는 거다. 힘센 A와 약한 B는 본래적으로 폭력/비폭력의 상황에 처해 있는 거다.

 

그렇다고 맞아야 하는 것인가?

안정리 상인들로부터 돌을 맞고 밀려나고 난 후, 평택역에서 어느 연설자가 말한다. "그들이 때리면 맞고, 죽이면 죽자"라고. 나는 그 연설자의 결의에 찬 발언에 모골이 송연해진다. 연설자에게 "그건 아니다"라고 소리치고 싶다. 비폭력은 어쨌건 개인 각자가 즐거워야 하고, 강요되어서는 안된다라고 말하고 싶다. 강요된 비폭력은 개인의 자위권을 무시한 또 하나의 자기 폭력이고, 그게 전체화되면 전체주의적 폭력의 근간이 된다고 웅변하고 싶다.

 

무엇보다, 이런 저런 말은 떠나,

나는 아프고 싶지 않다. 다치고 싶지 않다.

나는 생각한다. 비폭력은 내 몸에 대한 비폭력 감수성으로부터 시작한다고.

내가 다치고 싶지 않은 마음, 내가 아프고 싶지 않은 마음,

그 마음으로 나는 다른 사람도 다치지 않았으면, 아프지 않았으면 하는

공감력이 생겨난다. 그것이 비폭력의 출발이 아닐까?

 

폭력에 나를 무방비하게 내놓은 채,

그들이 때리면 맞고, 죽이면 죽는 것이 비폭력이 아닐게다.

그들이 날 때리려고 각목을 내리치면 나는 몸을 돌려 피하거나,

무언가로 내 몸을 보호하려 할 것이다.

하지만 이런 기본적인 비폭력 행위와 회피는 다르다고 생각한다.

비폭력이란 것이 우리의 예정된 행진을 중단하거나, 아예 공권력에 맞서기를 포기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어떻게든 우리에게 가해오는 폭력을 막으면서 우리의 길을 가야한다. 

비폭력은 직접행동과 함께 가는 것이다.

 

어 떻 게?

 

여기에서부터 비폭력은 그 빛을 발하기 시작한다.

비폭력과 직접행동이 만나면서 생겨나는 '딜레마'로부터, 그 딜레마가 있기 때문에, 비폭력은 다양한 상상력과 방법론으로 즐겁게 우리의 머릿속에서 둥지를 틀기 시작한다.

폭력이 '아닌' 방법은 맞는 것 말고도 많을 거다.

맞지 않는 방법, 비폭력의 방법을 고안하는 것은 각자의 몫이다.

비폭력은 원칙이라기 보다는 방법론이라고 누군가 말했다.

 

어제 안정리 상인이라고 하는 일단의 무리들이 우리에게 돌을 던질때

나는 왜 어제 가지고 갔던 우산을 펼쳐들지 못했나 하는 후회가 들었다.

그들의 폭력에 압도되어 상상할 마음의 여유가 없기도 했지만,

우산은 비올 때만 쓰는 거라고 틀에 박힌 사고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앞으로는 절대 지레압도되거나 포기하지 말아야겠다.

맞는 것, 다치는 것은 불상사일뿐 비폭력의 방법일 수 없다.

첫째 즐겁게 상상하고

둘째 단단히 준비하자.

 

꽃구경하며 게릴라전을 하는 것이 비폭력 직접행동이라고 일본의 아나키스트가 말했다. 

목숨을 걸고 하는 싸움은 소수만이 할 수 있는 싸움이다.

목숨을 지키는 싸움이야말로 보다 많은 이들에게 공명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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