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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물에서 찾기모든 존재하는 색들의 조화

정동진의 해돋이보다

  • 등록일
    2006/03/25 00:51
  • 수정일
    2006/03/25 00:51

 

 

대추리의 일몰이 더 아름답더이다.

어제와 오늘은 모판에 흙을 담았습니다.
모 파종을 하기 위한 것이지요.

그 모가 무럭무럭 자라 황새울 들녘이
지는 해와 함께 황금빛으로 일렁이는 모습을

꼭 보아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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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몸 망치는 줄 모르고

  • 등록일
    2006/01/17 09:23
  • 수정일
    2006/01/17 09:23

다들 멀쩡해보이는 사람들도 한가지 두가지의 마음의 병이든, 몸의 병이든 앓고 있다는 것 같다. 마음의 병이든, 몸의 병이든, 불면이든, 발가락의 고질적 습진이든 떼어버리려 안간힘을 쓰기보다 서로 돌봐야 다스려지는 듯 하다.

그제 이비에스에서 본 다큐멘타리에 보니 이 세상의 바이러스들, 조류독감이든 HIV든 다들 인간이랑 같이 살아볼려고 그 생난리를 치는 거란다.

숙주인 인간을 죽이는 것도 그네들의 입장에서도 치명적. 그래서 될수 있으면 인간을 죽이지 않고 살짝 더부살이 하다가 다른 인간으로 옮겨가는 기술이 그네들이 평생을 연마해야할 생존기술인 거다. 사람을 아작네는 조류독감이나 HIV는 아직 초보 하발이들이라는 얘기다.
바이러스의 입장에서 사람을 보니, 참 '현대 문명인'들이란 이 바이러스보다도 생존능력이 없는 존재들이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무엇이든 그 자리에서 부시고 빼앗고 모두 자기것으로 만들려고 든다. 제 몸 망치는 줄 모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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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15일 체포된 일본 반전활동가들을 위한 성명서

  • 등록일
    2005/08/19 10:37
  • 수정일
    2005/08/19 10:37

일본 활동가로부터 긴급 메일을 받았습니다.

다음은 http://antifa815.podzone.org/en/ 의 내용을 번역한 성명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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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15일 야스쿠니신사 참배 반대시위에서 '불법' 체포된

4명의 일본 반전 활동가들을 지지하는 성명서

 

2005년 8월 15일 군국주의와 외국인차별을 기치로 내건 일본의 우익 단체들이 도쿄 야스쿠니 신사에서 6천명의 군중을 동원한 대규모 행사를 진행했다. 이들 우익들 중에는 신조 아베, 신타로 이시하라 등 일본의 핵무기 무장을 지지하는 각료와 의원들도 참가했다. 이들은 종전 60년을 맞이하여 전쟁으로 죽어간 군인들에게 애도를 표했다.

 

이들의 행동은 과거 일본의 동아시아 침략을 미화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최근의 이라크전 참전을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행위로서, 무수한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고 간 전범으로서의 책임을 부정하고 이에 희생당한 사람들을 망각의 심연으로 빠뜨리는 것이다.

 

이날, 12시 사이렌이 울리고 군국주의자들이 묵념을 하는 동안 행사장에서 몇 백 미터 떨어진 길에서 전쟁 반대 구호를 외치던 친구들이 경찰에게 체포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들은 전쟁과 군국주의를 반대하는 내용의 플래카드를 들고, ‘군인들을 추모하는 행위는 또 다른 전쟁을 준비하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었다. 이어 약 50명의 사람들이 플래카드를 들고 야스쿠니 신사로 행진하려고 하자 중무장한 전경들이 새까맣게 몰려들어 이들을 에워싸고 폭력적으로 시위대를 해산시키려 하였다. 경찰은 심지어 지나가던 사람들을 공격하기도 했다. 결국 4명의 친구들이 그룹에서 떨어져 나와 경찰에 체포되었는데 이들의 체포 사유는 “공무집행방해”였다. 도대체 경찰의 그 신성한 “공무”가 무엇이었는지, 전쟁에 반대하기 위해 모인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공격하고 해산시키는 것이 진정 경찰의 “공무”인지 묻고 싶다.

 

일본 경찰이 시위대를 사소한 이유를 붙여 진압하거나, “급진파”니 “극렬분자”니 하며 체포해가는 일이 한 두 번이 아니다. 우리 반전 활동가들은 항시 체포의 위협에 노출되어 있다. 우리에게 정치적 행동의 권리와 의사표현의 자유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날이 갈수록 권리와 자유는 무시되고 소위 ‘법집행’이라는 이름의 탄압은 점점 그 강도를 더해가고 있다. 더욱이 시민들의 자발적인 행동은 공공의 평화와 질서를 위협하는 것인 양 왜곡되고 있다. 진정 평화와 질서에 위협이 되는 것은 그들의 ‘법집행’ 행위가 아니던가! 다시 무시무시한 전쟁 시대의 사회 분위기로 돌아가는 것 같아 위기감을 감출 수가 없다.

 

우리는 전쟁과 군국주의에 반대한다. 또, 전쟁반대 의사를 표명하는 우리의 정당한 권리를 침해하는 경찰국가 체제를 반대한다. 심판받아야 될 대상은 플래카드를 들고 있는 시민들이 아니라 그들의 행동을 탄압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는 세력들이다. 여러분들께 묻고 싶다. 단순히 전쟁반대 의사를 표명한 시민이 “극렬분자”인가, 아니면 폭력적으로 이들의 행동을 제지한 당국이 “극렬분자”인가?

 

여러분의 지속적인 지지와 지원에 감사드리며,
체포된 반전 동지들을 위한 지지 모임
ANTIFA 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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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저항자들(WRI) 국제 세미나~~~

  • 등록일
    2005/06/27 09:24
  • 수정일
    2005/06/27 09:24
돕헤드님의 [내일부터 시작하는 국제세미나] 에 관련된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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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흡과 명상 찬양

  • 등록일
    2005/05/13 10:06
  • 수정일
    2005/05/13 10:06

마석 꼬빌이 출입국에 잡혀갔다는 소식을 들었다.

게다가 마붑의 친한 친구가 5개월 동안 임금을 받지 못하고 공장을 나왔다.

진작에 그 공장에서 나왔어야 했는데...

지금 이 친구는 피씨방과 찜질방을 전전하고 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핸폰마저 잊어버려서 당장 친구들과 연락할 수도 없게 되었다.

회사에서 6시 땡치자마자 불이 나케 나와 테크노마트 중고폰 가게로 가서

5만원에 애니콜 폰 하나를 사고 나니 7시 30분이 넘었다.

요가학원에 가야하는데 너무 늦은 건 아닌지 모르겠다.

대강 테크노마트 지하 푸드코트에서 2천5백원짜리 통만두를 사먹고

또 부리나케 학원으로 향했다.

 

요즘엔 풀무호흡이라는 걸 배우고 있는데,

15번정도 복식호흡을 강하게 하고 난 다음에

크게 들이쉰 숨을 최대한 오래 참는 호흡법이다.

이때 X꼬를 함께 조여주고 배도 안으로 넣어야 한다.

요가장에는 약 여덟명 가량의 사람들이 제각기 다른 리듬으로

호흡을 한다. 코에서 나는 소리도 서로 너무 다른데,

어떤 이는 색색하는 소리가, 또 어떤 이는 흥흥하는 소리가 난다.

어떤 이는 들어마시는 숨이 태풍같고, 또 어떤 이는 내쉬는 숨이 폭포같다.

풀무호흡을 약 20분정도 하고 어깨를 떨구고 3분 정도 명상을 하는 시간이었는데

갑자기 마음이 슬퍼지면서 나와 세상에 대한 자비스러운 연민에 휩싸이면서 눈물이 나는 거다. 하루종일 쌓아두고 있는 감정의 형태들이 눈에 잡히는 듯.

요즘 골머리를 앓고 있는 전세 계약 건이나,

공장에서 나온 마붑의 친구에게  핸드폰을 그냥 주지는 말아야지, 하는 계산과,

꼬빌이야 어차피 캐나다에 가서 살 거니까 도와주거나 신경쓸 건 없어, 하는 합리화 등등

감정 그 자체에만 매몰되던 일상에서 벗어나 감정의 형태와 움직임을 '관찰'하면서 가지는 "객관적"인 슬픔이라고 하면 말이 되나?

 

정리해보니

친구이니 뭔가 도와줘야 한다는 심적 압박 VS 손해보지 않겠다는 이기심의 대결이다.

이 감정이 옳다 저 감정이 바르다 라는 판단할 수는 없는 일.

도와줘야 한다는 이타심이 옳고 손해보지 말아야 한다는 이기심이 나쁜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이다.

오히려 도와줘야 한다는 이타적 강박이, 손해보지 말아햐 한다는 이기적 강박을 기르는 경우가 많고, 손해보지 말아야 한다는 이기심이 도와줘야 한다는 이타심을 불러일으키는 경우도 왕왕 있다.

 

음... 정말 써보니 그렇다.

치우침과 강박이 마음의 병을 키우고 몸도 상하게 한다.

너무 착한 척을 하는 건 위선이고, 너무 나쁜 척 하는 것은 위악이다.

위선과 위악 모두 마음과 몸의 균형이 깨졌을 때

어떻게든 그 균형을 찾기 위한 마음의 자구책일 터.

하지만 궁극적인 치유는 이러한 마음의 움직임까지 살펴보고

그릴 수 있을 때 시작되는 듯 하다.

 

나중에 듣고 보니 호흡수련이 어느정도 진행되면 수행중 종종 눈물을 흘리게 된다고 한다.

처음엔 졸음이 오고, 그 다음엔 눈물이 나고... 허!

호흡과 명상은 대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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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성이 꼬리를 물고...

  • 등록일
    2005/05/10 09:57
  • 수정일
    2005/05/10 09:57

윤구병의 "잡초는 없다"라는 책을 퇴근하고 밤마다 짬짬히 읽는다.

평소 변산공동체에 대해서 가지고 있던 막연한 생각과 동경들이

그의 글을 읽으면서, 어떤 것들은 탈색되고, 또 어떤 것들은 더 선명해진다.

녹색평론 등에서도 간간히 공동체를 어떻게 만들어갈 것인가에 관한

좋은 글을 접하곤 한다. 그 중에서도 사람 사이의 관계가 가장 어렵고

가장 두려운 부분이다. 공동체가 아닌 작은 모임 하나 꾸리는 데도

조심스레 이 사람 저 사람의 마음자리를 살펴 일을 만들고 나누어야 하는데,

매일 매일 아침에서 밤까지 부대끼며 살아야 공동체에서의 삶이란 

얼마나 버겁고 때론 고역스러울까. 사랑이 아닌 증오가 더 크게 자랄 수도 있겠다 싶다.

 

저 멀리 변산으로 갈 필요도 없이 지금 함께 살고 있는 내 파트너와의 관계만 봐도

공동체 속에서 행복하게 사는 것이 얼마나 힘든가 알 수 있다.

나는 아침 7시 반쯤 일어나 늘 회사에 출근해야 한다.

반면 내 파트너는 나에 비해 상당히 자유로운 편이다.

방 하나를 함께 써야 하는 우리는 밤마다 작은 전쟁을 치룬다.

12시에 불끄고 자자는 나와, 잠이 안와서 컴퓨터를 하거나 TV를 보고 싶어 하는 그.

게다가 나에겐 오래전부터 불면증이 있어서 잠에 드는 것이 어렵고

조그만 소리나 빛에도 곧잘 깨곤한다.

이렇게 전쟁을 여러번 치르다 보면 마음에 그를 없애고 싶은 미워하는 맘이 생겨나게 된다.

물론 그가 전적으로 나를 배려해주는 편이긴 하지만

 

약 7년 남짓을 혼자 살아오면서

남과의 거리 만들기, 적당한 무관심만이 평화라고 믿어왔던 내게

사람과 부대끼며 만드는 적극적 평화란 이토록 힘겹다.

요즘들어, 내 파트너를 거울 삼아 나를 들여다 보게 된다.

뼛속 깊이 느긋한 내 파트너와 달리,

개발주의의 강령이 휩쓸어버린 이 사회의 학교 독, 강박, 소외된 교육, 외로움, 경쟁심, 열등감과 짝패를 이르는 우월감, 자만, 독선이 내 몸과 마음에 얼마나 큰 병을 키웠는지,

그가 11명의 형제들과 부모님과 함께 살아오면서 터득한 공동체의 지혜에 비해

나는 3형제 막내로 태어나서 남의 마음이야 어떻든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하려는

지금도 한참 마마걸 수준이라는 걸...

 

부끄럽게 깨닫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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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병역거부자 최진씨의 활동수기: 차 없는 날

  • 등록일
    2005/03/12 14:09
  • 수정일
    2005/03/12 14:09
병역거부자 최진 씨 활동수기) 차 없는 날 최진(초등학교 교사, secretroad@hanmail.net) 최진 씨는 현재 문경 용흥 초등학교 교사로 5월 15일 입영을 앞두고 병역거부를 선언했습니다. 최진 씨와 함께하고자 하는 분은 후원회 홈페이지: http://cafe.daum.net/naagaljin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지난 6월 25일 구속판정을 받았으나, 6월 28일 구속적부심에서 최종적으로 불구속 결정되었고 현재 재판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차 문짝을 수리하기 위해 아침 출근길에 차를 맡겼습니다. 날이 조금 더워졌지만 그럭저럭 퇴근 시간이 되었습니다. 여유있게 컴퓨터를 끄고 전원을 뽑고 문단속을 하고 교무실에 열쇠를 걸고 신발을 갈아신고 문단속을 하러 오신 아저씨에게 인사를 드리고 주차장으로 나갔습니다. 아무도 없더군요. 아침에 차를 맡긴 사실을 까맣게 잊고 있었습니다. 하는 수 없이 교문으로 걸음을 옮겼습니다. 차를 타고 다닐 때는 부랴부랴 고개만 까딱이며 인사를 드린 구멍가게 할머니께 “안녕하세요!”하며 목소리를 들려드렸습니다. 할머니의 주름진 웃음이 걷는 속도만큼 느리고 길게 따라옵니다. 마을을 벗어나자 성주봉의 뒷머리가 초여름의 생생함으로 빛나고 바람불때마다 하얗게 뒤집어지던 참나무들의 색이 짙어졌습니다. 길 옆이나 산 허리에는 하얀 찔레꽃이 은하수 별무리처럼 한창입니다. 아이들이 코를 쿡 쳐박고 찔레꽃 냄새를 맡다가 코끝에 노란 꽃가루 묻히고선 땡벌처럼 웃는 모습이 떠올라 저도 빙그레 웃습니다. 물길 따라 가던 길이 갈라집니다. 새로 난 길을 버리고 가로 막은 옛 길에 몸을 올립니다. 인적은 드물지만 몇 대 지나 다니는 차마저도 길을 제대로 걷기엔 번거로운 탓입니다. 그러나 얼마 가지 못해 덜컥 겁을 집어먹고 새로 난 길로 걸음을 돌립니다. 산의 속살이 벌겋게 드러난 비탈에서부터 제 몸집만한 바위돌이 서너개 굴러 내려왔기 때문입니다. 여기는 제작년부터 소형 댐공사가 진행 중입니다. 낙엽송이 거의 다 베어지거나 꺾여져 나가고 몇 그루 남은 나무들만 흘러내리는 흙과 돌과 폭파음에 맞서고 있습니다. 출퇴근 길에 늘 보는 풍경이지만 오늘처럼 가슴 저리지는 않았지요. 댐이 완공되고 수위가 높아지면 가까스로 살아남은 생명들마저 지워질겁니다. 그저 끝까지 생을 포기하지 않는 형제들을 향해 침묵으로 존경과 아픔을 전했습니다. 이라크라고 다를 바가 있겠습니까. 아무런 감정도 없이 굴러가는 포크레인과 불도져의 굉음이 산과 산의 생명들을 짓누루고 살해하듯이 이라크 사람들을 향한 무심한 총부리가 그들의 평화를 부수고 있습니다. 사람으로서의 권리를 빼앗고 생명을 죽이고 있습니다. 그들은 나와 같은 사람이고 나와 같은 생명입니다. 그들은 어쩔 수 없는 절망의 나락에서 총을 들고 몸에 폭탄을 두릅니다. 삶의 기쁨과 감사는 하느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인데 그것을 빼앗아가는 폭력 앞에서 저는 이 땅의 교사로서 이 나라의 국민으로서 아무 것도 할 수 있는 게 없었습니다. 저의 병역거부는 그 절망 앞에서 사람답게 살고자 하는 몸부림입니다. 정말 답답한 마음에 선택한 길일 뿐입니다. 마음에 난 길이 이즈음 닿자 유치원 선생님의 차가 옆에 섰습니다. 도자기를 보고 내려오시는 길이라 만날 수 있었습니다. 1시간 정도 발품을 덜었네요. 그러고도 마을까지 가는 버스를 놓쳐 30여분을 더 걸었습니다. 나즈막한 비탈을 오르는데 아랫마을까지만 가는 버스가 서더군요. 어둠이 멀지 않아서 이 버스라도 타야했습니다. 간만에 걸어서인지 허기가 지더군요. 버스기사 아저씨가 저녁을 드시는 사이 터미널 옆 포장마차에서 만두와 오뎅을 먹으며 허기를 지웠습니다. 제가 버스에 오르자 다시 버스가 출발하였습니다. 모퉁이를 돌자 커다란 바위산인 희양산이 하얗고 훤한 이마를 드러냈습니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희양산에게 경례를 붙이고 양산천 계곡을 따라 집을 향했습니다. 저녁 바람이 뺨을 어루만집니다. 물냄새 풀냄새가 계절의 추억을 되살려주네요. 어둠이 오는 것이 이제 눈에도 보입니다. 가늘게 눈뜬 초생달 옆으로 개밥바라기(초저녁에 뜨는 금성의 우리말 이름)가 떠있네요. 전에 아이들이 개밥바라기를 보고 “하늘에 누가 압정을 박아놨어요!”하며 놀라던 모습이 생각납니다. 무성한 느티나무 그늘처럼 오늘 같은 밤엔 추억도 무성합니다. 아, 이제 마을에 접어들었습니다. 논둑을 따라 난 지름길을 지나 마지막 비포장길에 닿았습니다. 고개를 넘자 마을 전경이 가늘게 남은 저녁 빛을 타고 눈 앞에 펼쳐집니다. 저 앞에 우리가 손수 지은 집들이 고즈넉히 빛을 발하고 있습니다. 물댄 논에는 검어진 산이 몸을 담그고 있습니다. 보석함 같은 그 속에 물까치도 날고 감나무도 서 있고 초생달도 개밥바라기도 가만가만히 흔들리며 담겨있습니다. 논에 담긴 개구리 울음소리가 발걸음소리에 놀라 지워졌다가 다시 개골거리며 길 가는 이의 걸음을 응원합니다. 이 속에 연두빛 모가 서고 여름으로 자라올라 물댄 논의 풍경들을 덮을 겁니다. 그러나 걱정마세요. 아름다운 풍경은 덮여서 사라진 것이 아니라 나락 하나 하나에 같이 영글어 있지요. 아이들의 눈동자 속에 담긴 풍경 역시 삶으로 영글기 마련입니다. 우리가 만들어가는 세상이 오늘 내가 본 풍경처럼 아름답기를 소망합니다. 삶은 너무나 아름답기에 절망도 큽니다. 그러나 포기할 수는 없지요. 우리의 아름다운 일상을 되찾는 싸움은 이제 시작입니다. 져도 지지 않는 싸움이 우리의 일상이니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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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대통령은 우리가 무엇을 잊어버리길 원하는가?(번역)

  • 등록일
    2005/03/12 13:21
  • 수정일
    2005/03/12 13:21
미국 대통령은 우리가 무엇을 잊어버리길 원하는가?
-Robert Fisk 2002 10.9
(infoshop.org에서 펀글)

요즘은 매일매일, 전쟁광 조지 부시가 내뱉는 상상을 초월하는 말들을
듣고 살아야 한다. 어제는 부시가 Cincinnati에서 “핵무기에 대항하는
신성한 전사들nuclear holy warriors”라는 말을 서슴없이 내뱉었다. 부시는 우리에게 여러 가지 사실들을 잊어줄 것을 요구하는 것 같다. 이라크에 핵무기가 있는 것이 아직 증명되지 않았다는 사실, 최근 부시와 블레어의 말에서 드러나는 불명료한 “그럴지도 모른다”, “만약 ~한다면” “그럴 가능성이 크다” 뭐, 이런 것들이 다 말장난이라는 것, 그리고 오사마 빈 라덴이 핵무기를 손에 넣었다면 맨 먼저 사담에게 사용했을 거라는 것 등등. 우리는 이 모든 것을 잊어야 한다.
또 우리는 잊어야 한다. 어제 부시가 연설하기 바로 몇 시간 전에 이스라엘 군에 의해 14명의 팔레스타인인들이 죽었다는 사실, 그리고 사망자 안에는 12살 난 아이가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 또 이스라엘 총리 샤론이 7월에 9명의 팔레스타인 아이들을 무자비하게 살해했을 때, 부시 입에서는 “샤론은 평화적 인물, 그는 위대한 사람이다”라는 말이 나왔다는 사실을.
테러라는 말을 그는 후세인, 오사마 빈 라덴, 야셀 아라파트에게만 사용한다. 다시 말해 이스라엘과 미국에 대항하는 사람들에게만 적용하는 것이다. 부시는 어제 연설 30분 동안에 30번 이 말을 사용했다.
그러나 이제 좀더 정확하게 우리가 그를 지지할 때 반드시 잊어야 할 것들의 명세서를 작성해 보자. 먼저 우리는 1983년 12월에 레이건이 사담 후세인에게 특사를 파견한 사실을 잊어야 한다.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이유에서 우리는 반드시 이 사실을 잊어야 한다. 첫째, 사담은 아란과의 전쟁에서 이미 독가스를 사용한 바 있다. 그 때 레이건은 그 사실을 눈감아 주었다. 그런데 새삼스레 지금에 와서 생화학 무기 운운하며 전쟁을 벌이려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둘째, 그 때 이라크에 특사를 보낸 건 이라크와의 재수교를 위한 것이었다. ‘바그다드의 백정’ 후세인과 무역과 경제에 대한 긴밀한 협조를 목적으로 만난 것이다. 셋째로, 그 특사는 바로 다름이 아닌 도널드 럼스팰드(Donald Rumsfeld)였다. 따뜻하게 악수까지 했던 사람이 실제로는 악마라는 것을 이제 와서 우리에게 밝혀주기라도 하겠다는 것인가? 그런데 이상하게도 럼스펠드는 그 일에 일언반구도 없다. 1984년 3월 럼스펠드가 이라크의 타릭 아지즈와의 회담하고 있던 기간에 사담이 이란에 독가스를 사용했다는 보고서가 날아들었다. 그럼에도 미국의 미디어는 그저 잠잠하기만 했다. 아마도 우리가 꼭 잊어야 할 사실이었음에 틀림없다.
또 잊어야 할 것들이 있다. 1988년 사담이 가스로 수 만 명의 쿠르드인들을 사살했을 때 – 부시, 체니, 블레어, 쿡, 스트로 등의 말을 인용하자면 “자기의 국민들에게 가스를 사용했을 때” – 아버지 부시는 UN 정부 보조금이라는 명목으로 미국의 농산물을 사는 대가로 그에게 5억 달러를 지급했다. 또 사담의 쿠르드족 인종청소가 끝난 그 다음해에는 아버지 부시는 보조금을 10억으로 늘렸다. 탄저균 종자, 헬리콥터, 생화학 무기로 사용할 수 있는 물질들의 지원과 함께 말이다.
아들 부시가 이라크 국민들에게 후세인이 제거된 후의 “새로운 희망의 시대”와 민주주의를 약속 할 때, 우리는 또 잊어야 할 것들이 많다. 우리는 1980년에 소련군을 물리치면 희망의 시대가 도래할 것이라고 파키스탄과 팔레스타인에게 한 미국의 약속을 잊어야 한다.
우리는 또 아버지 부시가 1991년에 이라크 국민들에게 사담을 제거하면 새로운 희망 시대가 도래할 것이라고 약속하고는 아무것도 해주지 않은 것을 잊어야 한다. 또 1993년에 소말리아에게 새로운 희망을 시대를 약속하고는 “Black Hawk Down”(?) 이후에 그 나라를 완전히 포기한 것을 잊어야 한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작년 아들 부시가 아프카니스탄을 폭격하기 전에 기필코 아프카니스탄을 지켜주겠노라고 약속한 것을 우리는 또 잊어야 한다. 그 후로 그 나라는 마약상들과 전쟁광들, 혼란과 공포의 소굴이 되어 휘청거리고 있다. 그런데 어제 연설에서 그는 아프카니스탄이 “해방”되었다고 떠벌렸다.
또한 우리는 석유에 대해서도 잊어야 한다. 석유는 아들 부시가 그의 ‘석유 동지’인 체니, 라이스, 그리고 다른 각료들과 함께 가장 잘 알고 있는 분야이다. 한번도 그들의 입에서 언급되지는 않지만 말이다.
어제 부시의 대 이라크전에 대한 30분 연설에는 이라크에는 사우디 보다도 더 많은 석유가 매장되어 있을 지도 모른다는 것, 그리고 미국의 석유 회사들이 전쟁 후에 엄청난 돈을 긁어갈 생각에 침을 질질 흘리고 있다는 것 등등이 전혀 언급되지 않았다. 반드시 잊어야 할 사실들이다. 전쟁에 나서기 전에 반드시 무시하고 넘어가야 할 일들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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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국적포기각서에 서명하는 이유

  • 등록일
    2005/03/12 13:17
  • 수정일
    2005/03/12 13:17
이 글은 제가 한겨레 웹사이트의 "왜냐면"에 기고한 글입니다


내가 국적포기각서에 서명하는 이유
- 매닉

    반전 인간방패로 이라크에 머물렀던 배상현씨와 임영신씨의 국적포기선언이 사람들에게 충격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이들의 국적포기선언의 배경에는 강대국 자신들의 국익을 위해 다른 나라의 주민들을 살상하는 반인륜적인 행위에, 한국이 또한 "국익"이라는 이름으로 동참하는 것에 대한 비참함과 분노가 놓여져 있다. 인간방패로 위험을 무릅쓰고 이라크에 가서 인종, 민족, 국가의 굴레를 모두 던져 버리고 이라크 주민들과 함께 생사를 같이한 이들의 입장을 생각한다면 그러한 선택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다. 분명 이들은 그 곳 주민들과 각 국에서 온 인간방패들과 민족, 국가, 인종을 뛰어넘어 같이 호흡하고 연대하면서 전쟁을 일으키고 전쟁에 동조하는 국가주의, 애국주의라는 집단 이기주의를 넘어서는 보다 근본적인 인간적 감수성을 발견했으리라.
   파병 논란과 그에 따른 이들의 국적포기선언, 또 그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을 보면서 나는 우리나라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거의 모든 담론들이 국가와 민족이라는 테두리를 벗어나지 않고 또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파병 찬성도 국가와 민족을 위한 것이고 파병 반대도 국가와 민족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 심지어 배씨와 임씨의 국적포기선언 또한 어떤 애국심을 담보로 할 때만이 정당한 것으로 여겨진다. 아이러니컬한 것은 이러한 편협한 국익을 위한 행위가 타 국민을 상대했을 때에는 "그들"을 위한 무언가가 된다는 것이다. 중동의 패권을 장악하기 위해 이라크를 침공하면서 겉으로는 그들의 민주화를 위한 해방전쟁이라고 떠들어대는 미국의 이번 대 이라크 전이 그 좋은 예가 될 것이다. 어찌되었건 전쟁의 폭력을 온몸으로 받아내는 것은 힘없는 이라크 주민들, 그들뿐이다. 언제까지 우리는 일반화된 국가폭력의 역사를 잘 알면서도 편협한 애국심을 조장하는 위정자들에게 우리들 자신을 맡겨야만 하는가! 노엄 촘스키의 말처럼 그들에겐 국민은 없는데도 말이다.

국적포기의 의미

    먼저 실질적으로 국적포기가 가능한 것인지에 대해서 얘기해보자.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태어나자마나 출생신고를 통해 대한민국 국적을 가지게 된다. 국적을 포기하기 위해서는 법적으로 다른 국적을 취득했다는 증빙서류를 제출해야 한다. 따라서 내가 알기론 국적 자체의 포기, 소위 무국적자가 되기 위해서는 아예 출생신고를 하지 않는 방법 이외에는 어떤 방법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국적이란 하늘이 내린 숙명과도 같아서 국적포기를 선언한다는 것은 현실적이라기 보다 매우 상징적이라 할 수 있다. 그 상징성에 대해서,
    첫째, 국적 포기 선언은 배씨와 임씨처럼 국가의 부도덕한 행위에 대한 반대의 의미를 담고 있을 수 있다. '나는 평소 대한민국 국민임을 자랑스러워했으나 이번 파병으로 인해 배신감과 분노를 느낀다. 따라서 나는 대한민국의 국민임을 포기하겠다'는 말이다. 이 이면에는 국가의 존재란 도덕적이고 합리적인 행위를 통해 정당화된다라는 전제를 깔고 있다. 다시 말해 국가 존재의 정당성은 무조건적인 것이 아니라 조건적이라는 것이다. 배씨와 임씨의 선언에 충격을 받은 일부 사람들이 인터넷을 통해 그들이 매국노라느니, 진짜 국적을 포기하는지 두고 보겠다느니 하는 욕지거리로 그들을 비판하고 있다. 하지만 그들에 대한 이러한 알맹이 없는 비판은 독재 정권 시대부터 전략적으로 심어져와서 이제는 그 뿌리조차 보이지 않게 깊이 박힌 무조건적 애국심을 반증할 뿐이다. 왜 국적을 포기하는가 하는 그 배경과 조건에 대한 논의보다는 국적을 포기하는 것 자체가 신성모독이고 불쾌할 뿐이다.
    둘째, 국적포기는 국가가 보장하는 권리를 포기하겠다는 것이다. 이는 배씨와 임씨의 입에서 나온 말이다. 국적이 없으면 합법적으로 일자리를 가질 수가 없다. 또 여권과 비자가 나오지 않기 때문에 다른 나라로의 여행도 불가능하다. 언뜻 보기에 국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이렇듯 여러 가지 권리 (노동할 수 있는 권리, 여행할 수 있는 권리 등등)를 보장받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말이 권리이지 구속력에 다름이 아니다. 국적이란 근본적으로 스스로를 자승자박하고 그것을 권리라고 칭하는 모순을 내포하지 않을 수 없다. 구속력이 마치 권리인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그것이 매우 배타적으로 작동하기 때문이다. 그 나라의 국적을 가지지 않은 사람들은 그 나라에서 자유롭게 여행할 수도 일할 수 없다. 그것이 바로 수십만의 이주 노동자들을 생사의 궁지에 몰아넣고 탄압하는 근거가 된다. 이렇게 소수자를 배제하고 억압해서 얻어낸 권리라면 그것이 폭력배가 한 동네를 차지하고 힘없는 사람들에게 통행세를 뜯어내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따라서 국적포기선언은 이러한 배타적 권리, 다시 말해 "국익"이라고 일컬어지는 집단이기주의에 대한 도전이다.

국익이라는 허상

   그렇다면 너도나도 떠들어대는 국익, 이 전쟁이 부당하다는 걸 알지만 힘이 없으니 어쩔 수 없지 않느냐고 들이대는 이 국익의 정체는 무엇인가? 국익이란 정작 누구의 이익인가? 국익은 결국 모든 일반 국민의 이익으로 돌아가는가? 국익은 보통 사람들이라고 하는 택시, 버스 운전사, 길거리의 노점상, 일반 노동자들, 회사원들, 소규모 자영업자에게도 돌아가는가? 몇 년 전 우리는 IMF라는 힘겨운 시기를 보냈다. 당시 김대중 정부는 구조조정과 신자유주의 정책은 필연적이고 오히려 국가 경쟁력을 높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국민들을 설득했다. 그 결과 많은 사람들이 직장을 잘리고 그 동안 군사 독재시대를 참아가며 국민이 묵묵히 일구어놓은 국가 기간 산업들이 송두리째 탐욕스런 자본의 손에 넘어갈 지경에 놓였다. 국가와 기업 경쟁력을 위한 이른바 노동 유연화 정책으로 비정규직 노동자가 50 퍼센트를 넘어서게 되었다. 국민 대다수가 박봉에다 언제 어떻게 잘릴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높은 금리 덕에 돈놀이해서 재미를 본 사람들은 그 부를 주체하지 못할 지경이다. IMF와 신자유주의정책으로 심화된 빈익빈 부익부 현상을 보고도 우리는 국익을 내세우는 국가의 정책이 국민 대다수를 위한 것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가? IMF로 직장에서 잘리고 노점상을 차렸다가 다시 거리 환경미화를 이유로 거리에서조차 내몰릴 수밖에 없는 사람에게, '월드컵은 바로 국익을 위한 것이다. 그러니 당신이 희생하라'고 말할 수 있는가? 도대체 얼마를 희생해야 국익은 바로 나의 이익으로 돌아오는가? 미군에 의해 두 여중생을 비롯한 여러 사람이 희생 당하고있는 상황에서 국익을 위해 어쩔 수 없이 미국과 계속 공생할 수밖에 없다고 우리의 위정자들은 말하는데, 그들에게 묻고 싶다. 도대체 얼마나 기다려야 우리는 미국의 식민지에서 벗어날 수 있는가? 체제 보장만이 유일한 목표인 것처럼 보이는 북한의 김정일 정권과 우리의 대한민국의 정치가들은 어디에서 어떻게 다른가?

국가는 절대선도 필요악도 아니다.

    내가 서명하는 국적포기각서의 의미는 어쩌면 배상현씨와 임영신씨와 다를 수도 있다. 나는 국가와 국민에 실망하고 분노하는 차원이 아니라 앞에 열거한 모든 이유에서 국가 존재는 필요악도 될 수 없다는 입장에 있다. 나에겐 나 자신과 나 자신을 둘러싼 이웃들이 소중하다. 나와 나의 소중한 이웃과 친구들이, 우리를 보호하고 그 이익을 보장해준다는 국익이라는 허상에 넘어가 온갖 가진 자들을 위한 정책에 동조하며 근본적인 도덕적 의지와 비폭력적 감수성을 죽이고 또 전시에는 전쟁기계의 부속품이 되어 희생되기를 원치 않는다. 나는 그동안 아나클랜(anarclan.net) 친구들과 이러한 입장에서 전쟁과 군대를 반대하고 파병을 반대해왔다. 나와 다른 의견을 가진 친구들도 많이 있고 또 어떤 사안에 대해서는 나의 의견에 반대하는 친구들도 있다. 하지만 전쟁이란 국가가 그 폭력적 본질을 스스로 드러내는 사건이라는 점에서는 모두들 동의할 것이라 생각한다. 또한 그러한 국가의 전쟁기계를 멈추기 위해서는, 국력을 키워 전쟁을 억제하자는 차원도 아니고(이러한 주장은 미국과 똑같이 되어 "방어전쟁"을 하자는 말이다) UN과 같은 국가와 국가 차원의 협의기구도 아닌, (이미 UN은 전쟁을 억제하지 못한다.) 오직 "국민도 시민도 노동자도 나 자신 이외에는 아무것도 아닌 잡민"들의 광범위한 연대만이 진정한 길이라는 사실에 동의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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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은 국가의 가장 완벽한 상태

  • 등록일
    2005/03/12 13:15
  • 수정일
    2005/03/12 13:15
19세기에 T.G Green은 전쟁이란 ‘불완전한’ 국가를 표현한다고 말한 바 있는데 그것은 잘못된 것이다. 전쟁이란 국가가 가장 완벽한 상태에 있는 것을 표현한다. 전쟁은 국가의 건강함을 의미한다. 1차 세계대전중에 Randolph Bourne은 이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국가는 어떤 무리가 그와 비슷하게 조직된 다른 무리들에 공격적 혹은 방어적으로 대항하기 위한 조직체이다. 전쟁은 목적과 활동의 물줄기를 무리의 가장 낮은 수준, 가장 외떨어진  가지들로 흘려보낸다. 사회의 모든 활동은 중앙 정부의 군사 작전과 신속하게 연결된다. 그야말로 전쟁을 통해 국가가 평화시 그토록 열망하던 이상적 상태가 되는 것이다. 나태와 불경기는 사라지고 저항세력은 퇴장한다. 국가는 천천히 육중하게 그러나 가속화되고 통합된 힘으로 움직인다. 위대한 목적, 전시(戰時)의 평화로움을 향해...

출처: , Colin Wa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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