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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병역거부자 최진씨의 활동수기: 차 없는 날

  • 등록일
    2005/03/12 14:09
  • 수정일
    2005/03/12 14:09
병역거부자 최진 씨 활동수기) 차 없는 날 최진(초등학교 교사, secretroad@hanmail.net) 최진 씨는 현재 문경 용흥 초등학교 교사로 5월 15일 입영을 앞두고 병역거부를 선언했습니다. 최진 씨와 함께하고자 하는 분은 후원회 홈페이지: http://cafe.daum.net/naagaljin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지난 6월 25일 구속판정을 받았으나, 6월 28일 구속적부심에서 최종적으로 불구속 결정되었고 현재 재판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차 문짝을 수리하기 위해 아침 출근길에 차를 맡겼습니다. 날이 조금 더워졌지만 그럭저럭 퇴근 시간이 되었습니다. 여유있게 컴퓨터를 끄고 전원을 뽑고 문단속을 하고 교무실에 열쇠를 걸고 신발을 갈아신고 문단속을 하러 오신 아저씨에게 인사를 드리고 주차장으로 나갔습니다. 아무도 없더군요. 아침에 차를 맡긴 사실을 까맣게 잊고 있었습니다. 하는 수 없이 교문으로 걸음을 옮겼습니다. 차를 타고 다닐 때는 부랴부랴 고개만 까딱이며 인사를 드린 구멍가게 할머니께 “안녕하세요!”하며 목소리를 들려드렸습니다. 할머니의 주름진 웃음이 걷는 속도만큼 느리고 길게 따라옵니다. 마을을 벗어나자 성주봉의 뒷머리가 초여름의 생생함으로 빛나고 바람불때마다 하얗게 뒤집어지던 참나무들의 색이 짙어졌습니다. 길 옆이나 산 허리에는 하얀 찔레꽃이 은하수 별무리처럼 한창입니다. 아이들이 코를 쿡 쳐박고 찔레꽃 냄새를 맡다가 코끝에 노란 꽃가루 묻히고선 땡벌처럼 웃는 모습이 떠올라 저도 빙그레 웃습니다. 물길 따라 가던 길이 갈라집니다. 새로 난 길을 버리고 가로 막은 옛 길에 몸을 올립니다. 인적은 드물지만 몇 대 지나 다니는 차마저도 길을 제대로 걷기엔 번거로운 탓입니다. 그러나 얼마 가지 못해 덜컥 겁을 집어먹고 새로 난 길로 걸음을 돌립니다. 산의 속살이 벌겋게 드러난 비탈에서부터 제 몸집만한 바위돌이 서너개 굴러 내려왔기 때문입니다. 여기는 제작년부터 소형 댐공사가 진행 중입니다. 낙엽송이 거의 다 베어지거나 꺾여져 나가고 몇 그루 남은 나무들만 흘러내리는 흙과 돌과 폭파음에 맞서고 있습니다. 출퇴근 길에 늘 보는 풍경이지만 오늘처럼 가슴 저리지는 않았지요. 댐이 완공되고 수위가 높아지면 가까스로 살아남은 생명들마저 지워질겁니다. 그저 끝까지 생을 포기하지 않는 형제들을 향해 침묵으로 존경과 아픔을 전했습니다. 이라크라고 다를 바가 있겠습니까. 아무런 감정도 없이 굴러가는 포크레인과 불도져의 굉음이 산과 산의 생명들을 짓누루고 살해하듯이 이라크 사람들을 향한 무심한 총부리가 그들의 평화를 부수고 있습니다. 사람으로서의 권리를 빼앗고 생명을 죽이고 있습니다. 그들은 나와 같은 사람이고 나와 같은 생명입니다. 그들은 어쩔 수 없는 절망의 나락에서 총을 들고 몸에 폭탄을 두릅니다. 삶의 기쁨과 감사는 하느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인데 그것을 빼앗아가는 폭력 앞에서 저는 이 땅의 교사로서 이 나라의 국민으로서 아무 것도 할 수 있는 게 없었습니다. 저의 병역거부는 그 절망 앞에서 사람답게 살고자 하는 몸부림입니다. 정말 답답한 마음에 선택한 길일 뿐입니다. 마음에 난 길이 이즈음 닿자 유치원 선생님의 차가 옆에 섰습니다. 도자기를 보고 내려오시는 길이라 만날 수 있었습니다. 1시간 정도 발품을 덜었네요. 그러고도 마을까지 가는 버스를 놓쳐 30여분을 더 걸었습니다. 나즈막한 비탈을 오르는데 아랫마을까지만 가는 버스가 서더군요. 어둠이 멀지 않아서 이 버스라도 타야했습니다. 간만에 걸어서인지 허기가 지더군요. 버스기사 아저씨가 저녁을 드시는 사이 터미널 옆 포장마차에서 만두와 오뎅을 먹으며 허기를 지웠습니다. 제가 버스에 오르자 다시 버스가 출발하였습니다. 모퉁이를 돌자 커다란 바위산인 희양산이 하얗고 훤한 이마를 드러냈습니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희양산에게 경례를 붙이고 양산천 계곡을 따라 집을 향했습니다. 저녁 바람이 뺨을 어루만집니다. 물냄새 풀냄새가 계절의 추억을 되살려주네요. 어둠이 오는 것이 이제 눈에도 보입니다. 가늘게 눈뜬 초생달 옆으로 개밥바라기(초저녁에 뜨는 금성의 우리말 이름)가 떠있네요. 전에 아이들이 개밥바라기를 보고 “하늘에 누가 압정을 박아놨어요!”하며 놀라던 모습이 생각납니다. 무성한 느티나무 그늘처럼 오늘 같은 밤엔 추억도 무성합니다. 아, 이제 마을에 접어들었습니다. 논둑을 따라 난 지름길을 지나 마지막 비포장길에 닿았습니다. 고개를 넘자 마을 전경이 가늘게 남은 저녁 빛을 타고 눈 앞에 펼쳐집니다. 저 앞에 우리가 손수 지은 집들이 고즈넉히 빛을 발하고 있습니다. 물댄 논에는 검어진 산이 몸을 담그고 있습니다. 보석함 같은 그 속에 물까치도 날고 감나무도 서 있고 초생달도 개밥바라기도 가만가만히 흔들리며 담겨있습니다. 논에 담긴 개구리 울음소리가 발걸음소리에 놀라 지워졌다가 다시 개골거리며 길 가는 이의 걸음을 응원합니다. 이 속에 연두빛 모가 서고 여름으로 자라올라 물댄 논의 풍경들을 덮을 겁니다. 그러나 걱정마세요. 아름다운 풍경은 덮여서 사라진 것이 아니라 나락 하나 하나에 같이 영글어 있지요. 아이들의 눈동자 속에 담긴 풍경 역시 삶으로 영글기 마련입니다. 우리가 만들어가는 세상이 오늘 내가 본 풍경처럼 아름답기를 소망합니다. 삶은 너무나 아름답기에 절망도 큽니다. 그러나 포기할 수는 없지요. 우리의 아름다운 일상을 되찾는 싸움은 이제 시작입니다. 져도 지지 않는 싸움이 우리의 일상이니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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