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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6,70년대 가족계획의 실체를 보자

  • 등록일
    2005/03/12 14:02
  • 수정일
    2005/03/12 14:02

일다에서 퍼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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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0년대 가족계획의 실체를 보자 박정희 경제발전논리와 여성 재생산권-1 이진옥 기자 2004-08-08 18:17:15 <출산과 피임, 임신중절, 가족계획과 관련된 이슈들은 여성의 몸과 성에 대한 권리와 건강권, 재생산권과 아주 밀접한 관련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 사회에선 근대화 정책이나 경제성장 논리에 가려져 제대로 논의되지 못해왔다. 일다에서는 1960~1970년대 국가주도의 가족계획이 어떻게 이루어졌으며, 이것이 여성들의 이해관계와 어떤 연관이 있는지를 2차례에 걸쳐 연재한다. -편집자 주> 최근 가족 해체, 출산율 저하를 국가적 위기로 간주하고 대안을 마련하려는 논의를 심심치 않게 접할 수 있다. 2002년 한국의 출산율 1.17은 그 동안 무시해 왔던 여성이 경제활동 여건을 보장할 수 있는 기본적인 법제 마련에 대한 논의를 끌어냈다. 한편 한국의 출산율 저하 현상을 ‘여성이 몸으로 저항하는 것’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낙태 용인되는 한국은 여성의 재생산권 보호국? 미국 부시 대통령이 집권하면서 세계에 끼친 많은 해악 중 하나는 낙태를 허용하는 국가와, 이와 관련된 단체들에 자금 지원을 중단했다는 점이다. 이는 1960년대부터 시작해 낙태 합법화를 위한 투쟁으로 상징된 여성 건강권 운동(women’s health movements)이 성취한 여성 재생산권의 선택 범위를 제한하며, 다시금 이 문제를 수 십년 뒤의 상황으로 후퇴시키는 것과 다름 없는 조치였다. 그렇다면 낙태가 용인될 뿐 아니라 권장되는 면까지 있는 한국은 여성의 재생산권을 보호하는 국가라고 볼 수 있는가? 1994년에 출판된 한 보고서에 따르면 폴란드와 함께 낙태율 세계 최고 순위를 놓고 경쟁한 바 있고, 여태아 살해(femicide)로 인해 1979년 유엔에 의해 채택된 여성에 대한 모든 형태의 차별 제거를 위해 만들어진 협약(CEDAW: the Conventions on the Elimination of all forms of Discrimination Against Women)의 5항에 따라 인권침해 국가로 분류된 바 있다. 또한 원치 않는 임신으로 인한 미혼모의 증가나, ‘아기 파는 국가’로도 악명이 높은 한국을 여성의 재생산권 옹호국가로 볼 수는 없는 일이다. 한국의 가족계획은 급속한 경제성장과 함께 세계에서 성공적인 사례로 주목받아 왔다. 1960년 전체 출산율 6.0이 1990년에 1.5으로 감소한 것은, 세계에서 유례를 찾기 힘들다. 1993년 가족계획에 투자된 세계 각국의 정부 노력 평가에서 한국은 중국 다음으로 2순위를 차지했다. 이는 출산력 감소가 단지 경제성장이 가져다 주는 사회 변동의 결과로 나타났다기보다, 출산력 통제를 위해 국가가 적극적으로 개입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박정희의 경제발전 논리로 출발한 산아제한 정책 출산력을 감소시키려는 본격적인 노력은 박정희 정권에 들어서면서 ‘인구 증가가 가난의 핵심적 이유’라는 맬서스의 진단을 수용하고, 인구정책을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국책사업에 통합시키면서 시작된다. 이는 박정희가 쿠데타로 획득한 정권이 정치적 정당성을 세우고자 한 발전주의 논리에서 산아제한이 출발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박정희 정권은 이전에 피임약과 피임도구의 수입을 금지했던 법을 1961년에 폐지했고, 그 이듬해에 보건사회부 관할 하에 가족계획사업을 추진했으며, 민간단체인 대한가족계획협회 또한 보건사회부 관리 하에 두었다. 1961년에서 1979년까지 박정희 정권 하의 가족계획 변모를 순차적으로 살펴보면, 가족계획 초기에는 전국의 보건소에 가족계획 요원들을 파견하여 의식향상 캠페인을 하고 경구피임약을 보급했다. 1964년에는 자궁 내 피임기구(IUD)를 도입했으며, 주로 간호사와 조산사로 구성된 가족계획 현장요원 수를 늘려 읍과 읍 단위의 1천473개 부설 보건소에 파견하고 외진 곳까지 미칠 수 있는 기동팀을 구성했다. 1968년에는 스웨덴 국제 개발국이 경구 피임약을 공급하고, 미국 국제개발처에서 상당한 자금을 지원한 것을 바탕으로, 전국적으로 가족계획어머니회를 조직했다. 이는 한국이 세계인구개발전략의 수혜자라는 것을 의미하지만, 동시에 한국여성들이 스웨덴이 ‘덤핑’한, 안정성이 확인되지 않은 피임약의 수령인이 되었다는 것을 말한다. 1973년엔 여성이나 태아가 치명적인 건강 상태에서는 임신중절을 허용하는 모자보건법이 통과되었고, 이후에는 병원 프로젝트, 산업단지 프로젝트, 도시빈민 프로젝트, 인구교육 프로젝트 등 국가 사업에 여성불임을 포함했다. 1976년에는 두 명 이하의 자녀를 가진 가족들에게는 소득세를 면제하거나, 불임술을 시행한 가족에게는 공공주택 우선권을 주는 등 적극적 사회조치(incentives/disincentives)가 도입됐다. 강요에 의한 불임 등 몸에 대한 통제권 잃어 이러한 정책들은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1962~1966)이 끝날 때까지 인구증가율 2.9%에서 2.5%로, 제2차 5개년 계획(1967~1971)이 끝날 때까지는 2.0%로 내리겠다는 목표 설정 하에 도입된 것이다. 수치 달성의 임무가 할당된 가족계획 사업에서 여성의 몸과 출산에 대한 여성 개개인의 권리가 고려되었을 리 만무하다. 특히, 적극적 사회조치의 도입으로 불임수술 수용자 수가 1974년 3만5천에서 1977년 23만5천으로, 단 3년 동안 7배로 늘어나는 결과를 가져왔다. 한 자녀 출산 후 불임술을 하면 국가의료원에서 그 자녀 출산비용을 무료화했고, 불임을 한 부부에겐 주택융자의 우선권이 주어졌다. 뿐만 아니라 빈민에게는 무료로 불임술이 시술됐고 현금으로 보조금이 제공됐다. 남성이 불임을 택하면 예비군 훈련 면제의 특혜를 제공해, 불임술을 받은 남성의 70%가 민방위 훈련 장소에서 그것을 결정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임사업은 주로 여성에게 집중되어 있어, 불임을 택한 여성의 수가 남성의 수에 비해 3배가 훨씬 넘어섰다. 조형 교수(이화여대 사회학과)는 연구를 통해 일부 농촌여성들은 자신의 몸에 피임용 자궁 내 고리(loop)를 이식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으며, 그들이 이웃이나 방문하는 가족계획요원의 요구를 수용하도록 강요 받았다는 것을 밝힌 바 있다. 뿐만 아니라 임신중절은 한국가족계획연구원으로부터 급격한 출산감소의 요인이 될 뿐만 아니라, 주된 피임수단으로 인지되기까지 했다. 또한 월경규제(menstrual regulation)라는 일종의 임신중절이 임신 8주 미만의 여성에게 권장됐다. 결과적으로 박정희 정권의 말기인 1979년에는 전체 출산율과 낙태율이 2.9로 같은 수치를 기록하게 된다. 이는 법적으로 낙태가 악화된 건강상태의 여성에게 제한되어 있는 것을 고려하면, 대부분의 낙태가 불법적으로 시술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가족계획 둘러싼 국가의 이해와 여성의 이해 이 같은 사실들은 국가가 어떻게 여성의 몸에 직접적으로 관여해왔는지 보여준다. 이는 발전주의 국가가 단지 수출지향 산업에 젊은 여성노동자들을 저임금으로 착취하는 방식뿐 아니라, 강제적인 수단을 이용해 여성의 출산력을 통제, 조작함으로써 경제성장에 이용했음을 의미한다. 한편, 여기서 또 하나의 질문을 던져본다면 여성 또한 스스로 출산력 통제의 수단을 획득하게 되길 바라지 않았는가 하는 점이다. ‘피임의 선택권’을 갖는 것은 한편으로는 여성들의 오래된 염원이었기 때문이다. 피임도구가 대중적으로 보급되고, 그것을 활용하게 된 것은 경제성장을 추구하는 국가의 이해였지만, 또한 여성의 이해이기도 했다. 1977년의 가족법 개정과 “아들 딸 구별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라는 표어는, 남아선호사상을 산아제한의 걸림돌로 진단하고 개선해보려는 정부의 실천적 제스처로 이해할 수도 있다. 우리는 이들 간의 차이와 연관성을 규명해야만 한국사회의 여성 재생산권에 대해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다음 기사 예고: 가족계획어머니회의 활동과 그 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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