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웰빙이 밉다

  • 등록일
    2005/03/12 14:00
  • 수정일
    2005/03/12 14:00

웰빙이 밉다

- 매닉


요즘에는 상품에 ‘웰빙’이라는 수식어가 붙지 않은 물건을 찾아보기가 힘들 지경이다.
웰빙푸드, 웰빙 아파트, 심지어 웰빙 바캉스까지 떡 하니 한 상업 잡지의 섹션으로 자리잡고 있다.
심지어 건강에 좋지 않기로 유명한 각종 페스트푸드점들도 호밀빵이니, 유기농이니 하며 상품의 가격을 올리고 있다.
한번은 캐나다 친구와 어느 유명한 패스트푸드 햄버거집에 들어갔는데, 계산대에서 이 친구가 어이없다는 듯이 마구 웃는 것이었다.
왜 그러냐고 물으니까 “그린 포크”라는 문구 때문이라는 것이다.
한글로 직역하면 “푸른 돼지고기”라는 뜻인데, 싱싱한 고기라는 뜻이겠거니 생각했는데, 웬걸, 반대로 “상한 돼지고기”라는 뜻이란다.


가끔 피자매연대 활동을 하면서 대안생리대를 웰빙쇼핑몰에서 팔지 않겠느냐, 대량생산하지 않겠는냐하는 제의를 받곤 한다.
이럴 때마다 마구 짜증이 나고 괜시리 사람들이 미워진다.
여성의 몸이 상품이 아니라는 관점에서 시작한 대안생리대 운동을 다시 상품으로 포장하려는 상술이 미워서다.
그러니까 대부분의 웰빙 상품이라는 게 그동안 일궈왔던 여러 가지 생태운동과 환경운동들의 성과를 돈과 시장체계가 가져 가버리는 게 아닐까 싶다.
가져가는 건 좋은데, 원래 하나인 것을 마구 쪼개고 쪼개진 일부를 떼어다가 전부인 양 얘기하는 게 더 밉다.


가령 대안생리대의 경우에는 대안생리대운동이 기반하고 있는 여러 가지 맥락들이 있다.
일회용생리대를 만들기 위해서는 엄청난 양의 나무를 벌목해 펄프를 만들고, 그 펄프를 엄청난 양의 물을 이용해 가공하고, 화학약품처리를 하고, 표백하고, 상품으로 생산하고, 소비자인 여성들이 사용하고, 휴지통에 버린다.
이렇게 자원을 대량채취해서 대량생산하고 그것을 대량소비하고 대량폐기하는 과정에서 그 굽이굽이 마다 발생하는 엄청난 환경파괴와 착취와 억압이 있다.
대량채취는 이른바 선진 산업국들인 북의 국가들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대부분 못산다는 남의 국가들에서 행해진다.
제3세계 민중과 여성들이 자급자족하며 살아온 숲이 펄프 목재를 위한 플랜테이션이 되어버리면서 공장 같은 농장의 일용직 노동자가 되거나 도시로 떠나 슬럼가를 전전하게 된다.
기업과 정부는 이런 것을 바로 “개발”이란 이름으로 포장하며 자기들 배불리기에 바쁘다.
북의 소비자들이 깔끔하게 포장되어 나온 일회용생리대를 보며 그 속에 고스란히 담겨있는 환경파괴와 착취의 비용을 생각할 리 만무하다.
그만큼 “그들”과 “우리”는 서로 연결되어 있으면서 또 서로 찢어져 있다.


웰빙상품이 된 면생리대가 미운 것은 이런 얘기들은 다 지워버리고 그저 “내 몸”에 좋으니까, “우리 환경”에 좋으니까 사서 쓴다는 생각만 심어주기 때문이다.
내 몸에 좋은 거, 우리 환경에 좋은 거까지는 좋다. 하지만 내 몸 아닌 거, 우리 환경 아닌 거에는 굉장히 무관심하다는 데 문제가 있다.
어느 생리대 회사는 마치 순면감촉과 똑같다는 일회용생리대를 내놓았는데, 이 회사의 모토는 “우리강산 푸르게”이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결국엔 남의 강산을 파괴해서 우리강산 푸르게 하자는 논리밖에는 안되지 않나 싶다.
“웰빙”이 내 건강이랑 남의 건강을 찢어놓는 식으로 모든 강산을 “우리 강산”과 “남의 강산”으로 찢어놓는 거, 바로 이런 게 미운 거다.
또, 어머니나 할머니에게서 물려받거나 혹은 자신이 직접 창안한 알록달록한 아이디어들을 공유하면서 만들어낸 갖가지 생리대를, 상품이 될 만 하니까, 마치 개인 소유인 양 가져다 특허니 실용신안이니 하는 독점권을 낸다.
이런 식으로 대안 운동이 웰빙 상품이 되면, 어설픈 바느질이나마 찢어졌던 조각들을 연결하려 했던 풀뿌리들의 노력이 또 다시 독점되고, 또 다시 생산과 소비로 찢어진다.


또 한가지 미운 게 있다.
‘웰빙’자만 들어가면 다들 왜 이렇게 비싼 건지.
쇼핑몰에서 파는 면생리대는 보통 10000원에서 30000원을 호가한다.
7-8개 세트를 모두 장만하려면 비싼 것은 30만원 이상 줘야 한다.
슈퍼마켓에 가면 유기농 원료를 이용한 것은 다른 것에 비해 두, 세배가 값이 더 나간다.
웰빙은 확실히 2000원 하는 콩기름 대신 8000원 하는 올리브유를 선뜻 집을 수 있는 사람들을 위한 것만은 틀림없는 듯 하다.
동시에 여태껏 일반적으로 먹어온 콩기름은 콜레스테롤 덩어리가 되고, 돈 없는 사람들의 먹거리로 ‘전락’한다.


굳이 웰빙을 예로 들지 않아도, 어느 때부터인가 우리는 물을 사먹기 시작해서 지금은 먹는 물 하면 사먹는 생수를 떠올리게 되었다.
또 언제부터인가 에어컨을 켜지 않으면 여름을 나는 것이 불가능해졌다.
우리 어머니 세대만 해도 의례 광목이나 옥양목으로 만들어오던 생리대가 새하얀 일회용생리대로 바뀌었다.
예전에는 사지 않았던 것들을 지금은 일상적으로 사서 먹고 쓰고 버리고 있는 것의 목록은 아마도 끝이 없을 것이다.
원래 우리 모두의 것이었던 깨끗한 물, 깨끗한 공기, 맑은 숲이 파괴되고 그 자리에 포장된 물, 포장된 공기, 포장된 숲의 향기가 팔리고 있다.
우리 것이 오염되니까 남의 것을 쓰려다 보니, 그것 마저 망가지고 파괴되어 신음을 한다.
물이 그렇고, 시골이 그렇고, 제3세계의 자연과 민중의 삶이 그렇다.


작년 여름 휴가 때 이 지긋지긋한 도시의 여름을 탈출하고자 부안에 간 적이 있다.
부안은 핵폐기장 건설 반대로 한창 달아올라 있었다.
정부가 핵발전소와 핵폐기장을 건설하면서 선전하는 문구는 ‘깨끗한 에너지’라는 것이다.
요즘 유행어로 말하면 ‘웰빙에너지’쯤 되겠다.
근데 문제는 도시 사람들에게나 웰빙이지, 막상 핵발전소나 핵폐기장이 세워지는 지역의 주민들에게는 심각한 생존권과 생활권의 위협이라는 거다.
좀 어려운 말로 정리하자면 환경파괴의 비용을 지역과 외부로 떠넘기면서 계속 에어콘화, 자동차화, 도시화, 산업화하겠다는 거다.
이런 개발 욕망의 이면에는 개발이 파괴한 깨끗한 공기, 물, 자연을 바라는 욕망 또한 자리잡고 있다.
그래서 “웰빙”이란 자동차를 타면서 깨끗한 공기를 원하고, 에어콘을 틀면서 깨끗한 에너지를 원하는 이 도시인들의 정신분열증이 아닐까 싶다.


그러나 한편, “웰빙”이라는 말을 따지고 보면 정말 좋은 말이다.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건강하고 행복하게 잘 사는 게 웰빙 아닌가?
그렇다면 내가 그렇게 웰빙을 미워할 이유는 없는 거다.
아마도 내가 미워하는 이유는 그 속에 분리와 차별 숨어 있기 때문일 거다.
지금의 웰빙은 소비만 웰빙이다.
돈 있는 사람들만 건강하게 행복하게 잘 살자는 거다.
하지만 돈으로 아무리 웰빙을 사도 그건 진짜가 아니라 모사품이라는 데 사람들은 곧 허탈해질 것이다.
진정한 웰빙이란, 돈없고 빽없고 힘없는 사람들도 함께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 때 가능해지는 거다.
그러니까 자동차, 에어콘 쓰지 말고, 개발과 산업화를 포기하고, 그렇다고 애꿎은 시골이나 지역을 건들지 말고, 도시 스스로가 갱생해야 할 일이다.


최근 일산 풍동에 다녀온 적이 있다.
현재 풍동에는 여남은 명의 철거촌 주민들이 용역깡패들의 침탈에 맞서 투쟁하고 있다.
폭격기가 쓸고 간 자리처럼 폐허가 된 동네의 한 가운데에는 주민들이 연립주택을 개조해 만든 골리앗이 홀로 솟아있었다.
내가 간 날에는 몇 명의 젊은 사람들이 무너진 담벼락과 건물 더미에 벽화를 그리고 있었다.
얼마 전에는 인터넷에서 그곳에서 상추 모종을 심는 사진도 보았다.
그러고 보니 이거야말로 웰빙이 아닐까 싶다.
돈 없는 사람들의 주거권을 파괴해가며 이윤을 추구하려는 사람들에 대항해서 우리들의 권리를 탈환하고자 맞서는 진짜 웰빙운동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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