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게시물에서 찾기분류 전체보기

연꽃피는 소리, 솔바람 소리, 그리고 무심천의 스피커 (2005.11.04)


                           연꽃피는 소리, 솔바람 소리, 그리고 무심천의 스피커


 

다산 정약용은 연꽃이 필 때가 되면 연꽃이 좋기로 유명했던 서울 서대문밖 서연지에서 동트기 전 이른 새벽에 친구들과 모임을 가졌다. 연꽃이 필 때 나는 소리를 듣기 위해서였다. 친구들과 함께 연못에 작은 배를 띄우고 배를 저어가서 연꽃봉오리가 많은 곳에 자리를 잡고 숨을 죽이고 기다리고 있노라면, 연꽃은 먼동이 틀 때 일제히 피어나는데,  필 때의 톡하는 소리가 그렇게 아름다웠다고 한다. 친구들과 함께 눈을 감고 숨죽이면서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연꽃 피는 소리를 듣고 있는 다산의 모습이 떠오른다. 한 폭의 그림이다.

성종 때 성현이라는 학자가 있었는데 이 사람 또한 독특한 취향이 있었다. 매화꽃이 필 무렵 눈이 내리면 나무 밑에 앉아 매화꽃 내음을 맡으면서 눈 내리는 소리를 듣는 것이었다. 자연의 소리에 귀 기울이면 귀가 밝아져서 눈 쌓이는 소리가 들리는데 옛날 사람들은 9가지 눈 내리는 소리를 구분할 수 있었다고 한다. 또 마음이 산란하면 산에 올라가서 소나무숲 한가운데 자리를 깔고 앉았다. 소나무 숲에 이는 바람소리를 듣기 위해서이다. 쏴아하고 소나무숲을 스쳐가는 바람소리는 가슴을 시원하게 만드는데 두보는 이 소리를 이 세상에서 가장 장중한 소리라고 했고, 조선의 선비들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소리로 연꽃 피는 소리와 함께 이 소나무 바람 소리를 꼽았다. 내 생각에는 활엽수에 비해 소나무잎은 가늘고 일정하게 잎들이 배열되어 있어 풍속과 풍향이 다른 바람이라도 소나무숲을 지나가면 균일하고 정제된 소리로 변하는 게 아닌가 한다.

얼마 전 청주시에서 무심천을 자연형 하천으로 만들겠다는 종합계획을 발표했다. 그런데 최근에 무심천을 산책하다 보니 스피커 시설이 설치되어 있고 거기서 노래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순간 당혹스러웠다. 자연형 하천이면 조선의 선비들이 연꽃 피는 소리나 솔바람소리를 들었듯이 새소리, 여울소리, 갈대밭을 스쳐가는 바람소리 등 무심천에서 들을 수 있는 자연의 소리를 시민들에게 알리고 그것을 즐길 수 있는 자연친화형 문화를 되살리는 것이 바람직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확성기를 설치하면 새들이 떠날 것이고 시민들은 자연의 소리를 들을 줄 아는 힘을 잃어버리게 될 텐데 이는 무심천에서 자연을 추방하는 행위가 아닐 수 없다. 쓰레기를 버리고 꽃을 꺽는 것만이 자연훼손이 아니다. 자연 속에 기계음을 옮겨놓는 것도 환경파괴라는 인식이 시민들의 생활문화로 정착할 수 있을 때 무심천은 진정한 의미의 자연형 하천으로 되살아나는 것이 아닐까?

그런데 요즘 자연형 하천을 만든다고 하면서 여기저기 큰 돌덩어리를 캐어다가 쌓고 있는 것을 보노라면 이게 자연형 하천 계획인지 토목공사인지 구분이 가지 않는다. 내가 알기에는 자연형 하천이라면 가능하면 돈을 덜 들이고 자연적 소재로 하천을 되살리는 것인데 이렇게 다른 지역의 자연을 파괴하면서 가져오는 돌덩어리로 자연형 하천을 만든다는 것이 가능한지 청주시장과 공무원들에게 묻고 싶다. 또한 이러한 문제를 새롭게 만들어진 환경단체에서는 제기하고 있던데, 지역의 상징적인 환경, 문화단체에서 왜 다루지 않는지 의문이 든다.

자연형 하천은 자연친화적 문화가 어울리고, 우리는 전통 속에서 그러한 문화를 만들어 갈 수 있는 힘을 얼마든지 찾아낼 수 있다.

한 가지 제안을 한다면 무심천의 일부 구간에 하회마을처럼 소나무 숲을 조성하고, 청주시민들로 하여금 솔바람 소리를 들으면서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공간을 만들면 어떨까?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이원종 도지사가 더 생각해야 할 것들 (2005.10.06)

 

                                    이원종 도지사가 더 생각해야 할 것들


지난 여름 우리 지역을 뜨겁게 달구었던 영동 전 부군수 성추행 사건이 이제 막바지에 접어들었다. 

지난 9월 28일 영동 전 부군수이자 현 청남대관리사업소장이 직위해제되었으며  오는 10월 7일 인사위원회에서 징계를 앞두고 있다.

징계를 한다고 하니, 이제 제대로 처리가 되는 가 싶다. 그러나 돌아보면 아쉬운 점이 참 많다.

성추행사건으로 청주지방노동사무소에 진정이 된 후에 바로 성희롱 심의위원회가 열려 이 사건을 제대로 처리했더라면, 피해자들의 그 큰 고통의 시간을 겪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또한 도감사관실에서 내부 조사를 통해 직위해제조치를 빠른 시일내에 취했다면 피해자들이 2차 가해에 노출되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아니 9월 2일 청주지방노동사무소 성희롱 판단을 나온 뒤에 바로 이에 상응하는 조치들을 취했더라도 국정감사의 소나기를 피해 가기 위한 조치가  위한 아닌가 하는 의혹의 눈초리를 받지 않았을 것이다.

이원종 도지사는 성희롱 사건 발생후 영동 전 부군수를 도청 총무과장과 청남대관리사업소장으로 발령내는 등 사건해결의지를 전혀 보이지 않았다. 도감사관실은 성희롱 진정 수개월 동안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으며 심지어 청주지방노동사무소의 일부 성희롱 판단조차 받아들일 수 없다는 입장을 보여왔다. 그런데  26일 이원종도지사의 “신속하고 명쾌한 조치를 취하라”는 지시에 따라 입장을 급선회해 중징계의결요구서를 징계양정위원회에 제출한 것이다.

갑자기 신속하고 명쾌한 조치를 취하라고 지시한 이원종 도지사나, 성희롱판단을 받아들일 수 없다던 감사관실의 입장변화는 국정감사를 앞두고 급하게 취한 행정적 처분이라는 의심을 갖게 하기에 충분하다.

이제 이 사건은 우여곡절끝에 7일 인사위원회에서의 징계결정을 앞두고 있다. 이번 인사위원회에서 무거운 중징계가 내려져 다시는 공직사회에서 성희롱 사건이 재발하지 않도록 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이제는 이원종 도지사의 말대로 성희롱에 대한 잣대와 인식이 바뀌었다. 따라서 솜방망이 징계로 두리뭉실 넘어가려고 하지 말고 이번 사건을 공직사회의 분명한 자정의 계기로 삼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징계만으로 이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대책위가 요구하는 것은 이원종 도지사의 사과와 재발방지 대책이다. 그런데 아직 이원종 도지사는 이러한 요구에 대해서는 침묵을 지키고 있다. 이 사건을 제대로 마무리 하려면 이러한 요구를 외면하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이번 사건의 진행과정속에서 변하지 않은 것과 변하고 있는 것을 확인해 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이다. 가해자와 관공서의 태도는 변하지 않았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이번 사건을 통해 아주 고무적인 변화를 발견 할 수 있다.

먼저 기존여성단체들이 아니라 노동자, 농민등 민중여성들이 문제해결자로 등장한 것은 중산층 여성운동의 한계를 넘어 새로운 여성운동의 가능성을 보여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남성들의 적극적 참여 역시 중요한 변화라고 할 수 있다. 대책위의 실무자로 남성이 나선 것이나 집회, 기자회견,1인 시위등에서 남성들이 적극적인 참여가 이번 사건을 단지 여성의 문제가 아니라 지역사회의 사회정치적 현안으로 부각시킨 요인이 되었다는 것은 아무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이러한 새로운 변화들이야 말로 성평등한 충북사회를  만들어 가는 가장 중요한 지반이 될 것이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성폭력 없는 충북을 꿈꾼다. (2005년 9월 6일)

 

성폭력 없는 충북을 꿈꾼다.


(전)영동군성추행 사건이 지역에 알려진지 벌써 넉달이 다되어 간다. 과정을 돌이켜 보면, 이 사건도 대부분의 성폭력 사건이 발생했을때 일어나는 절차를 그대로 밟고 있다.

성폭력 사건이 발생하면 진행되는 일종의 시나리오가 있다. 모든 가해자들은 끝까지 사실을 부인하며 억울함을 호소한다. 그리고 피해자를 형사상 명예훼손혐의로 고소하고, 민사상으로는 손해배상청구소송을 제기한다. 피해자의 입장에서는 기가 막힐 노릇이지만, 가해자의 명예훼손 고소는 성폭력 사실 공개가 가해자의 명예를 훼손한다고 보는 사회적 통념과 가해자의 인권 보호라는 말로 정당화되어 버린다.

가해자의 명예훼손고소는 “고소까지 한 걸 보니 정말 결백한가 보다.”라는 강력한 부인효과를 가져오며, “아무리 성폭력 가해자라고 하더라도 사회적으로 매장시켜서는 안된다.”는 가해자에게도 인권이 있다는 논리로 피해자의 진실성을 의심케 하며, 피해자를 압박하여 위축시키고, 성폭력 피해와 저울질 할 수 있는 명예훼손피해를 구성해냄으로써 성폭력 가해의 책임을 덜고 협상조건 만들어 낸다.(“서로 고소 취하하기로 합의하자”)(전희경,2003)

어쩌면 그렇게 닮았는지......이 사건의 피해자들과 난계국악단 노조원들,(전)영동군부군수 성추행 사건 해결을 위한 공동대책위원회 관계자들도 가해자에게 명예훼손으로 민형사상 고소를 당하여 큰 고통을 당하고 있다. 피해자들은 성추행 사건의 고소인임에도 불구하고, 거꾸로 피고인이 되어 경찰에서 조사를 받았으며, 명예훼손 손해배상청구소송으로 봉급의 50%가 차압되고 있어 정신적, 경제적으로 고통에 시달리고 있는 상황이다. (전)영동부군수는 고위공직자인 자신의 직위를 이용하여 이 사건이 청주지방노동사무소에 진정된 이후에는 노골적으로 피해자들을 협박하는 등의 2차 가해를 가하였다. 그러나 가해자의 이러한 행위들은 오히려 법의 테두리 안에서 보호받았으며, 피해자들은 지역과 소속단체의 명예를 실추 시켰다. 어떠한 음모를 가지고 허위사실을 유포한다는등의  비난을 받아야 했다.

이러한 현상은 성폭력 사건에서 우리 사회가 아직도 철저히 가해자 중심 사회이며, 공권력도 여성피해자들의 입장에 서지 않는다는 것을 잘 보여주는 것이다.

이 사건은 현재 청주지방노동사무소의 판결을 앞두고 있다. 사건의 조사기간동안 우여곡절도 참 많았다. 피해자들은 조사를 받으러 가기 위해 연가를 내야 했고, 가해자와 참고인들은 공가를 내고 조사를 받았다. 세세한 일들은 너무 많아 다 열거할수 조차 없다.

이 사건이 직장내 성희롱으로 판결이 난다면 그동안 청주지방노동사무소의 판결결과를 보고 결정하겠다며 책임을 회피했던 충청북도는 즉각 가해자를 징계하고 그간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던 것에 대하여 충북도민들에게 머리숙여 사과해야 할 것이다. 또한 앞으로 이러한 일들이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예방조치를 철저하게 강구해야 할 것이다.

성희롱 판결여부와 관계없이 이 사건이 성폭력없는 충청북도와 성인지적 도정운영을 위한 계기가 되길 바라며 우리 지역이 성평등 사회로 가는 중요한 디딤돌이 되기를 간절히 염원한다.

마지막으로 온갖 어려움을 이겨내고 이 사건을 공개하고 끝까지 싸운 피해자들의 용기에  큰 박수를 보낸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우리 부부의 부모역할 배우기

  이 글은 교육잡지 ‘좋은 엄마’에 2001년 11월 실렸던 것입니다.

                                            우리 부부의 부모역할 배우기

                                                                                   마을공동체교육연구소 문재현

  많은 부모들이 태어날 아기에 대해 거창한 계획을 세운다지만 우리 부부는 아기가 뱃속에 있을 때나 태어난 후에도 계획을 세울 엄두를 내지 못했다. 계획을 세우려면 아기의 발달단계, 상태와 요구, 정서적 특성에 대해 잘 알아야 하는데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이라고는 아동발달에 관한 일반 이론뿐이었기 때문이다. 또 말도 알아듣지 못하는 아이에게 계획을 이해시킬 수 있는 자신도 없었고 똑같은 아이라도 상황에 따라 대처 방법이 다를 수밖에 없는데 부모가 일방적 계획을 강요하면 아기의 내적 동기가 마르고 정서적 의지적으로 쇠약하게 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무모한 계획을 세우기보다는 아기의 복잡한 상호작용에 대처할 수 있는 원칙을 합의하고 공동의 규범을 만들기로 하였다. 우리가 세운 원칙은 두 가지인데, 하나는 아기로부터 배우고 구체적인 상황에서 아기의 요구와 관심에 적극적으로 반응하는 것, 다른 하나는 우리의 삶을 바르게 세워 아기가 우리의 삶에 참여할 수 있는 바람직한 환경을 만드는 것이었다. 이 원칙을 바탕으로 우리에게 부모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있는 자원이 준비되어있는지 따져보았다.
그 기준은 세 가지였는데,
첫째, 우리가 정말 아이를 원하고 있는가? 지금 이 상황이 즐거운가?
둘째, 안전하고 따뜻한 보호와 일관된 지원을 할 수 있는 가족적,사회적 환경을 제공할 수 있는가?
셋째, 아기와 정서적으로 공감하고 반응할 수 있는 문화적 능력이 있는가?
그 가운데 첫째, 둘째 조건은 어렵지 않게 정리할 수 있었다. 둘 다 아기를 좋아하는 데다가 우리가 연애경험을 통해 얻은 것, 즉 서로에 대해 깊이 몰두하고 서로의 감정과 요구, 기분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하며 결속했던 경험은 육아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또 우리 부부는 가사를 완전히 분담하고 있는데다가 육아 역시 그러한 원리에 따라 분담한다면 아내의 부담을 덜 뿐만 아니라 아기의 성장을 위해서도 바람직한 교육환경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문제는 세 번째 조건이었다. 아기와 즐겁게 놀 수 있는 마음의 준비는 되어 있지만 어떻게 놀아야 할 지 그 방법과 기술을 모르고 있었기 때문에 어떻게 준비해야 할 것인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래서 쉬운 것부터 생각하기 했다. 아기가 태어났다고 생각하고 다양한 상호작용의 상황, 즉 아기가 잠잘 때, 엄마 아빠와 마주보고 놀 때, 다른 아기랑 놀 때, 놀이감을 가지고 놀 때, 옹알이 할 때, 우유를 먹일 때, 어떤 것이 적절한 상호작용인가 공부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했다. 그래서 아기의 다양한 놀이자원들인 동작과 표정, 말, 극 놀이, 놀이감을 가지고 애들과 노는 방법에 대해 이리저리 자료를 찾아보았지만, 제대로 마음에 드는 자료를 찾을 수 없었다.
그런데 임신 5개월쯤 되어 아기가 뱃속에서 움직인다는 말을 듣고 언뜻 떠오르는 생각이 이제 아기가 태어나면 자장가도 불러주어야 하는데, 나는 자장가도 부를 줄 아는 게 하나도 없다는 것이었다. 이 순간의 깨달음은 문제 해결의 출발점이 되었다.
우리가 생각한 것은 나뿐만 아니라 예로부터 많은 부모들이 우리가 지금 가지고 있는 고민을 했을 것이고 이에 대한 대비책은 마련해 두었을 테니까 그것을 찾아 쓰자는 것이었다. 모든 사회는 사회 전체가 공감 속에서 참여하고 전승하는 문화규범인 육아법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수 천년 동안 전승되는 과정에서 아기가 가장 좋아하고 아기 발달에 도움이 되는 것일 가능성이 높을 것이라는 데 우리의 생각이 일치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아동발달 단계는 다를 것이 없고, 그때 아이들한테 좋은 것은 지금 애들한테도 좋을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때부터 나는 자장가부터 시작해서 아이들 놀이의 모든 것을 배우기 위해 할머니, 할아버지들을 찾아다녔다. 우리 어머니한테 배우면 좋았을 텐데 어머니가 교통사고로 뇌를 다쳤기 때문에 우리 집의 문화유산을 복원할 수는 없었다. 배울 때는 가사와 장단뿐만 아니라 표정, 호흡, 분위기 연출 능력을 그대로 따라 배우기에 노력했다. 놀이와 이야기 등은 민중들이 자신들의 집단 경험과 기억을 전달해온 매체이고, 이러한 말과 행동을 통한 전승 방식은 글을 통한 방식과 달리 당시 상황까지 그대로 전달되는 것이기 때문에 표정 하나 하나 까지 인류의 발달 과정 속에서 쌓여온 빛나는 문화유산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조사한 내용은 우리 아기와 다른 연구원들의 아이들에게 상호작용의 매개체로 사용했는데, 아이들은 아주 건강하고 창조적인 모습으로 자라났다. 노래와 놀이, 수수께끼들을 아주 자연스럽게 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상황에 따라 창조적으로 표현하는 즉흥성을 보여준다. 우리 아들 한뫼는 토요일, 일요일에는 집 가까이 있는 풀밭이나 뒷산에서 살다시피 하는데  그때 발견하는 식물과 나비, 벌, 지렁이들이 모두 이야기와 노래로 표현된다. ‘꿩꿩 장서방’이라는 노래를 가지고 주변 동식물을 배워나가는데, 아마 도시에 있는 부모들은 동식물의 이름과 서식지, 먹이 등의 생태에 대해서 한뫼와 막히지 않고 얘기 할 수 있는 사람이 거의 없을 것이다.
우리 부부와 연구원들의 변화도 많았다. 모두가 이야기꾼, 소리꾼이 되었고 그런 능력을 바탕으로 통합교육과 지역화 교육에 자연스럽게 대처할 수 있는 힘이 생겼다. 이러한 경험을 공동육아 어린이집, 한국 보육교사회, 초등학교 교사들, 유치원 선생님, 초등학생, ‘아리수’와 같은 전문 문화패들에게 강습을 했고, 작년에는 국립 국악원에서 교사들을 위한 전래노래와 놀이 연수를 1년 동안 전담했다.
우리는 학교 들어가기 전의 아이들은 놀이를 통해서 상호작용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보았기 때문에 글자를 가르친 적도 없고 억지로 책을 읽어 준 적도 없다.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자연을 대하든, 사람을 대하든 그 상황에서 민감하게 느끼고 행동하면서 애착관계를 형성하는 것인데, 책은 아이들의 첫 번째 경험을 왜곡하며 상황에 민감하게 반응할 수 있는 본능적인 힘을 약하게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은 그런 사람이 없지만, 얼마 전 까지만 해도 우리 부부의 육아법에 대해 정서 사회성 발달은 되겠지만, 인지발달에 문제가 있지 않겠냐고 걱정하는 사람이 있었다. 이는 정서적 능력이야말로 사회성 발달, 인지 발달의 기초가 되고 그 모든 것을 통합해 낼 수 있는 접점이 이야기요, 놀이라는 것을 모르기 때문일 것이다.
옛날에 소리꾼, 이야기꾼은 총기가 좋다는 소리를 들었는데 이는 원래 좋은 것도 있었겠지만 놀이와 이야기 통해서 그 능력이 획기적으로 높아진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운율구조와 이야기 구조는 글이 없는 시기에 집단의 기억을 전승하는 방법으로 창조된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놀이를 통해 아이를 기른 것은 아이들에게 글읽기나 개념적 사고 등을 배우도록 지나치게 재촉하는 풍토에 대해 반대하기도 하지만, 놀이야말로 아이들의 능력을 어떤 부담도 갖지 않은 상태에서 전면적으로 발달시킬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다.
놀이와 이야기를 가볍게 보는 것은 과학적 사고의 영향인데 그 과학 즉, 교육학, 생리학, 심리학, 신경과학들이 이제는 이야기나 놀이가 인간 발달에 가지는 의미를 깨닫고 이해하는 방향으로 바뀌고 있기 때문에 지금 아이들이 어른이 될 때쯤에는 우리와 같은 생각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질 것이다.
그 동안 교육운동을 해 오면서 느낀 것은 부모들의 조바심과는 달리 공부하기를 싫어하는 아이들은 없다는 것이다. 다만, 그 순간 그 내용을 공부하는 것이 싫고 생활과 분리된 개념적 사고가 너무 낯설기 때문에 공부를 싫어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아이들을 다그치거나 제도 개혁만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에 대한 애정을 가지고 있는 부모들이 스스로 공부하고 아이들과 놀 줄도 알고, 아이와 삶의 구체적인 의미를 공유하는 생활양식을 만들어 가야한다.
놀이를 통해서 아이를 기르는 과정에서 우리 부부가 깨달은 것은 한 사람을 깊이 있게 사랑하고 애착관계를 만들지 못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도 사랑하지 못하고 참다운 교육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부모들 사이의 상호작용과 부모와 아이들의 애착관계를 만들 수 있는 시간적, 정신적 여유를 빼앗고, 그 잠재력을 국가권력과 기업의 이윤추구만을 위해 쥐어짜는 우리 사회의 문제점은 반드시 해결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 출발점은 부모가 자기 아이들의 사회적 성공만을 재촉하는 것이 아니라 부모 스스로 다른 사람, 꽃, 동물, 가치들에 대한 애착관계를 만들고 이를 바탕으로 자기 아이, 나아가 아이들 세대 전체와 교류를 할 수 있는 힘을 갖추는 것이라고 우리는 믿는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내 아들은 문수동자

이 글은 교육잡지 ‘좋은 엄마’에 2001년 5월 실렸던 것입니다.

                                                     내 아들은 문수동자  
                                                                                                                                                                                                                                             마을공동체교육연구소    문 재 현

  10여 년 전 오대산 상원사로 답사를 가서 문수동자상을 본 적이 있다. 어린이 체형에 살이 토실토실 쪄있는 문수동자를 보면서 지혜의 화신인 문수보살이 어린이로 형상화 된 것이 어울리지 않는다고 느꼈다. 노인의 지혜가 존중되는 농경사회에서 어떻게 그러한 형상화가 가능했는지 신기하게 여겨졌다.
  그런데 늦게 결혼해서 아이를 길러 보면서 왜 문수보살을 어린이로 형상화 한 것인지 알게 되었다. 아기는 호기심의 덩어리였다. 눈에 띄는 모든 것이 호기심과 관심의 대상이었고, 끊임없이 질문이 쏟아져 나왔다. “저 산은 왜 저렇게 생겼어?”, “왜 이 산은 높고 저 산은 낮아?”, “ 장미꽃은 왜 빨개?”, “왜 김치를 먹어야 되지?”  등등....
  이러한 질문에 대한 답변은 개념적 지식이 아니라 아이들의 감성과 이해 수준에 맞아야 하는데  항상 부족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 과정에서 아이들의 이러한 질문이야말로 모든 부모와 사회집단이 직면했던 현실이었고, 이로 인해 한 사회가 교육체계를 갖출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그런데 아이의 호기심은 강력했지만 또 한 없이 연약한 것이었다. 내적 동기가 부여된 질문이 아니라 새로운 사물과 상황에 대한 자연발생적인 질문이었기 때문에 주변의 반응이 없을 경우 바로 그 불꽃이 꺼져 버렸다.  그것을 보면서 아이들을 위해서는 안정되고, 따뜻한 가정과 함께 협조적이고 반응이 풍부한 지역사회가 반드시 있어야 된다는 걸 다시 한번 깨달았고, 공동체 교육에 대해서 진지한 접근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옛날 마을에서의 육아방식들 아이 어르는 소리, 아이들노래(전래동요), 이야기를 복원하고 마을의 자연환경과 역사를 공부했다. 그리고 그런 내용들이 아이들 발달에 어떤 도움이 되는지, 또 다양한 생활 환경 속에서 가정, 어린이 집, 학교, 마을 사람들간에 가치의 연속성이 보장되는 인간환경이 얼마나 중요한지 연구하고, 이러한 경험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고자 마을공동체교육 연구소를 만들었다. 아들이 나에게는 삶의 의미를 새롭게 발견하게 한 문수동자였던 셈이다.    
  그런 경험 속에서 우리 나라 부모들의 교육열이 세계적이라는 말에 대해서 심각한 문제 의식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교육은 아이들의 자라남에 대한 관심이고, 진정한 교육열이라면 아이들의 삶에 진지하게 참여할 때 가능한데, 아이들의 요구를 부정하고, 자신의 욕망을 투사하는 부모들의 태도에서 참다운 교육열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현대 교육학의 흐름을 반영한 새로운 연구결과에 의하면 한사람의 교육적 성취는 지능이나 적성, 끈기 등 개인적 능력에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 가정이나 마을 등 관련 사회단체의 지원과 협력, 공감적 반응, 수용적 태도에 달려있다고 한다. 요즘 학교교육에서 경쟁이 아니라 협동학습이 강조되고, 통합교육, 지역화교육이 강조되는 것은 이러한 경향을 반영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교육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부모와 지역사회, 교사가 지역사회 안에 있는 모든 것을 교육자원으로 개발하고 자원으로 만들 수 있어야 한다. 아이들의 또래 관계, 가정, 마을에서의 사회적 상황과 경험, 자연환경을 스스로 발견하고 아이들이 거기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도록 부모가 먼저 공부하고 공동체적 교육환경을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새로운 사고는 자기 자식만을 경쟁사회에서 이길 수 있는 인간으로 기르기 위해서 발버둥치는 부모들은 참으로 수용하기 힘들 것이다. 그러나 아이를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아이들의 내적인 동력이 경쟁 속에서 소모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믿고 살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자유롭게 발전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할 것이다.
요즘 들어 부모대상 교육을 많이 하는데 그 때 마다 몇 가지 질문으로 강의를 시작한다. 아이들과 어떤 놀이를 하는가? 집(마을) 가까이 있는 산 이름과 생태환경을 알고 있는가? 살고 있는 마을의 역사를 아는가? 마을(아파트단지)사람들과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가? 이러한 질문을 하는 이유는 자기 아이만 바라보고 있는 부모의 시선을 아이들 전체와 공동체로 돌리기 위한 것이다. 지금까지는 제대로 답변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는데 좋은 엄마 독자 여러분이 이러한 질문에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는 부모가 되길 기대한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