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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세계대전 이후, 벤야민(과 그의 시대)는 무엇보다 ‘경험의 파산’을 ‘경험’했다. 그러나 그것은 벤야민에 따르면 더 이상 ‘경험’이 아니고 ‘문화’도 아닌 어떤 것이었다. 그는 전쟁 이후 그 이전의 가치들이 침묵하며 기술이 폭발적으로 발전하는 모습을 본다. 사람들은 외적으로, 또 내적(심령술이나 요가, 그노시즘의 이념들은 이 빈곤의 이면이다)으로 빈곤해진다.
-이 빈곤 속에서 벤야민은 새로운 ‘야만성Barbarentum’을 발견한다. 그것은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기”이며, “적은 것으로 견디어내기”이다. 이러한 야만성을 상징하는 건축은 바로 유리와 철골로 된 것이었다. 거기에서 모든 부르주아적 경험세계, 교양은 사라지고 투명함이 곧바로 드러난다. 이것은 “시대에 일말의 환상도 품지 않으면서 그 시대에 온몸으로 몰입하는 것”(175)이었다.
-새로운 기술은 이제 축적될 새로운 ‘경험’을 낳는 것이 아니다. 셰어바르트는 그것을 잘 보여준 소설가였다. 기술들을 활용해 이전의 ‘낭만’을 재생산하는 쥘 베른 등과 달리 셰어바르트는 인간 자체의 개조를 보여준다. 마치 혁명 이후 러시아 사람들이 탈휴머니즘의 이름들, 이를테면 ‘피아틸레트가’(5개년 계획을 어원으로 둠)같은 이름을 아이에게 붙여주듯이. 이 시대는 이제 아우라 없이 기술과 삶이 곧장 밀착하고 있는 것이다.
-경험의 빈곤, 이것은 새로운 경험에 대한 동경이 아니라 경험으로부터 풀려나는 것이다. 벤야민은 이 모든 빈곤을 순수하고 분명하게 통용시킬 수 있는 환경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그것은 어떤 ‘사실’이나 ‘실증’이 아니라 하나의 ‘꿈’같은 것이다. “미키마우스의 삶은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그러한 꿈이다. 이 삶은 기술적 기적들을 능가할 뿐만 아니라 그 기적들을 우스꽝스럽게 만드는 기적들로 가득 차 있다… 그것들은 모두 가장 일상적인 가구들에서 나온다는 점이다. 자연과 기술, 원시성과 안락함은 여기서 완전히 하나가 된다… 어느 방향에서나 가장 단순하면서 동시에 가장 안락한 방식으로 자기 자신을 충족시키는 삶이 구원의 빛처럼 나타난다.”
-이 텍스트의 마지막에서 벤야민은 이러한 ‘빈곤’을 권력자들의 ‘움켜쥠’과 대조한다. 우리는 새롭게, 적은 것을 가지고 꾸려나가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 인류는 ‘문화보다 더 오래’ 살아남을 것이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그들이 그 일을 웃으면서 한다는 점이다”
-마지막 줄은 이해하기가 어렵다: “우리는 개개인이 때때로 약간의 인간성을 대중에게, 그것을 언젠가 이자와 이자의 이자를 붙여 돌려줄 그 대중에게 내주기를 바랄 뿐이다.” 이것은 휴머니즘의 개개인들이 탈 휴머니즘의 대중들로 대체될 것을 예언한 것일까. ‘개인’으로서의 부르주아 인간의 몰락과 탈-인간인 프롤레타리아트 대중의 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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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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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자꾸 벤야민에게서 니체가 보인다. 그는 마치 30여년의 시간 후에 등장한 니체의 아바타같다...부가 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