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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키스트의 뉴욕 읽기/뉴욕 되기

 

아나키스트의 뉴욕 읽기/뉴욕 되기

[새책] 뉴욕열전 (이와사부로 코소, 김향수 옮김, 2010.11. 갈무리)

김강기명(연구집단CAIROS) 2010.11.29 18:45

 

 

“민중들의 극소 시간은 개발이라는 극대 시간에 비해 현저하게 약하고 종속적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실은 그렇지 않다. 망상으로써 거대 개발이 실현된다고 한다면, 이는 어디까지나 ‘치마타의 극소 시간’이 집적된 덕택이다.”(528)


 


 

“하긴, 시카고나 워싱턴에 UN 본부가 있다면 진짜 이상할 것 같아.” 


 

뉴욕의 이민자 출신 예술가이자 공간 활동가인 코소 이와사부로의 『뉴욕열전』을 읽기 시작할 무렵 누군가가 지나가면서 한마디 툭 던졌던 말이다. 그렇다. 뉴욕New York은 우리가 ‘미국’이라는 단어를 들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도시이면서도, 또한 가장 탈-미국적인 도시이다. 뉴욕은 미국과 세계의 경제를 움직인다는 맨하탄과 월스트리트가 있는 곳인 동시에 또한 지금까지 미국을 만들어온 수많은 이주민들이 처음 들어오는 문이기도 하다. 19세기의 수도가 파리였다면(벤야민), 20세기의 수도는 아마 뉴욕일 것이다. 그러나 뉴욕은 그곳이 단지 UN본부가 있는 장소(영토)이기 때문에 “20세기의 수도”인 것은 아니다. 뉴욕이 20세기의 수도일 수 있는 이유는 지난 세기로부터 오늘날까지 전지구적으로 형성되고 있는 거대 도시들 - 그리고 그 자체가 ‘전지구화’인 ‘도시화’ - 의 원형이기 때문이다. 


 

코소의 이 책은 TV에 나오는 뉴욕, 혹은 관광객들의 ‘판타스마고리아’인 뉴욕이 아니라 하나의 사유이미지(벤야민)로서의 뉴욕, 혹은 흐름(들뢰즈)으로서의 뉴욕을 파고들고 있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뉴욕이라는 한 도시를 이야기하고 있지만, 그 이야기는 곧장 세계의 거대도시와도 조응한다. 각 민족국가들의 중심지인 거대 도시들 어느 곳이든 그 이면은 ‘국가’라는 영토로 완전히 포획될 수 없는 수많은 이=민(移=民)들의 무리, 혹은 ‘잡다한 민중’들이 흘러가며 운동하고 있는 ‘대지’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세계도시’를 어떤 특정의 장소로만 설명하는 것은 한계가 있지만 어떤 특정 도시가 어떤 한 세기에 물리적 발전의 최전성기(동시에 한계성)를 보내면서, 그 세기의 ‘정치, 문화, 산업’의 주요 발전 형태를 대변하는 것은 불가능하지 않다.”고 말한다. 즉 그는 뉴욕을 통해 20세기의 세계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발견한 세계, 혹은 뉴욕의 모습을 저자는 ‘잡다한 민중-떼’, ‘치마타(巷)’ 등의 개념으로 포착한다. 그가 볼 때 흔히 ‘도시계획’이 수행하는 것과 같이 도시를 파악하는 영토화된 시각들은 그 도시가 정작 그 도시이게 하며, 운동하게 하는 주체를 파악할 수 없는 시선이다. 저자는 도시에(로) 이-민하며, 거주하며, 생산하고 투쟁하는 ‘잡다한 민중’들의 일상적인 시공간은 개발의 시공간보다 짧고 규모도 작아 보이지만, 그 도시의 다양한 미립자적 흐름을 조직하며, 신체와 정동을 생산함으로써 영토화된 ‘개발’의 논리를 넘어선다고 말한다. 잡다한 민중이 본래 가지고 있는 ‘밀집’과 ‘근접성’이야말로 사실상 뉴욕이 가진 힘의 원천이며, 여기에서 도시의 모든 것이 발생한다고 주장한다. 이를 해명하기 위해 저자는 뉴욕의 속살 깊숙한 곳으로 파고든다. 500쪽이 훌쩍 넘는 두꺼운 이 책 속에서 그는 뉴욕의 역사 속으로 들어가 지금의 뉴욕을 만든 잡다한 민중들의 삶과 저항을(그리고 그것과 영토화하는 국가와의 긴장을) 발견해내기도 하며, 과거와 현재 뉴욕의 각 지역 - 할렘, 브롱크스, 타임스퀘어 등등 - 마다 벌어지고 있는 다양한 운동 속에서 잡다한 민중들의 거대한 흐름을 엮어내기도 한다. 


 

그리고 이 ‘흐름’을 사유하는 개념이 바로 ‘치마타(巷)’이다. 일본어 치마타는 ‘길이 걸쳐 있는 곳’을 뜻한다. 저자는 서양적인 ‘광장’이나 도로 대신 ‘치마타’라는 용어로 사람이 집합하는 장소 어디에나 출몰하는 ‘교류와 교통의 공간’을 사유한다. 그리스적인 광장이 보여주는 ‘건전한 시민사회’나 ‘공공 공간’이 오이코스와 구분된 폴리스의 영역을 나타낸다면 치마타는 오늘날 잡다한 민중의 흐름과 생산이 만들어내는 ‘공공생활’을 드러내주는 어휘라 할 수 있다. 저자는 흑인들의 힙합 문화나, 푸에르토리코 이민자들에게서 비롯된 뜰 운동(버려진 공터를 꾸며서 주민들의 교류 공간으로 만드는 운동), 성소수자들과 성노동자들이 벌이는 다양한 형태의 저항행동들을 이 치마타 개념을 통해 분석하고 가시화한다. 


 

19세기의 파리를 사유하던 벤야민이 그랬듯, 이러한 뉴욕의 역사와 운동에 대한 저자의 르포는 단지 과거에 대한 기록으로써가 아니라 오늘날 지배적 상황에 균열을 내는 민중의 변혁운동을 사유하기 위한 것이다. 저자는 벤야민보다는 좀 더 직접적으로 이 운동의 모습을 드러내며, 그것을 ‘액티비즘’이라는 이름으로 포착한다. 아나키즘의 새로운 경향이라고도 할 수 있는 액티비즘은 어떤 한 단체나 몰적 집단의 이념이나 활동이 아니라 2000년 들어서 활성화되고 있는 전지구적 정의 운동의 다양한 주체들의 운동 양식을 느슨하게 개념화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액티비즘은 그 이전의 변혁운동과는 달리 이상사회나 이념을 위해 오늘을 희생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이상사회의 모습을 오늘의 운동 속에서 펼치는 ‘예시적 정치’로 나타난다. 더 이상 이념은 오늘날 민중의 삶의 바깥이나 ‘위’에서 내려오는 것이 아니라 잡다한 민중들의 생산과 저항의 네트워크 자체가 곧 이념(액티비즘)이 된다는 것이다.


 

저자가 이 책을 쓴 배경은 9.11 테러 이후 점증되고 있는 치안의 논리와 젠트리피케이션(치마타를 삭제하고 세련된 고층빌딩 도시로 재개발 하는 것을 말한다.)에 있다. 물론 이것은 그 이전부터 계속 반복되었던 것이고, 또한 모든 거대도시들이 겪는 문제이기도 하다. 그러나 9.11 이후 그것은 더 이상 개별 도시별로 벌어지는 사건이 아니라 하나의 전지구적 맥락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에서 오늘날 우리의 상황과 즉각적으로 만난다. 용산 철거민들의 투쟁을 ‘도심 테러리스트’로 비난한 보수 언론과 치안담당자들의 논리는 9.11 이후 이민을 엄격하게 제한하고, 도시를 청소하는 뉴욕의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다. 그러나 저자는 그러한 도시 정책을 비판하기보다는 그것에 저항하는 치마타의 민중들의 모습을 생동감 있게 그려낸다. 이 책의 미덕은 위에서 이야기한 여러 개념들이 아니라 이 개념들과 연결된 자세하면서도 속도감있게 전개되는 뉴욕 민중들의 이야기에 있다. 개념들에 앞서 독자들에게 당도하는 것은 이 책이 쓰여질 수 있도록 한 뉴욕 민중들의 정동(情動)인 것이다. 


 

도심 한 가운데에 있는 낡은 사무실에 출근하면서, 또 도심재개발에 맞선 두리반의 스콰터(점거)들과 연대하기 시작하면서 읽었던 이 책은 결코 우리와 상관없는 먼 나라 도시의 이야기이거나, 어려운 공간 담론을 담은 철학책이 아니었다. 특히 민주화 이후 기존의 좌파적 언어들이 죽은 언어가 되어버린 오늘날, 이 책은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도 조금씩 가시화되기 시작한 새로운 급진적 운동에 대한 하나의 설명을 제공해주고 있다. 500쪽이 넘는 분량에, 많은 개념어들이 등장함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생동감 있는 언어가 되어 우리의 상상력을 자극하며, 새로운 저항을 향한 발걸음을 내딛게 하는 교본으로 작동하기 충분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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