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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여들은 만날 수 있을까? 메모1

잠시 시간을 내어 정독도서관에서 <세계의 문학> 겨울호에 실린 "신프롤레타리아~" 특집을 읽었다. 1월에 써야할 글 때문인데, 소위 '잉여'라는 이름을 얻고 있는 "요즘 젊은 좌파들"의 집합행동을 다루어보려고 한다. 확실히 이런 주제라면 인문사회과학 책들보다 문학지들이 앞서가고 있는 듯 싶다. 직관적으로 파고들 수 있기 때문일까. 뭐, 문학지들이야 앞서가건 말건 내가 글을 잘 써낼 수 있을지는 솔직히 잘 모르겠다. 아직은 기본 얼개 정도만 짜놓은 상태다. 

 

자본주의야 원래 잉여가치와 잉여노동력을 동시에 생산함으로써 실존할 수 있는 체제이기에 '잉여'라는 주제는 오래된 것이고, 또 한국은 적극적인 복지국가로의 길을 걸어본 적도 없기에 언제나 '잉여'적 존재는 언제나 사회문제였다. 하지만 이것을 굳이 이 시점에서 다시 봐야 할 이유는 IMF체제 이후 기존에 잉여가 아니었던 이들이 잉여가 되면서 단지 경제적인 문제로 환원할 수 없는 어떤 것들이 만들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내 글에서는 그들, 그러니까 대학을 다니는 청년들 가운데서 나타나는 하나의 문화현상으로서 '잉여'를 다루어 보고 싶다. 

 

그들은 우선 잉여학력을 가졌다. 대학진학률이 80%를 넘겼다고 하던데, 솔직히 대학을 졸업한 사람들이 가게 되는/가야 하는 직장의 업무들의 상당수는 대졸학력을 필요로 하지 않는 일들이다. 그건 잉여다. 물론, 그것은 결코 쓸모 없지 않다. 잉여학력은 이전의 관념에서 '학력'이 가진 쓸모와는 '다른 쓸모'를 가지고 있고, 그 때문에 이 잉여학력의 세계는 유지가 된다. 무엇보다 그것은 노동자를 분류, 통제, 지배하는 기제로 작동한다. 똑같은 일을 하더라도, 그 일이 많은 공부를 필요로 하지 않아도 자본은 그들을 학력으로 분류하여 평가하고, 그에 따라 임금과 복지를 차등책정할 수 있다. 이것은 노동자들을 분할하여 그들이 하나의 계급으로 뭉치지 못하게 만들고, 그들끼리 경쟁하도록 만든다. 극소수가 이런 경쟁을 통해 저들이 말하는 '경쟁력을 갖춘 노동자'가 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이 경쟁의 진짜 목표는 그저 노동자들 스스로가 서로를 배척하고, 자신을 저주하게 만들고, 그래서 자본의 지배를 끊임없이 승인하게 만드는 데 있을 뿐이다. 대학을 나왔는데도 내가 이 모양 이꼴인 건 내가 공부를 더 열심히 하지 않아서고, 혹은 더 좋은 대학을 나오지 않아서고, 혹은 저 분교 애들이 분수를 모르고 본교 학생인 척 하기 때문이다.

 

한번 "개인 탓"의 논리로 빠져들면, 사회 전체가 모든 것을 개인의 책임으로 넘겨버리는 것은 쉬운 일이다. 청년 실업의 문제는 그 문제를 만들어 놓은 인간들에 의해 "청년들이 눈높이를 낮추지 않아서 생긴 문제"로 매도되고 만다. 모든 것이 개인 덕이고, 모든 것이 개인 탓! 이라는 이데올로기를 통해 한 세대, 혹은 한 계급 전체가 '개인'으로 조각조각난다. 맑스는 자본주의는 인간 존재를 '사적 개인들의 모음'으로 만드는 이데올로기와 함께 작동한다고 말했는데, 한국에서 이 이데올로기는 잉여학력과 함께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이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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