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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익에 반하는 이야기

유학 나와 있는 입장에서 내 이익에 반하는 이야기를 하는 건진 모르겠는데, 솔직히 나는 인문학 공부를 깊게 하려면 모국어로 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서양인문학 분야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공부를 깊게 하려는 사람들이 계속해서 모국어로 공부해도 지장이 없도록 후속세대 양성 시스템과 교원 시스템이 지금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유학은 공부를 깊게하는 것보다는 사유의 번역능력을 기르는 데 좋다. 타문화권, 타언어권에서 사유를 해야 한다는 것, 하지만 내 모국어는 결코 내 안에서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 그런 사이 공간의 연구자가 해야 할 고유의 역할들이 분명히 있다. 

 

하지만 한국의 서양 인문학 분야나 사회과학의 학자 양성 시스템은 이런 상식에 반하는 형태로 이뤄져 있다. 진태원 선생이 짧게 서술한 대로 돈이 없거나, 서울대 박사과정에 들어가지 않는 이상, 해외 박사 유학은 교수직을 꿈꾸는 사람들이 당연히 거쳐야 하는 코스처럼 받아들여진다. 교수들도 공부 좀 잘해서 키우고 싶은 제자가 있으면 어떻게든 유학을 보내려고 한다. 이것이 낳는 효과란, "학계"가 다양하고, 넓고, 뿌리 깊게 만들어지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박사논문이란 건 관련분야의 선행연구들을 이어받아서 그것을 더 풍요롭게 만드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영어의 헤게모니 덕에 영어 권의 연구는 모든 다른 언어권의 연구자들이 검토하는 편이고, 그 외 유럽어들은 각각 자신들의 언어권 내부의 맥락에서 참조되는 편이다. 박사과정을 해외에서 밟는 사람은 그럼 어떤 연구를 자신의 선행연구로 삼냐면, 영어권의 연구와 자기가 유학하는 언어권의 연구다. 한국 학계의 선행연구를 참조할 필요는 별로 없다. 해도 자기가 박사논문을 써서 제출하는 그 학계에 그걸 아는 사람이 없는데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이게 뜻하는 바는, 그렇게 유학하고 돌아온 사람들은 한국에서 한국어로 논문을 쓰게 되지만, 자신들이 학문하는 "장"은 한국이 아니게 되어버리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한국에 돌아온 사람은 자기가 공부한 "장"과의 연결관계는 또한 일정부분 끊어진 상태가 된다. 읽기는 하지만 쓰지는 않으니까. 이렇게 될 때 해외 학계는 곧 숭배의 대상이 되어 버린다.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학자들은 저마다 자기가 공부한 학문 장의 괜찮은 책들을 번역하거나, 사실 번역이 돈에도, 업적평가에도 도움이 안 되니 논문으로 일정하게 소개한다. 이 때 자기가 있어 보이려면, 혹은 번역 출간을 해주는 출판사를 구하기 위해서라도, 그 쪽 학계에서 "그냥 좀 괜찮은" 학자도 "이 분야의 대가"가 되는 일이 속출하게 된다. 그리고 진짜 "대가급"의 학자라도 그 쪽 맥락에선 그냥 비판과 반박 가운데에 놓여 있는 "대가"인 반면 한국에 오면 귀담아 듣고, 뜻을 밝혀 행해야 하는 그런 "스승님"이 되어 버린다. 

 

(당장 나만 해도 올해부턴 번역에 착수하고 싶은 Martin Saar 의 번역을 출간해줄 출판사를 구하려면 기획서에 당연히 "악셀 호네트의 수제자로서 프랑스 철학을 주로 연구하며 독일 비판이론과 프랑스 후기구조주의를 모두 꿰뚫는 신진 대가" 뭐 이런 거 써야 하지 않겠냔 말이지.)

 

내가 생각하기로, "서양 인문학" 분야 및 일부 사회과학 분야가 계속 이런 식으로 학계가 구성되는 것은 결코 뿌리깊은 사대주의라던가, 식민주의라던가 하는 그런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아주 물질적인 문제다. 이미 우리는 100년이 넘도록 서양인문학을 한국에서 연구해 왔는 걸. 하지만 학자를 길러내는 시스템이 이 모양이어서야, 늘 교수들은 유학파로 채워지고, 유학파 교수들은 수업시간에 "한국에서 제대로 벤야민을 이해하는 사람은 없어. 독일에선 말이지..." 뭐 이런 이야기를 하면서 젊은 연구자들을 해외로 몰아댈 것이다. 바로 지금 그 자리에서 젊은 연구자들을 박사과정으로 받아서 함께 한국에서의 벤야민 이야기를 자기가 만들어 내야 하는 것인데도 말이다! 

 

유학은, 내가 볼 때는 그거 성격으로 하는 거다. 유학이 성격에 안 맞는 사람은 정말 고생한다. 애초에 넓이를 추구하길 즐기고, 타문화권, 타언어권에서 생활하는 것이 성품에 맞는 사람이 유학을 해야 건강도 안 버리고, 마음도 안 버린다. 머리는 좋고, 공부도 열심히 하지만 성격이 안 맞아서 유학을 와가지고는 몸 버리고, 마음도 버리고, 멀쩡한 사람 하나 완전히 이상한 사람 되가지고 피해의식과 자존심이 범벅이 된 채로 한국에서 유학파 부심 부리면서 동시에 유학생 먹칠하는 사람이 속출하는 건 그 사람에게 들어간 외화를 생각해도 너무 낭비가 아닌가. 안 가도 될 사람들이 한국에서 깊이 공부하면 연구자로서 일정한 커리어를 싸울 수 있는 모델이 정립이 되어 있다면 이런 낭비를 하지 않아도 될텐데 말이다. 

 

이런 상황을 타계하려면, 뭐 여러가지 대안이 있을 수 있겠지만 무엇보다 일정시점을 정해놓고, 국내 박사과정에 대한 공통의 기준과 장학 시스템을 마련한 이후 그 시점 이후 배출되는 국내박사를 거의 "무조건" 해외 박사들보다 높게 평가하는 "편협함"이 필요하지 않은가 하는 생각을 한다. 해외에서 박사를 한 사람들의 경우는 국내에서 마치 프랑스의 국가박사논문이나 독일의 교수자격논문(하빌리타치온)처럼 박사논문에 준하는 논문을 하나 더 써야(그리고 그 논문은 한국 학계의 연구결과를 반드시 반영한 것이어야 하도록 하고) 국내 박사에 준하는 지위를 주는 것이다. 그럼 정말 자기가 좋아서 해외나가는 사람들 말고는 안 나가려 하겠지. 그리고 그게 결과적으로 한국의 인문사회과학계의 수준을 높이게 될 거다. 대학원 박사과정을 살리지 않으면 한국 인문학이란 사실상 계속 수입 학계로 밖에 남지 않게 될 것이다.

 

반대로 유학파 연구자들의 커리어를 위해서는 "번역"과 "아카이빙"에 펀드와 평가를 제대로 쳐 줘야 한다. 지금처럼 유학을 다녀온 사람도 번역을 꺼리게 되고, 결국 인문학 번역을 석박사 대학원생들이 초기 경력삼아 하는 시스템보다는, 제대로 고급인력을 철썩철썩 굴려가면서 질 좋은 번역을 뽑아내고, 우리도 좀 우리말로 된 서양인문학 아카이브들을 제대로 갖추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유학파 연구자들은 이 분야에 일자리를 얻고 말이다. 

 

뭐, 삶을 위한 인문학도 좋고, 투쟁하는 인문학도 좋고, 다 좋은데, 제도권 학계 역시 인민의 공적 자산이다. 여기에도 신경써야 할 것들은 참으로 많다. 뭐 내가 아무리 애정을 갖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한다 해도 그곳은 나를 받아주지 않는 곳이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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