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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04/18
- 민중신학에 대한 문답(2)
페이스북 «복음주의 클럽»에 올려서 진행한 질문과 답변들입니다. 아쉽게도 더 깊이 들어가지를 못했네요. 어디까지나 질문에 대한 대답을 추구해 보았습니다만, 더 깊은 것이 궁금한 분들은 별로 없었나 봅니다.
"민중신학에 대해 무엇이든 물어보는 글타래입니다"
시간과 여력이 되는 한 친절하게 대답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제가 모르는 주제는 잘 아는 사람을 소환...하도록 하겠습니다.
참고
Gefällt mir · · Beitrag nicht mehr folgen · Teilen · 10. April um 18:35
혜윤, 현정원, Heesong Yang und 21 anderen gefällt das.
Gyedo Jeon 남미의 '해방신학'과 비슷한 점/ 다른 점은 무엇인가요? 11. April um 01:59 · Gefällt mir · 2
Ki-myoung KimKang 우선 "해방신학"은 좁은 의미에서 남미의 정치신학을 가리키기도 하지만, 넓게는 모든 종류의 사회, 정치, 경제적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을 신학적으로 사유하는 신학을 일컫는 넓은 이름입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민중신학도 여성신학, 흑인신학, 달릿신학 등과 더불어 해방신학의 하나입니다. 좁은 의미의 남미 해방신학 역시 많은 변화를 겪어오고 있고, 최신의 경향은 제가 잘 모르기 때문에 초창기의 해방신학과 민중신학의 차이점을 말해보자면, 무엇보다 제가 저 참고메모에서 썼듯이 해방신학의 가장 주요한 주장은 "가난하고 억압받는 자들에 대한 하느님의 우선적인 선택"에 있습니다. 이것은 전통적인 신학에서 말하는 "모든 사람들을 위한 구원"이 사실상 우리가 지금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의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죽임과 억압을 은폐하는 "서구, 백인, 남성, 가진자들의 구원"일 뿐임을 폭로하고, 진정한 세계의 구원을 위해서 하느님은 가난한 자, 억눌린 자를 먼저 사랑하시고, 그들을 위한 구원을 베푼다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기존의 신학에 대한 비판이 분명히 들어 있지만, 민중신학의 시각에서 보자면, 전통적인 해방신학은 여전히 기존의 기독교 신학의 연장선상에 있습니다.(이단이 아닙니다!) 여전히 삼위일체 하느님이 세상을 구원합니다. 하느님께서 가난한 자들을 선택하시고, 그리스도께서 가난한 자들의 공동체에 임재하시며, 성령께서 세계의 해방(구원) 운동에 활기를 불어넣으십니다. 구원하는 주체는 여전히 하느님입니다.(고전적인 흑인신학 역시 비슷한 틀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흑인의 주제를 해방신학에 있어서 우선적 선택의 문제로 사유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민중신학은 첫째로, 기존의 기독교 신학이 갖는 — 혹은 물러설 수 없는? — 주체이신 하느님 자체를 문제삼습니다.(이런 점에서 여성신학의 주요한 주장과 비슷하기도 합니다.) 그런 점에서 서남동은 민중신학을 "반신학"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고전적인 서구 형이상학에 의해 구성된 신과 인간(혹은 세계)의 존재론적, 본질적 구분, 구원하는 주체인 초월적 신과 구원받는 객체인 인간(혹은 세계)의 구분을 민중신학은 철폐합니다. 그것을 "예수가 민중이고, 민중이 예수다"라는 말로 표현합니다.(이단입니다!)
이것은 민중과 예수가 본질론적으로 일치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민중신학은 본질론 대신 "사건"을 이야기합니다. 민중이 억압받고 있는 그 사건 속에서, 민중이 그 억압을 떨치고 일어나는 그 사건 속에서 민중과 예수가 하나라는 것입니다. 갈릴리에서 예수는 민중들 속에서 일어났으며, 민중의 고난과 희망이 예수를 또한 끌고 갑니다. 구원은 "…가 …를 구원한다"라는 주어와 서술어로 이뤄진 문장으로 서술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구원 사건이 일어났다" 라는 "증언의 문장"으로만 서술될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민중신학은 신약 성서의 전통을 분명히 자신의 것으로 하지만, 기독교신학과는 다른 방식으로 성서를 읽습니다. 또한 성서만이 아니라 모든 억압받는 이들의 이야기 — 특히 7, 80년대 한국의 민중에 주목했기에 한국 민중들의 해방 이야기(전태일, 광주, 구로동맹파업 등..) — 속에서 구원 사건을 발견하고 그것을 증언하는 것을 과제로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성서의 민중 이야기와 연결함으로써 그 사건을 "신학적인 것"으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민중신학은 기독교 신학의 전통과 불화하는 신학이라 하겠습니다.
더 자세한 이야기는 문답이 진행되면서 드러나리라 생각하고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여기에서 졸. 11. April um 18:42 · Bearbeitet · Gefällt mir · 9
Duvah Song 민중이라는 단어는 계급적으로 인식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민중신학의 민중개념은 어떤지 궁금하며, 계급적이라고 한다면 타계급을 무엇으로 인식하고 어떻게 대하는지 궁금하네요! 맑스주의의 계급론과는 어떻게 다를까요? 11. April um 11:48 via Handy · Gefällt mir
Ki-myoung KimKang "민중"이라는 개념은 명확한 역사적 기원을 갖는 한국어 용어입니다. 이런 건 깡성호 님을 비롯한 역사학도들이 잘 설명해 주실 것이라 생각합니다. 다만, 민중신학에서 민중을 뭐라고 보느냐만 짧게 설명해 보자면 민중신학은 민중을 계급론적으로 "정의"하는 것을 매우 꺼립니다. 특히 초창기의 민중신학자들의 작업이 그렇습니다. "민중의 개념을 분석하는 것을 과제로 하는 것은 여전히 서구 근대철학의 방법론이다"라는 식으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80년대 운동권이었던 2세대 민중신학자들은 맑스주의의 계급론과 민족주의의 피억압민족론, 종속 이론등을 받아들여서 민중을 설명합니다만, 그것은 그냥 80년대 운동권 이론과 크게 다르지 않은 민중에 대한 설명입니다. 저는 오히려 초창기의 민중신학 민중론이 갖는 독특한 성격이 요즘 다시 의의를 갖지 않나 생각합니다.
민중을 개념적으로 설명하는 대신에 초창기 민중신학자들은 민중을 "증언"했습니다. 민중에 대한 지식을 통해서 민중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민중으로부터 받은 충격에 의해 민중을 "알려고" 했던 것입니다.(사실 이런 방법은 현대철학에서 후기 맑스주의라 할만한 문화연구나 레비나스의 타자론 등에서도 발견되는 방법론과 비슷합니다.) 그래서 민중은 "어떤 정치사회적 구조 속에서 어떤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다." 식으로 서술하는 게 아니라 억압이 벌어지는 그 자리에서 각각 민중을 발견하는 것, 지배자나 자본가가 누군가를 착취하거나 배제할 때 거기서 민중을 발견하고, 그 배제와 차별, 착취를 낳는 구조를 설명하려 합니다. 그리고 민중이 그 억압을 떨치고 일어나는 "민중의 자기 초월"(구원)사건을 바라보고 증언합니다. 그래서 민중은 유동적입니다. 이를테면 광주의 시민들이 시민권을 상실했을 때 민중신학은 그들을 민중이라고 부릅니다. 학교의 청소년들이 억압과 죽음의 문화에 놓여 있을 때 그들을 민중이라고 부릅니다... 이런 식의 방법론을 택하는 것입니다.
이런 방법론을 통해 도달하는 것은 정치경제학적 계급론의 "계급"보다는 좀 더 보편적이고 사회적인 관점의 "민중론"인 것 같습니다.(맑스의 저작에서도 이른바 "청년맑스" 시기에 나타나는, 이 세계를 만들지만 이 세계에서 배제되어 있는 "보편적인 가난한 자들, 프롤레타리아"와 비슷합니다.)
Duvah Song "타 계급을 어떻게 보느냐"는 나중에 다시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11. April um 12:22 · Bearbeitet · Gefällt mir · 5
David Hong 민중신학과 같은 류를 상황신학이라고 하지 않나요? 민중신학이나 해방신학이나 여성신학, 퀴어신학도 같은 맥락에서 볼 수 있는거죠? 저는 그렇게 알고 있는데...
여튼 본질문을 드리려고합니다. 소위 종교개혁 이후에 루터, 칼뱅, 쯔빙글리나 이런 개혁자들에 의해 "이신칭의"로 불리우는 소위 "하나님의 의"에 대한 개념이 재평가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 개념이 재평가(회복이란 개념도 쓸 수 있을까요?)되면서 자연스럽게 예수에 대해서, 또한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해서도 재정립이 된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이러한 상황신학. 특히 민중신학에서는 이러한 삼위일체 하나님과 이신칭의에 대한 이해가 얼마나 탄탄한 바탕을 갖고 있는지가 궁금하네요. 간혹 상황신학을 하시는 분들의 글을 보면 "성서"와 "예수"를 인용해서 운동권의 운동을 합리화하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거든요. 즉, 상황신학은 정통신학과 어떤 연관이 있는지 궁금하네요? 11. April um 11:57 · Gefällt mir
Ki-myoung KimKang 천천히, 천천히... 11. April um 11:57 · Gefällt mir · 2
깡성호 그분 말씀처럼 전 개혁주의도 민중신학도 "민중"도 모르는 자라.....ㅋ 11. April um 12:05 via Handy · Gefällt mir · 1
Duvah Song ㅋㅋ질문폭발 11. April um 12:05 via Handy · Gefällt mir nicht mehr · 1
Ki-myoung KimKang David Hong 음. 이 질문이라면 제 첫번째 댓글에서 어느 정도 — 전통적 기독교 신학과의 연결과 단절 — 서술이 되었으리라 봅니다.
다만 덧붙이자면, "상황신학"과 "보편적 신학"의 구분은 "상황신학" 범주에 있는 신학의 문제의식을 이해하지 못한데서 나오는 의도적인 폄훼의 용어입니다. 해방신학이나 여성신학, 민중신학은 제각각 다른 지점에서 소위 전통적 기독교 신학이 인류 모두를 위한 보편적인 구원을 말한다고 주장할 때 사실은 특정한 맥락과 상황만을 옹호할 뿐이라는 것을 드러내고 비판하는 신학입니다. 오히려 기독교 전통 신학이야 말로 특수한 맥락에 놓여 있는 — 이를테면 서구, 남성, 백인, 이성애, 성직자들의 — 신학이라는 것을 드러내서 오히려 "보편성"을 회복하려는 것이 "상황신학"이라고 폄훼받는 신학들의 과제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상황신학을 하시는 분들의 글을 보면 "성서"와 "예수"를 인용해서 운동권의 운동을 합리화하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거든요."라고 한다면, 기존의 신학은 성서와 예수를 이야기하고 그걸로 체계를 세웠는데 사실은 이 체계가 우리의 보편적인 세계에 분명히 이야기되어야 할 것들을 삭제하고 배제한 "그들만의 신학이다" 그러니까 너네야 말로 "상황신학"이다.라는 반박을 할 수 있겠지요. 12. April um 01:44 · Bearbeitet · Gefällt mir · 4
Ki-myoung KimKang David Hong 보론: 이거 정용섭 목사님이 맨날 상황신학보고 욕하는 그 말이잖아욬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11. April um 12:24 · Bearbeitet · Gefällt mir · 2
Ki-myoung KimKang 아무튼 민중신학은 여러 해방신학들 중에서도 특히 더 전통적인 기독교 신학의 방법론에서 자유로운 신학입니다. 뭐, 전통신학의 용어들 — 죄, 구원, 대속 — 같은 것도 자유자재로 갖다 쓰긴 합니다만, 전통적 신학과는 전혀 다른 의미로(위에서 설명한 "증언"을 위한 용어로) 가져다 쓰죠. 11. April um 12:18 · Gefällt mir
숑숑숑 보통 3세계 신학(오해안하시길)은 기존 우리가 알게 모르게 답습해서 쌓여있는 신학적 맥과 좀 다르죠. 그 기준으로 해석하면 올바르게 이해할 수 음쬬. 참고의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 11. April um 12:27 · Gefällt mir
Ki-myoung KimKang David Hong 이번엔 제가 질문: "그렇다면 전통적이고 보편적이라는 신학의 논리에서는 예수가 오늘날 현실의 세계 속에서 고통받는 민중, 여성, 흑인, 종교적 소수자 등등을 도대체 어떻게 구원하는가? 심지어 전통적 신학의 논리와 서술 자체가 그 억압의 원인중 하나일 때라면? 전통신학이 여기에 먼저 답하지 않고, 현실의 운동 속에서 끊임없이 구원을 발견하는 소위 상황신학이 상황적이라고 비판하는 건 비겁하지 않은가. 여러분들의 보편이란 과연 "보편"인가."(이미 썼던 글에서 옮겨온 겁니다.^^) 11. April um 12:42 · Bearbeitet · Gefällt mir · 3
David Hong 1.도서관에서 있는 중이라 방에 들어가면 글을 쓰겠습니다잉 (김집사님 패러디) ㅋㅋㅋㅋㅋ 11. April um 12:39 via Handy · Gefällt mir
Ki-myoung KimKang §§§댓글을 다시는 분들께 부탁: 반드시 전체 글을 읽으신 다음에 질문이나 의견 개진을 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안 그러면 정자가 줄어들어 사망에 이릅니다! 11. April um 12:39 · Gefällt mir · 7
Ki-myoung KimKang David Hong "심지어 전통적 신학의 논리와 서술 자체가 그 억압의 원인중 하나일 때라면?"이라는 문장을 추가했습니다.(근데 여기 말고 다른 글을 열어서 이 논의는 따로 진행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이건 전통신학에 대한 제 질문이니까요) 11. April um 12:44 · Bearbeitet · Gefällt mir · 3
엔틸드 우와 선생님 민중신학 이야기 재미있어요! \'ㅅ'/ 11. April um 14:36 · Gefällt mir nicht mehr · 4
Duvah Song 편집은 언제쯤 끝나십니까...ㅋ 11. April um 16:21 via Handy · Gefällt mir · 1
Ki-myoung KimKang Duvah Song 일단 끝냈습미다. 또 물어보세요! 11. April um 16:42 via Handy · Gefällt mir
Duvah Song 구원론에 있어 주치와 객체의 구분을 지워버리는 게 인상적이네요. 그렇다면 궁금한 게, 왜 신학입니까? 이와 같은 작업은 탈식민주의 담론에서 많이 논의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논의는 신이라는 실존을 전제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왜 민중'신학’이어야 할까요? 11. April um 17:22 via Handy · Gefällt mir · 1
Ki-myoung KimKang 데이빗 님의 글에 단 댓글을 참조하시면 곧바로 응답이 될 것입니다*^^* 신에 대한 학문만 신학이 아니라 "신학에 대한 학문"도 역시 "신학"이라고 부를 수 있겠지요. 11. April um 17:24 via Handy · Gefällt mir · 5
Duvah Song 이해되지 않는 맥락이 있습니다. 주-객을 희석시키면 그 자체로 기독교(넓은 의미에서)라고 할 수 있습니까? 이건 단순히 전통에 관한 문제가 아닌 것 같습니다. 종교란 무엇이냐에 대해서는 다양한 시각들이 있겠지만, 기본적으로 종교를 구분하는 변별성은 종교 주체(그것 교조이든 신이든 간에) 아닐까요? 어떤 종교는 그렇지 않다고 해도 기독교와 타종교를 구분하는 변별자질은 주체자로서의 하나님과 예수그리스도입니다. 좋고 나쁨을 떠나서 민중신학의 개념은 이런 의미에서 기독교 외부에 위치해 있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그렇다면, 그것이 전통적 기독교와 소통할 수 있는 여지는 무엇에서 생기느냐 하는 의문이 생깁니다. 민중신학이 저런 것이라면, 민중신학 논의를 기독교담론 내에서 하는 것 자체가 저로서는 신기합니다. 11. April um 17:53 via Handy · Gefällt mir · 1
Ki-myoung KimKang 민중신학이나 여성신학같은 신학은 기독교를 자원으로 하는 거지 기독교의 자기 해명을 위한 신학이 아닙니다. 기독교가 아니지만 기독교신학이 없으면 또한 존재하지 않는 신학이죠. 그래서 "반신학적" "탈신학적 신학"이라고 부릅니다. 혹은 "비판신학"이라고 할 수도 있죠. 11. April um 18:00 via Handy · Gefällt mir · 2
Ki-myoung KimKang 결론: 이단 맞습니다 11. April um 18:00 via Handy · Gefällt mir · 2
Ki-myoung KimKang 하지만 예수 이야기를 안 하는 건 아니라는 거죠. 11. April um 18:00 via Handy · Gefällt mir · 1
Ki-myoung KimKang 안 아니면 밖만 있는게 아니라 "안에 있는 외부"라고 한 번 생각해 보셔요. 그럼 공간적인 이해에 도움이 되리라 봅니다. 11. April um 18:04 via Handy · Gefällt mir · 3
Duvah Song 그간 얼핏 민중신학을 기독교카테고리 내에서 생각해 왔는데 그럼 엉뚱한 이야기가 되는 거군요. 참 재밌습니다.^^ 감가합니다. 마지막으로 민폐 끼치자면, 민중신학 논의가 현재의 기독교 신학에 어떤 이로운 영향을 주리라 예상하십니까? 이단 정죄를 위한 논의는 아닐 거구요..ㅋ 11. April um 18:11 via Handy · Gefällt mir
Ki-myoung KimKang Duvah Song 제가 먼저 여쭈어 봐도 될까요? 어떤 이로운 영향을 주리라 예상하시는지.^^ 저는 그냥 간단하게만 일단 대답하렵니다. 예를들면 영화 "밀양"은 기독교 영화는 아닙니다. 하지만 분명하게 "신학적" 영화 — 기독교를 다룬다는 점에서도 그렇고, 신학의 주요한 통찰들, 죄와 속죄와 구원의 문제를 다룬 다는 점에서도 — 이고,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성찰의 계기를 제공해 주었죠. 그런 역할을 하고 있는 신학들이 많이 있습니다. 민중신학도 그 중 하나이겠죠. 11. April um 18:49 · Bearbeitet · Gefällt mir · 2
Heesong Yang ㅋㅋ '복음주의' 클럽 안에 '민중신학' 좌판이네... 제일 장사가 잘되는구만. 쏠쏠한 얘기들 오가구...^^ 이러다가 대거 복음주의적 민중신학 성도들이 마구 등장할지도. 11. April um 18:51 via Handy · Gefällt mir · 3
Ki-myoung KimKang 복음주의적 민중신학은 형용모순입니닼ㅋㅋㅋㅋㅋㅋ (급정색: 하지만 복음주의적 해방신학은 모순이 아니고 실제로 가능하고, 또 존재합니다) 11. April um 18:57 · Bearbeitet · Gefällt mir · 3
Se Yo Oh 글을 읽고나니 드는 생각인데 그렇다면 '민중신앙'은 존재할 수 있는게 맞습니까? 스스로의 신앙을 그렇게 생각하고있었는데 김강센세의 글을 보니 그게 제법 힘들어보이지말입니다... 11. April um 19:10 · Bearbeitet · Gefällt mir · 1
Ki-myoung KimKang 민중신학과 민중교회와 민중신앙은 하나가 아니라 서로 관련되지만 각각 다른 것입니다. 그러니까 민중교회의 성도들이, 민중신앙을, 민중신학을 통해 갖는 그런 관계가 아닙니다. 하지만 민중신앙이란 건 존재하지요. 예를들자면 "지금 우리가 암울한 시기를 지나고 있지만 언젠가 "그 때"는 온다." 이런 것들이 민중신앙들의 한 종류가 아닙니까. 그러한 민중의 신앙형태들도 민중신학의 동기이자 재료들이죠.
민중교회도 간접적으로 민중신학의 도움을 받을 순 있겠지만, 민중신학이 사목을 위한 직접적이고 도구적인 도움을 준다고 보기는 무리가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 신학자체에 대한 비판적 성격 때문에요. 민중목회를 위해서라면 민중신학보다 해방신학이 훨씬 더 민중교회에 직접적으로 도움이 될 것입니다. 11. April um 20:03 · Bearbeitet · Gefällt mir · 2
Ki-myoung KimKang 결론: 민중신학 도움 안 됨. 11. April um 19:28 · Gefällt mir · 2
Ki-myoung KimKang 보론: 특히 교회 영업에 지장을 초래함. 11. April um 19:28 · Gefällt mir · 3
Se Yo Oh 쉬어가는 뜻에서 취향질문 하나 드리겠습니다
서남동 VS 안병무 11. April um 19:40 · Gefällt mir · 1
Ki-myoung KimKang 김진호 11. April um 19:40 · Gefällt mir · 1
Se Yo Oh 김강기명 당했다...!! 11. April um 19:41 · Gefällt mir · 1
Ki-myoung KimKang 도움 안 된다는 건 농담이고, 나는 민중신학이나 여성신학 등이 타자와 관계맺는 방식을 바꿔준다고 생각해요. 전통적 신학에서 구원하는 하느님과 구원받는 인간은 실천적으로는 주체인 그리스도인과 객체인 비신자나 고난받는 자, 여성, 흑인…이 되는 경우가 많은데, 이런 대상적 시선을 넘어서, 그들로부터 내가 구원받는 그런 관계를 맺게 되는 거지요. 그래서 서남동은 소위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 혹은 "강도만난 사람의 비유"를 해석하면서 누가 구원자인가라는 질문을 던집니다. 사마리아 인이 아니라 바로 그 강도를 당한 자가 구원자입니다. 그가 피흘리는 부정한 자가 되어 고통속에 남겨져 있을 때, 역시나 부정한 존재요, 죄인으로 규정된 사마리아인이 그와 연대하고, 그것을 통해 그는 구원받은 거지요. 11. April um 21:11 · Bearbeitet · Gefällt mir · 4
Se Yo Oh 1,2세대 민중신학자들이 스스로를 민중(혹은 즉자적 민중)과 분리시켜 생각한것에 대한 김강센세의 견해를 듣고싶습니다. 더불어 서남동의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 해석의 출전을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ㅋ_ㅋ 11. April um 19:48 · Gefällt mir · 1
Ki-myoung KimKang Se Yo Oh 1. "선생님 돈 많아요?", 2. 어디였지… 12. April um 02:06 · Bearbeitet · Gefällt mir · 1
Ki-myoung KimKang Duvah Song 하나 덧붙입니다^^ 민중신학이 기독교라 할 수 있는가를 묻느다면 민중신학은 기독교에 이렇게 되물을 수 있습니다. "성서를 기독교 전통만이 독점할 수 있는가?"라구요. 누구든, 기독교 전통이 교리적으로 읽는 방식과는 다른 방식으로 성서를 읽을 수 있지요. 기독교도들이 고대 이스라엘 종교나 유대교와는 다른 방식으로 제1성서(구약)를 읽는 것처럼요. 민중신학에서도 성서는 중요한 "전거"입니다.^^ 11. April um 21:44 via Handy · Bearbeitet · Gefällt mir · 1
Ki-myoung KimKang §§§댓글을 다시는 분들께 부탁: 반드시 전체 글을 읽으신 다음에 질문이나 의견 개진을 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안 그러면 정자가 줄어들어 사망에 이르고, 죽으면 지옥불에서 영원히 태워집니다.§§§ 12. April um 01:15 via Handy · Bearbeitet · Gefällt mir · 3
깡성호 역사학도로서 예전에 읽었던 책의 메모를 '그냥' 올립니다: "우리가 기독교의 역사를 인식한다는 것은 단순히 지나온 기독교의 객관적 과거의 사실이나 역사 지식을 습득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과 자연 세계를 섭리하는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는 것이며, 또한 하나님께서 민중과 더불어 이루어 가시는 해방 활동의 원리와 법칙을 인식함으로써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현실의 모순과 역사의 과제를 풀어가자는 데 있다." (연규홍, 「역사 주체로서의 민중과 교회사」, 『민중신학입문』, 한울, 1995, 45쪽) 11. April um 21:54 · Gefällt mir
Ki-myoung KimKang 깡성호 님이 인용하신 글은 민중신학이 기독교 신학 안에 머무르는 경향을 강하게 보였던 2세대 민중신학자들 중 보수적인 흐름을 반영하는 것입니다. 대표주자는 임태수. 저는 싫어합니다. 12. April um 01:08 · Gefällt mir · 2
David Hong 김강센세는 모르는게 뭡니까? 민중신학과 보수신학과 철학을 모두 섭렵하셨는데..당신은 진정 지하철전도자되십니다. 12. April um 01:11 via Handy · Gefällt mir
Heesong Yang 독일의 흔한 유학생... 김강. 12. April um 01:12 via Handy · Gefällt mir · 3
Ki-myoung KimKang 제가 안 본건 잘 모릅니다. 그리고 모르는 이야기는 잘 하지 않을 뿐입니다. 판넨베르크라던가, 보프라던가, 유진 피터슨이라던가, 톰 라이트라던가... 이런 유명한 사람들 하나도 잘 몰라요. 저는 우물파는 걸 좋아하는 편이지 박학은 결코 못 됩니다... 12. April um 01:46 · Bearbeitet · Gefällt mir · 1
Duvah Song 민중신학이 기독교라 할 수 있는가와 성서를 기독교 전통만이 독점할 수 있는가는 사실 엄밀히 관계가 없는 이야기같습니다. 성서 해석이야 누가 어떻게 하든 자유 아닙니까. 기독교계에서야 싫어하긴 하겠지만, 그렇다고 뭘 어쩌겠습니까. 기껏해야 에반겔리온 애니매이션 보지 말라고 하는 정도겠지요. 12. April um 02:49 · Gefällt mir
Duvah Song 근대 체계 안에서 주객을 삭제하는 건 의미있는 일인 것이 분명한데, 솔직히 주체자를 제거하는 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성경이 아리안계 백인 남성 우월주의를 조장한다고 보기도 힘들고(말씀마따나 성경 해석이야 지 꼴리는 대로 가능하니까요), 지금까지 그렇게 만들어온 체계는 해체하면 그만일 텐데요. 지라르의 희생양이론에 관한 책이 저희 출판사에서 곧 나옵니다만(책홍보?), 절대자로서의 하나님이 인간을 타자화하시는 방식은 정신분석학적 시각에서부터 이야기되어 온 타자와는 다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구약만을 두고 분석하면 모르겠으나, 예수그리스도를 통한 자기희생은 스스로를 객체화하고 타자화 함으로써 주체와 객체의 구도를 뛰어넘었다고 봅니다. '종이 아니라 친구'라는 말씀은 그런 의미에서 해석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모두가 주체이지만 타인을 객체화 하지 않는 이상, 모두가 객체임을 인식하는 주체들을 꿈꿀 수 있게 된 거라고 봅니다. 물론 이론과 현상은 다르겠습니다만..... 그런 의미에서 사실 민중신학 이론이 잘 와닿지 않는 것은 사실입니다. 현재 기독교가 보이고 있는 억압적 주체자의 형상은 성경의 것이 아니라, 근대주의의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기독교의 탈을 쓴 근대주의의 주체의식이 성경텍스트를 기표로 삼은 것으로 해석해 봅니다. 이것뿐만은 아니겠습니다만...... 민중신학이 투쟁의 대상을 너무 현상적으로 선정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드네요. 뭐 그냥 제 생각입니다. 12. April um 03:13 · Gefällt mir
Duvah Song 에른스트 블로흐는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너희가 신이 되리라'로 해석하더군요. 12. April um 03:18 · Gefällt mir · 1
YongYeon Hwang 민중신학의 입장에서 보면 신은 '절대자'가 아니죠. 그 '주체성' 자체가 바로 '민중'과의 관계에서 형성되는 것이다라는 게 골자니까요.
민중신학자들의 글에서 "사람이 된 신"인 예수는 종종 '수동적 존재'로 등장합니다. 특히 가장 결정적인 순간 중 하나인 수난의 장에서도. 12. April um 06:45 · Bearbeitet · Gefällt mir nicht mehr · 3
Ki-myoung KimKang Duvah Song 초창기 민중신학자들이 매우 단순하게 서구적인 구도와 반서구적인 구도를 나누고, 주-객도식에 대해 비판하는 것은 학문적인 성실성으로만 따지면 그렇게 수준높은 논의는 분명히 아닙니다. 하지만, 현대의 철학자들이 치열한 논박으로 주체의 문제를 재 사유하는 것과는 다르다는 차원에서 그렇다는 것이지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무엇보다 신과 세계를 사고하거나 상상하는 방식은 또한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그려내는데 큰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민중신학이 주-객 도식의 문제를 비판하는 이유는 그것이 실제 역사에서 지배적인 구조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걸 해결하는 방식이 민중신학이 하는 것처럼 존재론을 사건론으로 바꾸고, 역사의 주체 하느님(혹은 그리스도, 교회, 기독교적 지배자, 그리스도인…)을 뒤집어서 차라리 역사의 주체는 "민중" — 이 이야기는 주객의 논의를 그대로 둔 채 민중이 주체라고 하는 게 아니라 주객의 논의를 흔들기 위한 선언입니다. — 이다라고 하는 그런 방법만 있는 것은 당연히 아닙니다. 현대의 사회문제에 직면한 사상가들이라면 이 문제를 들고 씨름하지 않는 사람이 없고 지라르 같은 식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이 희생양의 문제를 완전히 끝냈다고 서술하는 것도 그 중 하나이겠죠. (전 도대체 그래서 2000년 전의 예수가 끝냈다고 하는 문제가 왜 안 끝났는지, 그리고 2000년전의 예수가 오늘 희생양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고 계신다는 것인지 도통 이해가 안 되었지만 제가 지라르 이해가 부족해서 그런 거겠죠...)
민중신학자들은, 특히 초창기의 안병무나 서남동이 오히려 가장 급진적이었는데, 기독교나 성서의 신이나 그리스도, 영혼, 천국 뭐 이런 것들을 존재론적 차원에서 생각하는 것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정확히는 그것을 거부하고 성서의 민중, 그리고 역사 속의 민중, 오늘날의 민중의 이야기 속에서, 또 민중사건 속에서 하느님이나 메시야가 어떻게 나타나는가를 보려 합니다.
(존재론적인 차원의 논의에 대해서는 이분들이 막 인터뷰하다가 뜬금없이 "전 넓게는 우주에 대해 범신론적 경향을 취합니다. (…) 내 나름의 이해에 따르면 자연을 신이라 해도, 역사를 신이라고 해도 좋습니다."(서남동) "나는 동양적 신앙 자세에서 주객 도식이 없는 것을 높이 평가해야 한다고 봐요. 'OO를 믿는다'나 'OO에 내맡긴다'보다 그저 '믿는다', '내맡긴다'가 더 옳아요. 딴 말로 하면 불교나 노장은 객체로서 신을 말하지 않으니까!" 뭐 이런 말을 서슴없이 합니다. 이단 맞습니다. 이분들의 존재론에 관하여선 제 석사논문에서 열심히... 아닙니다...)
이를테면 "마당극"을 한번 떠올려 볼 수 있겠습니다. 무대와 객석이 분리된 연극과는 달리 마당극이란 연행하는 사람과 관객이 사실 점점 구분되지 않게 됩니다. 전반적인 줄거리가 있다 할지라도 관객들이 참여하며 방향을 이끌어가는 와중에 내용도 바뀌고, 권력자들을 풍자하는 내용이 살을 붙여가기도 하고, 그 자리에서 카타르시스로 향하기도 하지만, 반대로 집단적인 공분을 야기하여 저항의 무기가 되기도 하고 그렇지요. 이러한 연행적 성격, 사건적 성격을 가지고 안병무는 성서, 특히 복음서의 이야기들을 바라봅니다. 예수가 민중을 끌고다니는 것처럼 보이지만, 민중이 예수를 끌고 다니는 것 아닌가. 예수가 민중을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와 민중이 마주침으로써 발생하는 사건이요, 연행이 아닌가. 하는 것이지요. 복음서의 기록에 있어서도 구술연행자들의 존재를 매우 중요하게 바라봤습니다. 하나의 신학적 의도를 가지고 누군가 기록한 게 아니라 민중들의 집단적 저작으로 복음서를 바라보는 것이지요.
이런 방법론을 통해 민중신학은 성서 이야기에서 — 성서의 각 책들이나 수많은 전승들 그 자체로는 권력편향적인 이야기도 많고, 성차별적이고 억압적인 내용도 많습니다. 하느님 모습도 일관된다기 보단 때론 억압자의 편으로, 때론 민중의 희망으로 나타나는 등 다양하지요. — 도도하게 흐르는 이러한 민중적 전승의 맥을 발견하려고 합니다. 마치 화산맥처럼 많은 순간 밑바닥에서 보이지 않게 흐르다가 출애굽이나, 예수의 반란, 예언자들의 투쟁 등에서 한번씩 분출하는 맥을 보려 하지요.(하지만 이 논의를 정밀하고 수준높게 끝까지 밀고나가지는 못했다고 생각합니다.)
성서 자체에 일관성을 부여하고, 교리를 추출하는 기독교 신학과는 이 점이 크게 다르지요. 잠깐 언급하신 에른스트 블로흐가 "저항과 반역의 기독교(원제는 '기독교 내부의 무신론')"에서 취하는 방법과도 어떤 점에선 비슷합니다. 민중의 전승을 발견하고, 반란적 선분들을 찾아내고 그것을 또한 수많은 역사의 민중 이야기들, 오늘날 한국의 민중 이야기들과 함께 읽어내는 것(두 이야기의 합류). 그것을 통해 민중을 증언하고, 그 증언을 통해 기존의 신학이 보지 못하는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것 내부의 "신학적인 것"을 발견하는 것, 지배 체제를 비판하는 무기로 삼는 것. 이런 것들이 민중신학의 과제였습니다. 물론 오늘날의 문제에 대해 성서를 통해 개입하는 여러가지 방법 중 하나라고 생각하지, 기독교를 대체한다거나 뭐 그렇게 생각할 수는 없겠죠.(저는 민중신학자들이 무척 싫어했던 칼 바르트를 무척 좋아합니다!) 12. April um 12:41 · Bearbeitet · Gefällt mir · 2
Ki-myoung KimKang 헉. 헉.. 12. April um 12:37 · Gefällt mir · 2
Ki-myoung KimKang 물론 민중신학으로 무슨 "새로운 기독교"를 아예 만들어 보겠다고 하시는 분들도 있습니다. 무척 시원찮죠. 요즘은 뭐하고 계시는지도 모르겠는 정강길이라던가 정강길이라던가... 12. April um 13:27 · Gefällt mir
Duvah Song 김강기명김수영 시인은 정치적 자유를 '무엇이든 말해도 되는 자유'와 동일하게 이야기했다지요. 민중신학은 그런 의미에서도 생각해 볼 만한 것 같습니다. 글 정말 잘 읽었습니다. 며칠 사이에 많이 배웠습니다. 감사합니다...^^ 12. April um 18:13 · Bearbeitet · Gefällt mir
Ki-myoung KimKang Duvah Song 그냥 가지 마시고 지라르 이야기도 좀 들려주시죠. 어떻게 2000년 전의 예수가 지금 이자리에서도 계속 생산되고 있는 이 사회의 희생양들을 위한 단번의 속죄제물이 되는 건지, 그것은 실제로 어떤 것인지, 어떻게 오늘날의 희생양들을 철폐하는 것인지 궁금합니다. 배움의 기회를 주소서. 12. April um 18:18 · Bearbeitet · Gefällt mir
Duvah Song 제가 지라르를 이야기하면 주제넘는 이야기가 되어 버립니다. 저는 넓게 손을 뻗느라 깊이 파고들기 어려운 일개 출판편집인에 불과한지라...; 주제가 못됩니다 제가...ㅠㅠ 12. April um 18:28 · Gefällt mir
Ki-myoung KimKang 꼭 지라르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Duvah Song 님께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도 궁금하군요. 12. April um 18:29 · Gefällt mir
Duvah Song 다만 제 짧은 식견에, 두 가지 관점에서 고민해 볼 여지는 있지 않을까 합니다. 첫 번째는 희생양 이론이라는 것이 일종의 메카니즘이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이 already, not yet(맞나요...)라는 사실입니다. 12. April um 18:29 · Gefällt mir
Ki-myoung KimKang 추상적인 이야기라 잘 알아듣기가 쉽지 않습니다. 좀 더 풀어보시면 님도 좋고 저도 좋은 대화가 될 듯 합니다^^ 12. April um 18:31 · Gefällt mir
Duvah Song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12. April um 18:32 · Gefällt mir
Duvah Song 지라르의 희생양이론은 관념철학의 산물이 아니라 문화인류학적 연구성과라고 합니다. 그것은 곧 현상에 대한 연구 결과라는 것이고, 현상을 만들어내는 과정, 다시 말해 메카니즘을 도출해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지라르의 이론이 현상으로부터 도출해낸 메카니즘이라는 것은 거꾸로 말하면, 그것을 통해 다시금 현상을 구성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이 이미 이루어졌으나 아직은 아니다라는 상태를 적용시켜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현상을 구성할 주체에 대한 논의가 먼저 되어야겠지만 차치하고 말하자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도출된 반희생양 메커니즘-희생양 메커니즘을 해소하는-은 그의 유지(?)를 잇는 자들을 통해 희생양 메커니즘이 해소된 현상을 구성해낼 수 있도록 만든다는 것입니다. 2000년 전에 도출된 메커니즘이지만, 지라르 문화이론의 전제, 즉 희생양 메커니즘이 문명을 만들어냈다는 전제를 감안한다면, 그것은 시대를 넘어 현재에 있어서도 여전히 유효한 것이 된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현대 문명 역시 희생양 메커니즘으로 형성되었다고 할 테니까요. 12. April um 18:45 · Bearbeitet · Gefällt mir
Duvah Song 지라르에 대한 공부가 얕은 저는 사실 문명의 발생과 발달을 뭉뚱그려 희생양메커니즘으로 설명하는 게 현재로서는 조금 어렵습니다.... 12. April um 18:46 · Gefällt mir
Duvah Song 얼레디 벗 낫 옛의 의미는 메커니즘과 현상의 상관관계에서 의미를 얻는다고 생각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의 원리', 즉 구원 메커니즘은 도출되었지만, 그것이 적용되어 현상으로 구현되는 것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보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예수 그리스도는 지라르의 반희생양메커니즘, 또는 기독교 메커니즘의 창시자이지만 그것을 통해 현상을 구성하는 일은 그의 제자들, 나아가 이 시대를 사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일임해 놓았다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12. April um 18:49 · Gefällt mir
Duvah Song 다 그냥 제 의견입니다..; 12. April um 18:51 · Gefällt mir
Duvah Song 관련하여 에른스트 블로흐가 저항과 반역의 기독교에서 기독교가 어떻게 미래에 위치하는 사회주의적 이상을 향해 나아가도록 추동하는 역할을 할 수 있는지 분석한 것이 비슷한 맥락을 가지고 있다고도 생각됩니다. '우리가 신이 되리라'는 곧 신의 역할, 혹은 사역을 대신 한다는 의미이고, 그것은 '구원의 주체'로서 인간 존재들에 대한 이야기일 테니까요. 이렇게 보니 블로흐의 작업도 유사한 면이 있는 것 같네요. 12. April um 18:54 · Gefällt mir
Ki-myoung KimKang Duvah Song 저는 그렇다면 왜 희생양을 철폐하는 예수의 탈희생양적 모습을 이어가는 사람을 기독교인이나 예수의 정신을 "따르는" 사람으로 한정해야 하는지가 의문입니다. 전태일이 자신을 던져 70년대의 희생양이었던 노동자들의 삶을 폭로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이 문제를 위해 싸우도록 했던 것이 바로 그 예수 사건의 반복이 아닙니까. 광주의 민중들이 독재아래에서 신음하던 모든 이들을 대리하여 스스로를 던진 것은 지라르의 의미에서 곧 "구원 사건"이 아닌가요. 김진숙이 85호 크레인에 올라 수백일을 버팀으로써 우리는 연대를 알게 되고, 사랑을 알게 되고, 분노를 알게 되는 이것이 예수의 탈희생양의 제의를 오늘에서 또 보게 되는 신학적 사건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민중신학이 사유하는 것이 바로 이렇게 예수 사건이 역사에서, 그리고 오늘날 우리 시대에도 반복된다는 것입니다. 희생양으로 몰려나는 민중, 그러나 때로 그 희생양의 질서를 파괴하고 자기를 초월하는 민중들의 이야기 속에서 "신학적인 것"을 발견하는 것이 곧 민중신학입니다. 예수 사건이 유일회적인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되살아 나서 인간사의 고비고비마다 세계를 새롭게 빚어내는 것이지요. 기독교라는 체계의 자기 해명을 위한 설명에 대해서라면 모르겠으나, 사회와 정치적 사건이나 메커니즘이 가진 신학적 성격을 해명하고 이해하는데 있어 "우리 '기독교인들이' 십자가를 짊어지고 '가난한자들을 위해' 예수를 따라 가자."는 어렸을 때부터 듣던 익숙한 설명보다, 민중 자신의 고난과 구원을 증언하는 민중신학이 더 설득력 있어 보이지 않을까요. 적어도 제게는 그랬고, 그래서 매료되었던 것 같습니다. 12. April um 20:09 · Bearbeitet · Gefällt mir · 1
Ki-myoung KimKang Duvah Song 사실 지라르 자신은 매우 보수적인 카톨릭교도였고, 지라르 연구도 굉장히 보수적인 기독교 호교론의 입장부터, 좀 더 그 함의를 급진적으로 발견하는 흐름까지 다양합니다. 민중신학자들 중에도 지라르로 논문 쓴 걸 본 적이 있는데 잘 기억이 나지는 않네요. 예전에 어느 고신교단 목사님이 오스트리아에서 지라르 공부했다고 해서 기대하고 들으러 간 적이 있는데, "요즘 유럽의 포스트모더니즘에서 불교가 인기인데, 지라르적 시선에서 보면 불교는 승려제도라는 희생양 메카니즘 위에 세워져 있는 거고 포스트모더니즘도 별로고 예수님과 기독교가 킹왕짱임!" 뭐 이런 내용이어서 영 실망하고 돌아왔던 기억이 나네요... 12. April um 20:06 · Bearbeitet · Gefällt mir
Duvah Song 저는 김강기명님 말씀에 전반적으로 동의합니다. 그래서, 교회가 교회 밖의 운동가들과 적극적으로 연대해야 한다고 확신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모든 운동이 탈희생양적이지는 않다는 사실도 분명히 압니다. 결국 자신의 희생으로 끝났다고 해서 그것을 탈희생양메커니즘적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광주의 민중들이 독재 아래에서 신음하던 모든 이들을 대리하여 스스로를 던진 것'이라는 말씀에는 동의할 수 없습니다. 저는 아버지가 광주 토박이시고, 담임목사님도 5.18당시에 광주에 계셨기 때문에 정말 생생한 이야기들을 많이 듣습니다. 그러나, 4.19도 5.18도, 지식인들이 미화하는 것처럼 이야기할 수는 없는 게 사실입니다. 그들은 남을 위해서, 대속을 위해서, 대표자로서 싸우지 않았습니다. 자기 자신을 위해, 자기 가족을 위해 싸운 거지요. 그 사실이 이들의 죽음을 폄하한다고 보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4.19나 5.18의, 정의를 위해서가 아니라 '못 살겠어서' 들고 일어난 그들의 진정성과 인간 가치의 추구를 온전히 드러내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12. April um 20:15 · Gefällt mir
Duvah Song 민중신학에 대한 설명을 읽으면서 제가 이해하기 어려웠던 부분은, 민중에 대한 정의를 꺼린다는 사실에 있었습니다. 무언가에 정의를 내린다는 것은 그 정의 안에 갇혀 버린다는 의미일 수도 있긴 하지만, 그 정의된 관점이 지향하는 바를 분명히 한다는 의미도 있습니다. 제가 달았던 댓글에서 주체도 객체도 없는 상태에 대해 언급하기는 했는데, 주객을 없애는 것도 두 가지로 구분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김춘수 시인의 난해시가 해석 가능한 기호로서의 언어를 해체함으로써 해석 주체와 대상 모두를 지워버렸다면, 김수영시인은 마찬가지로 '무의미 시'를 주장하지만, 그것은 주체가 언어 체계 자체에 대해 치열하게 반성하는 것을 통해 언어 체계가 규정지은 의미를 의지적으로 해체해 내는 것이었습니다. 즉, 김수영적 작업, 마치 동시대의 푸코를 연상케하는 작업이 지성인들의 무의미함을 드러낸 4.19의 결과물이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지금 말씀하신 내용 대로라면 민중신학은 현존하는 민중을 주의 깊게 들여다본 것이 아니라, 민중이라는 어떤 실존을 상정하고 그것을 신학의 영역으로 들이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기존 정통 신학을 파괴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과연 그것이 진정으로 현존하는 '민중'들의 해방에 기여할 수 있는지 의심스럽고, 실제로 어떻게 기여했는지 궁금해집니다. 제가 처~음에 드린 질문에서 막시즘적 민중개념과 관련하여 여쭤봤던 것은, 막시즘은 근대사상답게 매우 명료하게 민중을 정의했는데, 그것의 해방에 이상적이진 못했지만 현실적인 운동으로 나타날 수 있었지 않았는가 하는 것 때문이었습니다. 지라르 이야기를 끌어오면, 글쎄요, 지라르가 예수님을 따르는 것으로만 그것이 가능하다고 이야기하는지는 모르겠습니다. 12. April um 20:25 · Gefällt mir
Duvah Song 저는 여전히 생각하는 중인 게 많아서, 결론이 나지 않은 것들도 많습니다. 다만 진리는 따르는 것이지 지키는 게 아니라고 생각하기에 전통적인 기독교적 관점에 대해서도 반성적으로 생각해 보곤 합니다. 현재까지는, 레비나스의 표현이었나요, 빌려오자면, 외부의 절대타자에 의존합니다. 저 스스로에 대한 인식이 그런 거겠지만, 외부의 절대자 없이 내부의 인간이, 설령 지라르식으로 완벽한 메커니즘을 도출하여 실행한다고 해도, 맑스의 경험처럼 현실에서 이상을 구현할 수는 없지 않은가 싶습니다. 기독교에는 예수 그리스도만 있는 게 아니잖아요. 창조주 하나님,그리고 성령 하나님도 계시니까요, 이런 부분에서 좀 더 생각해볼 여지가 많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뭐 전 사실 그냥 예수빠 기독교인이래도 틀린 말이 아닙니다..ㅋ 12. April um 20:35 · Gefällt mir
Duvah Song 참고로 제 프로필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전 현재 sfc출판부-그 고신 목사님과 가까운-소속이고, 사실 sfc치고는 다양한 책을 낸다고 자부하는 저희 출판부지만, 어쨌든 이번에 나오는 지라르 이론과 관련한 책은 말씀하신 그 불교와 관련한 내용과 여러 부분에서 비슷할 수 있습니다..ㅋㅋ큐ㅠㅠㅠ 대놓고 그렇진 않는데, 아무래도 그렇게 비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미리 커밍아웃을.....ㅠㅠㅠ 12. April um 20:38 · Gefällt mir
YongYeon Hwang Duvah Song 어떤 사건을 '대속'으로 정의하는 데 그 사건에 참여한 사람들의 주체적 의지가 결정적 요인인지를 물을 수 있겠지요. 말씀하신 대로 광주 사람들이 '대속'을 하겠다는 주체적 의지로 5.18에 참여한 건 아니겠지만, 5.18 자체는 '대속'으로 정의할 만한 사건이지 않을까요?
댓글 다신 걸 읽다 보니 안병무 선생의 "나는 민중을 미화하지 않는다. 다만 민중에게서 자기 초월이 나타나는 것을 인지할 뿐이다"라는 말이 생각나기도 하는군요.
'민중을 정의하지 않는다'와 관련해서는... 민중신학의 '민중' 용어는 '정의(definition)'하는 것과 좀 다른 각도에서 사용되는 특성이 있다는 걸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민중신학의 질문은 "민중이 누구이며 어떤 집단이냐"라고 묻기보다 "민중은 어떤 사건에서 어떻게 나타나는가"에 가깝다고 보거든요. 12. April um 20:44 · Gefällt mir nicht mehr · 1
Duvah Song 5.18 자체를 대속으로 정의할 만하다는 말씀에 대해서 설명해주시면 감사드리겠습니다. 물론 지금 제가 민중신학적 사유를 제대로 못받아들여서 이모냥입니다...^^;; 12. April um 20:48 · Gefällt mir
Duvah Song 한편으로는 민중신학에서 민중에 대해 이야기하는 방식이 몇몇 포스트구조주의자들의 그것과 비슷하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포스트모던의 이름으로 싸그리 비판받는 지점이 생각나기도 합니다...; 12. April um 20:50 · Gefällt mir
Ki-myoung KimKang 엌ㅋㅋㅋ 황목사님이 벌써 쓰셨는데요 제가 자세히 풀어보도록 하겠습니다. 12. April um 20:57 · Gefällt mir
YongYeon Hwang Duvah Song 뭐 꼭 '민중신학'적인 사유가 아니더라도, 5.18이란 사건을 둘러싼 구조적 요인에 호남에 대한 사회적 차별과 발전주의-반공주의적 노선의 기존 리더십(박정희)의 붕괴에 따른 불안을 해소(해결이 아니라 해소)해 버리려는 비슷한 노선의 새 리더십(전두환)에 대한 소극적인 동의가 있다는 것은 분명하지 않나요? 이런 것들로 인해 필연적으로 빚어질 폭력의 분출구가 되어 버린 사건이 5.18이니, 그런 의미에서 '대속'이라는 말을 쓸 수 있겠죠. 앞의 김강기명님 댓글에서 설명된 것처럼 이런 사건들이 바로 '신학적 사건'이라고 보기 때문에 민중신학이 가능한 것이겠구요.
위에 적은 내용과 관련해서 '신학'은 아닙니다만 당대비평 주간을 하셨던 문부식 선생의 글이 읽어 볼 만 합니다. 12. April um 20:58 · Gefällt mir · 1
Ki-myoung KimKang Duvah Song 위에서 민중신학이 민중을 어떤 "실체"로 이해하고 미화하는 것처럼 보이는 건 제가 윗 댓글에서 단순하게 하나의 예를 들어서 설명하다보니 그렇게 보이는 것입니다. 오히려 안병무, 서남동은 당대의 학자들이 계급론이나 민족주의 이론을 통해 민중을 개념화하고, 객관적인 성격을 부여하는 것을 꺼리면서 "나는 단지 민중을 바라보려 할 뿐이다."라고 이야기합니다.
실제로 80년대의 민중신학작업 중 많은 것들이 민중들의 이야기를 채록하거나, 채록된 이야기들 속에서 신학적인 것을 발견하는 것들이 많습니다. 광주 이야기는 말씀대로 그런 운동입니다. 그 속에서 들고 일어났던 사람들이 "내가 세상을 구원하겠다." "세상을 위한 대속 제물이 되겠다"고 일어났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광주 시민들 자신들은 그것을 "의도"한, 미화할만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박정희 한테 노동자들을 따뜻하게 대해달라는 편지도 쓰고, 죽을 때도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라는 평범한 구호 이상의 것을 말하지 않았던 전태일도 무슨 본질적으로 훌륭한 민중이나 구원자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게 중요합니다. 하지만 전태일의 죽음을 통해 폭로되는 것이 있었던 것이지요. 그리고 그의 뒤를 이은 운동이 전태일의 죽음 속에서 자신들의 죽음과 삶을 발견하게 되지요. 이런 의미ㅇ에서 "전태일 사건이 예수 사건"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광주가 "대속"의 의미를 갖는 지점은 이런 지점입니다. 광주에서의 일어섬과 죽임당함의 사건을 통해서 5공 정부의 성격을 우리가 알게 되고, 지식인들과 대학생들이 충격에 빠지고, 광주의 이름을 통해 80년대 내내 민주화 운동이 불붙었지요. 그 지점에서 "대속의 사건"이라고 바라보는 것일 뿐입니다. 실체론적인, 혹은 계급론적인 "민중"은 민중신학에서 존재하지 않습니다. 존재하지 않게 하려고 부던히 애를 썼습니다. 물론 후학들은 이걸 그냥 남겨둘 순 없으니 때때로 민중신학의 방법론이나 구조가 무엇인지 서술하기도 하겠지만요.
하지만 또 한편으로 여전히 민중신학은 민중을 미화하는 것이 아닌가라는 질문은 유효합니다. 이건 작업의 깊이와 넓이로 평가받을 문제이니까요. 그리고 그런 점에서 2000년대 이후 작업을 하고 있는 민중신학자들, 특히 김진호의 작업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김진호 목사의 작업의 대부분은 민중의 구원하는 역할로 섣불리 나아가기 이전에 민중의 좌절과, 민중의 실어증, 민중이 끊임없이 생산되는 체제에 대한 비평과 증언, 그 앞에 선 자기 고백의 글들입니다. "예수의 독설"이라는 한백교회 설교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책을 한번 권해드리고 싶습니다. 신학적 체계나 개념화의 길을 일부러 거부하는 "비평신학"본연의 글쓰기의 한 범례를 볼 수 있을만한 책입니다. 위의 황용연 님도 좋은 글 많이 쓰셨구요, 저와 동년배인 YongTaek Jeong 학형도 주목할만한 민중신학 연구자입니다. 제가 많이 좋아하고 존경하는. 12. April um 21:28 · Bearbeitet · Gefällt mir · 1
Ki-myoung KimKang 두번째 질문에 대해서도 대답을 하자면, 이건 제 생각이지만, 민중신학은 민중의 해방에 공헌하는 것을 직접적인 목표로 삼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그래서도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안병무 등이 가장 싫어하는 게 지식인들이 멋대로 규정한 사회법칙이나 역사법칙으로 민중을 지도하려 하는 것이었죠. 니들이 그렇게 운동해서 세상을 바꿔도 지배자의 얼굴만 바꾸는 것은 아니겠냐 하는 불신이 묻어나는 것 같습니다.
오히려 민중신학은 민중신학자 자신의 구원을 위한 신학일지도 모릅니다. 물론 간접적으로 민중해방을 위한 여러 운동에 도움이 될 수도 있겠지요. 민중신학적 성서해석학이 민중과 더불어 살기를 원하는 이들, 혹은 민중 자신에게 운동을 위한 무기를 마련해 주거나, 동기부여를 해 줄 수도 있는 걸테구요. 하지만 근본적으로 민중신학은 민중을 "위한" 신학이 아니라 민중 "앞에서" 하는 신학입니다. 신학만이 아니라 일반적인 학문으로서도 그렇습니다. 민중을 위한 학문은 이미 뭐 많지 않겠습니까. 맑스주의도 있고, 해방신학도 있고, 로잔언약의 복음주의 신학도 뭐 도움 될테고 그렇겠죠.
하지만 민중신학은 무엇보다 "민중 앞에서의 신학"입니다. 민중이 던진 신학적 질문 앞에서 대답하는 신학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민중의 죽음, 죽임 그리고 죽임당함 속에서 던져지는 질문들, 때때로 민중들이 지식인들을 바보로 만드는 그 현명함, 혹은 위에서 설명한 대속의 사건들, 그런 것들을 보면서 기존의 기독교 체제에 복무하며, 그 속에서 안락했던 민중신학자들 자신들이 충격을 받아서 이 질문에 대답하고자 하는 게 민중신학의 시작이었습니다. 그리고 민중들이 시작하고 보여준 그 사건을 통해 이들 자신이 학교 밖으로, 교회 밖으로 투신하게 만들었던 그 초월의 경험을 민중신학자들은 고백하는 거지요. 저는 이러한 신학이 갖는 고유한 자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사실 여기에도 주객 도식의 해체, 혹은 주체와 객체의 전복이 발생하지요.
물론 민중신학자들 중에는 자신들이 "민중을 위한" 이론을 만들겠다는 경향도 있었고 심지어 뭐 "새로운 기독교를 만들자" 뭐 이런 경향도 있고 뭐 그렇습니다만, 저는 오히려 그 반대방향을 향해 가야 하지 않나 싶습니다. 민중을 "위한" 이론적 작업이야 사회학이나 정치철학, 과학 등에 널려 있는데요 뭘.
그래서 특히 1세대의 민중신학자들에게 초월적인 신, 세계 바깥의 신은 아예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지금 이렇게 사람들이 죽어나가고, 사람들이 자기 구원을 이루는 이 역사 속에서 딱히 뭐하시는지도 모르는 초월적이고 형이상학적 하느님에 왜 관심을 두냐! 뭐 이런 거였겠지요. 그래서 위에 쓴 인용문에서처럼 지나가는 말로(진짜 인터뷰에서 지나가다가 저 말이 툭 튀어 나오는데) "내 나름의 이해에 따르면 자연을 신이라 해도, 역사를 신이라고 해도 좋습니다." 뭐 이런 이야기도 막 하는 거죠. (이단 맞습니다.) 하나도 중요하지 않으니까. 아마 그분도 별로 우리를 중요하게 생각안하시는 것 같구 말입니다.^^; 13. April um 00:27 · Bearbeitet · Gefällt mir · 2
Ki-myoung KimKang Duvah Song 그리고 민중신학이 민중을 이야기하는 방식이 68이후의 비판적 철학들과 비슷하다는 건 제가 볼 땐 사실인 것 같습니다. 80년대 운동권들이 흥미롭게도 20-30년대 맑스레닌주의를 재도입 — 독재와 맞서려다 보면 그런 화끈한 이론이 필요 했겠지요 — 해서 그렇지... 민중신학이나 68 이후 철학이 세계적으로는 동시대의 어떤 시대정신을 반영하는 것이지 않았나 싶어요. 근데 이 분들이 딱히 당대의 철학적 작업을 깊이 본 것 같지는 않거든요. 아무리 읽어봐도. 근데 해체주의적인 성격의 논의도, (들뢰즈를 연상케 하는) 존재론적인 논의도, 지젝이나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작업을 연상케 하는 이데올로기 비판의 논의도 꽤 많이 발견됩니다. 물론 그렇게 깊이있게 이론화된 작업을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걸 목표로 하지 않았으니까요. 12. April um 23:36 · Bearbeitet · Gefällt mir · 1
Ki-myoung KimKang 헉 헉... 12. April um 21:34 · Gefällt mir · 1
Duvah Song 김강기명 학부에서 공부하면서 내내 신기해 했던 부분입니다. 남의 나라 사상 연구하기 바빠서, 만만찮은 코앞의 사상을 제대로 평가하지 못하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했습니다. 사실 이론화의 작업은 당사자보다는 주변 학자들의 역할이 더 크지 않은가 싶습니다. 포스트모던 범주에서 자주 언급되는 푸코도 본인은 포스트모더니스트가 아니라고 말하니까요. 12. April um 21:37 · Gefällt mir
Ki-myoung KimKang 그나저나 그 정 목사님의 박사논문이 책이 나오나 봐요? 헤헤... 12. April um 21:38 · Bearbeitet · Gefällt mir
Gyedo Jeon 무슨 강의 듣는 기분으로 쭉 보고 있습니다. 감사. 12. April um 21:38 · Gefällt mir · 1
David Hong 하아 정목사님이라 그러니까 정용섭 목사 말씀하시는 줄 알고 자동소환됨;;; 아니였군요! 12. April um 21:38 · Gefällt mir
Duvah Song ㅋㅋㅋㅋㅋㅋ;; 와, 제가 편집담당이 아니라서 생각 못하고 있었는데, 저자께서 정씨가 맞는 것 같습니다..;;;; 12. April um 21:40 · Gefällt mir
Ki-myoung KimKang 학자로써는 훌륭하신 것 같아요... 이분 박사논문 지라르를 다루는 공식 총서 목록에도 들어가 있구.(제가 욕했다고 하지 마욬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다만 지라르를 가지고 추구하는 방향이 뭐 아 역시 고신 목사님은 고신 목사님의 길을 가는 구나. 뭐 그런 느낌이었습니다. 아주 어렵고 세련된 불교나빠 예수님 킹왕짱이야기... 12. April um 21:42 · Bearbeitet · Gefällt mir · 2
Duvah Song ㅋㅋㅋㅋㅋㅋㅋㅋ;;; 고신은 그런 이미지인가요..ㅋㅋ;; 전 고신교회 입문 십년차인데 이상하게 고신물이 잘 안든 편이라서... 얼마 전에는 현직 SFC출판부 편집자인데 SFC운동원출신 동문한테 SFC에서 뭘 배웠냐는 소릴 들었지요...기분이 묘하던데요;; 12. April um 21:44 · Gefällt mir · 3
Ki-myoung KimKang 제가 특히 "익명의 불교도"에다가 비판적 철학들을 열심히 공부하던 중이어서 그날 기분이 나빴었나 봐욬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12. April um 21:46 · Bearbeitet · Gefällt mir · 1
Duvah Song ㅋㅋㅋ;;;그건 또 무슨 '사건'입니까..;;ㅋㅋㅋ 12. April um 21:47 · Gefällt mir
Duvah Song 민중신학에서는 '부활사건'은 어떻게 보는지 궁금하기도 하네요. 사실 '대속사건'과 '부활사건'이 뗄 수 없는 관계라고 생각하는데, 그런 부분에 대해서는 언급이 안된 것 같아서요. 이건 또 판을 벌이는 건가.....;; 12. April um 21:49 · Gefällt mir
Ki-myoung KimKang 예수는 죽었지만, 예수 운동이 살아서 불붙었고, 광주는 죽었지만 80년대 내내 민주화 운동으로 되살아났고, 전태일은 죽었지만... 뭐 이런 식으로 이해합니다. 12. April um 21:50 · Gefällt mir
Duvah Song 사실 지라르를 끌고오게 되면 불협화음이 생기는 게, 예수가 죽었으면 불이 꺼지고, 불이 일어나는 체계를 해체하는 것으로 이어져야 하는데, 민중신학적 해석으로는 어째 대결구도가 더 명확해지는 느낌입니다? 12. April um 21:53 · Gefällt mir
Duvah Song 개인적으로 저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헤겔적 정반합식의 굴레를 깨뜨리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비슷한 맥락에서 지라르를 이해하고 있기도 하구요. 12. April um 21:56 · Gefällt mir
Ki-myoung KimKang 민중신학은 역사의 바깥을 떠올리지 않기 때문이겠죠. 때때로 이뤄진 해방은 또다시 닫히고, 또 다시 맞서 일어서고, 또 닫히고. 하지만 지금까지의 역사는 이렇게 이뤄져 온 거니까요. 저는 단박에 영원하고 완전한 평화를 기원하는 이론이 오히려 — 사실 이건 니체의 주장입니다만 — 이 세계를 사실은 사랑하지 못하는 원한(Ressentiment)의 정서에서 기인한 노예의 이론이라고 생각하는 편입니다. 2000년 전 예수의 십자가로 한번에 다 끝나지 않은 것도 사실 아닌가요. 차라리 다시 억압의 질서가 반복될 지언정 다시금 맞서 싸우는 이론이나 사유가 실상에도 맞고, 더 이 세계에서의 삶을 사랑하는 생명의 이론이 아닌가 싶습니다. 꼭 완전한 끝, 완성, 영원한 평화 이런 게 있어야만 할까요? 있는 건지도 잘 모르겠구요...(이건 꼭 민중신학적인 이야기는 아닙니다.) 13. April um 12:47 · Bearbeitet · Gefällt mir
Ki-myoung KimKang §§§하지만 댓글과 본 글을 전부 읽지 않고 댓글을 다는 사람들은 분명히 정자가 줄어들어 사망에 이르고, 죽으면 지옥불에서 영원히 태워질 것입니다.§§§ 12. April um 22:01 · Gefällt mir · 2
Duvah Song 저는 그 모든 것들이 동시대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싸움은 여전히 있겠고 고통도 억압도 있겠지만, 예수님께서 하라고 하신 사랑도 있겠지요. 얼레디 벗 낫 옛이니까요. 이거 한글로 써놓으니까 되게 이상하네요. 그렇기 때문에 저는 싸우는 이론에도 어느 정도 동의합니다...ㅋㅋㅋ그래서 좀 복잡하고 우유부단한 상태에 있기도 합니다;;...ㅠㅠ 12. April um 22:06 · Gefällt mir
Duvah Song 반구조주의나 탈구조주의가 아니라 포스트구조주의가 일반적인 번역어로 사용되는 건 구조주의 없는 포스트구조주의가 불가능하기 때문이겠지요. 모던 논의가 빠진 한국 교계의 포스트모던 논의가 공허한 까닭이 여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정통신학 없이 민중신학도 없다는 말씀이 이해가 갑니다. 이제 쾌적한 주말을 위해 자러 가야겠습니다. 돈 줘도 못배울 좋은 공부했습니다. 또 재미난 가르침 주시면 언제든지 달려오겠습니다. 좋은 아침 맞으세요^^ 12. April um 22:14 · Gefällt mir
Ki-myoung KimKang 국민은행 478-21-0374..... 12. April um 22:19 via Handy · Gefällt mi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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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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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가: 상황신학이라는 비판에 대한 문답David Hong
[상황신학에 대해 반대하진 않지만 갸우뚱 하는 이유]
1.일단 "구원"이라는 단어에 감춰진 세계에 대한 논의가 먼저 선행되어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도 일단 "구원"이라는 단어가 단순히 사후천국행만을 가르키지는 않는다는 전제아래에서 과연 "주류기독교"의 논리에는 구원이 있나라는 질문이 있을 수 있겠지요.(사실 그에 대한 반발로써 상황신학이 탄생한 것일까요..?)
2.요즘들어서 드는 생각은 성서의 많은 내용에 "약자에 대한 해방" 내지는 "자연에 대한 인간의 섬세한 관심"이 요청되었고 또 나름 중요하게 다뤄졌음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많은 성서학자, 신학자는 거기에 대해 무심했냐는 생각이 듭니다. 즉, [노예해방] 내지는 [인종차별]이라는 문제가 떠오르기전에 이미 성서의 증언은 왜 무시되었냐는 질문이지요.
3.결국 성서가 하나님의 말씀이 되는 것은 [기록] 그 자체라기보다는 기록을 재해석할 수 있는 지평을 열어주는 [사건]이라는 생각도 듭니다.(아 여기서 또 판넨베르크에게 걸리나요?) 그런 맥락 위에서 어쩌면 민중신학의 경우에는 민중에 의해 성서의 해석지평이 새롭게 열렸다고 볼 수 있겠지요.
4.그러면 성서를 해석하던 소위 [전통]은 무오하고 불변하느냐는 질문이 제기될 수 있습니다. 개혁주의에서도 보수진영이라 평가받는 진영의 논리는 불변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지만, 가톨릭은 물론이거니와 개신교의 현대신학의 발전은 결국 [전통]의 변화가 아니었나 싶네요. 그런 전통의 변화는 결국 기존의 전통이 오독하고 있던 혹은 오도하고 있던 부분을 나름 밝히 드러내고 있지 않을까요? (이를테면 몰트만, 본회퍼의 신학적사유는 일종의 [해방신학]으로의 길을 제시하고 있지 않나 생각해봅니다.)
5.이런 맥락 위에서 제가 [상황신학]들에 제기하는 질문은, [새로움]만을 추구하려하지 않느냐는 질문입니다. 즉, 기존의 교회전통 위에서도 몇몇 개념의 재해석을 통한 풍성함으로 소외되었던 혹은 오도되었던 개념을 되살릴 수 있을텐데요.(이를테면 레오나르도 보프의 삼위일체개념이라던가, 언급하셨던 몰트만의 삼위일체 개념.)
6.결국 제 질문은 이것이죠. "너희는 왜 전통을 아예 싸그리 무시함?"
Gefällt mir · · Beitrag nicht mehr folgen · 11. April um 1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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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vid Hong 뭐 굳이 전통을 신격화시키는 것은 반대지만, 그렇다고 전통을 반대할 필요까지 있느냐는 의문입니다. 김강기명님 소환!
11. April um 15:20 · Gefällt mir
David Hong 조금 덧붙이자면, 민중 혹은 흑인 혹은 노예들에게 기존신학의 "논리"는 해방을 제공하지 못했을지라도 기존신학의 수정/보완을 통해 해방을 제공할 수 있을텐데 왜 굳이 "마이너한 접근"을 시도할까요? 라는 질문도 가능하겠습니다.
11. April um 15:21 · Gefällt mir
엔틸드 김강님도 이미 밝혔고 저 또한 그렇게 생각하고 있던 바였습니다만, 상황신학이라는 단어가 주는 오해와 부정적인 선입견은 의외로 상당합니다. 그리고 데이빗님이 남기신 글 속에는 그러한 오해와 부정적인 선입견이 묻어납니다.
글 속에서 말씀하셨듯이 몰트만이나 본회퍼는 기존의 "전통신학"을 가지고 해방적인 메시지를 이끌어 낸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해방신학 또한 이들과 비판적으로 대화해 왔습니다. 아래에서 김강님이 말씀하셨듯이, 해방신학 안에도 "전통신학"과 맺는 관계 양태는 다양합니다. 그들과 친밀하기도, 또한 거의 전복적인 입장을 가지기도 합니다.
그러니 일단 해방신학을 상황신학이라고 하는 것도, 그들을 한데 묶어서 "전통신학을 무시한다"고 말하기에도 굉장한 무리가 따르고 폭력적인 접근입니다.
일례로, 민중신학이 기존 신학에 대해 "반신학"적인 입장을 취할 때 그것은 주로 신학적 방법론에 관한 것입니다. 연역적이고 하향적인 방법론에서 귀납적이고 상향적인 방법론으로의 전환을 주장합니다. (물론 이런 식으로 딱 갈라 구분하는 건 주장의 밀도가 떨어지는 일이고 오해의 여지도 있습니다. 쉽게 말해 그렇다는 것입니다.) "전통신학"에서 말하는 구원이나 계시 등등의 개념은 반신학적인 방법론에 따라 "재해석"됩니다. 그러므로 민중신학 또는 해방신학이 전통신학을 무시하고 있다는 생각은 전적인 오해이고 무지입니다. 민중신학에 대한 괜찮은 논문 하나만 읽어도 해결될만한 문제죠. 물론 위에서 말했던 대로 민중신학은 자신들이 모든 것을 설명해야 한다는 의무감을 가지는 신학이라고 보기는 힘들기 때문에 조직신학의 영역을 모두 커버하려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민중신학의 주된 관심사가 아닙니다.
아마 남겨주신 글의 2번 부분의 질문은 오히려 해방신학을 하는 분들이 전통신학에 제기하고 싶은 질문일 겁니다. "니들은 성서에 이런 전통이 있는데 왜 개무시하니?" 실제로 주된 비판거리이기도 하지요.
11. April um 15:40 · Gefällt mir · 2
David Hong 사실 남길려고 고민하다가 안남긴 질문이긴 한데, 해방신학이나 민중신학의 글을 읽어낼때에는 사실 별 꺼리낌을 못느꼈답니다. 어쩌면 제 삶의 지평과 얽혀있어서 그럴 수도 있겠지요. 반면, 퀴어신학이나 페미신학의 글들을 읽을때는 그런 생각을 더 깊이 가졌던 것 같아요 왜냐하면 뭐랄까요. 왜 굳이 "예수" 혹은 "기독교"의 언어를 빌려서 그런 주장을 펼치냐는 식의 의문일까요?
11. April um 15:43 · Gefällt mir
엔틸드 그건 신학을 하는 이들이 주로 기독교 신앙을 가진 이들이기 때문일 겁니다. 정치사회적인 메시지야 성서에서 끌어오기 쉽지만 젠더에 관한 문제에 대해서 성서는 무관심하거나 가부장적이니까요. 기독교인이면서 동성애 지향을 가진 신학자가 있다고 한다면 당연히 신앙과 성 정체성 사이에서 고민을 할 것이고, 성서가 가지는 시대적 한계에 대해 다양한 태도를 취하겠죠. 그런 그들에게 "전통신학 안에서 뭔가 할 수 있지 않느냐"는 질문은 글쎄요....썩 성실해보이는 태도는 아닌 것 같습니다. 위에 언급한 민중신학, 남미해방신학 뿐만 아니라 젠더 관련 신학에서도 역시 성서와 전통신학에 대한 다양한 접근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쪽으로 공부를 좀 더 해보시면 좋을 듯.
11. April um 15:48 · Gefällt mir · 1
David Hong 그렇군요. 제가 많이들 공부가 부족했군요 -0-
11. April um 15:49 · Gefällt mir
Ki-myoung KimKang 준철씨가 많은 이야기를 해서 하나만 덧붙입니다. 신학은 다른 여러 학문들과 마찬가지로, 방법론적 차원에서 하나의 체계적이고 구성적인-대부분의 전통적 신학 및 틸리히, 카우프만, 과정신학-학문일 수도 있지만 맑스나 니체, 비판이론 등이 현대 철학에 대해 수행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신학 안에서 신학을 비판하는 것을 그 자체 방법론으로 하는 학문-여성신학, 민중신학 등-일 수도 있습니다.
두 종류의 학문 방법론은 목표하는 것이 다릅니다. 체계를 세우려는 목적의 학문과, 그것 자체를 성찰하게 하거나 비평하는 학문으로 구분되겠지요. 이런 맥락에선 퀴어신학이나 여성신학 민중신학 등은 기존 신학을 바로 그 분석과 비판의 텍스트로 하여 기존의 신학을 비판합니다.
11. April um 16:16 via Handy · Gefällt mir · 3
Ki-myoung KimKang 여성신학이나 퀴어신학이 단지 퀴어이론이나 페미니즘을 체계적으로 구성하는 것이라면 애초에 신학을 할 필요가 별로 없습니다. 기존의 신학과 교회를 비판과 분석의 텍스트로 해서 여성주의와 퀴어의 맥락에서 비판적으로 성찰하게 하려는 게 여성신학, 퀴어신학입니다.
11. April um 16:19 via Handy · Gefällt mir · 1
Ki-myoung KimKang 민중신학의 경우는 민중신학 글타래에 적었지만, 신학이 포기할 수 없는 주-객의 문제, 구원하는 하느님과 구원받는 인간(세계)이라는 도식 자체를 문제시합니다. 이게 과연 체계적이고 구성적인 방식의 "신학"이 담아낼 수 있는 것일까요? 몰트만의 히스테리적 반응은 그 불가능성을 잘 보여줍니다. 단지 구원의 범위를 넓힌다고 모든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습니다. 민중신학이 기존의 신학에 개입하는 지점은 이런 "비평적 지점"입니다. 애초에 체계를 세우려는 신학이 아닌데 체계를 세우려 하지 않느냐는 비판은 큰 의미가 없겠죠?>_<
11. April um 16:23 via Handy · Gefällt mir · 2
David Hong 흠 일단 제 인식이 아직까지는 못미치는 것 같네요. 어쩌면 저의 "껄끄러움"은 제대로 사유되고 짜여져있으며 합리적인 상황신학을 경험해보지 못했기에 생기는 "껄끄러움"이라는 생각도 드는군요.
11. April um 16:25 · Gefällt mir
Ki-myoung KimKang "제대로 사유되고 짜여져 있으며 합리적인"이 이미 "구성적이고 체계적인"것만을 학문으로 바라보는 시각입니다. 이를테면 자끄 데리다는 그런 구성적이고 체계적인 학문을 하지 않지만 대가죠.
11. April um 16:27 via Handy · Gefällt mir
David Hong 어떤면에서 그렇다는 것인지 조금 추가설명을 부탁드려도 될까요?^^
11. April um 16:28 · Gefällt mir · 1
Ki-myoung KimKang 아니 뭐 민중신학이 그렇게 정밀하게 발전했다는 건 아니고... 방향이 다르다고요. 방향이 다른 거에 대해 방향이 다르다고 비판하면 무의미하다고요. 애초에 그걸 추구하고 있는 게 아닌데.
11. April um 16:28 via Handy · Gefällt mir · 1
David Hong 흠 어떤 맥락인지는 알겠습니다. 물론 저도 체계적이고 짜임새있어야만 신학이라고 보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떠한 "의도"아래에서 성서텍스트의 맥락과 내용이 훼손되거나 혹은 무너지는 경우는 없어야 되지 않을까요? 아니면 이런 의문조차도 기존 정통신학의 질문인걸까요?
P.S 모든 상황신학이 그렇다는 것은 아닙니다만, 종종 그런 글들이 보여서 말입니다.
11. April um 16:30 · Gefällt mir
Ki-myoung KimKang "제대로 사유되지만 그 '제대로'의 내용을 도발적으로 폭로하고 합리성의 이면을 드러내는 것"으로 이해하는 학문도 학문의 한 영역이라는 것입니다.
11. April um 16:30 via Handy · Gefällt mir · 1
Ki-myoung KimKang 보통 상황신학 측면에서 대답이라면, "너희가 주관적이고 자의적이라고 부르는 이 새로운 해석은 사실 너희의 기존의 해석이야말로 똑같이 보편과 객관이 아니라 편향되고 주관적인, 모두를 품지 못하는 것이라는 걸 드러내는 거다" 정도가 있습니다…만 물론 학문이 되려면 주석의 정밀함은 양쪽 모두에 요구되는 거겠죠.
한가지 흥미로운 것은 가장 최초의 신학은 구성적이고 체계적인 것이 아니라 그리스적-로마적 체계와의 논쟁이었다는 것입니다. 모든 체계적 학문은 사실 이런 이단적 혹은 비판자적 기원을 갖고 있는 셈이죠.
11. April um 16:36 via Handy · Gefällt mir · 4
Ki-myoung KimKang 결론: "전통신학을 무시하고 새로운 신학을 하는 게 아니라 바로 그 전통 신학을 텍스트로 하여 그것을 비판하고 성찰하는 기능을 수행한다."
11. April um 16:37 via Handy · Gefällt mir · 2
David Hong 어떤맥락인지는 알겠습니다만 뭔가 비평하고 싶은데 지속적으로 비평할 껀덕지가 아직 부족하군요 ㅠ_ㅠ
11. April um 16:42 · Gefällt mir
Ki-myoung KimKang 상황신학은 기존의 신학을 대체하는 게 아닙니다. 기존신학이 없으면 상황신학도 필요가 없죠. "신학 속에서 신학자체를 비평하기"라 하겠습니다. 그러니 기존의 전통은 공격받으면서도 또한 동시에 소중한 텍스트입미다.
11. April um 16:46 via Handy · Gefällt mir · 1
David Hong 아 결국 저는 정용섭목사의 스텐스를 못벗어나는건가용 ㅠ_ㅠ 엉엉
11. April um 16:47 · Gefällt mir
Ki-myoung KimKang 저는 왜 정용섭 목사님이 이 간단한 주장을 끝끝내 이해하지 못하는지 알 수가 없습미다. 애초에 보편적 신학을 하려 하지 않는 신학한테 보편적 신학이 아니다라고 비판하는 건 대체...@.@
11. April um 16:48 via Handy · Gefällt mir · 1
David Hong 그건 신학이 아니야. 라고 보는 것이지요. 신학을 신학되게 하는 도구정도로.. 마치 종교학이나 사회학처럼...(지금 저의 스탠스도 그러하다는;;;)
11. April um 16:49 · Gefällt mir · 1
Ki-myoung KimKang 다 비슷한 신학만 하믄 무슨 재민겨...
11. April um 16:49 via Handy · Gefällt mir · 3
차성훈 정 목사님의 스탠스를 넘어서기 위해선 오프라인 강의를 들어보시는게....... =ㅁ=;;;
11. April um 16:51 · Gefällt mir · 2
David Hong 하아..
11. April um 16:52 · Gefällt mir · 1
Ki-myoung KimKang 아니 신학도 다 고중세 철학과 법학 용어 기지고 처음에 시작했구만... 그럼 뭐 전통 신학은 그냥 서양 고대철학이고, 고대법학에 불과하다고 해도 되요.
11. April um 17:00 via Handy · Gefällt mir · 1
Ki-myoung KimKang 역사의 산물인 게 아무리 오래되고 체계화되었다 한들 역사의 산물이 아닌 게 아니라면 왜 오늘날의 역사가 새롭게 기입되고 학문의 방향을 다시 묻고 하는 게 역사적 신학일 수 없겠습미까.
11. April um 17:03 via Handy · Gefällt mir · 1
Ki-myoung KimKang 차라리 교회비판하는 너네가 교회돈으로 운영되는 학교에서 그런 신학으로 학자짓을 하다니! 한다면 수긍하겠습니다.
11. April um 17:04 via Handy · Gefällt mir · 1
Ki-myoung KimKang 성공회 신부님들이 성공회대 교수들보고 자주 하는 이야기죠.
11. April um 17:05 via Handy · Gefällt mir
Ki-myoung KimKang 되둉. "일부 신부님들이"
11. April um 17:06 via Handy · Gefällt mir
Ki-myoung KimKang 하지만 아예 그건 신학이 아니라고 주장하면...@.@
11. April um 17:06 via Handy · Gefällt mir
Haeman Hong-Shin 저도 정용섭 목사님 좋아하는데, 민중신학과 흑인신학 여성신학에 대해 비판하신 글을 보고 좀 갸우뚱 했던...
11. April um 17:07 · Gefällt mir
Ki-myoung KimKang 그리고 전 현대 신학이 이젠 철학한테, 심지어 사회학 한테도 학문 자체로는 완전히 밀리니까 그런 식으로 "신학의 고유성"을 추구하는 방어적인 방향으로 나가는 경향이 있지않나 싶습니다. 솔직히 1급의 신학자들이 던지는 질문들도 현대 철학이나 사회학에서 보면 "그거 뭐 우리가 다 하는 건데"하는 게 많죠.
11. April um 17:10 via Handy · Gefällt mir · 1
Ki-myoung KimKang 그럴 때 신학이 신학임을 보증해 주는 것은 결국 "기독교 교회의 전통"밖에는 없게 되고.... 그건 물론 소중하고 좋은 거지만 학문의 모험을 왜 하면 안 되겠습니까. 그리고 교회와 기독교 전통만 신학의 주제가 되는 것도 아니라면.
11. April um 17:12 via Handy · Gefällt mir
David Hong 하아 이거 안드로메다까지 관광당하는 기분이네요
11. April um 17:13 · Gefällt mir
David Hong 0ㅠ0
11. April um 17:13 · Gefällt mir
Gyedo Jeon 저는 '상황신학'이 없었다면 과연 '전통신학'이 자기 반성을 했을까하는 생각이 드네요.
11. April um 17:23 via Handy · Gefällt mir nicht mehr · 2
David Hong 근데 김강센세.. 그럼 상황신학은 결국 메타신학으로만 존재되는 것이 아닙니까? 응슷응센세처럼 '민중신앙'이라는 개념이 허공에 붕 뜬 개념이 되는 건 아닙니까?
12. April um 01:07 via Handy · Gefällt mir
Ki-myoung KimKang 기독교 신학에 대해선 메타신학의 성격을 갖지만, 한편으론 기존의 신학은 바라보지 못하고, 담지 못했던 세상의 다양한 사건들과 이야기 속에서 "신학적인 것"을 찾는 작업이기도 합니다. 예를들면 "전태일은 오늘 이렇게 죽었지만, 노동자들의 투쟁 속에서 수많은 전태일들이 부활할 것이다" 라는 고백들, "광주의 봉기가 지금 죽었지만 끝나지 않았다"는 절망 속의 희망들. 이것이 신학적인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12. April um 01:18 · Bearbeitet · Gefällt mir · 2
Ki-myoung KimKang 오히려 사회적인 것, 정치적인 것 속에서 신학을 발견하고 증언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런 게 바로 서남동이 말하는 "두 이야기의 합류"라고 부를만한 것들이죠. 기독교적 혹은 신학적 사유를 통해 기존의 철학이나 사회학으로는 해명되지 않는 사건의 어떤 측면, 곧 "신학적인 것"을 드러내는 것, 이것도 "신학"입니다.
12. April um 01:17 · Bearbeitet · Gefällt mir · 3
David Hong 하아..
12. April um 01:17 via Handy · Gefällt mir
Ki-myoung KimKang 조금 더 보충했습니다.;;
12. April um 01:18 · Gefällt mir
Jung Hoon Yeo 상황신학 아닌 신학이란게 있나요. 신학이란건 처음부터 번역과 대화와 타협이었는데..
12. April um 01:20 via Handy · Gefällt mir nicht mehr · 2
David Hong 보라. 서남동과 안병무는 김강센세에게서 부활하셨도다!
12. April um 01:21 via Handy · Gefällt mir · 1
Ki-myoung KimKang 하지맠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12. April um 01:21 · Gefällt mir
David Hong 이것도 상황신학아닌가요?
12. April um 01:22 via Handy · Gefällt mir
Ki-myoung KimKang 하지맠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12. April um 01:25 · Gefällt mir
YongYeon Hwang 신학의, 아니 세상의 모든 담론치고 '보편'을 추구하지 않을 수 있는 담론이 있긴 할까요. 다만 그 '보편'을 어떻게 추구하느냐가 문제겠죠. 마치 정답지를 작성하는 것처럼 하느냐, 마치 모든 것을 흔들어 버릴 것처럼 하느냐(말로 표현하려니 아직 쉽지 않군요.)
12. April um 01:29 · Gefällt mir nicht mehr · 2
김성래 막판에 빵빵 터지네요...ㅋㅋㅋㅋ
12. April um 05:59 via Handy · Gefällt mi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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