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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0/10/29
    혼자 떠난 가을 여행기 1 - 밤산책, 광주(2)
    김강

혼자 떠난 가을 여행기 1 - 밤산책, 광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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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시작은 아마도 밤산책이었을 것이다. 여름이 끝나갈 무렵, 밤산책이 너무나 좋아졌다. 관광객들이 빠져나간 뒤 적막해진 북촌의 한옥 골목과 삼청동 언덕길을 매일 밤 걸었다. 그렇게 걸었던 이유는 흔히 ‘외로움’이라는 용어로 불리는 신체의 어떤 감응 때문이었다. 나는 ‘외로움’이라는 이 단어가 나의 신체 감응을 적절하게 담아낼 수 없는 어휘라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무엇보다 외롭기 때문에 혼자 밤산책을 다녔던 내 경험이 드러내주고 있다. 말하자면, 나는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외로움 속으로 나를 몰아넣었던 것이다. 사실 사람이(혹은 자연계의 어떤 개체이든) 정말로 ‘혼자’가 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외로움조차도 그(것)의 바깥에 무언가가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 아닌가. “그것 바깥에 아무 것도 없는 것”은 스피노자가 말하는 ‘신’외에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런 이유로 신은 외롭지 않다. 언제나 외롭다는 건, 누군가가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가슴 한 가운데가 텅 비어 있고, 그래서 그 안으로 초가을의 바람이 소용돌이를 만들며 스며들고 있었다. 나에게 외로움이란 이런 신체감응이었다. 신체의 그 느낌이 나로 하여금 진짜로 바람을 맞고 싶도록 만들었던 것 같다. 그래서 밤의 삼청동을 걸었다. 백현진의 노래가 다 끝날 때까지 동네 이곳저곳을 계속 걸었다. 백현진의 음성이 참 좋았다. 이어폰으로 듣는 선명한 소리가 아니라 핸드폰 스피커를 통해 나오는 그의 목소리가 바람 같았다. 그 목소리가 나를 외롭게 했고, 내 외로움을 채워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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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는 봤나. 거주자 우선 '주사'구역! 아쉽게도 며칠 뒤 오타 수정...

 

어느날 밤을 꼬박 새었다. 다음날은 아침부터 일정이 있는 날이었다. 하지만 사람들을 만나고 싶지 않았다. 더 외로워질 것 같았다. 그런데 그 외로움을 달랠 외로움을 사람들 속에서 찾을 수는 없는 거였다. 그래서 훌쩍 짐을 쌌다. 밤을 꼬박 새었기에 한숨 푹 자고 싶기도 했다. ‘멀리 가자. 그리고 안 가본 곳으로’ 용산역으로 가서 광주든 목포든 먼저 출발하는 표를 달라고 했다. 내가 ‘외로움’이라고 부르던 이 신체감응은 그제사 적절한 이름을 얻었다. 그건 ‘여행병’이었던 것이다. 

 

광주역에 내렸다. 괜히 KTX를 탔다. 세 시간 반만에 종점이라니. 속도는 여행의 시간을 그 풍성한 질감으로부터 박탈하여 평평하게 만들어버린다. 제대로 잠을 자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호남선 주변으로 펼쳐지는 그 아름다운 평야의 풍경을 보지도 못하고 ‘목적지’에 도착해 버렸다. KTX의 속도는 여행 그 자체가 여행의 목적일 수 있는 그 가능성을 박탈한다.(그러나 나의 이런 생각은 다음날 목포-제주 간 배에서 다섯 시간 동안 지루하게 배멀미를 견디면서 위기에 봉착하기도 했다.) 

 

잠이 덜 깬채로 광주역 광장 앞에서 무엇을 해야 할지 고민을 하다가 일단 광주 비엔날레에 가 보기로 했다. 광주에서는 이 여행이 어떻게 흘러갈지, 얼마나 길어질지 알 수가 없었던 데다가 여행의 흥분보다는 몸의 피로가 더 컸기 때문에 거의 사진을 찍을 생각을 별로 하지 못했다. 그리고 사실 광주라는 도시에 잠깐 머무는 동안 나는 커다란  감흥을 느끼지 못하기도 했다. 그건 아마도 광주의 ‘첫인상’이었던  비엔날레 전시장이 내가 끔찍이도 싫어하는 신도시 아파트촌 속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비엔날레 전시 자체는 좋았다고 생각했지만 사람들이, 특히 억지로 와서 뛰듯이 관람하는 아이들이 너무나도 많았던 데다가, 대규모의 전시를 관람하기엔 몸이 피곤했던 것 같다. 지금에 와선 기억나는 작품이 거의 없다. 

 

비엔날레 전시장에서 금남로로 향했다. 그래도 광주에 왔으면 금남로의 광주 도청에 한 번 가봐야 하는 것 아닌가. 그곳은 광주민중항쟁의 상징이기도 했지만 사실 나는 사진 속에 등장하는 도청 건물과 그 앞의 로터리가 참 ‘예뻐서’ 꼭 가보고 싶었다. 물론 그것을 예쁘게 느끼는 것이 민중항쟁의 기억과 따로 떨어져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곳에서 느끼는 “예쁨”은 민중항쟁의 공식적 역사가 갖는 근엄함이나 식상함을 넘어서서 여전히 그곳을 다른 방식으로 기억하게 하는, 그곳에서 나타났던 어떤 힘과 활력에 대한 체험이나 그것을 기대하는 감정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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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렇게 기대하던 예쁜 금남로는 이미 몇년 전에 없어져 있었다. 그 일대는 ‘공사중’이었다. 도청 건물 앞에는 도청보다도 더 거리의 풍경을 좌우하는 다른 건물을 짓기 위해 시끄럽게 중장비가 움직이고 있었다. “아시아 문화의 전당”이라는 뭔가 아득하게 먼 듯 한 이름이 붙게 될 그 건물은 그 공간에 달라붙어 있는 저항과 반역의 기억을 지워버릴 것 같았다. 이게 나로 하여금 광주에 대한 감흥을 잃고 더 무언가를 보기를 포기하게 만든 두 번째 이유였다.  근처에서 점심을 먹고, 다시 금남로 로터리 앞의 카페에서 맛없는 커피를 마시면서 망연자실하게 창밖을 쳐다보다가, 목포로 바로 내려가기로 했다. 어차피 용산역에서 ‘가장 멀리’ 가고 싶었던 것 아닌가. 그리고 마침 트위터에서 @amisdame 님이 목포의 맛집들 몇 군데를 추천해 주셨다. 듁흔 듁흔. 광주 됐고, 목포 맛집이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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