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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8/06/13
- <다중> 서평, "촛불 앞에서, 진보적 복음주의자들께 드리는 고언" [복상 213호] (4)
진보적 복음주의 기독교인들이 만드는 잡지 <복음과 상황>에 연재하는 글입니다...만, <다중>의 내용을 충실히 쓰고 있기에 기독교와 상관 없는 분들도 일독을 권합니다. 뭐, 별로 잘 쓴 글인진 모르겠지만요^^;
안토니오 네그리 & 마이클 하트, <다중>, 세종서적 2007
김강기명_성공회대 대학원생
성서한국의 구교형 목사님께.
목사님 6월 9일의 만남은 참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이런 때가 아니면 언제 저같이 부족한 사람이 복음주의권의 오피니언들과 평등하게 이야기를 섞을 수 있었을까요. 촛불을 들고 거리로 쏟아져 나오는 저 자발적 대중들 - 특히 10대, 20대의 모습들이 복음주의권의 오피니언들에게도 놀라움과 경탄, 그리고 겸손함을 낳게 한 것 같습니다. 저는 그날 "솔직히 열심히 한다곤 하지만 결국 386 '꼰대' 목사님들 아니야?"라고 불신하던 저의 많은 감정들을 녹일 수 있었습니다. 적어도 9일의 시국토론회와 이어진 뒤풀이 자리에 참여하셨던 분들은 운동권과 시민단체 못지않게 복음주의 운동도 변해야 한다는 공감대를 분명히 갖고 계셨다고 생각합니다. 식사 자리에서 구 목사님의 "내가 청년들을 정말 잘 모르고 있었구나."라는 자기고백은 저에게 큰 충격으로 다가 왔었지요.
저는 물론 복음주의자는 아닙니다. 하지만 저 수구적 목회자들의 세력 확장과, 또 사회변화와 세대교체라는 환경의 변화 속에서 이제는 더 이상 복음주의와 진보주의라는 구분으로 기독교를 양분하는 것이 너무나 소모적이지 않은가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교리보다는 이슈들이, 술․담배․낙태문제 같은 개인윤리보다는 대운하․쇠고기․반전․토지정의․인권․FTA 같은 사회윤리문제가 기독교 운동의 중심이 되면서 복음주의와 진보주의, 혹은 저 같이 어린 민중신학도와 복음주의 오피니언인 구 목사님 같은 분들이 무언가를 함께 할 수 있는 자리가 앞으로 더 많이 생겨나리라 생각합니다.
이런 점에서 저는 복음주의 운동에 대한 '애정'을 갖고 복음주의 바깥에서 구 목사님을 비롯한 진보적인 복음주의 오피니언들께 감히 몇 마디 고언을 드리고 싶습니다. 물론 제가 "책 읽어주는 친구"인만큼, 촛불집회의 모습을 보면서 변화의 길을 모색하고 있는 복음주의 운동이 참고하면 좋을만한 책을 한 권 추천하면서 제 이야기를 해 보려 합니다.
"정상적 국민국가"의 시대가 저물고 있다
제가 소개할 책은 이탈리아의 정치철학자 안토니오 네그리와 그의 제자 마이클 하트가 함께 쓴 <다중>이라는 책입니다. "다중"이란 인민이나 민중처럼 통일성으로 규정되거나, 군중처럼 획일성으로 규정될 수 없는, '수많은 차이들이 하나의 공통의 집단을 형성한 모습'을 일컫는 말입니다. 마치 촛불집회를 함께 하는 우리 시민들을 연상하게 하지요?^^ 이 책은 바로 이 "다중"을 지배하는 세계 지배체제(그것을 저자들은 <제국>이라고 부릅니다.)의 모습을 살피고, 그 지배에 저항하는 다중의 모습, 그리고 그들이 그렇게 저항하는 주체로 나타날 수 있는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문화적 조건들을 분석하는 책입니다.
저자들은 현재 세계는 더 이상 국민국가 단위에서 정당정치를 비롯한 "정치행위"를 통해 국민의 의사를 반영하고, 권력의 행사가 이루어지는 정상적인 국민국가들의 시대가 아니라고 이야기합니다. 즉, 자본주의가 전지구적으로 통합된 하나의 시장을 만들고 있듯이, 주권권력 역시도 더 이상 일국적 차원의 주권을 말할 수 없는 전지구적 주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세계시장과 세계주권, 이 둘은 사실상 하나입니다.) 전작인 <제국>이 세계시장의 측면에서 제국적 주권을 분석했다면, 이 책은 세계주권의 측면에서 제국을 분석하고 있습니다.
저자들이 분석한 제국적 주권의 모습은 "전쟁" 혹은 "전지구적 내전상태"입니다. 즉 그것이 민주주의가 되었든, 과두제나 군주제가 되었든 정상적인 정치가 기능하지 못하고, 전지구를 가로지르는 경찰-군대가 끊임없이 치안을 유지해야 하는 항구적인 "예외상태"가 바로 오늘날 지구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저자들은 "제국적 권력 하에서 고강도의 치안행위와 저강도의 전쟁 행위가 만난다."고 말합니다. 이라크에는 미국과 다른 여러 나라의 군대가 파견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작전"은 전쟁이라기보다는 사실상 "치안"행위에 가깝습니다. 다를 게 없습니다. 반대로 현재 한국 경찰은 시위대를 무력으로 짓밟고, 바리케이트를 치는 "치안행위"를 하고 있지만 그것은 사실상 저항자들을 상대로 한 "전쟁"과 비슷한 양상으로 전개됩니다.
이런 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해 권력자들은 "안보"의 논리와 "정의로운 전쟁"론을 설파합니다. 우리의 안전한 삶을 위해서 테러리스트들을 소탕하자! 그러나 소탕되는 것은 테러리스트가 아니라 보통 가난한 이들입니다. 정작 테러리스트는 제대로 잡지도 못하는 이런 치안 전쟁들의 역할은 사실상 안보 선동을 통해 사람들로 하여금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도록 눈을 가리는 역할을 한다는 게 저자들의 주장입니다. 즉, 신자유주의에 입각한 지금의 세계체제(제국)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치안-전쟁이, 즉 이전에는 "예외적"이었던 상황이 항구적인 것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일국적 차원의 국가권력은 너무나 무능력합니다. 그토록 국민들이 재협상을 부르짖어도 "힘들다, 어렵다"를 반복하는 이명박 대통령의 모습은 단순히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라는 말만 가지고는 효과적으로 비판할 수 없습니다. 어찌보면 그는 제국의 총독에 불과할 지도 모릅니다.
저자들은 이런 점에서 단순히 하나의 국민국가를 "정상상태"로 되돌리려는 투쟁으로는 이러한 전지구적 시장과 권력에 제대로 맞설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이미 우리는 노무현 5년의 실험을 통해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제대로 맛본 바 있습니다. 저는 이런 점에서 과연 한국의 복음주의 운동이 정치참여 운동으로 나아가는 것에 대해 상당한 불만을 갖고 있습니다. 일단 - 죄송한 말씀이지만 - 잘 하지도 못하는 것 같고, 과연 새로운 전지구적 질서 하에서 기독교인들이 선택과 집중을 해야 할 영역이 '국민국가의 정치'인가 하는 의문이 들기 때문입니다.
전지구적 지배에 맞선 전지구적 다중
이렇게 이야기하면 "그렇다면 뭘 해야 하느냐?"고 반문이 쏟아질 것입니다. 저자들이 바로 이 지점에서 강조하고자 하는 것이 전지구적인 주권권력에 맞선 전지구적 "다중"의 연대와 민주주의 운동입니다. 저자들은 현재의 주권권력이 강력하며 또 잔인하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그보다 다중의 저항이 더 강력하다고 주장합니다. 그것은 바로 이 제국은 "다중"이 만들어내는 생산물에 기생하면서 지배하고 있을 뿐이기 때문입니다.
즉, 제국은 언제가 다중이 노동현장과, 또 노동현장을 넘어 삶 시간 전체에서 생산하는 상품, 지식, 재화, 정서, 정보 등의 이른바 "공통적인 것"을 착취함으로써만 체제를 유지할 수 있는 허약한 주권체제라는 것입니다. 만일 다중이 이러한 "공통적인 것"의 착취를 거부하고, 스스로가 공통적인 것들의 생산과 재생산을 장악하려 할 때 제국의 주권권력은 위협을 느낄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좀 더 구체적인 예를 들어 보자면, 이를테면 인터넷 공간은 그 동안 자본이 자신의 덩치를 불리는 공간이었습니다. 특히 한국에서 IT산업의 발전은 비약적이었지요. 그들은 인터넷 공간에서 생산되는 수많은 정보, 정서, 라이프스타일 등을 절취함으로써 자본을 증식합니다. 그런데 이제 그 동일한 공간에서 사람들이 자신들이 생산한 이 공통적인 것들을 정부와 언론, 또 정부 정책에 기생하는 자본에 대한 저항을 위해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 과정에서 광우병, 민영화, 집시법 등등 수많은 정보들이 무료, 말하자면 공통의 것이 됩니다. 비단 인터넷뿐만 아니라 산업의 현장에서 노동자들이 파업을 통해 자본에 맞설 때, 시위 현장에서 자발적으로 김밥을 싸고, 오토바이를 타고 그것을 배달할 때 우리는 거기에서 공통적인 것을 생산하고 직접 통제하려는 다중의 저항을 만나게 됩니다.(물론 예로 든 것들은 매우 작은 예에 불과합니다.)
이런 점에서 다중은 결코 "단일한 집단"(인민)은 아니지만 한편으로 "공통적인 집단"입니다. 수많은 차이들을 가지고 있는 다중들은 또 한편으로는 공통적인 것들(가장 크게는 이 세계)을 함께 생산하고 있는 이들입니다. 저자들은 이전의 공산주의나 사회주의의 오류가 이 다중을 "노동계급"으로 한정한 데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그들이 만든 사회는 획일적인 독재 사회였던 것이겠지요.
촛불집회에 모인 사람들은 이 다중의 모습을 너무나도 잘 보여줍니다. 그 누구도 특권화되지 않는 평등한 네트워크가 이번 촛불시위의 특징입니다. 여고생, 예비군, 노동자, 유모차부대, 직업 운동가, 하이힐을 신고 나온 여성과 그녀의 손을 꼭 잡은 남자 친구, 할아버지, 장애인, 이주노동자... 그들의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받는 억압도, 그들의 삶이 생산해내는 것들도 각각 다 다르지만, 그들은 지금 광장에서 '공통의 요구'를 하고 있습니다. "안전한 먹거리를 달라", "공공성을 파괴하지 말라", "국가를 신뢰할 수 없다"는. 이 요구가 단순히 "대한민국 헌법 1조"라는 국민국가적 내용으로 나타난다 할지라도, 이미 그것은 곧바로 공통적이며, 전지구적인 요구로 나타납니다. 미국이 끈질기게 "쇠고기 문제는 한국의 국내문제다."라고 덮으려 하는 것은 오히려 이 문제가 결코 일국적인 문제가 아님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다중의 운동으로서의 "민주주의"
저자들은 이러한 다중의 공통적인 것을 향한 운동을, 또 저항을 "민주주의"라는 오래된 용어를 통해 설명합니다. 저자들이 말하는 민주주의란 대의제 민주주의와도 다르고, 또 직접민주주의와도 다릅니다. 그것들이 "제도화 된" 정태적인 민주주의라면 저자들이 말하는 민주주의는 운동과정 중에 있는, "만들어 져야 할" 동태적인 민주주의라 할 수 있습니다.
즉 저자들은 쉽사리 어떤 정치적 시나리오나 유토피아적 상황을 그려놓고, 다중의 운동적 활력을 그 속으로 밀어넣는 것을 강하게 비판합니다. 민주주의란 바로 다중의 주권에 대항하는 운동 그 자체요, 또 공통적인 것을 생산하고 통제하려는 운동 그 자체라는 게 제가 이해한 저자들의 "민주주의"입니다. 저자들은 다중이 어떤 대의제 장치가 없이도 소통하는 능력을 가졌다고 말합니다. 물론 이것은 분명 60년대 이후 지속적으로 성장해 온 지식정보 자본주의와 인터넷 덕택이기도 합니다.(그리고 그것을 만들어낸 것도 또 다중입니다.) 저자들은 지금의 시대야말로 더 이상 대의제 정치나, 전위조직이 대중을 동원하는 형식의 운동방식이 불가능한 시대라고 이야기합니다. 때문에 저자들이 마지막으로 주문하는 것은 바로 민주주의라는 끊임없는 운동정치 속으로 과감히 들어가 "다중이 되자"는 것입니다.
복음주의 운동은 무엇을 할 것인가?
저는 저자들의 진단과 제안이 복음주의 운동을 비롯한 기독교 사회운동에도 많은 시사점들을 던져준다고 생각합니다. 이번 촛불집회는 분명 어떤 대의제 민주주의로 환원되지 않는 대중의 욕구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국가는 더 이상 신뢰할 수 없는 존재가 되었습니다.(촛불 이전에도 그 불신은 투표 거부라는 소극적 행위로 나타난 바 있습니다.) 또한 국회에 있는 어떤 정당도 사실상 작금의 대중을 제대로 '대의'할 능력이 없습니다.
한편으로 이번 촛불집회는 기존의 시민운동과 사회운동에도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5월 2일 여고생들과 네티즌들이 이슈를 제기하자 운동단체들은 그제서야 부랴부랴 "광우병 국민대책위"를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거리의 대중은 무려 1700여개의 단체가 함께 한 대책위임에도, 그들에게 권위를 부여하는 것을 한사코 거부했습니다. 그야말로 수평적인 네트워크들이 곳곳에 만들어졌고, 그 네트워크 안에서는 끊임없는 논쟁과 토론이 이어졌습니다. 대중의 지도부를 자처한 몇몇 단체는 호된 비판을 맞기도 했습니다. 저는 이러한 모습이 저자들이 말하는 움직이는 운동으로서의 "민주주의"에 상응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미 많은 운동단체들이 자기 반성을 쏟아내고 있고, 특히 회원 없는 명망가 중심의 조직운동에 대한 자기 비판과 대중과 소통하지 못하는 운동권의 문화적 감성에 대한 비판들이 봇물처럼 터져 나오고 있습니다. 저는 이러한 움직임이 확산된다면 혹여라도 이 촛불이 잦아들고, 제국적 주권체제에 기생하는 국가권력이 그대로 존속하게 된다 하여도 아래로부터의 민주주의의 희망은 분명히 계속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복음주의 운동은 어떨까요? 저는 그 어느 운동단체보다도 복음주의 운동이 권위주의적 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물론 그것은 단지 복음주의 운동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 교회 전반의 문제입니다. 저는 가끔 선교단체들의 경배와 찬양 집회나 대형교회의 예배에서 파시스트 집회에 온 것 같은 섬뜩함을 느끼곤 합니다. 자기 주체적 신앙인으로서, 아래에서부터 한 몸 된 공동체를 이룬다기 보다는 무대 위의 인도자나 설교자의 열광적인 인도를 따르는 '청중'이 되어 그에게 가치판단을 맡겨버리는 획일적인 군중의 모습이 현재 한국교회 일반의 모습은 아닐까요? 진보적인 복음주의 운동이라고 별반 달라 보이지 않습니다. 보수파 목사들이 보수적인 설교로 대중을 동원한다면, 진보적인 목사들은 진보적인 설교로 대중을 동원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그래서 촛불집회가 보여준 "자유발언대"의 발랄함과 그것을 통해 진화하는 대중의 신앙적, 정치적 능력은 한국 교회 어디서도 찾을 수 없는 것은 아닐까요. 목회자들은 늘 "청년들이 너무 각성이 안 되고, 동원도 안 된다."고 푸념하시지만 스스로가 권위의 덫에 빠져 있는 것은 혹시 아닐런지요.
복음주의 운동의 의제들과 이슈들도 그렇습니다. 예전에 <88만원 세대> 서평에서도 썼듯이 통일운동이나 정치참여 운동이 중심의제가 될 때(특히 성서한국 등의 큰 운동이 그런 경향이 있다고 봅니다.) 그 운동은 명망가 중심, 386 목회자들 중심의 운동에 청년들이 동원되는 형식을 넘어서기 힘들지 않을까 합니다. 지금 복음주의 운동에 필요한 것은 위를 향하는 그런 운동이 아니라 저자의 표현을 빌리면 "다중"이 만들어나가고 있는 여러 가지의 민주주의 운동에 동참하는 것이 아닐까요. 사실상 몇몇 리더들 말고는 참여하기 힘든 정치운동의 틀을 벗어나 복음주의 청년들이나 교인들이 일상에서 느끼는 이슈들로부터 시작되는 운동들을 만들어나갈 수 있지 않을까요.(저는 개인적으로 환경, 평화, 학생인권, 생활협동조합, 공동체 운동 등이 종교운동의 블루오션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운동 방식에 있어서도 촛불집회의 "자유 발언대"로 상징되는, 대중들의 자발성과 창조력을 최대한 이끌어낼 수 있는 방식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구 목사님. 물론 제의 이런 비판은 제가 복음주의 바깥에 있기 때문에 편하게 던지는 것일 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욱 구 목사님과 같이 복음주의 운동의 핵심에 계신 분들의 깊은 숙고가 필요한 시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교회 안팎의 "다중"들은 단지 한국 보수교회의 "내용"만을 비판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들은 바로 권위 구조 전체에 대해 저항하고 있습니다. 진보적인 복음주의 운동이 여기에 대해 해답을 모색하지 않는다면 저는 한국 교회의 미래는 아마 없을 거라고, 시민사회와 동떨어진 곳에서 화석화된 늙은 종교로 남을 거라고 감히 전망합니다.
하느님은 결코 홀로 일하시지 아니하시고, 사람을 통해 일하십니다.(민중신학에선 그것을 "민중사건"이 곧 "하느님 사건"이다."라고 이야기합니다.) 하느님이 일하시는 그 사건의 현장 속에서 목사님과 자주 만나 뵙길 소망합니다.
구 목사님의 책 읽어주는 친구, 김강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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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계친구앨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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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발언대.... 나는 사실은 결코 그렇지 못할지라도 나보다 그리스도를 먼저 생각하는 것을 이상으로 배웠습니다. 당신이 그리스도의 기생충들을 빌미삼아 이 사고를 폐기하고자 하신다면 이것은 폐기될 것입니다.그 다음 남는 것은?? 모든 인간에게 편만하게 존재하는 사단의 역사??
'선악'의 이분법의 철학이 낳은 역사적 결론은 항상 신분제였습니다.
그리고 그 신화적인 '선악'을 보다 구체적인 '공익' '연대' 따위로 탈신화화하고서야 신분제는 진정으로 막을 내렸습니다.
신화적인 선악의 구분, '천벌'을 없애 보십시오. 기독교는 선악이 가장 혼란스럽게 교차하는 그곳에서 그것을 가장 가장 첨예하게 구분하고자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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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계친구앨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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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발언대.... 나는 사실은 결코 그렇지 못할지라도 나보다 그리스도를 먼저 생각하는 것을 이상으로 배웠습니다. 당신이 그리스도의 기생충들을 빌미삼아 이 사고를 폐기하고자 하신다면 이것은 폐기될 것입니다.그 다음 남는 것은?? 모든 인간에게 편만하게 존재하는 사단의 역사??
'선악'의 이분법의 철학이 낳은 역사적 결론은 항상 엘리트주의였으며 최종적으로 신분제였습니다.
그리고 그 신화적인 '선악'을 보다 구체적인 '공익' '연대' 따위로 탈신화화하고서야 신분제는 진정으로 막을 내렸습니다.
신화적인 선악의 구분, '천벌'을 없애 보십시오. 기독교는 선악이 가장 혼란스럽게 교차하는 그곳에서 그것을 가장 가장 첨예하게 구분하고자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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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nseksrmrqh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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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말씀 잘 듣고 읽습니다. " 의인이 한 명만 있을지라도 내 이곳을 멸망치 않으리라" 좋은 하루가 되시길 건강한 삶이 되시길 바랍니다.부가 정보
qnseksrmrqh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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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말씀 잘 듣고 읽습니다. " 의인이 한 명만 있을지라도 내 이곳을 멸망치 않으리라" 좋은 하루가 되시길 건강한 삶이 되시길 바랍니다.부가 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