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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5/09/26
    노인의 생활철학(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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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05/09/20
    안본다고 없어지나(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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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2005/09/14
    시작만 해놓고(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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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2005/09/09
    자랑하기(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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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2005/09/05
    정신없던 일주일(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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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의 생활철학

여든이 다 되신 이모부께서 예전에 아버지 보여드리라고 주신 A4용지 한장에 담긴 글.

정리하다 나왔는데 그냥 버리려니 아쉬워서...

내용에 대해서는 노 코멘트!

 

 

노인의 생활철학

 

1. 젊어서 돌보지 않은 몸, 늦었다면 지금부터 확실히 관리하여 아프다 소리 마소.

2. 늙으면 설치지를 말고, 미움 살 소리 군소릴랑 말고, 그저 남의 일에 칭찬만 하소.

3. 묻거들랑 가르쳐주되, 알면서도 모르는 체 어수룩하소.

4. 모든 일에 이기려 하지 말고, 져주시구려!

   한 걸음 물러서서 양보하는 것이, 원만하게 살아가는 비결이라오.

5. 돈,돈,돈의 욕심을 버리시구려. 아무리 많은 돈을 가졌다 해도,

   죽으면 가져 갈 수 없는 거라오. 죽기 전에 많이 베풀고 덕을 쌓으시구려.

   그러나 돈은 놓치지 말고, 죽을 때까지 꼭 잡고 계시구려.

   돈이 있음으로써, 나를 돌보고 받들어 모셔 준 다오.

6. 왕년의 일일랑 다 잊고, 잘 난 체 자랑이랑 하지를 마소.

7. 내 자식 내 손자와 이웃 누구에게도, 존경받는 좋은 늙은이로 사시구려.

8. 멍청해도 안 되오. 그러기 위해 한 가지 취미라도 갖고, 즐겁게 밝게 사시구려.

9. 항상 신변을 깨끗이 하고, 모든 일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멋있게 건강하게 사시구려.

10. 생각을 깊게, 마음은 원만하게, 화를 내지 말 것이며,

    말을 조심하면 오래 살 수 있으리라.

 

 



1. 환갑(61)에 저승에서 데리러 오거든, 지금 부재중이라 하소.

2. 고희(70)에 저승에서 데리러 오거든, 아직은 이르다 하소.

3. 희수(77)에 저승에서 데리러 오거든, 지금부터 생을 즐긴다 하소.

4. 산수(80)에 저승에서 데리러 오거든, 이래도 아직 쓸모가 있다고 하소.

5. 미수(88)에 저승에서 데리러 오거든, 쌀을 좀 더 축내고 간다고 하소.

6. 졸수(90)에 저승에서 데리러 오거든, 그렇게 조급하게 굴지 마라 하소.

7. 백수(99)에 저승에서 데리러 오거든, 때를 보아 내 발로 간다고 하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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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본다고 없어지나

뻐꾸기님의 특정한 글은 아니고 [공장의사 일기] 에 관련된 글.

 

다른 다큐를 보면서 그런 적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칠레 전투'를 보면서는 정말 그런 생각이 많이 들었다.  "이젠 힘든 것 그만 좀 봤으면 좋겠다."  

칠레 전투가 워낙 속상한 내용을 담고 있어서 그랬을 수도 있고, 내가 그 즈음 힘들어서 그랬을 수도 있을 게다.  

 

화학공학을 전공했고 (그렇다고 화학이나 화공에 대해 물어보지 마시라. 쥐뿔도 모른다.) 화공과 출신 상당수가 그렇듯 공장에 들어갔다. 내가 있던 부서는 우리 회사 제품을 쓰고 있는 다른 공장에 갈 일이 무척 많았다. 포항제철이나 삼미특수강, 현대 자동차 등 작업조건이 상대적으로 양호한 곳도 있었지만 절반 정도는 정말 열악한 환경의 작업장들이었다. 난 아직도 어쩌다 쇳가루 냄새를 맡으면 그 때 생각이 난다.  어설프게나마 '노동자성'을 갖고 있던 나에게 그건 결코 마음이 편하지 않았던 경험이었다.

 

나 자신이 물론 노동자였고, 운동권은 아니었지만 뒤늦게 맑스에 반한 나에게 '노동자'란 말은 최소한 그 당시 가슴을 뭉클하게 하는 단어였다. 보는 월간지도 '말'에서 '길'로 바뀌었다. "너 같은 녀석은 직장생활 6개월 이상 못할거야"라는 친구들 말과는 달리 2년반을 다녔다. 직장생활 자체는 별로 힘든 것이 없었는데 각 공장을 돌아다니는 것이 내 마음을 편하게 하지는 않았다. (회사를 그만둔 이유와는 상관없다. 흔히들 하는 고민 "이렇게 평생?" 뭐 그런 거였다.)


관리직인 내가 우리공장의 생산직 사원들과 관계를 맺어나가는 것도 무척 힘들었고, 다른 공장의 노동자들과 대면하는 것은 더 복잡했다. 다른 공장의 관리직도 상대하고 생산직도 상대하는데 우리 회사의 이익과 상대편 공장 노동자의 이익이 (또는 상대공장 관리직과 생산직의 이익이) 서로 꼭 부합하는 관계가 아닌지라 정체성의 문제를 고민해야 하는 경우도 많았다.
물론 제일 괴로운 건 이것저것 떠나서 "어떻게 이런 데서 일을 하냐?"라고 느껴질 때다. 환기시설이 엉망인 곳에서 그 많은 분진을 잘난 3M 마스크 하나로 막아내고(나도 써봐서 알지만 분진을 막아주기엔 형편없다. 다만 없는 것보다 나을 뿐이지) 소음은 또 얼마나 심한데...  환풍기 두어개만 틀어놓고 도장을 하는 곳은 페인트 냄새에 취한다. 휘발성 용제 때문에 아마도 애들이 본드 흡입할 때의 효과 비슷한 게 생기지 않을까 싶다.

 

 

뻐꾸기님의 공장의사일기를 보다 보면 그 때 생각이 날 때가 있다. 그 때 생각이 안나더라도 그냥 내용 자체가 힘든 경우도 많다. 아는 사람의 얼굴이 떠오를 때도 있고 말이다.  그러다 문득 든 생각

 

=> "힘든 것 이젠 그만 좀 봤으면 좋겠다."

  => "어, 이 생각 언젠가도 했던 것 같은데"

    => "그래, 칠레 전투!"

 

그러던 즈음 신문에서 9월 11일이 칠레의 아옌데 정부가 미국이 사주한 쿠데타에 의해 무너진 날이라는 칼럼을 봤다. 칠레전투가 바로 그 내용이다. 1부 마지막에 쿠데타 군이 카메라를 향해 총을 겨눈다. 그리고 카메라가 바닥으로 고꾸라진다. 카메라맨이 총에 맞고 죽은 것이다. (미국의 사악함은 정말 종류도 다양하고 끝도 없다.)

 

그래도 내가 공장에 다니던 시절은 87년 노동자 대투쟁의 여파로 그 이전에 비해서나 현재에 비해서 꽤 나은 편이었다. 일단 해고의 불안에 떠는 일이 별로 없었고, 비정규직 문제도 없었다.(있기야 했겠지) 고생한만큼은 아니지만 임금도 그리 형편없지는 않았다.  물론 그 때도 대기업 하청 노동자의 처우는 상대적으로 열악했고, 12시간 맞교대로 일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저러고 어떻게 사나"하고 안스러워 하기도 했다. 십수년이 지난 지금 더 나아지기는커녕 비정규직의 삶은 끝없이 추락하고 있고, 전선이 확실했던 그 당시에 비해 이젠 피아의 식별 문제도 그리 단순하지가 않다. <밥.꽃.양>을 보며 울화가 치밀어 오를 때만 해도, 그게 극히 일부노조만의 극히 예외적인 상황에서 발생한 것이라고 억지로 믿어보려 했는데...

 

하여튼 2005년, 내 상황도 우울하고, 대한민국도 우울하고, 참 엿같다.

칠레전투 이후로도 속상한 다큐를 계속 보듯, 공장의사 일기도 계속 보게 되겠지. 가끔은 꿍얼거리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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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만 해놓고

정순택

전향장기수라서 송환 대상에 오르지도 못한 인물

2년전 쯤 정선생님을 만났을 때 귀가 좋지않아 잘 들을 수는 없었지만 건강해 보였다.

며칠전 암이라는 얘기를 들었고,  다음날 한겨레 신문에도 났다.

장기수 선생님들을 만날 때 느끼는 그 복잡한 감정들..

사실 복잡할 것도 없다. 존경은 하지만 그분 들의 말씀에는 동조하기 힘든 그런 상황들.

 

 

아옌데 칠레 대통령

9월11일은 미국한테도 역사에 기록될 날이지만, 칠레라는 나라에게도 그러했다더라. 아옌데 대통령이 몰락한 날.

'칠레전투'를 보며 "이젠 힘든 것 좀 그만 봤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을 했다. 요즘 뻐꾸기님의 글들도 그런 생각이 들게 한다.

 

병원 24시

어머니는 슬픈 내용의 프로그램을 보지 않는다.

 

알아서 기는 나라 대한민국

'학교급식조례'  

정부도 알아서 기고 대법원도 알아서 기고.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시절의 아름다운 전통이 아직도 계속되서 그러나?

 

여성의 군복무

평등, 노블리스 오블리제. 제발 웃기지좀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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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랑하기

지금까지 복권이란 걸 한 번도 사 본 적이 없다. 대학교 때 친구 녀석이 선물이라며 주택복권을 한 장 사준 적은 있지만 귀찮아서 맞춰보지 않았다. 경품 준다고 뭘 적어내 본 적도 없다. 확률상 낮은 일은 재미로조차 하지 않는다. 결정적으로 게으르고 말이다.

 

그런 내가 뻐꾸기님 삼만번째 방문자 이벤트에 당첨되었다. (곰상스런 면이 있는 나의 쓸데없는 치밀함으로 그 때 화면도 캡쳐해 놨다.  증거로 쓸 일이 있을까 해서^^)

 

 

 

뻐꾸기님이 평택까지 올 일이 있다고 해서 한 번 만나볼까 생각도 했었다. 예전엔 낯을 무척 가리는 편이었지만 나이들면서 그런 것은 많이 없어졌고 온라인상에서 알게된 사람을 오프에서 보는 것은 어느 정도의 궁금함으로 인해 기대되기 마련이다. 나야 나비와 찍은 사진 등 내사진을 블로그에 올리기도 했고,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내 글의 느낌과 만나서 얘기할 때의 느낌이 거의 같다고 한다. 너무 신비감이 없는 것 같아 앞으로는 내얼굴에 모자이크 처리라도 해야겠다.

 

뻐꾸기님이 너무 바쁘게 사는 것 같아서 신경도 쓰였고, 나도 아버지께서 악화되는 바람에 만나는 것은 포기하고 DVD를 선택.

 

내가 갖고 있는 DVD는 2천원짜리부터 2만 몇천원짜리까지 있다. 물론 DVD 가격이 영화의 질과 비례하는 것은 아니다. 2~3천원짜리에도 걸작이 수두룩(정말 많다. 부록이 좀 부실하긴 하지만)한 반면, 거져 줘도 안가질 '태극기 휘날리며'같은 것은 3만원이 넘는다.

둘 중 하나를 보내달라고 메일을 보냈다. 사실 가격이 신경쓰여서, 왠만큼 값이 나가는 것 하나와 비교적 저렴한 것 하나를 말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잘못 알았다. 내가 가격을 알아본 알라딘에서만 브에나비스타 소셜클럽을 싸게 팔고 있었던 거였다. 뻐꾸기님은 다른 곳에서 구매했고 말이다.) 뻐꾸기님은 둘 다 보내는 만행을 저질렀고, 본의 아니게 난 잔머리를 굴린 것처럼 되 버렸지만 뻔뻔하게 즐거워하기로 했다. ㅎㅎ




<스티브 지소와의 해저생활>

영화는 좋아하지만 편식이 심한 편이다. 그런 편식에 문제있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고칠 생각은 전혀 없다. 코메디는 잘 안보는 편이다. 특히 '로멘틱 코메디'는 거의 안본다. 차라리 아예 말이 안되는 '총알탄 사나이'류는 그나마 보겠는데(주성치는 아주 좋아한다.) 대부분의 로맨틱 코메디들은 너무 재미가 없다.  (르네젤위거가 좋아서 봤던 브리짓 존스의 일기는 엄청 짜증나는 수준)

 

물론 우디알렌의 코미디는 감탄을 하면서 본 기억이 있다. <스티브...>가 나의 흥미를 끈 것은 일단 미국에서는 대박이 났다는데 우리나라에선 개봉조차 못해보고 곧장 dvd로 출시됐다는 것. (이런 DVD는 우리동네 대여점에서 갖다놓을 리가 없다. 용산에서도 이런 걸 팔리는 없고)  내가 볼 수 있는 방법은 인터넷에서 다운받거나 DVD를 사는 것인데 모니터로 영화보는 것을 극히 싫어하는 나로서는 뻐꾸기님의 이벤트가 정말 '딱'이었던 것이다.

 

 

감탄까지는 안나왔지만 아주 재미있게 봤다. 말이 안되는 것을 말되는 것처럼 하는 영화들 정말 짜증나는데, 말이되고 안되고를 아예 무시하는 영화들은 괜찮다. 그런 영화갖고 '말이 안된다'라고 따지는 사람도 없거니와 행여 그런 사람이 있으면 "누가 뭐래? "라고 해주면 된다.

 

 나름대로 유명했지만 이젠 투자자조차 확보하기 힘들게된 해양 다큐멘타리 감독 스티브 지소의 이야기다. 난 이 영화의 줄거리를 재미있게 설명할 능력이 없다. 스티브지소의 냉소적 유머감각과 엉뚱한 캐릭터들이 재미를 주는 것인데 줄거리 장황하게 설명해봐야 더 재미없게만 느껴질 것 같다. 꽤나 호화 캐스팅인데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에서 그렇게 인기있는 인물은 별로 없다. 내가 좋아하는 윌리암 대포(사진 제일 오른쪽)는 이 영화에서 정말 재미있는 양념 역할을 한다. 꽤나 성격있는 배역들을 주로 맡았는데 이 영화에서는 좀 깨는 역이다.

 

 아들일지도 모르는 네드와 지소간의 관계가 줄거리의 큰 축을 차지하고 그로인해 가족주의 강박의 혐의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거슬리지는 않았다. 다르게 생각할 여지도 있고 말이다. 별 이변이 없는한 나도 스티브지소처럼 자식없이 늙어갈텐데 허헛!

 

 

어이없는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

예전에 이 영화를 비디오로 빌려서 봤다. 그런데 본지 그렇게 오래된 것도 아닌데 영화내용이 극히 일부만 생각나고 거의 아무 것도 남은 것이 없었다. 그렇게 기억에도 안남는 영화가 왜 그렇게 호평을 받았는지 궁금하기도 했다. 어떤 영화였는지 다시 보고 싶었고, 요즘 영화를 모으는 취미아닌 취미를 갖게되었는데 기왕이면 다큐영화를 모으기로 한 것도 한 몫해서 뻐꾸기님에게 요청한 <브에나...>

 

영화를 보면서 너무 어이가 없었다. 이 영화는 놀랍게도 "내가 안 본 영화"였던 것이다. 아마 타큐라고 하기에 그리 당기지도 않으면서 일단 비디오를 빌려온 것 같다. 정혜랑 같이 살면서 약간 피곤하게 살던 때였고 (가사노동과 경제적인 문제를 100% 내가 해결했기에) 그때는 피곤해서 주로 액션 영화를 봤다. 아마도 조금 보다가 잠이 들었고 반납일 때문에 그냥 반납했을 것 같다. 그래놓고도 그 영화를 봤다고 생각하고 말이다. 정말 어이없어.

 

 

그래, 피곤하고 컨디션 안좋을 때 볼만한 영화는 아닌 것 같다. 그래도 어쨌든 참 좋았다. 무엇보다도 음악 자체가 좋았고 그런 음악을 늙수구레한 노친네들께서 한다는 것도 감동적이다. 극영화에서 인정받은 감독답게 다큐면서도 극영화같은 분위기가 있다. 다큐에 스태디캠을 이렇게 쓸 수도 있겠다 싶다. (우리나라 독립다큐에서 그럴 일이 있을까? 그 비싼 장비를?) 인터뷰할 때도 카메라는 다른 다큐처럼 고정되어 있기도 하지만 빙글빙글 돌기도 한다. 음악을 따라 춤을 추듯.

미국이 그렇게 없애고 싶어했던 카스트로가 대통령으로 있는 나라. 속옷 광고에도 그의 사진이 쓰일만큼 자본주의 이미지에 이용당하고 있는 체게바라를 혁명과 연결해서 기억하는 나라 쿠바. 그렇게 노래를 잘하던 가수가 먹고살기위해 구두닦이를 했지만 그걸 떳떳하게 말하는 것도 인상적이었다. 어쩜 그렇게들 낙천적일 수가 있을까?

 

Special Feature도 마저 봐야겠다.

어, 내가 뻐꾸기님에게 고맙다는 말을 했나? 5공쯤에 유행했던 표현을 빌자면 "이 왠수를 어떻게 갚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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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없던 일주일

EBS 다큐 녹화하기

일주일 동안 하루에 10여편을 상영했는데 내가 본 것은 한두편 정도씩이다. 비디오나 DVD는 가게에 손님이 오거나 다른 일이 있어도 정지시켰다가 다시 보면 되지만 TV는 그게 안되니 짜증난다. 아침 6시부터 새벽 1,2시까지 하는 걸 다 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그래서 녹화를 했다. 중간중간 사정이 생겨 다 녹화하진 못했지만 그래도 70% 정도는 한 것 같다. 불행히도 우리집은 교육방송이 잘 안나온다. 화질만 좋았다면 나름대로 훌륭한 자료수집이었는데 아쉽다. 시간맞춰 테이프 갈아끼우고, 예약녹화하고, 다음날 녹화계획 짜고... 나름대로 꽤 손이 많이 갔다. 공테이프 값만 거의 10만원은 든 것 같다. 이제 찬찬히 봐야지. 뿌듯.

 

아버지 가정간호

아버지께서 예상보다 갑작스레 안좋아지셔서 아무것도 못드시는 상황이 벌어졌다. 담당의사를 만나기로 한 날은 일주일이나 남았는데 말이다. 일단 병원을 찾아갔다. 전화예약은 무조건 이틀후에나 되지만 직접찾아가면 오래 기다리더라도 그날 만날 수가 있다. 그런데 담당의가 휴가를 갔단다. 에구구.  같은 과의 다른 의사분과 다음날로 예약을 해놓고 다음 날 또 서울에 갔다. 강남성모병원은 서울지역만 가정간호가 되기 때문에 소견서를 가지고 수원 빈센트 병원으로.  나처럼 찾아오는 경우가 흔치 않아서 안내하는 사람들도 우왕좌왕. 어찌어찌 의사를 만나고 어찌어찌해서 수녀님(가정간호사)을 모시고 집까지 왔다. 코줄과 소변줄을 끼면서 아버지 표정을 살폈다. 이젠 말도 못하실 정도로 상태가 안좋아진 아버지가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실까?

 

식사를 못하시게 될 것은 이미 예정된 일이었기에 그 전부터도 생각은 해놓고 있었다. 문제는 어머니가 코줄 끼는 것을 반대하는 거였다. "사람이 못먹으면 가는 거지, 그렇게까지 해서 뭐하냐. 그렇다고 사는 것도 아니고."  형은 "그래도 껴야지 어떻해"라고 했고, 난 사실 어떻게 하는 게 나은지 알지 못했다. 뇌출혈 같은 거라 몸만 불편할 뿐 생명과 상관이 없는 것이라면 고민도 안할 것이다. 하지만 아버지는 어차피 나을 수 없는 병이고 점점 끝이 다가오고 있다. 코를 통해서 음식물과 약을 주입하면 생명이 조금은 더 연장되겠지만 그렇다고 병이 낫는 것도 아니고, 아직 의식은 멀쩡한 편인 아버지가 당신의 몸이 하나씩 망가져가는 걸 스스로 지켜봐야 하는 것이 더 끔찍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런데 당장 아버지가 입도 못벌리는 상황이 되자 어머니도 겁이 나셨나보다. "코줄이라도 껴야하나 어떡하냐?"

 

음식을 먹을 수 없다는 것은 약도 먹을 수 없는 걸 의미한다.  그렇게 되자 정말 하루이틀 사이에 급격하게 악화됐다. 혈압, 맥박, 체온등을 재고 나신 수녀님께서 "지금 상태라면 당장 오늘밤이라도 안좋은 일이 생길 수 있으니 마음의 준비를 하셔야갰네요."

 

음식과 약이 들어가자 아버지는 조금씩 좋아지셨고, 이틀이 지나자 급기야 당신 손으로 콧줄을 빼셨다. 주무시다가 무심결에 갑갑해서 뺀건지 일부러 뺀건지는 잘 모르겠다. 어차피 물어봐도 대답은 안하신다. 하여튼 또 한고비를 넘겼다. 이젠 아주 조심스럽기는 하지만 입으로 음식을 드신다. 한동안 또 이렇게 가겠지.

 

 

욕창

침대에서 꼼짝 못하게 된지 딱 10개월이 지났고 , 결국 아버지에게도 욕창이 찾아왔다. 욕창이 생기니까 정말 할 일이 많아졌고, 소독할 때마다 보는 것도 괴롭다.

욕창 자체만 생각하면 2시간마다 자세를 바꾸고, 가급적이면 똑바로 누워있지 않는 게 좋다. TV보는 게 대단한 일도 아니지만 아버지가 하루종일 하는 건 그것밖에 없는데 욕창때문에 옆으로 뉘여드리면 그나마 TV도 못보고 멀뚱멀뚱 계시거나 주무시는 것밖엔 할 게 없다. 어차피 욕창보다는 아버지 머리속의 암세포가 더 빨리 퍼질텐데 욕창치료만을 위해서 아버지를 계속 옆으로만 누워계시도록 하는 게 잘하는 건지...

 

 

용산

그 와중에도 조카녀석 컴터를 사러 용산에 다녀왔다. 다큐 녹화는 누나에게 맡기고.

용산에서 볼 일 보는 동안 아는 이에게서 전화가 왔다.

"오늘 저녁에 술 한잔 할 수 있어요? 사는 게 왜 이렇게 힘들죠?"

왠만하면 같이 한잔 하며 넉두리라도 들어주련만 상황이 전혀 왠만하지가 않은 관계로 다음에 보자고 했다.

 

 

스티브 지소와의 해저생활

뻐꾸기님의 이벤트에 당첨되어 받은 DVD (나중에 자세히 자랑해야쥐)  다큐 녹화시켜놓고 이 영화부터 봤다. 지난 한주동안 평택에 오실 일이 있다고 했지만 내 상황이 상황인지라 만나보는 걸 포기하고 DVD 선택.

 

 

아~ 피곤하다. 내일은 또 병원 가는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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