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게시물에서 찾기분류 전체보기

281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5/01/10
    통곡의 벽 끝?
    무위
  2. 2005/01/10
    지리산 올라가기(2)
    무위
  3. 2005/01/10
    낯선 곳으로 여행/추억 속으로 여행
    무위
  4. 2005/01/09
    통곡의 벽(1)
    무위
  5. 2005/01/09
    기부문화 시비걸기
    무위
  6. 2005/01/09
    운동권 밴드? - 천지인
    무위
  7. 2005/01/09
    나비 그 후(1)
    무위
  8. 2005/01/09
    채식유감(1)
    무위
  9. 2005/01/09
    한대수- 상처
    무위
  10. 2005/01/09
    나비와 인연은 이렇게 시작되고(7)
    무위

통곡의 벽 끝?

아직 다른 벽을 긁긴 하지만 주로 스크래쳐를 긁는다.

아버지 때문에 사진을 찍을 여유가 없어 스크래쳐를 긁는 그럴듯한 모습을 찍지 못했다.

오랫동안 긁는 게 아니기 때문에 긁기 시작하자마자 카메라를 찾으면 이미 늦는다.

카메라를 준비하고 기다려야 하는데 요즘 형편상...

 

어쨌든 스크래쳐와 많이 친해졌다.

꼭 긁으려고만 올라가는 것이 아니고 그냥 스크래쳐가 좋은가 보다.

좁아서 전혀 편해보이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그위에서 이것 저것 한다.


슈퍼맨이 날아갈 때 이렇게 한쪽 팔을 쭉 뻗곤 하지.

 

이렇게 앞발을 교차하기도 하다가.

졸다가

지가 긁어 놓은 벽을 쳐다보기도 하고 

이번엔 팔을 바꿔서 날으는 자세?




원래 뜯던 벽쪽에는 스크래쳐를 갖다놔서 그곳을 뜯지는 않는다.

하지만 어디 벽이 거기 뿐이랴.

주로 스크래쳐를 긁지만 짬짬이 이 곳도 이렇게까지 망쳐놨다.

그래-서

이렇게 해놨다.

 


벽을 책으로 가려놨다.

그랬더-니

 

 


을 뜯고 있다. (결정적 순간에 후레쉬가 안터지다니!)

그래-서

 

혼내줬다.^^

 

--------------------------------------------------------------------------------

많은 책을 버리고 왔지만 이번에도 지는 버리질 못했다.

괜한 미련을 떤 것인지도 모르겠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지리산 올라가기

젠장 벌써 7시군. 6시에 일어나려고 했는데.

하긴 어제 너무 늦게 잠자리에 들었지.

텐트치고 라면 끓여 먹고 나니 11시가 다 되어 가는데도

그 시간에 술을 먹기 시작했으니.

반딧불도 보고 밤하늘의 별도 보고

계곡 물소리도 들으며 술한잔 하다보면

친구와 뭔가 그럴 듯한 대화를 나눌 것도 같지만

우리의 일상이 누추하듯 우리의 대화 내용도 그냥 그렇고 그런 것들뿐이다.

늦게 일어났다고 또 라면을 먹을 수는 없으니 밥해 먹어야지.

어제밤에 귀찮아도 쌀을 담가두길 잘했군.

내가 한 밥이지만 정말 예술이야.

 

 

나이를 확인하다 ?

 

한신계곡-> 세석산장-> 장터목 산장-> 천왕봉-> 하동바위

코스를 정했으니 열심히 올라가야지.

난 그렇게 힘든 것까지는 모르겠는데, 이 녀석은 자꾸 나이 탓을 하네.

지가 맨날 대충 라면으로 때우고 운동도 안하니까 그렇지

어디 꼭 나이 때문이겠나.

하긴 맨날 술에 쩔어 살던 나도 별로 나을 건 없다.

 

내 눈치를 보며

"좀 쉬었다 갈까? 그리고 앞으로도 자주 쉴 것 같은데..."

어쩌겠는가. 쉬어야지.

"천왕봉까지 가려면 시간 안모자라냐?"

"걱정마. 충분해"

 

"야 여기 기억나냐? 10년전에 우리가 수영했던 곳인데"

나같은 길눈에겐 다 거기가 거기 같은데 기억날 리가 있나.

"수영했던 기억은 난다."

한여름은 지났다지만 그래도 8월이고, 날도 이렇게 더운데 수영이나 하고 갈까?

어제밤 계곡물에 씻을 때도 별로 차갑지 않았잖아.

 

 

어라? 물이 왜 이리 차가운 거야.

기껏 옷도 벗었는데 수영은커녕 발도 못담그겠네.

5초정도만 발 담그고 있어도 발이 시려서 도저히 견딜 수가 없군.

분하다. 10년만에 수영 한 번 해보려고 했는데.

"야, 예전엔 이렇게 차가운 물에서 어떻게 수영을 했지?"

친구 왈 "그땐 한여름이었고 제일 팔팔할 때였잖아"

그래도 좋다. 수영은 못즐겼지만 눈과 몸은 이렇게 즐거우니.

계곡물은 그냥 마셔도 찜찜하지 않고.

그런데 이렇게 좋은 한신계곡 쪽에는 사람들이 왜 없지?

이쪽 코스가 좀 험해서 그러나?

 

 

길을 잃다.

 

올라갈수록 점점 험해지는군.

친구놈은 원래 그랬다치고,

난 왜 갑자기 힘이 쫙 빠지고 다리가 후들 거리지?

배고픈 건가?

친구가 건네준 쵸코바, 이거 완전히 마약이군.

먹자마자 힘이 확 솟네.

이런 효과를 전문용어로 '직빵'이라고 하나?

 

 

바위와 나무들이 온통 이끼로 덮인 모습이

플래툰 같은 베트남전 영화에서 본 정글 느낌이다.

이끼낀 바위는 정말 미끄럽다.

난 이렇게 계속해서 미끄러지며 헤메고 있는데

이녀석은 잘도 올라가네.

 

 

"범수야, 길 잃어 버린 것 같다."

엥? 이녀석 여기 출신 맞아?

지리산을 마치 제 앞마당처럼 얘기하더니.

반달곰이 좋아한다는 연죽만 지천으로 널려있군.

풀에 쓸리고, 나뭇가지에 긁히고,

에고 에고 길을 찾아랏!

 

 

막판에 많이 힘들었지만 어쨌든 1차 목표지점인 세석산장에 도착.

이제부터는 능선을 타고 가기 때문에

좀 전처럼 그렇게 가파른 곳은 없다고 하니 다행이군.

근데 날씨가 왜케 좋다냐?

 

내 눈엔 별 것도 안보이는데 이 녀석은 뭘 그리 감탄을 하지?

"야~ 구상나무가 살아남았구나!"

 

귀신같이 나타났다 사라지는 빨지산들을 도저히 잡을 수가 없어

토벌군이 산에 불을 질렀다고 한다.

아직도 흙을 파보면 검은 재가 나온다나.

모든 나무가 불타 버린 그 곳에

구상나무 군락을 만들겠다고 묘목을 심었는데

자생할 수 있을지 회의적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놈들이 이렇게 멋지게 살아남았으니 친구녀석이 감탄할밖에.

 

저기 보이는 곳이 천왕봉이라고? 저길 언제가냐?

시간도 꽤 된 것 같은데.

사진이고 뭐고 빨리 빨리 가야겠다.

 

그래도 촛대봉 꼭대기에는 올라가서 내려다 봐야지.

 

이 녀석은 이제야 마약을 복용하는군.

하긴 마약 대신 어제 절에서 얻어온 오이와 과일을 잔뜩 먹기는 했지.

 

"저~기 보이는게 바다야, 구름이야?

여기 올라오면 맑은 날에 바다가 보인다고 하던데."

 

 

어찌하오리까?

 

장터목 산장 가는 길.

핸드폰이 안터지니까 시간도 안나오네.

시계는 핸드폰에 내장된 건 줄 알았는데 시간도 전파를 통해서 받나 보다.

시계를 찬 사람에게 시간을 물어봤는데.

 

아이고 큰 일 났다. 벌써 3시가 다 돼 간다고?

우린 1시반이나 2시쯤 됐는 줄 알았는데.

아직 장터목도 제법 가야 하는데, 그리고 점심도 아직 안먹었는데.

천왕봉은 포기해야 하나?

 

시간이 넉넉하다고 자신있게 떠든게 미안했는지,

길을 잃어 시간을 허비한 것이 미안했는지

친구녀석은 자꾸 엄한 소리를 한다.

"산이란게 꼭 정상에 올라야 맛이냐?"

"천왕봉이 지리산에서 최고봉이라니까

사람들이 꾸역꾸역 올라가는 것뿐이지 사실 별 의미는 없다."

 

맞는 말이긴 한데 거의 다 와서 못올라가는 것도 좀 그렇잖아.

장터목에 도착하긴 했는데 시간 여유가 너무 없다.

해떨어지면 랜턴도 없는데 말이다.

이 녀석은 죽어도 못가겠다고 하니

이 참에 짐을 다 내려놓고 혼자 올라갔다 와야겠다,.

생라면 반개를 후다닥 깨먹고 출발하려는데

친구녀석은 아무래도 걱정스러운가 보다.

올라가는데만도 1시간은 족히 걸릴텐데 1시간안에 올라갔다 내려올 수 있을까?

그나마 한시간도 거의 맥시멈으로 잡은건데.

에라 중간에 돌아오더라도 일단 가보자.

 

 

급한 마음에 너무 오버를 했나보다. 아주 죽겠구만.

이 상태로는 시간안에 도저히 못갔다 오겠다.

10년 전쯤에 천왕봉을 못올라 갔다면 굉장히 짜증났을 것 같은데

이젠 그런 일쯤은 그냥 넘길 만한 여유는 생긴 것 같다.

아님 스스로에게 세련된 변명을 할만큼 교활해진 건가?

뭐 아무려면 어때.

가을에 다시 오지 뭐. 내년에 오던가.

1808M 제석봉, 그래 오늘은 여기까지다.

 

사진이나 몇장 찍고 가야겠다.

안내판을 보니

예전에 도벌꾼들이 극성을 부렸는데

그들이 증거를 없애려고 불을 질렀다고 써있다.

친구 말에 의하면 도벌꾼들이 많았던 것은 사실이라는데

증거를 없애려고 불을 질렀다는 것은 좀 이상하다.

아무래도 우리 국군이 빨치산 잡으려고 불질렀다고 쓸 수는 없어서 이렇게 쓴거 아닐까.

'도벌꾼'을 '토벌군'으로 바꾸면 딱 맞는데.

그러고 보니 어제 문수사 가는 길목에 세워져 있던

'지리산 공비' 어쩌구 저쩌구 하는게 생각나는군.

 

이번 산행 때 쓸려고 미니 삼각대를 샀는데 한 번은 써먹어야 할 것 아냐?

셀프샷 한 장.

자, 이제 열심히 내려가야 겠다.

 

 

2003년 여름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낯선 곳으로 여행/추억 속으로 여행

10년만에 친구와 지리산에 갔다. 10년 전에도 이 친구와 갔다.

친구의 고향이 바로 지리산 밑자락인 경남 함양이다.

나는 시간이 널널한데 반해 이녀석은 무지하게 바쁘기에 일정을 짧게 잡았다.

 

 

문닫은 학교

 

우리가 택한 등산로인 백무동 계곡에 가려면 친구가 태어난 곳을 지나치게 된다.

친구가 다니던 초등학교에 들렀는데 이미 폐교된 상태였다.

초등학교를 두 군데 다녔는데 두 곳 모두 문을 닫았다.

아무도 찾지 않는 학교 운동장은 잡초만 우거져 있었고,

새끼를 낳은 개가 사납게 짖어댔다.

하지만 내가 누군가?

곧 이녀석은 경계를 풀었다.

옛날 학교가 의례 그렇듯 이순신 동상이 근엄하게 서있다.

이승복 동상이 없는 게 오히려 좀 이상했다.

 

 

처음 가본 문수사 / 10년만에 찾은 문수사

 

어릴 적 형편이 아주 어려웠던 내 친구는 5년동안 절에 맡겨졌었다.

10여년만에 찾아가는 그 절로 가는 길 내내

친구는 감회에 젖어 계속 주절주절댔다.

지금은 도로가 뚫려 차로 금방 올라갔지만,

어린 초등학생이 산길을 따라 그 먼 학교를

5년동안이나 다니기엔 무척이나 힘들었을 게다.

친구의 옛날 사진 속의 절은

불전이 달랑 하나 있는 아주 작은 절이었는데,

지금은 완전히 달라진 모습이다.

난 이런 사진 별로 안좋아 하는데, 친구녀석이 자꾸 찍으라고 해서 찍었다.

이 녀석이 하고 싶은 것 중의 하나가 '식물도감'을 만드는 것이다.

전공이 뭐냐고? "화학공학" ^^ 박사과정까지 마쳤다.

두 꽃 중의 하나가 다알리아라고 한 것 같은데...

이게 더덕 꽃이라고 한다. 다른 화려한 꽃보다 더 정감이 간다.

절은 변했지만 친구를 돌봐준 스님은 그대로 계셨다.

지리산 자락에 있는 절답게 뱀도 돌아다녔다.

내려 오는 길에 호두를 땄다.

난 호두가 그렇게 생겼는지 몰랐다.

쌀밥 먹어보는 것이 소원이었던 어린 시절의 친구에게는

이 호두가 천하진미의 간식이었다고 한다.

밤늦게 백무동 계곡 야영장에 도착해서 텐트를 치기 시작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통곡의 벽

빈 박스 하나 갖다 놓으면 그게 나비의 보금자리이자 스크래쳐 역할을 했다.

그러다 박스가 너무 헐어서 바꿔주려고 일단 치웠는데

새로운 박스를 갖다 놓는다는 것이 그냥 며칠이 흘렀다.

그러자

 


 

벽을 긁기 시작했다.

시작은 미약했다. 하지만...

 


 

벽 긁는 것에 재미들인 나비는 계속해서 벽을 엉망으로 만들어놨다.

이젠 박스를 갖다놔도 소용이 없었다.

그냥 기념으로 놔두기에는 점점 흉물스럽게 변해가고

 

할 수 없이 돈을 들여서 스크래쳐를 구입했다.

 

 

그런데 스크래쳐에는 관심도 없다.

내가 억지로 올려놓은 다음 발을 붙잡고 긁는 시범을 보여줘도 나비는 도망 가버린다.

 

 

스크래쳐를 산지 3일쯤 지나서 드디어 나비가 스크래쳐에 관심을 보인다.

 

제발로 스크래쳐에 올라갔다.

과연 긁을 것인가?

 

 

엥? 딴 짓만 하고 있다.


 

그러다 돌아섰다. 그리고

드--디---어-----

긁기 시작했다.






스크래쳐를 밟고 벽을 긁기 시작했다는 말이다..

내가 미~~~쳐!

과연 나비의 통곡의벽은 끝이 났을까?

 

-To be continued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기부문화 시비걸기

꼬리에 꼬리물기? 아님 횡설수설?

 

아름다운 재단이 떴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떴다"라는 표현만큼 적적한 걸 못 찾겠다. 참여연대 대표였던 박원순씨의 개인기에 전적으로 의지해 탄생한 듯한 아름다운 재단은 이제 방송은 물론 신문까지 밀어주고 있다. 아니 '기업'까지도 밀어주고 있다.현대증권인가에서는 TV광고를 통해서 실질적으로 아름다운 재단을 광고해주고 있다. 자신들의 이미지와 접목시키려는 속셈이 너무 뻔해 보이지만 시청자들에게는 아름다운 광고로 보이겠지.

뭔 문제가 있어서 난 이렇게 시비조일까? (불우이웃돕기 성금이라곤 10원도 안내는 내가 이따위 소리를 해도 되는 걸까? 그렇다고 무슨 빈민운동을 하는 것도 아니면서 말이다. 너무 뻔뻔한 거 아냐?)

 



자선문화가 자리잡히면 빈곤문제가 해결될까? 아니 해결까지는 아니더라도 완화는 될까?

 TV에서도 사랑의 리퀘스트 같은 프로그램을 통해서 성금을 받는다. 눈물나게 어려운 사람들을, 감정을 자극하는 멘트와 함께 보여줘서 사람들로 하여금 수화기를 들게 만든다. 공영방송이라는 취지에도 그럴 듯하게 맞는 것 같고, 전화로 돈을 낸 사람도 뿌듯함을 누리게 하는 누이좋고 매부좋은 프로그램이다. 그런데 그 프로그램에서 근본적인 문제제기를 한 걸 본 적이 있는가? 왜 가난이 대물림 되는지, 그렇게 아프고 아무런 능력이 없는데 국가는 대체 뭘하고 있는지 따지는 걸 본 적이 있나 말이다. 할머니와 동생들을 부양하는 소녀가장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성인이 되었다고 해서 나아지는 것도 없는데 정부보조금이 끊기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만 얘기할 뿐 무엇이 문제인지는 말하지 않는다. 그 프로그램 만드는 사람들이 능력이 없어서?

TV 구석에 보면 성금액수가 올라가는 게 보인다. 억대의 제법 많은 돈이 걷힌다. 시청 앞에도 사랑의 온도계를 만들었다고 한다. 기부금 액수가 100억이 되면 온도계도 100도를 가리키게 된다나 모라나. (요즘은 정치던, 운동이던 간에 이벤트가 빠지면 안된다. 뭐 그게 나쁜 것도 아니고) 100억, 꽤 큰 돈이다. 숫자로 따지면 꽤 여러 명에게 혜택이 돌아갈 것이다. 하지만 퍼센트로 따진다면 얼마나 될까? 그리고 100억이 매달 모이는 걸까? 아마도 올해 목표액일 것이다. 그래 까짓거 매달 100억 정도는 기부금이 모인다고 치자. 그 돈으로 얼마나 빈곤을 해결 할 수 있을까?

간단한 산수 한 번 해보자. 독거노인이 60만명이라고 한다. 이들에게 한달에 10만원씩만 주려고 해도 600억이 필요하다.(매달 말이다. 그리고 10만원 갖고 인간다운 삶은 고사하고 그냥 생존이나마 가능한가?) 게다가 어려운 사람이 독거노인뿐인가? 경제능력이 없는 장애인은 몇 명일 것이며, 소년소녀가장은 또 한둘인가? 노숙자는 어떻게 할 거고, 고아수출은 대체 언제까지 할건데? 이걸 기부문화를 확산해서 해결하자고? 장난하나?

 

어쨌든 기부하는 것은 좋은 일 아닌가? 맞다. 좋은 일이다. 내가 아는 사람은 장애인 센터를 운영하다가 자금 사정 때문에 문닫을 뻔 했다가 개인 독지가의 도움을 받아 새로운 건물을 지어 이사를 했다. 이건 의심할 여지없이 훌륭한 일이다. 그리고 기부를 하거나 봉사하는 분들의 대부분이 훌륭하다는 것에 딴지 걸 생각도 없다.

하지만 때에 따라서는 아닐 수도 있다.

 

횡설수설, 노조 이야기

내가 좋아하는 하종강이란 분이 있다. 한울노동문제연구소장이고 노조에 강연도 많이 다닌다. 노조원들 중에는 맑스니 계급이니를 체계적으로 말할 수 있는 먹물들도 있겠지만 그런 의식없이 그저 "노조에 가입해서 단결하여 싸우면 월급 많이 받을 수 있다"는 정도의 의식만으로 노조원이 되는 경우도 많다고 한다.이런 아저씨, 아주머니들이 하종강의 강연을 듣고 나면 감동을 한단다. 그의 강연내용을 무리하게 축약하자면 이런거다. "사회적 약자인 노동자들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싸우는 것이 궁극적으로는 사회의 발전에도 기여한다." 임금인상을 위해 파업 같은 것에 동참했던 분들이 언론에서 게거품 물며 '이기주의'니 '기업과 나라를 망하게 한다'느니 하는 말에 마땅한 논리도 없이 속으로 죄책감 같은 것에 시달려왔는데 하종강의 그런 말을 들으니 얼마나 당당해 지겠는가. 하지만 하종강의 나머지 말에도 귀를 귀울여야 한다. "노조 지도부까지 그 수준에 머물러서는 안된다."

내가 지금 상관도 없는 것을 어거지로 갖다 부치는 건지도 모르겠다. 우쨌든

일반 소시민들이 자신의 수입의 일부를 떼어내서 남을 돕고, 소중한 시간을 내서 어려운 사람을 위해 봉사하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다. 그런 분들에겐 오히려 존경을 표한다. 내가 지금 시비 걸고 있는 것은 그것을 자신의 '업'으로 여기는 사람들을 말하는 것이다. 오해하지 말기 바란다. 여기서 '업'이란 자신의 삶을 모두 바쳐서 어려운 사람을 돕고 있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문제 삼는 사람은 빈곤의 문제를 '자선과 기부문화의 확대'로 해결 하자고 '운동'하는 사람들인 것이다. 즉 그것을 운동차원에서 하는 사람, 또는 단체, 언론기관 등등을 말하는 것이다.

 

또 횡설수설? 이주노동자 이야기

참세넷에서 같이 활동하던(하는?)사람 중에 이주 노동자를 위해 일하는 인권운동가가 있다. 그분이 일하는 센터는 기부금으로 운영된다. 이런점에서 기부금은 매우 중요하다. (노파심에서 다시 말하지만 난 지금 기부금 자체를 문제삼는 게 아니다. 어쨌든 다시 돌아가서) 그곳에서 일하는 분들 사이에 이견이 있는데 이런거다. 아니 사실 이견은 없다. 그들은 이주 노동자도 우리와 똑같은 인권을 가지고 있는 노동자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문제는 기부하는 사람들에게 이주노동자들을 어떻게 소개하느냐이다. 원래 생각 그대로를 말했다가는 많은 기부자들이 떨어져 나갈 것이라고 한다. 왜? 상당수의 기부자들에게 이주노동자란 "너무 불쌍해서 도와줘야하는 존재"일뿐 자신들과 동급이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센타의 문을 닫는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기부자들에게 솔직히 말해야할까? 아니면 무슨 악마의 돈을 받는 것도 아닌데 그런 문제일랑 덮어두고 그 돈을 좋은데 쓰기만 하면 되는 걸까?

기부를 많이 하는 사람들조차-아니 어떤 때는 그들이 더- 빈곤에 대한 근원적인 문제제기를 하면 거부반응을 일으킨다.

 

이번엔 신문 얘기?

중앙일보에서는 몇 달전부터 WE START라는 운동을 벌이고 있다. 어려운 사람을 돕자는 뭐 그런 운동이다. 오늘은 신문 1면에서부터 <달라진 기부 문화 치솟는 '사랑 온도'>라고 요란을 떨어놨다.운동의 부제도 멋지다. "가난의 대물림을 끊자"  그런데 그들이 제시하는 방법이 가난의 대물림을 끊는 것과 얼마나 관련이 되는지 다소 황당하다. 그걸 보니 마치 이러는 것 같더군. "우리가 가난한 니들을 위해서 이렇게까지 노력하잖아. 그러니 제발 분배니, 평등이니, 생존권이니 하면서 지랄들 좀 하지마." (물론 성격도 않좋고 중앙일보도 싫어하는 내가 오버한 게 분명하다)

 내가 못마땅한 것은 한겨레마저 그러고 있다는 것이다. 한겨레신문은 꽤 한참 전부터 아름다운 재단과 함께 기부문화 확산을 위한 캠페인 같은 것을 장기적으로 해오고 있다. (물론 대기업의 협찬을 받는다.) 한겨레에 대해 이미 포기한 사람도 많다. 나도 한겨레가 대단한 신문이라서 지지하는 것은 아니다. 어떤 면에서는 말도 안되는 '진보적 대중지'라는 모토로 밀고 나가는 신문의 한계이기도 할게다 (대중의 평균수준보다 앞서 나가는 게 진보인데 진보적 대중지라니!)  그나마 한겨레에는 이런 훌륭한 칼럼도 실렸다. (이 사람은 이렇게 짧은 글로 핵심을 파고드는데 난 왜 이렇게 길게 주절거릴까? 사실 이 글에 모든 내용이 다 들어 있다.)

 --- 중략---  시장에서의 무한 경쟁이 자연스럽거나 불가피한 것으로 받아들여지면, 복지가 경쟁력을 저해하는 비용처럼 보이는 것은 당연하다. 복지 담당자들은 재정경제부 눈치를 보고, 시민단체들은 예산을 따내기 위한 로비와 기부금 모집에 매달릴 수밖에 없다.

하지만 예산을 위한 로비와 기부금 모집은 빈곤을 끝내는 게 아니라 연장하는 것이다. 구걸하다시피 해서 따낸 예산이나 기부금이 축소된 복지를 만회해 줄 수도 없지만, 빈곤에 대한 그런 접근이야말로 빈곤층을 사회적 부를 축내는 문제 집단으로 만드는 것이며, 빈곤층을 양산한 자본과 국가에 면죄부를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많은 빈민들에도 불구하고 미국에는 왜 빈민운동이 없는가. 디파치오는 이렇게 답했다. 빈민을 돕고 대변한다는 자들이 무엇보다도 빈민을 양산하는 원리에 눈감으며, 빈민을 대신해 자본과 국가에 구걸해주는 선행으로 빈민들의 직접적인 정치세력화를 막았다는 것.

결국 빈곤을 둘러싼 투쟁에서 나오는 새로운 비전이 없다면 우리의 패배주의적 시각과 고갯짓은 멈추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1% 나눔운동’ 등을 전개하고 있는 시민단체가 진정 빈곤을 없애고자 한다면, 그 수익을 빈민들의 생계지원이 아니라, 그 책임을 방기하고 있는 국가와 자본을 향한 빈민들의 투쟁 자금으로 지원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빈곤의 투쟁, 투쟁의 빈곤> 전문 보러 가기

 

자선과 빈민운동은 상호 모순관계인가?

 위에서 보았듯이 절대적인 모순관계는 아니지만 모순일 수가 있다. 그 것도 심각하게 말이다. 물론 빈민운동하는 사람이 이웃의 굶는 아이를 외면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이런 경우 아무런 모순은 없다. 황당한 비유로 들리겠지만 위기에 처한 동물을 돕는 사람들에게 "사람 먹고 살기도 힘든데 왜 동물 갖고 난리냐?"라며 시비 거는 사람들이 꽤 있다. 꽤 설득력 있는 것처럼 사람들이 동조하기도 한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나중에 또 주절거리겠지만 일단 변명?을 해보자면 이런거다. 동물 위할 줄 아는 사람이 사람도 위하고 다른 생명도 위하는 경우가 많다. 생명의 소중함을 아는 사람이 강아지의 목숨도 중하게 여기고 함부로 꽃을 꺽지 않는다면 이상한 건가?이처럼 상호 모순관계가 아니라 서로 상승작용을 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빈곤의 문제는 이렇게만 볼 수는 없는 것이다.

 

더하면 한 얘기 또하는 꼴이 될 것 같으니 일단 그만둘란다. 졸리기도 하고 말이다. 전혀 정리가 안됐지만 나중에 다시 정리할 것 같지는 않다. 할 수도 있고. 어차피 횡설수설이니까.

 

잔향-노을

* ps 오늘 신문을보니 사회복지공동모금회에서 밝힌 것에 따르면 올해 801억의 성금을 모았다고 한다. 위에서 내가 말한 100억이 아니라 1000억이 목표였나보다. 그렇다고 크게 달라지는 것은 없지만 말이다. 그런데 801억의 내용을 보면 무지 우울하다. 삼성 200억, 현대기아차 70억,엘지70억, SK70억, 포스코 70억 이런 식이다. 이렇게 기업체가 낸 성금비율이 87%이다.사회복지공동모금회는 기업에게 구걸하는 단체인가? 게다가 기업들은 기부금을 내면 파격적인 세금혜택을 받기 때문에 금전적으로 손해볼 것도 별로 없다. 기업 이미지 관리까지 생각하면 아주 남는 장사다 2004. 12. 29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운동권 밴드? - 천지인

내자신이 운동권도 아니었고, 천지인이란 밴드가 있는지도 몰랐다.

마르크스를 좋아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무슨 좌파라고 할 수는 없다.

(이 사회에서 자칭 혹은 타칭 좌파라고 하는 이들 중에 진짜 좌파가 몇%나 되는지 의심스럽긴 하지!)

유물론자?

그래 거기엔 좀 해당된다.

 

아, 음악 소개하려다가 얘기가 딴길로 새는 것 같군.

어쨌든 천지인은 내가 10여년째 보고 있는 월간지 <말>에 실린 기사를 보고야 알았다.

아래에 있는 말지 기사만으로도 글이 굉장히 기니까 오늘은 노래 가사나 올리고 그만둬야겠다.

 

청계천8가 version2 _ 김성민 작사 작곡_

파란불도 없는 횡단보도를 건너가는 사람들 물샐틈없는 인파로 가득찬 땀냄새 가득한 거리여 어느새 정든 추억의 거리여 어느 핏발 서린 리어카꾼의 험상궂은 욕설도 어느 맹인부부 가수의 노래도 희미한 백열등 밑으로 어느새 물든 노을의 거리여 뿌연 헤드라이트 불빛에 덮쳐오는 가난의 풍경 술렁이던 한낯의 뜨겁던 흔적도 어느새 텅빈 거리여 칠흑 같은 밤 쓸쓸한 청계천 8가 산다는 것이 얼마나 위대한 가를 비참한 우리 가난한 사랑을 위하여 끈질긴 우리의 삶을 위하여 rap/ 화려한 불빛도 없이 그저 각자의 삶의 길로 수없이 지나치는 사람들 그 사이로 내 의지보다는 타의로 생겨나고 사라지고 현실의 벽 앞에 난 눈물을 떨구고 가난이라는 글자에 포기라는 단어로 끼워맞춰 보기도 했지만, 쓴 가래 뱉어 버리고 도 자식들의 꿈 있는 미래를 위해 내 한 몸이 이 거리 속에 묻혀 이 두 다리로 버텨

 


 

“팔리지 않는 시대정신은 가라.

       이게 우리들의 음악이다.”

 

 

글 이오성 레이버투데이 기자 dodash@labornews.co.kr

사진 허태주 기자 tjheo@digitalmal.com

'"우리 앨범을 두고 이번에 메이저 앨범이라고들 이야길 하는데요, 메이저가 뭔지 알려면 먼저 마이너가 뭔지 알아야 해요. 그럼 마이너란 뭐냐. 내 음악으로 내가 밥 벌어먹고 살지 못하면 그게 마이너예요. 메이저라는 게 방송에 나오고, 기획사에 소속되어야 되는 게 아니라, 우리 스스로 메이저의 지위를 만들어야 되는 거죠. 전문연구직 직장인으로서 우리들의 생계와 미래를 스스로 책임져야 하는 것 아닙니까.“

천지인은 잔뜩 화가 나 있었다. 어느덧 데뷔 10년을 넘겨 진보진영 '최장수 밴드'의 반열에 오른 '2004년의 천지인'은 최근 그들을 둘러싼 호사가들의 ?리뷰와 코멘트?에 벌써 마음이 상할 대로 상해 있었다. 그 중에서도 ‘진보진영 관계자들’ 특유의 ‘단정과 재단’이 그들을 지치게 한 했다.

"한때 ‘팔뚝질’ 좀 했다던 어느 진보적 인터넷매체 기자는 ‘아직도 천지인이 활동하고 있느냐’고 사람들이 묻는다고 하대요. 그래서 5년 전부터 그런 이야길 쭉 들어왔다고 그랬죠. 그리고 이야기했어요. 비정규직과 이주노동자 집회에 쉬지 않고 나갔었다고. 어느 일간지 기사제목은 ‘운동권 밴드 천지인 세상 속으로’ 였어요. 세상 속으로라니, 우리가 세상 밖에 있었나요? 그 세상과 이 세상이 다른 세상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죠?"

 그랬다. ‘불행히도’ 천지인은 신화적인 밴드였다. 베이시스트 허훈씨의 표현대로 그들은 ‘공동체의 별’이었고, ‘노래하는 거리의 투사’였다. 그리고 그 신화는 꼭 그만큼의 무게로 그들의 발목을 잡는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어떤 뮤지션보다도 더 현실에 발 딛고 노래하며 싸웠던 그들이 정작 그 현실 밖에 비켜서 있던 이들의 눈에는 ‘신화’처럼 보이고 있었다. 그 ‘신화와의 전쟁’을 선포하고 그들이 다시 돌아왔다.



우리는 신화가 아니다

천지인(天地人). 문민정부가 출범하고, “신세대, 네 멋대로 해라”고 명명된 ‘신세대 담론’이 열병처럼 세상을 휩쓴 1993년, 일렉트릭 기타와 드럼을 들고 민중운동판에 벼락처럼 나타난 록밴드. 그들은 록이 어떻게 ‘한국’의 민중운동과 결합할 수 있는지 보여준 최초의 전형이었다. 「청계천 8갯 「열사가 전사에게」 「청소부 김씨 그를 만날 때」 「밤바다」 「어쨌든 우리는 살아가니까」··· 등 한 번에 열거하기도 힘든 숱한 히트곡들이 말해 주듯 그들은 ‘당대 최고의’ 뮤지션이었다.

천지인의 록이 ‘어필’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철저하게 이 ‘나라의 현실’에 발딛고 있다는 점이었다. 가령 ‘네가 커서 어른 되면 남 다스리는 판사나 정치인이 되어’로 시작하는 「네가 커서 어른 되면」은 1990년대 운동권의 혼란한 정서를 역설적으로 대변했다.

노래패들은 앞다투어 그들의 노래를 따라불렀고, 노래 부를 수 있는 술집이 완전히 사라진 뒤에도 그들의 노래만은 술집의 낮은 창 너머로 이따금씩 흘러나오곤 했다. 그해 출시된 그들의 ‘비합법 음반’은 사회과학 서점에서밖에 구입할 수 없던, 그 ‘열악한 유통구조’에도 불구하고 무려 8만여 장이나 팔려나갔다.

어떤 이는 “서태지류에 잠식당하기 시작했던 민중가요판에서 음악의 질로 맞장 뜰 수 있었던 유일한 밴드”라고 그들을 평가한다. 당대를 풍미했던 꽃다지, 혹은 희망새의 인기가 서서히 하향세를 그려가는 과정에서도 록밴드의 정체성을 지닌 천지인의 생명력은 남달랐다. 한때 융성했던 ‘록 담론’-록 음악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던-이 자취만 남기고 사라져갔음에도 그들은 1997년 2집 음반, 2001년 3집 음반을 발표하며 자신들의 이름을 꿋꿋이 지켜왔다. 이제 천지인은 데뷔 이래 10년을 넘긴 몇 안 되는 ‘노래집단’이 되었다.

그런 그들이 지난 7월 ‘새음반’을 발표했다. 2년의 준비 과정 끝에 천지인의 지난 히트곡들을 베스트앨범 형식으로 다시 묶었다. 비록 ‘베스트’라곤 하지만, 이번 음반은 과거의 천지인과 확연히 달라졌다. 리듬앤블루스 풍의 랩이 가미된 「청계천 8갯와 세련된 전자음으로 업그레이드된, 그러나 그 ‘슬픔의 정서’는 한층 깊어진 「열사가 전사에게」등 모든 곡들이 좀더 깊어지고 세련돼졌다.



3.5집은 어떤 결별이자 시작

천지인은 “할 수 있는 모든 표현을 다 해봤다”고 자부했다. 그래서 그들은 이번 앨범을 ‘3.5집’이라고 부른다. 4집으로 가는 길목에서 낸 ‘베스트’이자, 3집 이전의 천지인과 ‘일정한 결별’을 했음을 의미한다. 그 ‘결별’의 단초는 무엇보다 이번 음반이 메이저 음반사인 신나라뮤직을 통해 유통된다는 점이다. 더욱이 천지인은 이번 앨범을 내며 ‘공격적인 방송활동’을 펼치겠다고도 선언했다. ‘복수의 빛나는 총탄으로 이제 고인 눈물을 닦아다오’라던 그 노래, 「열사가 전사에게」가 방송사의 심의를 통과한 ‘사건’도 기폭제가 됐다.

그래서일까. 천지인의 이번 앨범은 ‘기성언론’으로부터 유례없는 조명을 받았다. 거의 대부분의 일간지에 그들의 음반소개와 함께, 인터뷰가 비중 있게 실렸다. 10년을 언더그라운드로만 ‘암약’해 온 록밴드에 대한 기성언론의 관심이야말로 천지인의 생명력과 가치를 웅변하는 것이었다.

그런 천지인도 한때 민중운동진영에서 ‘이단아’ 취급을 받기도 했다. 그들의 음악을 듣던 근엄한 ‘선배’들이 “양키의 음악이 민중가요의 순결을 유린한다”며 술상을 뒤엎었던 것이다. 불과 10년 전의 이야기다. ‘원년 멤버’로 아직까지 활동하고 있는 김정은씨(34 · 키보드)는 지금도 믿을 수 없다는 듯 ‘옛날 이야기’를 꺼낸다.

“정말로 공연하다가 돌을 맞은 적도 있어요. 1994년에 광주 조선대에서였는데, 아마 한총련 출범식이었을 거예요. 사상적으로 조금 다른 학생들이 모여서 함께 집회를 하고 있던 자리에 초대받아서 공연을 하게 됐는데, 우리 공연을 제지하기 위해서 주최측 학생들이 몰려왔었어요. 결국 사수대들의 보호까지 받으며 노래를 불러야 했죠. 하~ 참.”

 



 

우리는 너희들의 안줏거리 밴드가 아니다

그리고 강산이 변했다. 그런데 10년 전의 천지인을 알고 있는 사람들의 반응은 ‘또다른 낯섬’이거나 ‘과거에 대한 집착’이 주류다. 그들의 방송활동 선언이나, 메이저 음반유통사와의 계약에 대해 삐딱한 시선으로 흘겨보는 이들도 적지 않다. 어느 영화주간지에 실린 음반평은 ‘사운드와 편곡은 비할 바 없이 세련돼졌지만···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청계천 8가의 벼룩시장처럼 10년 전의 투박했던 감동도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김정은씨는 차라리 “옛날처럼 반발이라도 하면, 보다 건강한 논의를 할 수 있을 텐데 그렇지 못해 아쉽다”고 말한다. 록밴드 ‘메이데이’ 출신의 베이스 연주자 허훈씨(34)도 이렇게 항변한다.

"아니, 떡볶이도 맛있어야 팔리는 거 아닙니까. 떡볶이가 맛있으려면 떡도 좋아야 하지만, 양념도 좋아야 하고, 그릇도 맛있어 보이는 놈으로 갖춰야죠. 그런데 뭐라고요? 변했다니요? 맛도 보기 전에 함부로 이야기하고. 그런 사람이 평생 가봐야 떡볶이 맛을 알겠어요? 전노협 진군가를 밤에 홀로 들었던 사람은 거의 없겠죠? 그런데 저흰 천지인 노래를 잠자리에서도 듣고 싶은 ‘맛있는 노러로 만들고 싶어요."

이처럼 ‘좋았던 옛날’만 기억하려는 ‘무심한’ 진보진영의 팬들에게 천지인이 가진 서운함은 결국 지금 민중가요판의 현실과도 맞닿아 있다. 대중음악판이 휘청거리는 지금, 민중음악을 만들어 나가는 이들이 느끼는 위기감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그의 말이 이어진다.

“민중가요판은 이제 정말 삭막합니다. 후배들이 없어요. 문화공연의 경우에도, 보세요. 지금 ‘자 우리 손을 잡자’라든지, ‘자유’, 라든지 그래도 우리 민중음악판에 숨통을 틔워주던 공연들이 최근 5년 동안 완전히 사라져버렸어요. 이를테면 모두 열린음악회 같은 것들에 뺏긴 거지요. 그 많던 공연 기획자들, 음반 기획자들은 또 모두 다 어디로 갔습니까? 게다가 진보진영의 음악하는 단체들은 어떻습니까. 채 10개도 안 돼요. 한번 꼽아볼까요? 꽃다지, 희망새, 소리타래, 우리나라, 젠···”

결국 채 여섯 개도 꼽지 못한 채 말을 잇지 못하던 그가 한참 뜸을 들인 뒤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천지인이 살아남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런저런 욕을 먹더라도 악착같이, 아니 번듯하게 살아남아야 합니다. 그래야 나중에 후일담이라도 나올 것 아닙니까?”

그랬다. 어쩌면 천지인이 10년을 버틸 수 있었던 ‘힘’은 “우리마저 무너지면 안 된다”는 절박함과 자존심일지도 몰랐다. ‘자존을 건 생존’을 부르짖는 이들에게 그들을 알고 있다던 이들은 변절, 혹은 타협이란 단어를 들고 나와 싸움을 거는 셈이다. 김정은씨가 말을 잇는다.

“최근 천지인의 오버 진출에 대해서 자본주의화니 하는 소리들을 들으며 그런 생각까지 들더군요. 아니, 대체 유물론자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이 돈에 대해 초연하다는 게 말이 되는 것인가. 유물론자가 돈의 문제를 적극적으로 해결하려는 건 기본 중의 기본 아닌가 하는 생각 말이에요.”

그래서 기자가 다시 물었다.

- 이분법적으로 물어보죠. 그와 같은 이들의 반응에 대해 어떻게 대응할 건가요? 그런 게 아니라고, 맞서 싸울 겁니까? 아니면 초연해질 겁니까?.

“사실 내 개인적인 생각으론 그냥 ‘무시’하고 싶어요. 이 말은 초연하다는 것과는 좀 다른 건데요. 말하자면 우리는 술자리의 오징어 안주처럼 추억거리 밴드로 남고 싶지 않다는 강렬한 의지가 있어요. 아주 사적인 경험이지만, 옛날 선배들, 특히 일상적으론 진보진영이나 또는 음악과 아무 관계없이 살던 사람들이 어느 날 만나면, 니네 이래서 되겠냐, 아직도 이런 정도밖에 안 되냐며 냉소적으로 훈계를 하죠. 그래 놓곤, 돌아서면 또 아무런 관심이 없어요. 우리에 대한 생각은 전혀 없이 추억처럼 씹다가 마는 거예요. 정말이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그런 충고나 늘어놓는 그런 사람들은 무시해야 된다고 생각해요.”


“천지인은 왜 MR 테이프 안 풀어요?”

‘후일담이나 늘어놓는 선배’들 뿐만이 아니었다. 진보진영에 대해 가지는 천지인의 ‘문제의식’은 더욱 심각했다. 그리고 그것은 고스란히 10년의 깊이가 담긴 문제의식이었다. 보컬 엄광현씨(29)가 정색을 했다.

“노래운동 진영의 선배들, 혹은 공연 관계자들을 만나면 이런 소리를 들어요. 왜 천지인은 MR(반주테이프)을 풀지 않느냐는 거죠. 답답해요. 우리는 멤버가 모두 모여 장단을 맞춰야 음악이 나오는 밴드 아닙니까. 그런 사람들에게 반주테이프를 달라는 것처럼 치욕스러운 게 없어요. 물론 우리 문화판의 여러 조건들이 밴드가 공연할 수 있는 분위기가 안 되는 건 압니다. 그래도 하나씩 바꿔 나가야죠. 결국 이런 식으로 우리 같은 밴드들이 집회의 소모품으로 전락하는 겁니다. 정말 화가 나요.”

엄광현씨는 “그나마 밴드가 공연할 수 있는 조건이 되는 큰 집회에선 우리를 부르지도 않았다”고 말했다. 아닌 게 아니라 지난 3월 10만 명이 모인 탄핵반대 집회에 서문탁과 조PD의 모습은 보였어도 천지인은 보이지 않았다. 천지인이 걸어가야 할 ‘길’은 아직도 멀어 보인다.

“3.5집을 내고, 오버에서 활동하기로 하면서 꽃다지의 이은진 선배를 찾아가 물었더니 그러시더군요. 민중가요의 틀을 깰 수 있는 건 지금 너희밖에 없는데 왜 이제서야 내기로 했느냐고. 천지인은 이미 외연의 확장을 해낸 밴드고, 그래서 오버에서 승부할 수 있다는 말씀이었죠. 그리곤 그러시대요. ‘가라, 가서 열심히 싸우다 장렬히 전사하지만 말라’고.”

지난 8월 3일은 천지인에게 뜻 깊은 날이었다. 이날 처음으로 「열사가 전사에게」가 공중파를 타고 울려퍼졌다. 대구 MBC에서 방영하는 ‘텔레 콘서트’가 그 자리였다. 말하자면 제도권에서의 ‘첫 경험’에서 느낀 그들의 ‘감개무량의 소감’은 이런 것이었다.

“음··· 모두들 우리를 신인 록밴드 정도로 생각하더군요. 겉늙어 보이긴 하지만(웃음). 그런데 굉장히 특이했던 것은 ‘열전’(열사가 전사에게)을 부르고 났더니, 처음 들어본 이들이 이 노래를 아주 독특한 발라드쯤으로 받아들이더군요. 어떤 이들은 '열전'을 듣고 6·25 전쟁 때 사망하신 순국선열들을 떠올리며 가슴이 뭉클했다고도 하고, '청계천 8가'를 듣고 어머니 아버지의 삶을 떠올렸다는 사람들도 있어요. 그런 반응들이 우리를 설레게 합니다.”

이제 오버그라운드로 첫발을 ‘오래된 밴드’는 스스로 자신들의 장점을 무엇이라고 생각할까.

“데뷔 10년만에 가장 튼튼한 라인업이 구성된 거죠. 사실 1집 때만 해도 모두들 군대 문제조차 해결이 되지 않았습니다. 다들 군대 갔다 휴가 나와서 가발 쓰고 공연하기도 했거든요. 1999년에 이 멤버가 짜여졌으니 벌써 5년 동안 호흡을 맞춰 왔어요. 매니지먼트 역시 과거의 아마추어적 분위기에서 벗어났습니다. 말하자면 ‘자본주의적 이미지메이킹’이 필요하고, 거기에 충실해질 생각입니다. 3집 앨범 낸 뒤에 대중음악계의 한 홍보담당자를 만났어요. 그랬더니 혹시 니네 멤버 중에 의사나 변호사가 있냐고 묻더군요. 없다고 했더니 아니 그러면서 어떻게 ‘홍보’를 하느냐고 반문하대요. 음악하는 사람이 음반 낸 게 무슨 기삿거리냐는 거죠. 우리는 이런 현실에 맞설 겁니다.”

 

‘팔리지 않는 시대정신’은 가라

천지인은 단단히 ‘작심’한 듯 보였다. 그것은 냉혹한 자본주의의 ‘게임의 법칙’에 정면으로 맞서 싸우겠다는 각오였다.

“우리는 자부합니다. 지금 이 세상의 어떤 밴드가 자신들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고 전략과 전술을 고민하겠습니까. 우리가 아직 테크니션이라고 불릴 만큼의 실력은 아니지만, 더 이상 ‘팔리지 않는 시대정신’에 집착해 자멸하진 않을 겁니다. 지켜봐 주세요.”

9월 10일, 엄광현씨는 빈민대책 집회에 예의 ‘밴드도 없이’ 혼자 노래하고 돌아왔다. 그날 밤 늦은 시각, 그는 천지인 팬 카페(http://cafe.daum.net/bandchunjyin)에 이런 글을 올렸다. 취기 어린 그의 글엔 천지인의 진심어린 고민이 담겨 있었다. 그들의 음악이 더 많은 사람들의 가슴을 '후벼파는 날', 천지인은 비로소 ‘살아 있는 신화’로 거듭날 것이다.

‘내 노래의 파장이 좀더 컸으면 좋겠습니다..
내 노래가 내 가사가.. 좀더 많은 사람들 가슴을 후벼팠으면 좋겠습니다..
내 노랫말이 사람들 가슴을 후벼파는 대신..
머리랑.. 가슴만 아픈 하룹니다..
여기 들어오시는 모든 분들..
내게 힘을 좀 주세요..
무거운 납덩이 같은 힘을.’

 


기사를 링크시키려고 했는데 잘 안돼서 그냥 퍼왔다.

기사는 월간<말>의 인터넷판인 디지털말(http://www.digitalmal.com)에서 가져왔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나비 그 후

수술에 약간의 문제가 있었는지 중간에 우여곡절이 좀 있엇지만 어쨌든 현재는 아주 좋다.

너무 많이 먹어서 비만이 걱정이긴 하지만...

 

길에서 데려온 푸들 '로드'.

인터넷에 올려도 데려가겠다는 사람이 없어 걱정이다.

 


나비의 앞발 공격을 피하고 있는 로드

 

한동안은 나비가 겁을 먹고 경계를 많이 해서 힘들었다.

로드는 좋다고 자꾸 장난을 거는데 나비는 스트레스를 받고.

이젠 나비도 경계는 안한다. 다만 귀찮아할 뿐.


눈감고 있으니까 눈없는게 티가 안난다.

 


이젠 이렇게 평화로울 때도 많다.

 



 TV를 보면 나비는 쿠션에 올라온다.

가슴에 올라오기도 하고, 가끔 거대한 엉덩이로 내 목을 눌러 숨막히게도 한다.

 

가족사진? ^^

2004. 5. 19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채식유감

예전에 1년쯤 채식을 한 적이 있다. 그 때 써놓은 글이다. 채식을 해놓고 왠 '유감'?


난 채식을 한다. 사이비이긴 하지만 그래도 채식을 한다고 말할 정도는 된다.  엄밀히 말하면 눈달린 것은 먹지 않는다.

년초에 TV에서 채식을 알리는 프로그램 때문에 요즘 채식열풍이라고 한다. 그래서 좀 짜증난다. 내가 그들과 같이 취급당하는 것이 싫기 때문이다. 그래서 요즘은 채식한다는 말을 될 수 있으면 안 한다. 민망해서. 근본적으로 대부분은 건강을 위해서 채식을 한다. 나? 난 건강하고는 전혀 무관하다. 난 오히려 골고루 먹는 것이 건강에 좋다고 생각하는 편이고, 또한 건강에 좀 해로와도, 입에서 즐거운 것을 먹다가 좀 일찍 죽자는 생각이 크다.

또한 건강을 위해 채식을 하려면 부족한 영양분을 채우기 위해 식단에 무지하게 신경써야 하는데, 난 그럴 여력이 없거니와 별로 그럴 마음도 없다.

 

그럼 난 왜 채식을 하는가? 누가 물어보면 일단 내 대답은 이거다.

"유난떨려고."

그런데 이젠 너도 나도 채식을한다고 해서 유난떨지도 못하게 됐다.

 

내가 채식을 하는 이유는 인간들의 먹거리 양식이 도를 지나쳤다는 생각 때문이다. 옛날처럼 생존을 위해 고기를 먹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의 즐거움을 위해 고기를 먹는 경우가 많아지면서 동물들에게 몹쓸 짓들을 하고 있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난 보신탕을 먹지 않는다. 하지만 보신탕 먹는 것을 반대하지 않는다. 하나의 음식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바램이 한가지 있다. 고기맛을 좀 좋게 하려고 살아있는 개를 몽둥이로 패는 일은 없어졌으면 하는 것이다. 어차피 잡아먹을 건데 그게 뭐 어떠냐고 할지도 모르겠지만 그러지 않는게 '생명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한다. 고기를 먹으면서 동물들에게 미안해 할 것까지야 없더라도 고마워하는 마음은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가 채식을 하고 있는 주제에 채식하는 사람들을 뭐라고 하기는 좀 뭣하지만 어쨌든 한마디 하고픈 말이 있다. 건강을 위해서 채식한다는 것은 과학적으로 검증되지 않은 사안이다. 물론 채식만 하는 것이 건강에 해롭다는 증거도 없다. 실제 채식만 하고 건강한 사람들이 많으니까. 건강위해서 하겠다는데 말릴 생각도 전혀 없다.

얼마전 100분토론에서 채식에 관한 논쟁이 있었다. 채식을 옹호하려고 나온 사람중에 한명이 우리과 선배인데 정말 인상깊은 대목이 있었다. 고양이에게 채식을 시켰더니 건강해졌다는 엽기적인 내용이었다. 처음엔 안먹으려고 하더니 배가 고프니까 할 수 없이 먹더란다. 이건 정말 엽기적이고 또한 대단히 폭력적이다. 육식동물에게(개는 잡식이지만 고양이는 육식동물이다.) 채식을 강요하다니!!! 학교다닐 때도 좀 싸이코 기질이 있더니 그런 짓까지 하다니.

건강문제뿐만 아니라 '생명사상'같은 의미에서 채식을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것도 그리 설득력 있어 보이지 않는다. 식물은 생명아닌가?

영화 '개벽'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동학에서는 모든 것이 하눌님이라고 믿는다. 나도 하눌님이고 너도 하눌님이고 개도 하눌님이다. 최시영(맞나?)이 딸과 바닷가를 걷는 장면에서 나오는 대화인데 딸이 아빠에게 묻는다. "사람도 하눌님이고 조개도 하눌님이면 하눌님이 하눌님을 먹느냐"는 것이다. 이때 최시영의 대답이 걸작이다. "하눌님이 하눌님을 먹이는 것이지." 그렇다. 난 자연스러운 것이 좋다. 인간은 잡식하도록 진화했고 그것이 무슨 '악'이 아닌 한 억지로 바꾸지 않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하눌님이 하눌님을 먹여살리고, 그걸 먹는 이는 그걸 고마워하며 먹으면 되는 것이다. 내가 아까 개를 패는 이야기를 한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개를 먹는 것이야 무슨 죄이겠냐마는 좀더 맛있게 먹겠다고 팰 것까지야 있나? 그런 면에서 회를 먹는 것도 별로 마음에 안든다. 끓여먹든 날로 먹든 관여할 바는 아니지만 굳이 숨을 헐떡거리는 것을 보면서 먹어야 마음이 흐뭇한가? 중국요리에서는 아예 생선을 튀기는데 기술적으로 몸만 튀겨서 튀긴 생선이 식탁위에서 숨을 헐떡인다. 그런짓을 해서는  죽어도 안된다는 것은 아니지만 꼭 그렇게까지 해야겠는가?

모든 인간에게 인권이 보장되야 하듯이 모든 생명에게는 나름대로 존중을 해주어야 한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옛날처럼 소를 키우면서 일도 시키다가 나중에 잡아먹는 것은 자연스럽다고 생각한다. 개나 돼지도 마찬가지였고. 그래도 개는 사람하고 친하다고 차마 직접 잡아먹지는 못하고 이웃의 개와 바꿔서 잡아먹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 '고기'는 하나의 산업이 되었다. 어떻게든 생산량을 늘려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 동물들에게 몹쓸 짓을 해대고 있는 것이다. 움직임이 없어야 살이 찌니까 좁은 곳에 가둬서 움직이지 못하게 하고, 생산량을 늘리기 위해서 사료에 육류성분을 넣었다가 생산량은 늘어났는데 광우병이란 것이 생겨나지 않았는가. 몇백만 마리를 도축했다고 하는데, 게네들이 무슨 죄가 있는가.

난 이런 꼴같지 않은 인간들의 행위가 마음에 안드는 것이다. 그래서 그냥 나혼자 항의 표시로 채식을 하는 것이다. 그런다고 누가 알아주냐고? 아무도 안알아 주겠지. 인간들이 마음을 고쳐먹고 소나 돼지들에게 제대로된 대접을 해줄리도 없고 말이다. 그래도 내가 그러고 싶으면 그럴수도 있는 것 아닌가? 강타나 문희준이 나오면 채널을 돌리듯이 말이다. 그런다고 게네들이 TV에 안나오는 것은 아니지만 내가 짜증나니까 돌리겠다는 거다.

 

그리고 이건 전혀 다른 문제이지만 전세계적으로 육식이 늘어나는 것은 커다란 식량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 중국인들이 육식하는 비율이 급격하게 늘어나고 있다는데, 십억이 넘는 인구가 육식을 늘린다는 것은 매우 위험할 수 있다. 전세계적인 식량부족을 낳을 수 있다. 고기먹는만큼 곡식소비가 줄어드니까 그게 그거 아닐까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그게 전혀 아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한끼를 해결하는데 필요한 곡식이 400그램이라고 치자. 똑같은 한끼를 해결하기위해 고기를 먹는다면 아마도 비슷한 양의 고기가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소나 돼지가 내버려두면 그냥 알아서 자라나? 당연히 뭔가 먹여야 된다. 한끼로 먹을 고기를 생산하기 위해서 먹여야 되는 곡류의 양은 5배정도 즉 2000그램을 먹여야 하는 것이다.

물론 현재의 기아문제는 생산량의 부족이 문제가 아니라 '분배'의 문제이다. 하지만 이런식으로 나가면 분배문제는 그대로 남아있는 채로 식량부족문제까지 생길 것이니 큰일 아닌가.

 

Rumble Fish - 예감 좋은날(연주)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한대수- 상처

음악에 대해 뭐 아는 게 있어서 이 카테고리를 만든 것은 아니다.그냥 내가 좋아하는 음악을 간혹 올려보겠다는 단순한 생각으로 시작한다.

가끔 영화에 대한 얘기도 올릴까 한다. 원래는 다큐영화를 좀 올려볼까 했는데 지금의 내 상황을 봐서는 꽤 오랫동안 그러기는 쉽지 않을 것 같다.

 처음으로 올리는 곡은 한대수의 '상처' 라는 노래다.

 

    아 그대여  왜그래 왜그래

    상처만 주나, 상처만 주나

    아 그대여  아무리 아무리 아무리

    아픔만 주나  아픔만 주나

    아--무리 말하여도

    아--무리 탓 하여도

    그대는 그만  그대는 그만

    -----------------------

    우 --------------------

    -----------------------

    아 --------------------

 

* 한대수의 앨범에는 그가 직접 갈겨쓴 가사가 실려 있다.

이 곡에 대한 짧은 멘트도 있지만 너무 많은 것을 여기다 올리는 것이 예의가 아닌 것 같기도 하고 다른 이유도 있어서...

내 나이가 적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한대수 세대까지는 아니다.

어렸을때부터 한대수를 알기는 했지만 내가 한대수를 좋아하게 된 것은 2년이 채 되지 않는다.

무척 힘들었던 때가 있었는데, 우연히 벅스에서 그의 음악을 듣게 되었고 그 당시 나에게 많은 힘이 됐다.

"희망의 나라로" 같은 노래로 힘을 줬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의 슬픈 노래가 내 슬픔을 달래 줬다는 말이다.

"슬플 때는 오히려 슬픈 노래를 들으라"는 말이 있다.

역시, 인간의 경험에서 나온 말들은 괜히 나온 것이 아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나비와 인연은 이렇게 시작되고

송탄에 있는 큰누나네 가다보면 허름한 구멍가게가 하나 있다. 그 집에 냥이 한 마리가 있는데 가끔씩 내가 가서 아는 척을 하곤했다. 묶여있을 때도 있고, 없는 경우도 많았다. 모처럼 이녀석이 있기에 오랜만에 이녀석과 놀려고 가까이 갔는데 세상에...


한쪽 눈이 반쯤 썩어 있는 거였다. 그래 곪았다는 표현보다는 썩었다는 말이 더 어울릴 정도였다. 고름이 뚝뚝 떨어지고, 내가 부르니까 애처롭게 울어댔다. 다친지 좀 된 것 같은데 아무래도 냥이 주인이 그냥 내 버려 두는 것 같았다. 서울로 올라오면서 고민에 빠졌다. 이 녀석을 어찌해야하나. 요즘 목돈 들어갈 일이 생겨서 빚내서 살고 있는 주제에 이 녀석 수술비를 감당해야 하나? 얼마나 들려나? 어쨌든 주인이 있는데 내가 나서는게 주제넘어 보이진 않을까? 그냥 못본척하고 넘어가면 아무래도 두고두고 후회할 것 같았다. 어쩌겠능가. 더 이상 고름이 나오지는 않고 있었다. 주인과 얘기했는데 내가 예상한데로 돈 걱정 때문에 병원에 못데려가고 있었다. 너무 상태가 안좋아서 항생제 주사를 사다가 놔줬다고 한다.(시골에는 가축 때문에 동물용 약품을 파는 곳이 많다) 눈동자는 더 이상 형체도 알아볼 수 없게 시뻘건 살덩이로 변해있었다. 고양이가 좋아서 키운게 아니라 쥐 때문에 키웠고, 이렇게 되자 차라리 집을 나가 버리길 바랬는데 그러지도 않아서 고민이라고 했다. 멀리 내다 버릴까 생각도 했지만 고양이는 함부로 내 버려서는 안된다는 동네어른의 말 때문에 그냥 데리고 있다고 했다. 주인에게 내가 치료해도 되겠냐고 했더니 "미안해서 그러지, 치료만 해주신다면 저희야 고맙죠." 그 근처 동물병원에 데리고 갔더니, 자기네는 수술 못하니까 서울에 있는 큰 동물병원에 가보라고 한다. 아무래도 수의사가 아니고 그냥 동물관련 용품과 약품을 파는데 간단한 치료정도 하는게 아닌가 싶다. 이틀후 다시 내려가서 서울로 데려왔다. 꼬마 아이들이 캐리어에 있는 나비를 보고 고양이라고 구경하러 왔다가, 눈을 보고는 꽥 소리를 지르고 도망간다. 그러게 내가 흉하다고 경고했건만. 눈을 적출하고 꿰맸다. 작은방에 녀석 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로드 때문에 방에 따로 두는 수밖에 없다. 스프레이가 걱정되서 중성화수술도 함께 시켰다. 냥이 사료도 사고, 모래도 사고, 구충제도 먹이고. 내일은 실밥 풀러간다. 사람들은 좀 특별한 녀석들을 기르고 싶어서 적지 않은 돈을 들이기도 한다. 내게도 아주 특별한 냥이가 생겼다. 애꾸눈 고양이.^^ 2004. 3. 26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