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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5/01/08
    진보넷으로 이사오다.
    무위

나비랑 나랑 2

모처럼 나비와 함께 이불 속에 들어갔다.

머리를 긁어 주니 눈을 감고

얼굴을 가까이 갖다 대니 다소 당황한 표정?

냥이들은 얼굴을 들이대면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목을 긁어 주니 아예 넘어가고

그러다 잠이 들었다.


팔베게를 해주어도 자고

긁어 줘도 그냥 잔다.

 

* 이틀 전부터는 다시 3층에서 나비와 같이 잔다. 아버지가 약간 나아진 것도 있고, 어머니가 밤에 자주 일어나시기 때문에 내가 일어날 일도 거의 없어져서 그렇게 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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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랑 나랑


내가 비디오나 DVD를 보려고 자리를 잡으면 나비가 올라온다.

영화보는 두어시간 내내 내려오지 않는다. 

주로 골골거리며 잠을 잔다.

 


삼각대에 카메라를 거치시켜놓고 찍는데 셔터소리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본다.

 


쓰다듬어주다 보면 이렇게 손을 물기도 한다.

많이 혼내면 도망가버리고, 조금만 혼내면 그냥 뭉게고 있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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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비킴- 고래의 꿈

아버지를 모시고 방사선치료 받으러 다닐 때 처음 들었으니까 이 앨범이 나온지는 꽤 됐다.

차 안에서 처음 듣는데 아주 신선한 느낌이었다.

독특한 창법이 아소토유니온을 떠올리게도 했다. (물론 장르부터 다르긴 하지만)

누가 부르는지도 모르고 그냥 지나갔었다.

음악을 찾아들을 상황도 아니었던 때고 말이다.

 

그러다 근래 케이블을 볼 수 있게 되면서 바비킴의 뮤직비디오를 보게 됐다.

전혀 뜻밖의 모습이었다.

아주 다른 경우지만 아소토유니온의 모습도 당혹스러울 정도로 노래와는 너무나 다른 이미지였다.

전혀 음악하게 생기지 않았는데(음악하게 따로 생긴 것은 아니지만) 음악은 훌륭하다.

 

바비킴의 경우는 오히려 너무 잘생겨서 의외였다.

내가 아는 상엽씨를 닮아서 친근해 보이기도 했고 처음 듣는 Let Me Say Goodbye 라는 노래는 고래의 꿈과는 또 느낌이 달랐다.

그의 음악이 궁금해져서 CD를 샀다.

 

고래의 꿈 (Falling In Love Again) (feat. 김영근 [Bobby's Father])

 

파란 바다 저끝 어딘가 사랑을 찾아서 오예~
사랑을 찾아서
양 꼬리 세워 길 떠나는 나는
바다의 큰 고래 오 예~

이렇게 너를 찾아서
계속 헤매고 있나 오예~
저 하얀 파도는 내 마음을
다시 흔들어 너를 사랑하게 해

I'm fall love again 너를 찾아서
나의 지친 몸짓은 파도위를 가르네
I'm fall love again 너 하나만
나를 편히 쉬게 할 꿈인걸 넌 아는지

먼 훗날 어느 외딴 바다에
고래를 본다면 오예~
꼭 한번 쯤 손을 흔들어 줘
혹시 너라면 알지 모르니

I'm fall love again 너는 바다야
나는 그 안에 있는 작은 고래 한마리
I'm fall love again 왜 이렇게
돌고 돌아야하나 내 맘을 왜 몰라

한잔 두잔 술에 잊혀질 줄 알았어
운명이란 없다고 말해었던 나인데
하지만 난 너를 사랑에 빠져
이제 꿈을 찾아 떠나 바다를 향해

I'm fall love again 너를 찾아서
나의 지친 몸짓은 파도위를 가르네
I'm fall love again 너 하나만
나를 편히 쉬게 할 꿈인걸 넌 아는지~~
 
 
앨범이 아주 마음에 든다.
난 그냥 참신한 신인가수쯤으로 생각했는데 대단한 내공이다.
아직 가사를 신경써서 들은 건 아니기에 가사내용이 얼마나 만족스러운지는 모르겠다.
실력있는 윤미래(T)를 만날 수 있어 즐겁고, 재밌게도 아소토유니온도 featuring으로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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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질루 이쁜

아버지 때문에 서울집의 짐을 정리해서 내려왔다.

송탄에서 짐을 정리하다 옛날 사진들이 나왔다.

대부분은 허접 쓰레기 같은 것들이었는데...



처음으로 같이 살게된 냥이 콩콩이

 

내가 살던 신림6동.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길건너편 9동은 고시촌으로 꽤 그럴 듯 하지만 6동은 낙후된 지역이다.

그곳 재래시장에 토끼, 오리등을 약으로 고아서 파는 집이 있는데,

철창에 냥이가 들어있는 경우가 가끔 있었다.

아마도 동네에서 냥이가 새끼를 낳았는데 처치곤란하면 그집에 갖다 주는 것 같다.

가끔씩 다 큰 녀석이 있기도 하고.

 

콩콩이를 거기서 데려왔다. 아주 새끼였는데 관심을 보이자 주인이 사가라고 했다.

정확히 기억은 안나지만 2천원인가 줬던 것 같다.

그 집은 이렇게 임자가 나타나면 팔기도 하고, 약 고을 때 냥이를 같이 넣어 끓이기도 하는 것 같다.

냥이가 신경통에 좋다는 말도 안되는 속설이 있으니까.

 

콩콩이의 영양상태는 좋지 않았다.

2천원에 파는 냥이에게 얼마나 좋은 것을 먹였겠는가.

지금 생각하면 콩콩이에게 너무 미안하다.

그때부터 냥이용 사료를 먹였어야 하는데 말이다.

냥이를 처음 길러봤고, 그 당시에는 "적게 벌고 지지리 궁상으로 살자주의"였기 때문에 밥에다 생선 통조림을 비벼서 주었다.

콩콩이의 건강을 생각하나,

매번 밥하고 생선 데워서 비벼주는 귀찮음을 생각하나

심지어 비용을 생각해봐도 진작 사료를 주었어야 했는데 말이다.

한 달에 몇천원만 더 쓰면 됐는데.

 

콩콩이의 어릴적 사진을 찍기는 했을 것 같은데찾지는 못할 것 같다.

그걸 찾아볼 시간도 요즘은 없고 말이다.

어쨌든 그래도 잘 자라서 드디어 새끼까지 낳았다.

아는 사람은 안다.

새끼 냥이가 얼마나 놀랍도록 예쁜지를.

 

 





 




 

제목이 왜 "세상에서 질루 이쁜"인지는 나중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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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마쵸?

* 이 글은 알엠님의 [고백] 에 관련된 글입니다.

내가 뭘 고백을 하겠다고 쓰는 것은 아니다. 그냥 알엠님의 글을 읽다가 이것 저것 생각나서.

나 자신이 페미니스트라는 말을 가끔 듣긴 하는데 그 말이 영 편하지가 않다. 두 가지 이유가 있는데



첫째는 진짜로 페미니스트가 아니기 때문이다. 모름지기 페미니스트라면 여성주의적인 시각으로 세상을 봐야하는데 난 그렇지가 못하다. 그러려고 노력을 하지도 않고 말이다. 그런데 세상이 워낙 거지같아서 굳이  노력하지 않아도 너무나 잘못된 것들이 눈에 많이 띈다. 그래서 그것에 대해 뭐라고 하면 "거봐, 페미니스트 맞잖아" 뭐, 이런 식이다.

 

페미니스트라는 표현을 좋아하지 않는 두 번째 이유는 페미니스트라는 용어 자체가 사회적으로 어떻게 유통되는가 하는 문제 때문이다. 물론 페미니스트라는 표현은 분명 필요하다. 어떤 특정한 성향을 가진 사람들을 따로 부를 필요가 있으니까. (일본에서 페미니스트라는 표현은 '여자에게 친절한 남자'라는 뜻으로 쓰인다고 한다. 원래 뜻 그대로인 채로는 일본 땅에서 발붙일 수가 없어서 그런 식으로 살아남았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 우리 사회에서는 페미니스트라는 용어가 마치 그들을 특별한 집단처럼 취급하기 위해 사용되기도 한다. 즉 자신들이 보편적인 평균의 인간이고 페미스트들은 뭔가 좀 유난을 떠는 사람들처럼 취급하기 위해 사용하기도 한다는 말이다. 페미니스트들을 좀 급진적인 사람들로 취급함으로써 잘못된 기성 질서에 길들여진 자신들이 마치 '정상'인양 면죄부를 주고 있는 것이다. 다소 무리한 비교일 수도 있지만 노무현을 '좌파'라고 부르는 것은 한마디로 코메디인데도 이 사회에서는 꽤 많은 사람들에게 먹혀 들어가기도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극우가(진정한 극우도 없지만 어쨌든) 합리적 보수라며 너스레를 떨 수 있게 된다.

 

비록 진보넷에 둥지를 틀기는 했지만 난 '진보적'이지 않다. 파란닷컴이나 싸이월드 같은 곳보다는 그나마 이 곳이 약간 편해서 이곳으로 왔을 뿐이다. 난 그냥 좀 '상식적'인 인간이고 싶을 뿐이다.

 

예전에 누가(女) 나에게 이렇게 물었다. "어떻게 그런 시각을 갖게 되었느냐"고, "어떻게 하면 남자들이 나 같은 시각을 갖을 수 있을 것 같냐"고 말이다. 물론 두 번째에 대한 해답은 나에게 없다. 아마도 내가 특이한 경우이기 때문일 게다. 내가 남녀문제에 관해서 조금이나마 균형적인 시각을 갖게 된 이유는 아주 단순하다. 사실 나 자신도 '남성우월주의자'였다. 즉 남자가 여자보다 훨씬 잘났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내가 보기엔 세상이 여자들에게 너무 불공평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내 생각은 무지하게 단순했다. "남자들이 워낙 잘나서 공평하게 경쟁해도 충분히 여자를 압도할 수 있는데 왜 그리 치사하게 여자들에게 불공평한 룰을 만들었지?" 한마디로 말하면 '남자로서 정말 쪽팔렸다.' (지금 생각해보면 진짜 마쵸였다.) 그래서 남자와 여자가 똑같은 여건에서 경쟁해야 한다고 생각을 한 것이다. 그래야 비겁하지 않고 쪽팔리지 않게 남자가 여자보다 우월하다는 걸 증명할 수 있으니까.(지금까지도 남자가 우월하다고 생각하냐고? 난 바보가 아니다.)

 시작은 정말 유치했다. 그런데 어떤 것들이 불공평한지 따지다 보니까 정말 말도 안되는 것들이 너무나 많았다. 그러면서 나도 변해갔다. 20대 초반의 일이다.

 

결혼하고 몇 년쯤 지나서 추석 때였다. 정혜가 우리집(시댁)에 가지 않고 자기집(친정)에 가겠다는 거였다. 어차피 차례라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지는 않지만, 어쨌든 어차피 지낼거면 자신도 조상이 있는데 왜 남(여기서 남은 '나'다)의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냐는 거였다. 난 당황해서 몇가지 허접한 핑계를 대며 설득을 하다가 결국 포기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한 말이 나 스스로에게도 설득력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기껏해야 치졸하게 "그렇게 하면 결국 너만 피곤해진다"라는 야비한 설득밖에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포기했고 결국 추석에 나는 우리집으로 정혜는 자기 집으로 갔다. 내가 그랬던 것은 페미니스트라서가 아니라 그게 합리적으로 맞는 말이라서 따른 것이다. 이 얘기를 하면 대개는 "잘했다"가 아니라 "깬다"라는 반응이다. 기껏 하는 얘기가 "너희집 먼저 차례 지내고 곧장 처갓집에 가면 될 거 아냐" 정도다. 그렇게 말하는 이들은 결코 "처가집 먼저 차례 지내고 나중에 남자 집에 가는 것"은 용납 못한다.

내가  그렇게 바른생활을 하는 것도 아니다. 사실 난 적당히 비겁하고 타협도 무지 잘한다.

 

잠시 엉뚱한...

알엠님의 글을 읽으면서 '같은 남자'로서 무지 쪽팔렸다. 그런데 가만 생각해 보면 그게 맞는 건가? 내가 그런 행동을 하지 않았어도(아무런 잘못을 안했다는 것은 아니고) 같은 남자이라는 이유로 쪽팔려 하거나 미안해 해야 하는 걸까? 왜? 사회가 그렇게 돌아가는 것을 막지 못해서? 방관함으로써 결국 못된 사회가 되는데 일조했기 때문에?

 한국이 베트남 침공에 협조했으니까 한국인인 내가 베트남 사람들에게 미안함을 느끼는 것은 얼핏 당연하고 아름다워 보이기는 하는데 정말 합당한 것일까? 난 가해 당사자가 아닌데? 이라크 침략전쟁에 동참한 나라의 국민으로서 이라크인들에게 죄송한 마음을 갖는 것이 합당하고 양심적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정말 결사적으로 반대한 사람들도 미안해 해야할까? 그들이 무슨 잘못을 했기에? 동족을 잘못둔 죄? 파병을 막지 못한 죄?(막을 힘이 있는데 안막았다면 미안해 해야 하지만 최선을 다했는데도 못막았다면?) 조금 이상하지 않나? 무슨 책임회피를 하겠다는 것이 아니고 논리적으로 맞느냐 하는 것이다. 혹시 우리 안에 있는 집단주의? 이 얘기는 아주 나중에 다시 해야겠다.

 

 내가 가장 많이 바뀌게 된 직접적인 사건(사실 아무 일도 없었지만)은 대학에 입학해서 여자들이 담배피는 것을 본 것이었다. 그 모습이 '충격적'이었다는 게 아니다. (내가 자란 곳은 미군부대가 있는 기지촌 같은 곳이었는데 코흘릴 때부터 여자들이 담배피는 것은 지겹도록 보아왔다.) 벌써 20년이 다돼가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상당수 소위 진보적이라고 하는 남성들의 수준이 아직도 '여자들이 담배피는 것을 뭐라 하지 않을 정도' 수준에만 머물러있는 게 아닌가 싶다. 딱 거기까지만 말이다.

얘기가 너무 길어질 것 같다. 오늘은 그만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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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향 - 자각몽

잔향殘香의 CD를 산지는 꽤 됐는데 아직도 제대로 들어보질 못했다.

요즘의 내 상황이 조용히 음악을 감상할 만한 사정이 못된다.

그래서 어떤 곡이 좋은지 몰라 선곡을 하지 못하고 그냥 타이틀곡인 자각몽을 올려본다.

자각몽이란 꿈꾸면서 그것이 꿈이라는 사실을 알게되는 때가 있는데 그런 꿈을 가리킨다고 한다.

나도 어렸을 때는 그런 적이 가끔 있었는데 언제부턴가는 전혀 자각몽을 꾼 기억이 없다.

음반 전체 분위기가 적당히 가라앉아 있어서 마음에 든다.

내겐 역시 밴드음악이 맞는 것 같다.

굳이 밴드들의 음악을 찾아듣는 것은 아닌데 어찌하다보면 솔로보다는 밴드를 더 많이 듣고 있다.

자각몽은 어떤 영화의 도입부에 쓰이면 어울릴 것 같은 분위기다.

 

전에 가봤을 때는 홈피도 안꾸며져 있더니 이젠 내용이 채워져 있다.

잔향 홈피 가기

 

 

그런데 잔향으로 검색을 하다보니 '음향/진동학'에서 잔향에 대한 이런 설명이 되어 있는데 난 왜 이런게 재미있는 거지?

뭐 그렇다고 이걸 다 이해하는 것은 아니지만.



잔향 [ 殘響 reverberation ]

 

넓은 실내에서 음원(音源)의 음이 정지한 다음 잠시 동안 들리는 연속적인 반사음. 이것은 여러 경로를 통해 도달해 오는데 벽 등의 반사음이 중첩된 것이다. 반사 때 그 에너지의 일부가 흡수되기 때문에 잔향의 크기는 일반적으로 지수함수적으로 줄어들어 마지막에는 소멸한다. 따라서 그 음압 레벨은 〔그림 1〕처럼 시간과 함께 직선적으로 하강한다. 다만 복잡한 음향특성이 있는 방에서는 〔그림 2〕와 같이 이 직선이 굽어질 경우도 있다.


음원이 멈추었을 때부터 시작하여 잔향음의 에너지가 최초의 값의 1/100만이 될 때까지의 시간을 잔향시간이라 한다. 잔향시간 T를 구하는 식은 건축음향학의 창시자 P.E. 새빈에 의해 최초로 실험적으로 정립되어,
=0.161/
라고 표시되었다. 여기에서 V(㎥)는 방의 부피, S(㎡)는 벽의 면적, α는 벽의 평균 흡음률(음 에너지가 흡수되는 비율)이다. 다만 홀 등의 경우 α는 좌석의 재질이나 청중의 수에 따라 달라진다. 최근에는 더 많은 요소를 고려한 잔향시간의 식이 제안되고 있다. 적당하다고 생각되는 잔향시간은 그 방의 사용목적에 따라 달라지며 음악의 경우 1.5∼2.5초 정도, 강연에는 1.0∼1.5초 정도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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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 흑백사진

필름 카메라를 더 좋아하면서도 돈이 많이 들어서 디카만 사용했다.

사촌형이 20여년동안 사용안한 필름 카메라를 주었지만 1년여를 찍어보지도 않았다.

그러다 달랑 한통 흑백필름을 사용했는데 뽑는게 귀찮아서 또 그렇게 몇달이 흘렀다.

그래서 이 사진엔 로드도 담겨져 있다.

 

 

통곡의벽이 시작되기 전 나비의 보금자리였던 라면박스.

위쪽을 보면 스크래치한 흔적이 있다.

설마 나비가 위쪽을 긁었다고 생각하진 않겠지?

내가 박스를 뒤집어 놓은 것이다.

 



신문을 덮어도 가만 있는 나비.

역시 필름카메라의 얕은 심도는 디카와 비교가 되지 않는다.

 


이때까지만 해도 로드와 함께 세가족이 살았는데, 지금은 잘 지내고 있는지 모르겠다.

 

 

필카든 디카든 언제쯤 사진 찍으러 나다닐 수 있을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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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대수 - 먼지

앨범에 가사가 적혀있지 않기도 하거니와

굳이 여기다 가사를 적어놓는 것이 이 곡을 듣는데 방해가 될 것 같다.

가사를 다 알아 들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랩도 아니고, 옛날 노래들 처럼 시를 읆는 것도 아니고,

한대수 제멋대로 주절 거린다.

 

운율이 맞는 듯도 하고, 어거지로 대충 갖다 맞추는 듯도 하고,

하여튼 제멋대로 자신의 이야기를 한다.

 

요즘의 나에게는 정말 절절하게 다가오는 가사다.

이 노래 가사를 듣다보면 이런 생각이 든다.

"한대수! 정말 미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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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록도

밤새 운전을 하고 갔다.

소록도, 정말 멀더만.

녹동 선창장에 도착을 하고, 코앞엔 소록도가 보였다.

약간 낯설고, 약간은 떨리고, 조금 설레기도 하고.

 

 

어리버리 첫날- 자원봉사

 

대단한 영미씨다. 소록도까지 일감을 싸갖고 오다니!

영미씨는 컴터앞에 앉아 일을하고, 그런데님과 나는 자원봉사자 회관을 찾아갔다.

 

- 며칠간 하실 거죠?

"3일이요"

-단기로 하실 거니까 좀 힘든 일이어도 괜찮죠? 새벽 5시에 일어나야 하는데.

"...네."

(어, 이게 아닌데. 우린 자봉도 하지만 실컷 놀기도 할건데 이래서야...)

 

그런데님은 중환자병동에, 난 정신병동에 배치됐다.

 

잠도 못자서 몽롱한데, 무엇을 할지 몰라 어리버리한 첫날이었다.

한센병환자도 처음이고, 정신병동도 처음이고.

가자마자 물수건으로 얼굴과 손을 씼겨주란다.

처음 씼겨드린 할아버지는 한센병 때문에 눈도 없고, 손가락도 없다.

아니, 씼겨드리기 전에 한 일이 있구나.

할아버지께서 소변을 보시겠다고 했고, 난 이렇게 말했다.

"어떻게 해야하죠?"

 

주로 한 일은 씼겨드리기(제일 힘든 목욕시키기는 전날 했다고 한다.),

식사시키기(식사시간도 약간의 전쟁이다. 눈이 안보여도 혼자 드시는 분이 있는가 하면

떠먹여드려야 하는 분도 있다.), 기저귀 갈기, 소변 받기, 옷갈아입히기, 등등.

 

가장 나를 긴장시킨 것은 손톱깍아 드리는 것이었다. 그냥 손톱만 보면 무지 긴데,

손톱 밑을 보면 살과 늘러붙어 있는 경우가 많아서 조금만 잘못하면 피가 나기 때문이다.

손톱이 너무 두꺼워져 손톱깍기가 아예 안들어가는 경우도 많다.

 

3일간을 주로 병동에서 보냈는데 병동에서는 사진촬영이 금지되어 있기 때문에 그곳 사진은 없다.

사진촬영이 금지되지 않았다해도 안찍었을 것 같다. 사진찍으러 간 것도 아니었고.

 

첫날 사진은 없다. 너무 피곤했고, 다음날 새벽 4시반에 일어나기로 했기 때문에

저녁에 선영씨집에 돌아오자마자 잠을 잤다. 그런데...

 

 

밤9시가 좀 안되서 영미씨가 깨웠다. 밤바다에 나가자고.

나나 그런데님이나 밤바다에 가고 싶었겠는가?

너무너무 일어나기 싫었는데 그래도 일어났다.

하루종일 혼자 있었던 영미씨와 놀아줘야겠다는^^ 의무감 땜시.

 

너무 피곤하고 졸려서 밤바다 좋은 줄도 잘 몰랐는데, 선영씨집에 돌아와 술을 먹으니 좀 말똥말똥해졌다.

송환 얘기도 하고, 소록도 얘기도 하고...

 



그런데님의 셀프샷. 자신의 변화하는 모습을 관찰하겠다나 뭐라나.


둘째날 점심시간에 선영씨집앞에서.


병동 바로앞 바다에서 


옛날에 사용했던 검시실 내부


일제시대때는 강제로 정관수술을 했다고 한다. 그 수술대

 

단종대 (이 동)

 

그 옛날 나의 사춘기에 꿈꾸던

사랑의 꿈은 깨어지고

여기 나의 25세 젊음을

파멸해 가는 수술대 위에서

내 청춘을 통곡하며 누워 있노라.

장차 손자를 보겠다던 어머니의 모습

내 수술대 위에서 가물거린다.

정관을 차단하는 차가운 메스가

내 국부에 닿을 때

 

모래알처럼 번성하라던

신의 섭리를 역행하는 메스를 보고

지하의 히포크라테스는

오늘도 통곡한다.

 


짱박혀 담배피기


그런데님보다 내 점심시간이 30분 더 길어서 영미씨와 좀 돌아다녔다.

 

 

둘째날

 

둘째날 자원봉사는 훨씬 수월했다.

몸은 피곤했지만 이젠 어리버리 단계를 지나 뭘 해야할지 감이 잡혔기 때문.

하루 자봉한 주제에, 새로온 자원봉사자들에게 뭘해야 할지 교육도 하고. ^^

 

홍구 할아버지라는 분이 계셨는데 어깨를 몇 번 주물러 드리곤 했다.

그런데 그 할아버지께서 내게 오라고 손짓을 하셨다.

자신의 침대에 와서 앉아보라는 것이다.

그리곤 창밖의 바다를 보라고 한다.

정신병동이라 창문에 비록 쇠창살이 쳐져 있지만 창밖의 바다는 아름답다.

잘 알아듣지는 못하지만 할아버지와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눴다.

 

그러다 할아버지가 갑자기 우시는 거다.

난 어쩔줄을 몰라하고 있는데 간호사 지나가다 그런다.

"그 할아버지 원래 그래요."

 

그냥 혼자 생각해 보았다.

이 할아버지는 정신이 말짱한 편이었고, 나이는 여든이 넘으셨다.

혼자 걷지도 못하고, 기저귀를 차고 사신다.

자신이 이 병동에서 삶을 마감하게 될 것이란 걸 아시고 계실게다.

그런 저런 생각이 들면 울음이 안나오겠는가?

 

 

두 번째 밤바다

 

이날은 정신을 좀 차려서 카메라도 챙기고, 폭죽도 챙겨서 바다로 나갔다.

물론 맥주와 안주도 가지고 나갔다.

깜깜한 바다가에서 핸드폰 불빛을 이용해 나뭇가지를 찾아서 긁어 모았다.

그런데님의 집념으로 제법 그럴 듯한 모닥불을 피우고.

맥주로 병나발도 불고.

이게 뭔 사진이냐고?

믿거나 말거나 밤바다 사진이다.

낸들 어떻게 하나? 뵈는 게 없는데 어찌 찍냔 말이다.

바다는 보이지 않지만 잔잔한 파도소리는 들린다.

못온 사람들 부러워하라고, 무지 재미있는 척?하며 폭죽놀이를 했다.

 

 

마지막날

 

영미씨는 아침에 먼저 출발하기로 했다.

새벽에 일을 하고 긴 아침식사 시간을 이용해서 사진도 찍고 영미씨 배웅도 했다.

선영씨 집이고,

선영씨 집에서 문을 열고 나오면 이런 풍경이다.

선영씨가 일하는 어린이집.

말그대로 선영씨집 코앞에 있다.

두 번째 셀프샷. 뭐 바뀐게 있나?

 

거실에서 기념촬영

집앞에서도 기념촬영

선착장에서 배를 기다리며.

내가 찍은 그런데님 사진 중에 이게 젤로 맘에 든다.

 

드디어 배가 오고

혼자 씩씩하게 배를 타러가는 영미씨.

어제밤에 얼핏 사슴 한 마리를 본 게 전부였는데

오늘은 떼거지로 등장했다.

뻘에서 꼭 한 장 찍어야겠다기에.

근데 어두워서 셔터속도를 늦게 했더니 좀 흔들렸다.

뽀샾으로 보정을 좀 하긴 했는데...

어두워지는 바닷가에서 선영씨에게 요술풍선 강습.(그런데님 촬영)

자신의 컴터 바탕화면으로 쓰겠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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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행유예 2주

아버지와 병원에 다녀왔다.

 

방사선 치료가 끝났는데도 상태가 안좋아져서 원래 한두달 정도 있다가 찍을 예정이었던 MRI를 오늘 찍을 수도 있다고 했다. 스테로이드 때문에 반짝효과를 봐서 좋아졌을 가능성이 높기는 하지만, 어쨌든 호전은 되었으니 2주정도 더 지켜보기로 했다.

의사나 나나 모두 악성 뇌종양일거라고 예상은 하지만 아직 결정적으로 뭐가 나온 것은 아니기에 마음의 준비를 2주간은 미룰 수 있게 되었다.

이러기를 벌써 몇 번째인가?

뇌종양인 것을 안 다음부터 양성이니 악성이니 의사들도 의견이 많았고, 뇌수술 후 별거 아니라는 말에 기적이 일어났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이제 회복하는 일만 남은 줄 알았는데... 다시 악화되서 뇌사진을 또 찍고, 그 새 또 자라난 걸 봐서는 악성같다고 하고... 아버지는 병원을 못믿겠다고 하고... 그러다 별 수 없이 방사선치료를 시작하고... 점점 좋아지는 것을 보니 방사선치료가 효과있는 걸로 믿기도 했다가... 다시 안좋아져서 거의 다 줄였던 약을 왕창 늘리고...

어쨌든 조직검사에서 악성판정이 난 적이 없고, 아직은 뇌사진을 찍지 않았으니 말그대로 '아직'은 악성이란 판정이 난 것은 아니다.

인간은 어차피 죽는다. 하지만 사형수가 자신의 사형집행일을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이 아무 차이가 없을까?

 


 

아래글은 아버지가 아주대 병원에 입원했을 때 병원에서 써놓은 글이다.

나중에 상황이 바뀌었다고 내 스스로가 딴소리 할까봐 적어놓은 것이다.



당사자 되기

 

아버지는 뇌종양으로 수술을 하기로 했다.
아주대 병원에서의 치료 방법중에는 수술이 없었다.
너무 위험한 부위라고 극히 일부 조직만 떼어내서 암덩어리인지 단순한 양성혹인지 알아보고 방사선 치료하자는 거다. 그런데 조직을 떼어내기 위해서도 마취를 하고 바늘로 두개골을 뚫고 세포를 떼어내는 것이기 때문에 자칫 잘못하면 반신불수가 된다고 한다.

어차피 위험한 것이라면 그나마 완치의 가능성이 있는 수술을 선택하기로 했다.
지금은 잘된다는 생각만 하고 있지만 몹시 불안한 것도 사실이다.
별의별 생각이 다들고 말이다.

광기형을 통해서 영동세브란스 병원의 실력 있는 권위자에게 수술을 받기로 했다. 수술할 환자들이 워낙 많이 밀려있는데, 아는 사람의 부탁이니 그 스케줄 사이에 아버지를 끼워넣어 주기로 했다. 한국사회의 커다란 병폐중의 하나인 '연줄'을 우리도 동원한 것이다. 연줄 없는 사람들이 그만큼 뒤로 밀려나겠지. 원칙적으로 해서는 안되는 일이다. 하지만 난 그럴 수 있나? 아니, 못한다. 이 죄를 앞으로 어떻게 갚아야 할지 모르겠지만 거부할 수는 없다.

병원에서 파업을 하고 있다. 모든 일정이 늦어지고 있다.
아직은 식사가 제대로 안나오고 하루 세끼 똑같은 도시락이 나오는 정도의 불편이지만 장기화되면 뭐가 어떻게 돌아갈지 알 수 없어 무지 불안하다.
주5일제를 요구하고, 비정규직 철폐를 요구하는 그들의 주장을 100% 지지한다. 하지만 당장 피해를 입게될 내가 어디까지 이성적일 수 있을까? 벌써부터 TV에서는 평소의 60%밖에는 수술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린다. 우리 아버지의 수술도 그만큼 늦어지겠지.
노사간에 타결이 안되면 난 물론 사측을 더 원망하겠지만 같은 노동자로서 그들을 계속 지지할 수 있을까?
당사자가 된다는 것은 정말 괴로운 일이다.

 

천지인-열사가 전사에게전(연주곡)

2004. 11.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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