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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5/01/12
    잔향 - 자각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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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05/01/12
    나비 흑백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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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2005/01/11
    한대수 - 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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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2005/01/11
    소록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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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2005/01/11
    집행유예 2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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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2005/01/10
    통곡의 벽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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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2005/01/10
    지리산 올라가기(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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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2005/01/10
    낯선 곳으로 여행/추억 속으로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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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2005/01/09
    통곡의 벽(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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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2005/01/09
    기부문화 시비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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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운동이 되살려야 하는 것

예전엔 말지 기사를 하나도 안빼고 다 읽기도 했는데 요즘은 반의 반도 못읽는 것 같다. 인터넷에서는 괜찮은 글도 많긴 하지만 일단 너무 많아 괜찮은 글을 '찾아내는 것'도 큰 일거리다. 이미 검증된 잡지를 보는 것, 그게 바로 내가 아직도 말지를 사서 읽는 이유다. 특히 나는 데스크 칼럼을 좋아하는데 이전 편집장이던 김성환보다는 못한 것 같지만 이종태 편집장의 이번달 데스크 칼럼은 읽어볼만 하다. 진보넷에서는 이 글에 동의하지 않는 분들도 많을 것 같기는 하다. 내 블로그에 오는 이가 별로 없기 때문에 무슨 논쟁거리가 되지는 않겠지만 말이다.

 

 

노동운동이 되살려야 하는 것

 

 "저 공장도 토지도 건물도 문화도 무기도 우리의 것이다!"
1980년대 말에서 1990년대 초까지 나왔던 월간 <노동해방문학>의 뒷표지에 새겨져 있었던 문구이다. 물론 여기서 '우리'는 노동자 계급을 의미한다. 이 잡지는 '노동해방'(사회주의)이란 '노예의 언어'를 사용하긴 했으되 "노동운동의 목표를 사회주의 혁명"으로 뚜렷이 못 박는 선명성을 과시하면서 엄청난 주목을 받은 바 있다.


 그랬다. '80년대' 대다수 노동운동가들의 꿈은 사회주의였다. 20세기 초 러시아 지식인들이 공동체 건설을 위해 농촌으로 들어갔다면, '80년대' 남한에서는 스스로를 사회주의자로 규정한 운동가들이 공장으로 들어가 "변혁의 주체"인 노동자들을 만났다.


 그들에게 사회주의 혁명으로 가는 길은 레닌 등이 교시한 대로 너무나 선명했다. 임금인상 등 노동자들의 처우개선을 위한 "경제투쟁"은 필수적인 것이었지만 거기서 멈춰서는 안 되었다. 노동자들은 이 경제투쟁을 통해 계급의식을 획득하고 궁극적으로는 사회주의 혁명을 위한 정치투쟁을 전개해야 한다고 운동가들은 생각했다. "파업(경제투쟁)은 혁명(정치투쟁)의 학교"인 것이다.


 그래서 노동운동은 '80년대' 내내 임금인상 등 처우개선을 위해 헌신적으로 싸웠다. 그 경제투쟁은 단지(!) 해당기업 노동자들의 임금인상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노동자가 주인 되는 참세상'을 앞당기기 위한 '예비적 투쟁'으로 설정되었다. 그래서 투쟁의 성과가 설사 해당기업 노동자만의 처우개선에 그친다고 해도 그것은 '전체 노동자를 위한 싸움'이라는 '윤리적 확신'으로 이어졌다. 이런 자부심 덕분에 당시의 노동운동은 '자본의 앞잡이'들이 식칼로 옆구리를 찌르고, 감옥에 가두고, 때로 조직 내부에 프락치를 투입해도 굴복하지 않았다. 그리고 윤리적 확신과 자부심이 강한 만큼 투쟁은 치열했다.


 이렇게 '80년대'는 해방 이후 줄곧 수세였던 남한의 노동운동이 비약적으로 발전한 연대가 되었다. 이 시기 노동운동이 거둔 성과는 놀라울 정도이다. 노동운동의 치열성은 당시 3저호황과 맞물리면서 1987년을 전후한 3년여 동안 전체 노동자계급의 실질임금을 100% 정도 올려 놓았다.


 아이러니한 것은 사회주의자들이 이끈 '80년대'의 노동운동이 오히려 한국 자본주의를 더욱 튼실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1980년대 중후반 한국 경제를 주도한 것은 자동차, 아파트 등 내구소비재 산업이었다. 그리고 이렇게 기업들이 쏟아내는 고가의 내구재 상품들이 팔릴 수 있었던 것은 노동자계급의 실질임금이 급속히 상승했기 때문이었다. 한국경제의 생산능력 확대와 임금상승이 맞물려 경제 전체적으로는 선순환을 이루었던 셈이었다. 심지어 1980년대 말 한국 경제의 위기를 극복한 원동력은 내수의 급증이었다는 주장이 나올 정도이다.


 그러나 이런 '공로'와 별도로 남한 노동운동은 임금인상 이후 사회주의쪽으로는 한치도 나가지 못했다. '사회주의 혁명 노선'을 계속 유지해야 했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단지 사회주의의 합리적 핵심인 '공공성과 사회적 연대'의 문제의식만큼은 놓쳐서는 안되었다는 이야기다.


 1980년대 이후 남한 노동운동이 잃은 것은 사회주의적 문제의식이었고, 간직한 것은 레닌주의적 노동운동의 과격성이었다. 이는 자기 기업 내부에서는 처우를 개선하기 위해 '윤리적 확신'에 근거한 '치열한 계급투쟁'을 벌이지만 기업 밖으로는 한 발짝도 나가지 못하는 이율배반적인 모습으로 나타난다. 대기업 정규직 노조가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무심하다는 비난은 이제 모함으로만 들리지 않는다. 최근 세상을 시끄럽게 했던 기아노조의 채용비리나 민노총 대의원대회 폭력사태 등은 이런 관행의 연장선상에서 해석될 수 있을 것이다.


 신자유주의 개혁이 급속히 진행되고 있는 2005년의 대한민국에서, 밑천이라곤 몸뚱이 하나밖에 없는 노동자들은 모두 잠재적 피해자의 입장일 수밖에 없다. 오늘의 정규직은 내일의 비정규직이다. 그리고 유럽복지국가들의 사례에서 보듯이 지금 뿔뿔이 분열된 남한 노동자들이 우선 '계급'으로 단결할 때 국가-자본과의 사회적 협약과 국민경제의 발전도 가능하다. 이를 위해서는 비교적 여유 있는 노동자들이 상대적으로 불리한 처지에 놓인 노동자들에게 먼저 연대의 손을 내밀어야 할 것이다. 노동자 계급은 여전히 진보운동의 주요 세력이다.

 

<말> 3월호 '데스크 칼럼' 이종태 편집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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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아줌마인가?

- 아래 글은 몇 년 전에 '아줌마와 아가씨의 차이점'이라는 게시물에 내가 댓글을 단 것이다. (사람이름 몇 개를 고쳤다. 그리고 알엠의 예전 게시판에도 올린 적이 있는 글이다.) 친구와 전에 이 얘기를 잠깐 한 적이 있는데 그 때는 내 블로그가 없어서 이 글을 보여줄 방법이라곤 그 게시판을 찾아가 내 아뒤를 검색해 찾아 읽어보라는 수밖에 없었다. 흔적은 안남기지만 내 블로그에는 들어오니까 이 글을 보고 있겠지. ^^


미용실에서 파마를 할 때 -아가씨: 예쁘게 해주세요! -아줌마: 오래가게 해주세요! 몇 년 전 아줌마 씨리즈가 유행할 때 들은 얘기다. 재미있었냐고? 아니, 엄청 짜증났다. 하나 물어보자. 영부인은 아줌마인가 아닌가? 백지연은? 박근혜는? 이들이 아줌마가 아니라면 아닌 이유를 말해달라. 아줌마가 맞다면 이 질문에 대답해 주시길 바란다. 이 아줌마들이 미용실에 가서 과연 "오래가게 해주세요"라고 말할까? 강남에 사는 나의 사촌 형수(50세쯤)는 절대 뽀글뽀글 파마하는 일이 없다. 당연히 "오래가게 해달라"라는 말을 한다는 건 상상도 못한다. 그럼 잘사는 강남엔 아줌마가 없는 건가? TV에 나오는 여성정치인이나 정치인들의 부인, 잘 나가는 캐리어 우먼들을 한 번 보라. 아줌마의 상징처럼 되어버린 "뽀글뽀글 파마"한 사람이 단 한 명이라도 있는지. 아줌마들은 버스나 전철에서 자리가 나면 몸을 날린다고? (이 얘긴 좀 있다 다시 할 것이다.) 잘사는 집 싸모님들은 그럴 일 없다. 자가용 타고 다니던가 택시 타고 다닐 테니까. 어찌 천박하게 자리 하나 갖고 그러겠는가? 귀하신 몸인데. 사실 아줌마 씨리즈의 상당수는 중산층 이하인 아줌마들이 그 주인공이다. 까놓고 말하면, 먹고살기 힘들어 그렇게 진화(?)할 수밖에 없었던 아줌마들을 웃음거리로 만드는 거다. (물론 잘사는 아줌마들 중에서도 절약하느라 그러는 사람들이 많기는 하다.) -또 다른 관점에서 정말 대부분의 아줌마들이 버스나 전철에서 자리가 나면 몸을 날릴까? 대부분 "그렇다"라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이건 커다란 착각이자 기만이다. "진실"을 말하자면 "대부분의 아줌마들이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하는 사람들의 대부분이 아줌마"인 것이다. 얼핏 들으면 그 말이 그 말 같지만 엄청난 차이가 있다. 본드나 부탄가스를 흡입하는 이들은 대부분 청소년들이다. 이건 사실이다. 근데 이걸 "청소년들은 대부분 본드나 부탄가스를 흡입한다."라고 말하면 옳은가? 당연히 아니다. 만일 누가 "대한민국 청소년들의 특징"을 -본드나 부탄가스를 마신다. 담배를 핀다. -선생에게 대들고 폭행을 하기도 한다. -가출을 자주한다. -원조교제를 한다. 라고 말하며 대한민국 청소년들의 일반적인 특성처럼 말한다면 당신은 동의할 수 있는가? 중학교 때 나온 간단한 수학 한가지. "p이면 q이다"라는 명제가 참이면 그 명제의 역인 "q이면 p이다"도 참인가? 당연히 아니다. 참일 수도 있고, 거짓일 수도 있고 그때마다 따져봐야 한다라고 배우지 않았나? 내가 아는 아줌마들 대부분은 "당연히" 자기 앞에 있는 자리가 나야 그 자리에 앉는다. 당신들이 아는 아줌마들은 다들 몸을 날리는가? 노파심에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몸을 날리는 아줌마들이 있는 것 뿐이다. 다들 몸을 날리는 것이 절대 아니고. 이런 얘기하면 꼭 이러시는 분들이 있다. "그냥 웃자고 하는 건데 너무 과민반응이다"라고. 재미있자고 사람 바보 만들어서는 안 된다. 옛날에 이경규가 바보연기를 한 적이 있다. 그때 신문에서 독자의견을 읽었다. 그건 바보연기가 아니고 정신지체자들의 모습을 흉내낸 것이라고 말이다. 이경규의 행동이나 말하는 것이 자신의 아들과 너무나 닮았다고 말이다. 바보 연기의 대가 배삼룡(이 사람을 모르는 사람도 이젠 꽤 있겠지)의 불만도 그것이다. 요즘 코메디언들은 바보연기를 하는 것이 아니고 정신지체자를 모욕하고 있다고. 배삼룡이 연기한 바보는 순진하고 어눌한 사람이지 정신지체자가 아니었다. "강원도 산골 사는 사람을 갑자기 서울 한복판에 데려다 놨다고 생각해봐. 하는 행동거지가 얼마나 어설프고 바보 같겠어." 배삼룡이 연기했던 바보는 이런 바보였다. 이경규의 연기를 보고 분노하는 정신지체아의 부모에게 "과민반응하지 마시라"고 말할 수 있나? * 아래 퍼다 놓은 게시물과 그림은 그나마 재미로 볼 정도는 되는 것 같다. 그래도 불만 한가지. 나이 들면 살이 찌는 것은 그렇다 치고, 거기 나오는 아가씨들은 왜 그렇게 눈이 크다냐? 아줌마 돼서 살이 찌면 눈이 그렇게 까지 작아지나? 마치 영화나 TV에서 둔하고 미련한 사람역할은 살찐 사람을 쓰는 것과 비슷하지 않나? 뚱뚱하면 미련하다? 아님, 미련하면 살이찐다? 둘 다 거짓명제! 내가 또 오바하는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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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배피는 여자

이 글은 내가 전에 쓴 진짜마쵸?라는 글의 연장선상에 있지만 그걸 읽어야 이해가 갈 내용은 전혀 아니다.

 

대학에 가서 여자선배나 동기 여자들이 담배피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묘한 기분이 들었다.  솔직히 말하면 '불쾌'한 감정이었다.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봐도 내가 불쾌한 감정을 느낄 만한 '합당한' 이유가 '전혀' 없었다는 것이 문제였다. 그래, 바로 그게 문제였다. 기분 나빠할 이유가 전혀 없는 데도 불구하고 기분 나쁠 때는 어떻게 해야하지?

 

상당수는 기분나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찾아내려고 노력을 한다. 없으면 만들어서라도 합리화 시켜본다. 모성이 어떻고, 남자든 여자든 담배는 무조건 해롭다 등등(당시 그 얘기를 담배피는 '남성'에게 열심히 하는 사람은 거의 보지 못했다.)

여러 가지 이유들을 들이댔지만 까놓고 말하면 이유는 단 한가지밖에 없었다.

"어디 여자가 감히 담배를..."

그런데 대놓고 그렇게 말하는 것이 쪽팔리는 일이라는 것쯤은 아는 먹물들이 여러 가지 이유들을 잘도 만들어냈다.



정반대의 경우도 많았다. 소위 진보적이라고 하는 운동권 남자들에서는 여자가 담배피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분위기였는데, 여자가 담배피는 것을 '인정'해주는 것이(자신들이 인정해주고 말고 할 일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어쨌든) 마치 자신들이 여성의 자유와 평등을 보장해주는 사람임을 증명이나 하는 듯이 생각하고 있었다. 다른 거의 모든 가부장적 태도는 전혀 바뀌지도 않았으면서 말이다.

 

 

사회의 잘못된 편견에 길들여진 잘못된 나의 감성

 

사실 아주 단순한 문제였다. 내가 여자들이 담배피는 모습을 불편하게 느끼는 것은 잘못된 환경에서 자란 때문이란 것이 명백했다. 그리고 난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좀처럼 불쾌한 감정이 사라지지 않았다. 그런 내자신이 무척 못나 보이고 짜증나면서도 어쩔 수가 없었다. 더군다나 진짜 마쵸에서 말했듯이 난 양공주(우리 지역에선 양색시라고 불렀다.)들이 담배피는 모습을 어려서부터 봐왔기 때문에 여자들이 담배피는 모습은 무척 익숙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대생'들이 담배피는 모습을 불쾌하게 여기다니!!!  이건 명백한 나의 차별의식이었다. 그래서 더 기분 나빴다. 내가 이 정도밖에 안되는 인간이라니...

 

이성적으로만이 아니라 감정적으로도 괜찮아지는데 2년 정도는 걸린 것 같다. 하지만 역시 처음이 힘들지 그 다음부터는 수월하다. 스스로에게 쪽팔리고 싶지 않았기에 노력을 많이 했다. 감정적인 부분이 노력한다고 전부 바뀌는 것은 아니겠지만 그렇다고 전혀 바뀌지 않는 영역도 아니다.

 

내가 라쇼몽이란 카테고리를 만들 게 된 이유까지 포함해서 꽤 긴 글을 쓸까 했는데 졸리기도 하고 귀찮기도 하다. 마지막으로 내가 대학생때 나누던 이야기 스타일

 

"갠, 여자애가 무슨 담배를 피고 그러냐?"

 

- 여자가 담배피는 게 어때서?

 

"야, 좀 그렇잖아"

 

- 넌 할머니들이 담배피는 거 보고도 기분이 않좋냐?

 

"그건 좀 다르잖아

 

-다르긴 뭐가 달라. 너 지금 할머니들은 여자도 아니라고 무시하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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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밖으로~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영락없이 도둑고양이라고 생각할 게다.

  

빨래를 널러 옥상에 올라가면 나비가 따라 나온다.

처음엔 불안해서 문단속을 하고 못나오게 했는데

늘 갇혀있는 나비에게 미안하기도 하고

겁많은 녀석이 멀리 가지는 않을 것 같기도 해서 모험을 감행했다.

그래도 처음엔 어찌나 불안하던지.

 

 

이 뚱땡 고양이를 우째야 쓰것나?

늘씬한 냥이를 기준으로 하면 거의 몸무게가 두배는 나간다.

다이어트 사료를 먹이긴 하는데 워낙 식탐이 심해서리.

마음 약한 내가 더 문제다.

 

옆집이 궁금하긴 한데

넘어가 보자니 무서워서...

냥이는 호기심도 많은 것이 겁도 무지 많아서 웃기는 녀석들이다.

 

역시 자연광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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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길! 내가 이걸 왜 샀을까?

한 대수의 예전 앨범을 구하려고 여기 저기 기웃거리다

중고 앨범을 사고 파는  먹통레코드란 곳을 알 게 됐다.

한대수 8집만 주문했어야 했다.

중고 CD 목록에 있던

김현식 Sickbed Live 미개봉 9,000원

 

20대 초반에 그를 좋아했지만

들을 수 없게 돼서 이미 버린  LP와 함께 잊고 있었는데.

한 장 사나 두 장 사나 똑같은 배송비 때문인지

그에 대한 옛추억이 생각났는지

어쨌든 그의 앨범도 주문하게 되었다.

 

그의 CD를 틀어놓고 난 곧 후회했다.

아, 그래, 그는 이 세상에 없지.

너무 숨이 가빴나?

안그래도 애절한 노래를 이렇게 힘들어하며 부르고 있는데...

 

나이가 자꾸 들어가서 그런가?

속상한 것을 자꾸 피하고 싶다.

내가 안보고 안듣는다고해서

 그 속상한 일들이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면서도

그러면서도

내가 너무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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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엄마...>을 보러 가자

* 이 글은 알엠<엄마...> 라는 영화 를 소개 하려는 글인데 내 글이 역효과를 내진 않을지 걱정이다.

3편의 작품을 냈지만 나에겐  류미례'감독'보다 '미례씨'가 더 익숙하다,

그건 류감독이 자신의 작품을 준비조차 하지 않던 시절에 그를 알 게 됐기 때문일 게다.

이젠 블로그상에서 쓰는 '알엠'이 더 편하게 됐고.

 

내가 예상하기 힘든 것들

-TV에서 하는 다큐에 익숙해진 관객들에게 이런 독립다큐가 어떻게 느껴질까?

어느 대목에서 재미있어해야 할 지, 어느 대목에서 감동을 먹어야 할 지까지 친절히 '지시'해주는 듯한 TV다큐들을 난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가끔은 "이래도 네가 감동안하고 베겨?"라며 협박하기도 한다.  빈곤한 영상과 주제를 말빨로 때우기도 하고 말이다.

물론 TV에서 하는 다큐물들을 모두 싸잡아서 깍아내리는 것은 '독립다큐는 모두 훌륭하다'라는 말만큼이나 말이 안되는 짓이다. 말이 그렇다는 것이니 알아서 새겨 듣길!

 

- 류감독을 모르는 사람들(관객의 대부분)이 이 영화를 볼 때의 느낌이 어떨까?

난 원래 류감독을 안다. 물론 그의 가족사에 대해서는 이 영화를 통해 처음 알았지만, 어쨌든 자신이 아는 사람의 얘기와 전혀 모르는 사람의 얘기는 느낌이 많이 다를 게다. 그리하여 류감독을 모르는 대부분의 관객들이 이 영화를 어떻게 볼 지 예상하는 것이 쉽지만은 않다. 하지만 류감독을 알고 말고의 문제보다는 '엄마'라는 공통분모가 주는 영향이 더 강할 것이라 추측해 본다.

 

사적 다큐라지만

류감독 개인의 일기를 훔쳐보는 느낌은 안들 것이다.  사회가 만들어낸 이데올로기 일지도 모르는 '무한희생 천사표 엄마'와는 거리가 있는 그의 엄마, 남겨진 가족들의 가슴에 큰 상처를 남긴 아버지, 이 영화가 유쾌하지 않았을 것이 분명해 보이는 오빠,  이 영화의 방향을 샛길로 빠지게한^^ 매력적인 러시아 언니 등등 무척 이색적인 상황에 처한 류감독의 특이한 가족사 같지만 사실은 우리 주변에 널려있는, 하지만 쉽게 얘기하지 못하는 그런 것일 수도 있다.

고백하자면 이 영화를 푸른영상 시사회에서 처음보고 류감독과 비슷한 경험들 때문에 공감을 하는 이들이 많은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난 그의 경험이 극히 예외적인 것이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어수선한 카리스마

옛날 그를 만났을 때의 느낌은 '산만함'이었다. 그의 글은 정말 인상적인데 비해(오히려 그래서 더) 실제 만났을 때의 모습은 글과 매치가 안되서 당혹스럽기도 했다. 그런 그가 차츰 변해갔다. 자신의 작품을 만들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점점 훌륭해졌다. '훌륭하다'는 말이 적절해 보이지 않기도 하지만 정말 그는 훌륭해졌다. 아님 원래 훌륭했는데 내가 늦게 깨달은 것일까?

영화상영 후 행해지는 감독과의 대화를 보다보면 이젠 일종의 카리스마까지 느껴진다. 어수선한 카리스마!

어떤 사람의 무게감이 몸무게로 결정나는 것이 아니듯, 그의 카리스마는 외형적인 것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당장 본인부터 "왠 카리스마?"라고 할 것 같다. 하여튼 내 맘이다.

 

 

류미례 감독 자신의 엄마에서 세상의 모든 엄마로

영화의 시작은 감독의 엄마에서 비롯됐지만 류감독은 그것을 세상의 모든 엄마로 확장시킨다. 물론 러시아 언니(당신도 영화가 끝나고나서 그녀가 머리속에 남게 되지 않을까?)의 영향도 있었고, 다른 여러 가지 상황도 있었을 것이다. 앞서 얘기했듯이 옆길로 샌 것으로 느낄 수도 있다. 진짜 샌 것일 수도 있지만 그게 걸리적 거리진 않을 게다.

 

능력이 없다보니 글만 길어졌다. 결론적으로 영화관에 가서 볼 것을 추천한다. '독립다큐의 발전'같은 무슨 거창한 이유 때문에 보진 말라. 그런 식으로 발전 될 것 같지도 않고 말이다. 영화를 보는 당신들의 입장이나 태도에 따라 다르겠지만 정말 재미있다. 그래서 보라는 것이다.

다큐는 살아있는 얘기다. 영화 속에 나오는 등장인물들이 이 영화를 어떻게 볼지를 추측해 보는 것도 무척 재미가 있고  당신의 엄마가 이 영화속의 엄마(들)를 어떻게 볼지를 생각해 보는 것도 재밌을 것이고 말이다. 그리고 정작 당신은 이 영화를 어떻게 보고 있는가?

 

여성영화제에서 만난 류 감독의 큰 언니(맞나?)가 "언젠가는 이해하게 될 날이 올 것이다"라는 말을 울먹이느라 제대로 하지도 못했다. 류감독은 언니의 예상처럼 나중에 자신의 시점이 변하게 될까?

그렇게 되는지 꼭 보기 위해서 한 10년 정도는 더 친하게 지내봐야겠다.

 

 

3월 4일(금)부터 상영한다. 상영정보 및 영화 소개를 보려면 '포스터를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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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대수의 새 앨범이

내가 누군가의 앨범에 이렇게 집착?하는 것은

십수년 전 한영애 이후 처음인 것 같다.

 

한대수의 새앨범이 나왔다.

2001년에 했던 콘서트의 라이브 앨범이 이제야 나왔다.

 

2001년?

그 땐 한대수에 관심도 없었다.

내가 태어난 해에 데뷔를 했으니 당연히 내 세대 가수는 아니다.

 

인터넷으로 주문한 두장짜리 앨범을 받았다.

 

한대수에게 중독된 내 또래의 기획자가

엮어낸 콘서트였다.

앨범에 쓰인 그의 글을 읽으면서

아-후-!

난 감탄과 한탄과  그리고...

* 한대수의 노래를 올렸는데 자꾸 에라가 났다. 내 블로그에 접속만하면 Explorer가 먹통이되고 말이다. 할 수 없이 노래를 지웠더니 멀쩡하네. 덕분에 저작권법 위반은 면하게 됐네. 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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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농한 인환씨를 만나러

너무도 허전한 '다녀오기' 카테고리를 채워볼 요량으로 퍼온다. 아무데도 갈 수 없는 사정상 이 카테고리를 없앨까도 생각해봤지만 설마 마냥 이렇게 살기야 하겠냐는 희망으로 살려둔다.

 

다소 우발적으로 전남 곡성을 가게 됐다.

그러다 보니 열차표도 예매를 못했고, 토요일인지라 아침 8시 기차밖에 없었다.

인환씨는 5시정도 되야 일이 끝나는데 난 4시간 정도 먼저 곡성에 도착했다.

일단 역근처에 있는 식당을 찾았는데 두 군데밖에 없었다.

그 중 하나는 중국집. 예까지 와서 중국집을 가긴 싫었다.

백반을 시켰는데 12가지 반찬에 동태찌게까지 나왔다.

역시 전라도다.

전라도 음식치고는 그렇게 감동적이지 않았지만 다양한 반찬에 만족스런 점심이었다.

기차역에 있는 지도를 보니 5Km 떨어진 곳에 도림사가 있다고 한다.

걷기에도 만만하고, 시간 때우기에도 만만하다.

도림사를 찾아가다 길을 물으니 아저씨가 길을 가르쳐 주면서 하는 말.

"걸어가려고요? 솔찬히 먼데..."

 

 

솔찬히 걸어서 도림사에 도착했다.

배경에 묻혀서 처음엔 이 녀석들을 보지 못했다.

내가 카메라를 들이대니까 긴장해서 그렇지 실제 모습은 너무나 귀엽다.

하는 짓도 그렇고.

털색깔이 너무 특이해서 마치 들개 같았다.

나하고 잘 놀던 녀석이 다른 등산객들이 지나가자 짖어대기 시작했다.



인환씨가 두 개에 5천원 주고 산 드럼통으로 만든 난로다.

몇 번의 실패 끝에 내가 간 그 날에야 시운전에 성공했다.

난로옆에 있는 녀석은 서울에서 같이 내려온 누이.

 

원래 이름은 '루이'였다고 한다.

그런데 종자도 시골에 어울리지 않는데 이름까지 '루이'라면

자칫 왕따당할지 모른다는 생각에 가장 근접한 이름으로 바꿨다고 한다.

'누이'로. 성까지 같이 부르면 '오누이'

 

나를 가슴 아프게 만든 녀석이다.

진돌이의 공격으로 한쪽 눈이 빠졌다.

 

진돗개를 일본으로 데려가 종자개량을 했다는 야키다. (맞나?)

 

누이와 진돌이는 정말 친구같았다.

진돌이가 너무 사고를 많이쳐서 문제였지만.

기르던 기러기도 물어 죽이고,

좋다고 내게 달려들어 머리로 내 턱을 쳐받는 바람에 정신이 없었다.

 

마당 너른 집. 먹고 사는 걸 떠나서 그냥 바라보기엔 너무나 좋아보였다.

 

드디어 보호대를 풀었다. 그동안 제대로 긁지 못해, 한참을 긁고 문지르고 난리였다.

8살이나 먹었는데, 재롱떠는 것이 너무나 귀여운 녀석이다.

 

산에서 따온 이름모를 열매로 염색을 해보았다.

 

인환씨 밭 바로 앞에 있는 저수지.

지난 여름에 여기서 수영을 했다고 한다.

물론 수영금지라고 써있지만.

 

요만큼이 인환씨가 뭘 심어놓은 밭이고,

이만큼이 앞으로 풀뽑고 돌 골라내고 해서 밭으로 일궈야 할 곳이다.

실제로 보면 무지하게 넓다.

 

수확의 기쁨?

배추씨를 심고 비닐을 덮어놨는데 한달만에 와보니 많이 자라 있었다.

이건 마늘. 따뜻하라고 겨를 덮어놨다.

 

그리고 섬진강으로 갔다.

사실 사진 찍으러 간 것도 아니었고, 이런 얘기를 쓰려고 시작한 것도 아니었다.

귀농을 선택한 인환씨의 얘기도 들어보고, 그들이 사는 모습도 보고 싶었다.

그리고 그걸 여기에 쓸까 했다.

많은 얘기를 듣고, 많은 걸 느끼고 오긴 했는데, 정리가 안된다.

뭐, 사실 안될 것도 없긴하다. 그런데 별로 쓸 자신이 없다.

쓰는 게 잘하는 짓인지도 모르겠고 말이다.

그들이 예쁘게 살아가는 모습에 대해 쓸 수도 있을 것이고,

그들이 겪고 있는 고생에 대해서도 쓸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겨우 하룻밤 자고 오면서 보고 느낀 것에 대해 주절대는 것이

너무 같잖다는 생각이 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고 싶은 말은 많지만 조금 더 고민해봐야겠다.

초여름쯤에 다시 가기로 했다.

 

 


2004년 초에 다녀온 것이다.

아버지께서 병이 나는 바람에, 초여름에 다시 가겠다는 약속은 지키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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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주나 한 잔 마시고

역사적인 날?

 

아버지는 농사밖에 모르고 사시다가

딸 셋 이후로 나온 쌍동이 아들 녀석들 때문에  장사를 시작했다.

빈농의 자식으로 태어난 아버지가

농사지어서는 자식 교육을 시킬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시작한 구멍가게를 35년동안 하루도 닫지 않앗다.

심지어 자식들 결혼식 날조차도 몇시간만 잠깐 닫고 다시 열었다.

매일 밤 12시 30분까지,  35년을.

 

먹고사는 문제가 해결된지 한 참이 지났지만

아버지는 당신이 만들어 놓은 원칙을 바꾸지 않았다. 

그 때문에 어머니는 맞춰사느라 계속 힘이 드셨고 말이다.

 

아버지는 침대를 벗어날 수 없는 상태가 몇달 째 지속되고 있고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한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아버지를 위해서 가게를 계속 열었지만

나나 어머니나 점점 지쳐가고 있었다.

 

그런데 습관이란 정말 무서운 것이지.

일흔 넷이나 먹은 우리 어머니는 아버지보고

'뭐할라고 그렇게 고생하며 살았느냐'고 하시면서도

막상 가게문을 닫을 엄두를 못낸다.

 

어머니가 못하면 나라도 해야지.

스스로 가게를 볼 수 없게된 아버지는

차마 가게문을 계속 열라는 말은 못하고

하고 싶은 데로 하라 했다.

 

내일 35년만에 우곡상회가 처음으로 쉰다.

간병하는 사람이 편해야 환자에게도 좋다는 말을

계속 되뇌이면서도 자꾸 헛헛한 마음이 들고,

나는 몇 달만에 소주를 먹고 있다.

 

 

pan이 아니었으면

 

그냥 맥주나 한 잔 하고 잠들지 않았을까? 

가게에서 파는 고추참치와 번데기 통조림을 따서

소주를 한 잔 하고 있다.

알탕이 어쩌니 곱창이 어쩌니 해쌌는 바람에... ^^

어머니에게 내일 깨우지 말라고 했다.

원래도 깨우지는 않지만 말이다.

 

 

한대수

렛츠뮤직에 한달 3천원 내고 음악을 듣고 있다.

저작권 협상이 안되서 들을 수 없는 음악들도 많다.

한대수의 이전 앨범은 살 수가 없어서 그냥

렛츠에서 듣고 있다.

내가 듣고 싶은 노래들은 유료 mp3f로도 구할 수가 없다.

한대수!

이 자를 어찌할꼬?

 

 

다음주쯤엔?

 

주말에 서울을 올라갈 수도 있을 것 같다.

너무 늦은 시간이겠지만 한두명쯤은 부를 수 있지 않을까?

이젠 상황이 바뀌어서 아무도 안나오려나?

그래, 혼자 한잔하고 일찍 자고

다음날 조조영화나 보고 내려와야지.

그때 그사람들을 보고잡다.

정말, 오로지 백윤식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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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매혹적인 길냥이

이 녀석을 왜 티토라고 불렀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냥 지은 이름인지, 무슨 뜻이 있어서였는지. (지금은 해체된 유고연방의 대통령 이름이 티토였는데.)

 

옛 냥이 사진들을 순서대로 올리는 것은 아니다. 순서를 제대로 기억하지도 못하거니와, 그걸 굳이 따져서 올려야할 이유도 없고 말이다.

그런데 이 녀석에겐 순서가 중요하다. '부비'라는 녀석 다음으로 데려온 녀석이다. 부비 사진은 없다. 보통 길냥이를 데려오면 사진을 찍어 인터넷에 올려서 입양 시킨다. 그런데 부비는 사진을 찍기도 전에 무지개 다리를 건너갔다. 부비 이야기는 나중에 따로 해야할 것 같은데 그 녀석 생각을 하면 너무 속상해서 아예 안할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부비를 그렇게 보내고 난 다음에 온 녀석이라 티토에겐 무지 신경을 많이 썼다.

 

골목길에서 이 녀석과 마주쳤는데 부르니까 내게 오는 것이 아닌가. 새끼건 다 큰녀석이건 길냥이가 사람을 따르는 경우는 거의 없는데...  사람을 무척 따르는 것을 봐서는 사람이 기르거나 길렀던 녀석인 것 같았다. 이 녀석과 좀 놀다가 그냥 가려는데 계속 쫓아왔다. (개는 이런 경우가 종종 있지만 냥이가 이러는 것은 정말 드문 일이다.) 누가 풀어놓고 기르는 것일 수도 있기 때문에 잠시 고민을 했다. 그런데 이녀석 영양상태가 너무 않좋았다. 게다가 피부병도 있었다. 그래서 죄책감없이 데려오기로 마음 먹었다. 행여 주인이 있다 하더라도 제 가족인 냥이를 이 정도로 방치했다면 같이 살 자격도 없거니와, 그냥 길냥이일 가능성이 더 높았으니까.

 



집에서 한동안 지내보니 길냥이인 것이 확실해 보였다. 콩콩이는 그러지 않는데 이녀석은 비닐을 뜯어서 기어이 먹을 것을 찾아내고야 말았다. 그러지 않으면 길거리에서 생존할 수가 없었을테니까.

 

 

 

 


 


 

 



 

안타까웠던 것은 자다가 무슨 악몽을 꾸는 것처럼 몸부림을 치는 것이었다. 아마도 힘들었던 길거리 생활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다 큰녀석이라 입양이 안될까 걱정이었다. 하지만 다행히도 오히려 큰녀석을 원하는 여자분이 있었다. 냥이를 처음 키워보는데 새끼라면 어찌하다 잘못되지나 않을까 걱정되서 그렇단다. 냥이에 대해 기본적으로 알아야 할 것을 메모해서 내 연락처와 함께 주었다. 얼마후 티토가 설사를 한다고 연락이 왔다.  나중에 예방접종 때문에도 연락이 왔다.  우리 동네에 있는 한성동물병원을 소개시켜줬다. 나는 시간이 안나서 정혜가 만나 같이 갔는데 티토는 놀라울 정도로 예쁘게 변해있었다고 한다. 늘 영양결핍에 시달리는 길냥이들을 잘먹이면 정말 몰라보게 변한다. 이렇게 예쁜 녀석을 주셔서 고맙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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