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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어머니...

  • 분류
    riverway
  • 등록일
    2005/02/05 00:33
  • 수정일
    2005/02/05 00:33
  • 글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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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민학교 5학년때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어머니에 대한 애틋함보다 결손(?)가정의 자녀로 보이는 것이 더 싫었던 어린 시절, 어머니의 그 빈자리를 메워 준 사람은 할머니와 큰언니였다. 할머니는 늘 큰 손자가 제일 귀했지만, 에미 잃은 손주들이 못내 안타까워서 90이 다되서 돌아가실 때까지 하루도 등을 방바닥에 대고 편히 주무시지를 못하셨다. 늘 옆으로 웅크리고 주무시고, 더딘 걸음으로 시장까지 가시어 아껴두신 쌈짓돈으로 손주들 주시겠다고 고기를 사오시곤 하셨다.  래도 어릴땐 내가 할머니를 돌봐드린다고 힘들어 했는데, 철들며 보고싶어하실 때 더 찾아뵙지 못한 것이 후회스럽기만 하고...

대학을 갓 졸업하면서 6남매의 첫째로 어머니의 자리를 대신해야 했던 큰언니는 결혼을 하고서도 우리 집을 그리 멀리 떠나 지 못하였다. 큰언니가 자기 아이들을 키우면서 행복하게 사는 모습에 다소 배신감도 느꼈지만, 성장과정의 중요한 귀로에서 언제나 나는 큰언니의 조언과 지원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늘 동생들에 대한 부담감을 거침없이 표현했기에 언젠가 그녀의 보호로부터 벗어나리라 다짐한 적도 많았지만, 나이가 들면서 자기 자식보다 동생들을 더 의지하는 언니를 보며 세월을 실감하게 된다.

결혼 초 시어머님은 남편의 어머니로 그저 어렵기만 했다. 경상도 분이라 사루리를 큰소리로 말씀하실 때는 화가 나신 것 같아 부엌에서 일하다가 방에 들어와 남편에게 ‘어머니가 왜 화가 나셨나?’고 묻기도 했다. 어머님도 서울말씨를 쓰는 내 이야기를 알아듣기 어려워하시곤 했다. 게다가 모시고 살지 않으니 일년에 네차례 뵙고, 가끔씩 전화드리는 정도. 자연히 형식적인 대화에 늘 그쳤다. ‘별일 없으세요?, 별일 없냐?’ 묻고 답하면 전부다.

속에 있는 생각을 말씀하신 것이 그래서 더 기억에 남는지도 모른다. 내가 박사과정 들어가던 해에 아버님이 신경과에 입원하시고, 진단을 위해 검사를 받으러 들어가셨을 때 대기실에 기다리시면서 ‘만일, 저 양반한테 안 좋은 일이 생기면 우리는 큰 아이를 의지할 수 밖에 없다. 니가 힘들더라도 같이 살 수 있겠니?’하고 물으셨던 일(그 전날 인턴이 사전동의서 받으면서 엄청 겁을 주었기 때문). 아이를 못 낳는 며느리 데리고 용하다는 한의원 가시면서 ‘니가 젊어 모르겠지만 내가 나이 들어 보니, 늙어 자식 없으면 그나마 너무 외롭더라...’  당신 욕심보다 우리들의 노후가 걱정되신다던 말씀. 나 혼자서 이사하는 것이 걱정되신다며 올라오셨던 날, 어머님과 단 둘이 TV를 보는데 ‘요즘, 여자들 살기 좋은 세월이다..’ 한마디 던지시며 당신 어릴 때 외할아버지가 공부하지 말고 집안일 거들라고만 하셨다고, 당신이 큰아들을 낳으셨을 때 외할머니가 젖먹이 막내 동생을 키우셨다며 살아오신 험난한 세월을 들려주시던 말씀. 성격이 까다로우신 아버님과 사시면서 쌓인 불만을 언뜻 언뜻 비추시면서 ‘남편한테 너무 잘 하려고만 하지 말아라’하신 충고, 동서들에 대해 못 마땅하신 속내를 드러내며 딸 없는 외로움에 대한 표현들....

이런 말씀들은 오랜 세월을 거쳐 어머님에 대한 나의 애정과 믿음이 커지게 하였고, ‘남편의 어머니’가 아닌 ‘어머니’로 내 성장과정의 ‘결손’을 채워주고 계시다.  특히, 

오늘 조카를 통해 마흔 다섯이 된 내 생일을 축하해주시니, 살아오는 동안 나를 ‘있게’하신 어머니들을  생각하며 감사드리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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